정토행자의 하루

서현법당
양파껍질 까듯 이어온 5년간의 수행 이야기
서현법당 엄지선 님 수행담

발심 후 처음 2년, 미리 당겨 받은 과보

정토회를 처음 찾은 것은 아이가 네 살 때였습니다. 다 버리고 둘이서만 시골에 내려가 살아야겠다고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먹던 날들. 겉으로는 남 부러울 것 없었지만 안으로는 지옥 같다고 느끼던 결혼생활. 여기저기, 이 사람 저 사람에게서 돌파구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저보다 더 힘든 상황에서도 밝게 살아가는 한 지인이 정토회를 다니는 게 생각났습니다.

아파트에서 하는 가정법회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날, 법륜스님의 《기도》를 사서 혼자 집에서 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마음도 몸도 약해진 상태였기 때문에 30배도 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미워했던 남편이 서서히 이해가 되고, 그가 내 옆에서 얼마나 힘들어했는지를 알게 되면서 매일 참회의 눈물을 끝도 없이 쏟았습니다. 몸이 심하게 아팠을 때도 절을 하고 나서야 눈이 떠졌습니다. 수행을 해야만 겨우 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혼자서 한 달 정도 절을 하다가 서현법당을 찾았습니다. 그 길로 바로 불교대학에 등록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수요법회 영상 소임도 맡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이 그동안 억눌러왔던 감정들을 폭발시키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 부부는 더 많이 싸웠고, 그럴수록 남편은 더 밖으로 돌았습니다. 저와 남편의 건강은 점점 나빠졌고, 경전반을 저녁으로 옮기면서부터는 법당에서도 차츰 멀어졌습니다. 그러던 중 예전 직장으로 돌아가 일을 시작하려고 하다가 한 차례 좌절을 겪고 말았습니다.

충격으로 심하게 앓고 귀가 잘 들리지 않게 되었던 그해 겨울, 미루고 미루던 천일결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일을 겪어본 적도 없고, 원하는 것은 노력하면 다 얻을 수 있었고, 실패라는 것을 몰랐던 삶이었는데, 나라는 존재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때였습니다.

항상 옆에 있어 준 남편과 함께. JTS 거리모금을 같이하면서.
▲ 항상 옆에 있어 준 남편과 함께. JTS 거리모금을 같이하면서.

봉사의 시작과 ‘나’라는 자각

세 번째 천일결사를 갔을 때부터 밴드 모둠장을 맡았습니다. 모둠 법회 때는 사람을 모으고 챙기는 일을 하면서 너무 힘들어 나누기할 때마다 눈물을 쏟았습니다. 아쉬운 소리 한번 해보지 않고 살아왔기에 남에게 숙이고 부탁하고 거절당하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통해 무엇보다 내 인생에 보이지 않게 도와주었던 노력과 수고가 있었고, 이제까지 이런 정성들을 받기만 하고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받아온 은혜를 꼭 회향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2014년 여름부터 희망리포터를 맡으면서 법당 일과 사람들에게 더 관심을 가졌습니다. 도반들의 수많은 이야기를 통해 매번 감동받았고, 나 자신을 비춰보며 삶에 대해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다음부터는 뒤로 물러서기만 했던 일들을 하나씩 가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수행을 시작한 지 3년이 되는 여름, 남편이 불교대학에 스스로 입학을 하였습니다. 남편이 이해해주고 함께 하니 봉사를 조금씩 늘려 갈 수 있었고, 매일 하는 수행도 점점 안정되어 갔습니다. 하지만 대학 때부터 계속된 슬럼프는 사라지지 않았고, 주기적으로 몸과 마음 상태가 바닥을 쳤습니다. 남편도 부모님도 문제가 아님을 알았지만 그 슬럼프의 주기는 점차 짧아지고 기간은 길어졌습니다. 왜 이런 건지 원인을 몰랐습니다. 결국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지고,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되었을 때 나눔의장에 가게 되었습니다.

모둠법회를 마친 후 도반들과 함께.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엄지선 님.
▲ 모둠법회를 마친 후 도반들과 함께.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엄지선 님.

두꺼운 유리공을 깨고 나온 순간

나눔의장에서 내 이야기를 쭉 풀어 놓자 법사님은 “지금 마음이 어떠냐.”라고 물었습니다. 나는 “그걸 잘 모르겠어요. 마치 유리공 속에 들어가 있는 듯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요.”라고 말했습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울음이 팍 터져버렸습니다. 스무 살 때부터 5년 동안 겪었던 일들이 끔찍한 스토킹과 폭력이었다는 것을 나눔의장 도반들의 반응을 통해서야 비로소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감정을 스스로 차단해왔고, 억눌렀던 감정들이 쌓여 주기적으로 우울과 무기력이 찾아왔다는 것을, 그리고 스트레스가 심할 때 겪었던 증상이 공황장애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애정결핍과 낮은 자존감으로 인해 잘못된 선택을 하고 그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그런 제게 관심도 없었고 아무런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던 가족들에 대한 원망이 밀려왔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통곡하며 울었던 것 같습니다.

나눔의장에서 돌아온 후 며칠 동안은, 너무 고통스러워 느끼지 않으려 했던 감정들이 가시 달린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온몸을 훑고 지나가기를 반복했습니다. 이걸 극복하지 않고는 살 수 없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마음을 잡고 수행을 시작했습니다. 5일 동안 천배정진도 하고, 백일동안 300배도 하였습니다. 인도 성지순례를 다녀왔고, 이듬해 봄부터는 천배정진담당소임도 맡게 되어 정진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그렇게 묵었던 상처가 점점 회복되어 갔습니다.

인도 성지순례에서.
▲ 인도 성지순례에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바라보기

흙탕물이 가라앉고 조금 편하게 쉴 수 있게 되자, 이번에는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근원적인 불안이 밀려왔습니다. 한시도 바쁘게 움직이지 않으면 불안해져 폭식과 인터넷 쇼핑으로 시간을 보내는 나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것이 일중독, 공부중독이라는 것을 그제야 알았습니다.

과거, 저는 갓 돌이 지나 일곱 살이 될 때까지 외갓집에서 지냈습니다. 당시 저는 외숙모를 엄마로 알고 살았습니다. 그러다 돌아온 서울의 부모님 집은 불편하고 어렵기만 했습니다. 어색하고 서먹서먹한 부모님께 오빠와 동생 사이에서 관심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공부를 잘하는 것이었습니다. 삼남매 중 가장 늦되고 느린 저는 모든 에너지를 공부에 쏟았습니다. 1, 2등을 놓쳐 본 적이 없었고, 외고와 좋은 대학도 무리 없이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더 완벽한 딸이 되기를 요구하는 부모님에게서는 내가 원하는 인정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 요구는 어느새 내 스스로에게 내리치는 채찍이 되어갔습니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은 내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은 머리와 몸을 한시도 쉬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공부와 일로 내 존재를 확인하지 못하면 버림받지 않을까 하는 그때의 두려움이 다시 살아나 서서히 압박해오기 시작했습니다.

정일사 때, 법사님의 말씀을 듣고 그 불안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위해 명상을 갔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침묵의 시간 속에서 마지막까지 직시하지 못했던 대학 때의 상처를 덜어내었고, 조금씩 불안을 다스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명상에서 돌아온 다음 날, 뜻하지 않은 큰 선물을 받았습니다. 8년 동안 그토록 기다려온 둘째가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3개월 후, 뱃속 아이를 하늘나라로 보내고 말았습니다.

성남시 희망 강연 봉사 중 도반과 함께. 앞쪽이 엄지선 님.
▲ 성남시 희망 강연 봉사 중 도반과 함께. 앞쪽이 엄지선 님.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는 과정, 깨달음이라는 행복

처음에는 견딜 수 없이 힘들었습니다. 유산 후 6개월, 몸도 마음도 회복이 잘 되지 않았고 수행은 처음 정토회에 왔을 때보다도 더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습니다. 몸이 아파 아무 데도 가지 못한 정월 초하룻날, 혼자서 천천히 300배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막다른 길에 다다른 것 같은 5년간의 수행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자각이 치유의 시작’이라는 법문의 말씀. 뜯어고치려 하며 자책하고 스스로를 미워하던 모습에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한 것입니다. 완벽하지 않으면 가치가 없다고 느끼던 세상과 사람과 스스로를 보던 방식에서, 현재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고 감사하는 시각으로 바뀐 것입니다.

더불어 유산을 통해 깨달음이라는 선물을 받았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습니다. 슬픔을 직시하지도 타인의 슬픔을 받아주지도 못하는 내 모습을 보았고, 둘째를 가지려고 그토록 집착하며 남편을 증오하던 마음이 바로 모든 것을 갖추고 살고 싶은 욕심, 완벽에 대한 강박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남편에게 참회한다고 하면서 겉으로만 숙이고 안으로는 여전히 나를 굽히지 않고 있었다는 것도 보게 되었습니다.

또한 부모님께 사랑받으려 아등바등하던 내 안의 어린 아이를 보듬어 주고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를 미워하던 엄마의 업식을 따라, 아무리 해도 떨쳐낼 수 없었던 남편에 대한 불신과 저항하는 마음을 하나씩 참회하고 덜어내며 부드럽게 남편을 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돌처럼 굳어 있던 내 마음을 움직여 편안하게 만들어 주고 소중한 딸아이를 얻을 수 있게 해준 남편. 그는 항상 날을 세우고 보이지 않는 칼을 마음으로 휘둘렀던 나를 한결같이 사랑하고 믿어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힘들다고 표현하는 것을 나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여 미워하고 상처를 주기만 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선물은 그동안 아무리 해도 버려지지 않던, 강한 사람이 되고자 했던 욕망과 불안감에서 살아왔던 묵은 업식을 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자기만족이나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필요한 곳에 잘 쓰이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습니다.

100일 동안 300배를 하면서, 이 기도를 천일은 이어가야겠다고 원을 세웠습니다. 100배는 남편에 대한 참회기도, 100배는 나를 버렸다고 생각했던 친정엄마에 대한 감사기도, 100배는 이제까지 잘 살아올 수 있도록 해준 일체중생의 은혜에 감사하는 기도였습니다.

세끼 밥 먹듯 평생 해야 한다는 수행. 매일 해도 제자리인 것 같아 답답해질 때도 많지만, 5년 전의 내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의 나는 기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활짝 웃을 수 있게 되었고 웃음소리까지도 달라졌습니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던 슬럼프도 사라졌고, 항상 긴장하고 있느라 몸 이곳저곳에 나타났던 통증들도 씻은 듯합니다. 양파껍질 까듯 까도 까도 자꾸만 나오는 업식에 지치곤 했었지만, 지금은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이 과정 자체가 소중한 행복이라는 것을 압니다. 자라는 아이가 예쁜 줄 알고, 사랑하는 남편과 부모님과 도반들이 있고, 지금의 일상에서 오롯이 행복을 느낄 수 있음에 눈물 나도록 감사했습니다. 실패와 고통을 겪으면서 더 열심히 수행할 수 있었고, 그만큼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 과정들이 없었더라면 자만에 빠져서 타인의 어려움을 외면하고, 내 욕구 채우기에만 급급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남들보다 천천히 돌아온 길입니다. 그래도 수행의 끈을 놓지 않고 올 수 있어 정말 다행입니다. 앞으로는 이 감사함과 행복을 많은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삶을 살려 합니다. 나를 살린 부처님 법과 수행·보시·봉사가 또 다른 많은 이들의 삶에도 빛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수행담을 마칩니다.

글_엄지선 희망리포터(분당정토회 서현법당)

전체댓글 12

0/200

강말임

부족함 투성이인 나또한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시랑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잘 읽었습니다.

2016-06-04 06:52:38

요산요수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016-06-04 01:51:32

노변방초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_()_

2016-06-04 01: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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