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경남지부
정신의 행! 몸의 행! 마음의 행!
심장을 찌르는 《발원》

지난 경남지부 희망리포터 회의에 《발원1.2》를 읽기로 했습니다. 경남지부 편집담당을 해 주시는 목인숙 님이 읽고 나서 경전반 다니면서 배운 내용과 연계해서 정리해 주셨네요. 원효의 발원이 목인숙 님의 발원과 다르지 않음을 느껴집니다. 함께 읽어 볼까요?

소설 《발원1.2》은 나에겐 한 편의 영화였다. 주인공 원효의 행보는 세상을 움직이는 장대한 산맥처럼 꿈틀거렸고, 때론 수정처럼 맑고 고요했으며, 또 어떨 땐 예리한 칼날처럼 내 심장을 찔렀다. 무림의 고수가 일필휘지하듯 써 내려 간 문장들은 심연 깊은 곳까지 울려 나를 흔들었다.

때는 635년 서라벌. 원효는 청운의 꿈을 안고 화랑이 되었다. 하지만 욕망으로 가득 찬 야신과 부딪히며 삶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백제군의 공격으로 서곡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접한다. 원효를 견제하던 야신은 척후병으로 원효가 나서기를 명했고 원효는 척후마를 타고 잠입했다. 그런데 야신의 계략으로 독풀을 먹은 척후마는 거품을 물고 날뛰었고, 원효는 부득이 살생을 해야만 했다. 죽어야 하는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죽어 가는 짐승의 눈동자 …… 속으로 …… 기이한 장면들이 흘러갔다. 당신입니까. 원효가 물었다. 화답하듯 말이 울었고, 말의 눈동자 속에서 구도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경전반에서 공부한 내용이 그대로 접목되어 흘러나왔다. 매에게 쫓기는 비둘기를 구하려고 자신의 살을 베어주는 구도자 이야기. 생명의 무게란 이런 것이다. 아무리 작고 미미한 목숨일지라도 살아 있는 모든 것은 각기 온 존재로서 있을 뿐 경중이 없다. 전율이 일었다.

아! 그러다가 나는 서곡성 전투 장면이 마치 영화처럼 눈앞에 펼쳐지는 바람에 숨이 멎는 듯했다. 썩어가는 인육에 구더기들이 바글거리는 연꽃밭을 망연히 바라보다 역겨운 냄새에 구토하는 원효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어떻게 나를 구원할 수 있습니까? 당신을 뵙기를 원합니다. 소용돌이 속의 알 수 없는 형체를 향해 원효는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다. 벼락이 내리꽂혔고, 심연의 한 켠이 열렸다. 시체가 즐비한 들판 한가운데서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어떻게 나를 구원할 수 있습니까?’ 소리치는 원효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는 내 무의식 깊은 곳에 고여 있던 울음과 맞닿은 듯 통증이 왔다. ‘나는 어떻게 나를 구원할 수 있습니까?’는 나의 오랜 질문이었고, 통곡이었고, 암흑이었다. 그 장면에서 난 떠나지 못하고 울었다.

신라군이건 백제군이건 그저 구더기의 집이었고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흩어질 몸뚱어리들일 뿐이다. 서곡성 전투에서 나뒹구는 시체를 앞에 두고 울부짖던 원효가 깨달은 것. 시체 안에서 살아 꿈틀거리는 구더기. 인간은 서로를 적이라며 죽이고 죽지만 구더기는 백제군이건 신라군이건 구별하지 않았고, 머잖아 그들은 지수화풍으로 흩어질 것이다. 나라와 전쟁, 야신의 욕망과 원효의 영혼, 삶과 죽음. 그리고 깨달음! 마음의 깨달음은 행으로 이어지리니. 원효는 출가한다.

나는 직면한 이 실상에 헛된 의미를 덧대지 않겠다. 전쟁은 전쟁, 살생은 살생. 모호하게 뒤엉켜 있던 세상의 바닥이 똑똑히 보였다. 나는 있는 그대로 보겠다. 우린 무엇을 위해 전쟁을 하는가. 무엇을 위해 살생을 하는가. 죽어서 나뒹구는 시체를 덮어줄 아름다운 의미가 있는가. 있는 그대로 보겠다는 원효의 깨달음은 나의 깨달음이 되었다. 살아만 있거라. 살겠다는 의지를 버리지 말거라. 미움 없이 살 수 있는 땅이 있을 것이다. 그 땅은 어디에 있습니까, 랑이여. 찾아내겠다. 모순이 들끓는 바로 거기에서! 야신의 도끼에 다리를 찍힌 백제군 소년병을 업고 탈출하면서 내뱉는 원효의 한 마디 한 마디는 내 마음을 흔들었다.

하지만 원효는 또다시 절망한다. 스승 혜공이 황룡사에서 꼼짝하지 말고 3년 공부하라 했거늘, 원효는 1년 만에 부패한 황룡사의 바닥까지 보고는 그만 나와 버렸다. 이미 황룡사 수많은 경전을 다 읽었고, 경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그의 정신을 금강처럼 빛나게 했다. 부처님께서는 단 한 명의 구제받지 못한 중생이 있으면 그를 위해 세상 한가운데 머문다 하셨습니다.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 황룡사 불제자들의 상구보리는 귀족과 황금입니까? 이곳의 하화중생은 게으름과 배척입니까? 부처를 숭배하는 삶이 아니라 부처처럼 살고 싶은 원효였다. 매 순간 깨어 찬란하게 세계를 꿰뚫고 날마다 스스로를 변혁하는 삶을 꿈꾸게 된 원효! 이제 그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이름 없는 꽃을 포함한 수많은 꽃으로 법계를 아름답게 장식한다. 중생인 우리 모두 하나씩의 꽃일 수도……. 이름 없는 한 송이 꽃에도 무한한 우주의 기운이……. 산천초목 천지 만물이 통째로 진리의 몸이다……. 아! 난 산행에서 이 문장의 깊은 뜻을 체득할 수 있었다. 산에 오르면 신은 이미 우리에게 모든 축복을 다 주었음을 느낀다. 산천초목 천지만물이 통째로 진리인 것을! 나에게 산은 통째로 법문의 세계이다. ㅎㅎㅎ 그때 난 산꼭대기 바위에 앉아 예불문을 들었다.

황룡사 지장전 증축 공사를 하다 죽은 아비를 위해 참배를 한 번만 하게 해 달라는 어미의 소원. 그 소원을 알리기 위해 12살 소녀 단이는 장륙존상 어깨에 오른다. 소녀의 시위는 7일째 이어졌고, 제지하러 올라간 사내들보다 먼저 꽃잎처럼 떨어졌다. 우리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존재들입니다. 신에 종속되지 말라! 계급과 신분에 종속되지 말라! 모든 존재가 존재 자체로서 존엄하다! 절대 신분의 사회를 질타하는 목숨을 건 설법도, 애타는 눈물도 소용이 없었다. 단이는 떨어져 죽었고, 원효는 끌려갔다.

여왕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풀려난 원효는 “세상을 바꾸고 싶은 게냐, 너를 바꾸고 싶은 게냐?”라는 혜공의 질문을 안고 산을 오른다. 속계에서도 법계에서도 들끓는 모순! 그것을 타개할 방법을 찾던 원효는 세속 나이 120세가 넘는다는 승려 도명을 찾아갔다. 월명산에서 홀로 열반의 기쁨을 누리며 마치 젊은이처럼 앉아 있는 신이한 도명을 보고 원효는 깨닫는다. 천상천하유아독존 삼계개고아당안지! 삶의 주인으로서의 존재 가치를 깨닫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지혜는 고통 속의 일체중생을 나와 더불어 마땅히 해방시키고자 하는 ‘삼계개고아당안지’의 자비와 함께 짝을 이루어야 비로소 완전해짐을 알겠습니다. 지혜는 자비와 함께 굴러가는 수레바퀴인 것을! 그렇다. 나의 존재 가치를 아는 지혜가 세상을 사랑하고 변화시키는 힘이 되는 것. 도명처럼 부처를 사랑할 것이 아니라 부처가 필요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자신의 길임을 깨닫는다.

그런데 원효가 구해준 백제군 병사의 칼부림에 스승 혜공이 죽었다. 이김도 짐도 없다. 함도 아니함도 없다. 중도(中道)의 진리. 대자연의 순환에 의할 뿐. 모든 것은 어울려 흐르고 돈다. 하나의 몸과 하나의 마음. 너는 드넓게 걸어라. 스승 혜공은 그렇게 갔다. 산천초목 천지만물이 하나의 몸이며 하나의 마음. 그 안에서 어울려 흐르고 도는 대자연의 순환일 뿐, 이기고 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마음은 번뇌를 여의었고, 몸은 지수화풍으로 흩어졌다 흐르는 것. 그러니 삶과 죽음이 어찌 둘이겠는가. 혜공은 아무런 걸림 없이 떠났다. 그 길로 생사를 벗어난 것. 삶도 죽음도 자유자재한 혜공의 모습은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경지였다.

그리고 백성에게 사랑 받는 왕이고자 꿈꾸었던 여왕도 죽었다. 나는 전쟁이 싫다. 끊임없이 전쟁을 해야 하는 나라의 임금인 것도 싫다. 전쟁이 왕의 운명이고 전쟁의 패배가 곧 왕의 무능이 되는 시대이니, 나는 백성들 앞에 부끄러운 왕일 뿐이구나. 지쳤다……. 이제 그만 나 스스로를 거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저잣거리를 떠도는 일개 승려일 뿐인 혜공과 여왕의 죽음. 같은 죽음이지만 죽음을 맞이하는 마음은 사뭇 다르다. 혜공은 급작스런 죽음도 기꺼이 맞이했고, 여왕은 숙명처럼 떠안은 시대의 과제에 지쳐 스스로 죽음을 부르는 듯했다.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그때 나에겐 또 하나의 죽음이 있었다. 연일 계속되는 폭염 속에서 시어머니는 암으로 고통받다 떠나셨다. 굴곡진 생의 한가운데서 준비 없이 맞게 된 마지막이었다.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죽음. 어떤 마음으로 맞이할 것인가. 난 오래 머물렀다.

당나라로 가던 원효는 해골물을 보고 깨달았다. 마음 바깥에 법이 존재하지 않은데 어디로 가서 따로 구하겠는가! 마음이랄 것도 없구나.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님을 알겠다. 석가모니 붓다께서 법을 깨달아 펼치신 정법한 진리가 이미 우리 손안에 있습니다. 문제는 행(行)! 행이 있다면 깨달은 것이고 행이 없다면 아직 미망에 갇힌 것이지요. 정신의 행! 몸의 행! 마음의 행! 만법이 마음 안에 있음을 깨달은 원효, 문제는 행(行)이다. 원효의 깨달음이 나의 심연에도 물결쳤다. 정신만 있고 행이 없다면! 마음만 있고 행이 없다면! 몸만 있고 행이 없다면! 그건 미망인 것이다. 행이 머뭇거릴 때 미망은 춤을 추며 집을 짓는구나. 행과 행 사이 끼어드는 미망을 잡기 위해선…… 순간에 충실하기! 찬란한 순간을 기다리지 않는다. 매 순간을 찬란하게 만든다. 눈이 번쩍 뜨였다.

돌아온 원효는 분황사를 쓸고 닦으며 경전 공부에 매진했다. 세상이 변했으면 좋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먼저 그 변화가 되어야 합니다. 나부터 변해야 합니다. 원효의 설법은 그대로 스님의 법문이 되어 내 가슴에 꽂혔다. 그때 요석은 아비가 마련해 준 금강송 별궁에 갇혀 하루하루 죽은 채 살아가고 있었다. 원효는 즉각 편지를 썼다.

두 번째 화살을 맞지 마십시오. 첫 번째 화살은 피할 수 없이 닥칩니다. 살아 있으므로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일들이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슬픔과 괴로움은 그 자체로는 번뇌가 아닙니다. 문제는 슬픔과 괴로움 그 자체에 끌려가며 자신 속에 번뇌를 쌓을 때 생깁니다. 슬퍼한 후 슬픔을 해방 시키지 못하고 슬픔에 사로잡혀 자신을 감옥으로 데려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두 번째 화살에 맞는 겁니다. 내가 이 말씀을 처음 들은 순간이 떠올랐다. 아찔하게 현기증이 일었고, 가슴에서 무언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동안 내 미망으로 지은 집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 아니었을까.

좀 전에 당신이 욕한 것을 내가 받지 않으면 그 욕은 누구 것이오? 무너져 내린 돌덩이가 또다시 잘게 부서졌다. 무언가에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사실과 사로잡힘 사이. 객관과 주관 사이. 있는 그대로 보기. 미망이 무너진 자리에 햇살이 환했다.

‘수허몰가부(誰許沒柯斧) 아작지천주(我斫支天柱)’ 광목 두루마리에 이렇게 쓴 원효는 첨성대의 단 맨 상부에 우뚝 섰다. 왕과 대면한 원효. “백성들의 도끼에는 자루가 없습니다. 도끼날밖에 가진 것이 없는 백성들, 온몸으로 도끼날인 백성들, 의지할 혈통도 권세도 없는 백성들. 자루 없는 도끼라야 진정한 새 하늘을 열 수 있는지도 모르옵니다. 백성들 스스로 찾아낸 의미가 그것이라 여깁니다.” 원효를 쏘아보는 국왕의 미간이 또 한 번 성마르게 꿈틀거렸다. 현실적인 부와 권력의 질서는 도끼를 움직이는 자루이다. 그런데 이 자는 기존의 질서와 무관한 자리에서 새 하늘이 열린다는 말을 하고 있지 않은가. 부와 권력으로부터의 단절, 그것을 결핍과 소외가 아니라 자유와 해방이라고 받아들이는 사유의 역전은 국왕의 심장에 소름이 돋게 했다.

혈통으로 정해진 신분은 곧 권력이 되고, 그 피는 대대로 흘러갈 것이 운명인 시대에 자루(권력)없는 도끼가 자유와 해방이며 그것이 새 하늘을 연다?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이야기 아닌가. 절대 권력을 꿈꾸는 왕과 원효의 대화는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지금 대한민국은 꼭 1300년 전 신라를 닮았다. 2016년 11월 12일, 촛불과 함성은 광화문의 밤하늘을 달구었고, 그 함성은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어른들의 무지와 탐욕에 더는 희생양이 되기 싫다는 학생들의 발언은 통곡이 되어 심장을 찔렀다. 1300년이 지난 지금 자루(권력) 없는 우리는, 온몸이 도끼날인 우리는, 어떻게 새 하늘을 열 것인가. 역사 속에 살아있는 현재를 본다. 무소불위의 권력 앞에 원효가 활불로 살아 돌아온다 해도 혼자서는 이 혼돈의 정국을 헤쳐 나갈 수 없다. 역사는 자루 없는 우리의 손에 달렸다. 문제는 행.

원효를 시험하기 위해 왕은 경전 중 가장 난해한 《금강삼매경》 해설을 명했다. 권력에 빌붙어 수승한 승려들과 많은 백성이 지켜보는 가운데 원효는 바로 본론을 이야기했다. 정신 차리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정신 차려 집착하지 않고, 정신 차려 휘말리지 않고, 정신 차려 빠져나옵니다. 모든 것이 변화한다는 무상의 가르침과 모든 것에는 실체가 없다는 무아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아! 난 그때 금강경을 공부하고 있었다. 다 체득하지는 못하지만 한 학기를 금강경의 원융무애함에 감탄하고 금강경을 배울 수 있음에 엎드려 절했다. 금강경 공부 시간은 내 인생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순간이었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왕과 원효는 요석을 두고 차원이 다른 선택을 했다. 왕은 요석을 주는 대신 자신이 원하는 것이 요석임을 비두골에 모인 백성들 앞에 분명히 보이라고 명했다. 원효는 이 자리가 그동안 자신도 모르게 만들어진 명예를 버리는 과정이자 백성의 자리로 내려가는 길이기도 함을 알고 있었다. 단의 묘 위에서 원효는 아무런 걸림이 없었다. 고독했으나 자유로웠다. 그래서 원효는 성심을 다해 요석을 안았고 사랑을 나누었다. 누가 원효를 파계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요석을 구하는 동시에 유명한 원효를 내려놓고 백성의 자리로 내려가는 길을 선택했는데!

진흙에 물들지 않는 한 송이 연꽃이 아니라, 한 송이 연꽃을 피우기 위해 스스로 진흙이 되는 경지. 한다는 마음 없이 다만 할 뿐인 경지. 한 중생을 구제한다는 마음 없이 중생과 함께 살아가는 경지. 화작! 원효와 요석은 순간을 영원처럼 사랑을 나눈 후 각자의 거리로 떠났다. 물론 이 글은 사실에 작가의 상상을 결합 시켜 만든 소설임을 밝힌다.

이후 원효의 행적은 묘연하다. 정작 원효는 이름을 버리고 떠났는데 전국 곳곳에 원효의 자취는 남아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렇게 《발원1.2》은 폭풍우처럼 나를 휩쓸고 지나갔으며, 읽는 내내 원효를 앓았고, 이제 원효의 발원은 나의 발원이 되어가고 있다.

글_목인숙 (경남지부)
편집_정은영 (경남지부)

전체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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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륜화 강말임

매 수업시간에 감동하시던 모습 여기서도 느낄 수 있습니다. 공부 잘하고 계시는 보살님! 박수를 보냅니다.

2016-11-26 11:59:02

이기사

고맙습니다_()_

2016-11-25 14:07:13

공덕장 손명진

와우 ~~~~~~
말씀뿐 아니라 글로서도 우리를 감동시키시네요♥
꼭 접해 볼께요 ^^

2016-11-25 11:0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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