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의 열기가 더해가는 6월의 어느날, 인천법당에서 김미현 인천정토회 대표를 만났다. 취재에 응해줄 것을 부탁하자, 무척 당황해 하며 손사래를 친다. 자신은 그럴만한 자격이 없다며 마다하는 김미현 님과 대화를 이어나갔다.

인천정토회 대표로서의 소감 - 정토회가 이 사회 민주주의의 모델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2017년 2월 초 전국 법당에서는 9차 천일결사 기간 동안 활동할 총무와 대표, 대의원 선거가 있었다. 그곳에서 정회원들의 투표로 김미현 님이 인천정토회 대표가 되었다. 우선 대표가 된 소감을 묻자, 정토회 내에서 민주주의의 실현을 실험하는 대의원이 된 것이 기쁘다고 한다. 그녀의 희망은 정토회가 이 사회 민주주의의 모델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나도 행복하고 이웃과 더불어 행복해지는 것이 자신의 꿈이자 정토회의 희망이 아니겠냐는 거다.

그녀가 정토회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2005년 <깨달음의장>을 다녀오면서부터이다. 그보다 먼저 남편은 정리해고의 칼바람을 37세의 나이에 맞게 되었다. 낙담하는 남편에게, 어차피 고향에 돌아가서 농사를 지을거면 미리 가자고, 이참에 고향으로 가서 농사를 짓자고 권했고, 그렇게 고향으로 갔다. 고향에서 지내는 생활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고향사람들은 니가 얼마나 버티나 보자는 투였고, 그들과 교류하는 것은 차라리 생전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 교류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고 한다. 김미현 님은 김미현 님 대로, 아는 사람도 없는 곳에 남편 따라 왔으니. 안착할 때까지는 남편이 사람들에게 소개도 시켜주고, 안내도 해주면서 도와주는 것이 너무나 마땅하다는 생각이었다.
서로에게 요구만 있는 생활이다 보니 자주 싸우게 되고, 미워하게 되고, 마음은 점점 지옥이 되어갔다. 이 지옥을 해결하는 길은 이혼이라는 생각이 들 무렵, 지인이 <깨달음의장>을 권유했고,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정토회라는 곳이 뭔지도 모른 상태로 참가하게 되었다.

내가 옳다고 여기는 것처럼 남편도 역시 옳다고 여기면서 살고 있겠구나!

<깨달음의장>에서 보게 된 것은, ‘내가 옳다고 여기는 것처럼 남편도 역시 옳다고 여기면서 살고 있겠구나!’였다. 100% 내가 옳고 남편이 잘못이라고 여겼던 미현 님은 이 당연한 사실이 그 당시에는 머리를 한 대 맞는 것 같은 충격으로 다가왔고, 돌아온 다음 날부터 절을 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고 한다. 또 하나, 환경, 복지, 통일을 위해 활동하고 있는 단체와 만났다는 사실도 위로가 되고 안심이 되었고, 이는 천일결사에 입재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강화에서 대중교통으로 서울에 오면 2시간 40분이 걸린다. 왕복하면 6시간 가까이 걸리는 그 길을, 불교대학을 하고, 경전반을 하러 일주일에 한 번씩, 때로는 두 세 번씩 2년 동안 오르내리며 다녔다. 강화에서 열린 법회를 진행해보고, 가정법회를 진행하면서 자연스레 강화법당 불사담당자가 되어 강화법당을 개원하게 되었다고 한다. 강화법당에서 부총무 소임을 3년 마치고, 이제는 인천정토회 대표로 선출이 된 것이다.

두려움이 있음을 보게 되었고, 보게 되니 해결방법을 연구하게 되면서 그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어요

인천정토회 대표가 되는 길은 인천경기서부 상임위원이 되는 길로 연결이 되었다. 그리고 수도권이라는 이유로 상임위 사무팀이 되고. 상임위 사무팀 회의를 하러 일주일에 두 번, 대표단회의와 상임위회의를 하러 주말이면 집을 비우는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아픈 어머님이 계시고, 아내가 돌아다니는 것을 끔찍이 싫어하는 남편이 있는 상태에서, 게다가 민박집을 운영하는 김미현 님으로서는 난감한 일정이 아닐 수 없다. 혼자 있는 것을 너무나 싫어하시는 어머님과 '해도해도 너무한다‘고 터진 남편에 비하면, 그래도 민박집을 해결하는 것이 제일 쉬웠다. 딸들에게, 요양보호사님께 알바로 맡길 수 있었으니까.
어머님에 대한 밑마음은 ‘혼자 계시다가 쓰러지면 어쩌나’였다. 강화에 있으면 어찌됐든 빠른 시간 안에 수습할 수 있는데, 멀리 있어서 수습이 어려운 상황이 될 때 내가 감당해야하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있음을 정일사를 하면서 보게 되었고, 보게 되니 해결방법을 연구하게 되면서 그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해도해도 너무한다고 터진 남편’과는 정면돌파를 택했다고 한다. “이 온 우주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 당신이다. 당신과 계속 살고 싶다. 그런데 나는 정토회 일도 해야겠다. 이 일을 하는 나를 도저히 못 견디겠으면 당신이 선택해라.” 남편은 며칠 동안 아무 말도 없었고, 그 다음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대했다고 한다. 지금도 역시 대답은 듣지 못했으나 “나가라”는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않는다고 한다.

내 안에 평화와 화합을 이루는 길이 우리 민족이 통일되는 길이구나!

기도에 대해 김미현 님은 이렇게 말한다. 기도하기 너무나 싫었던 적은, 만나기만 하면 싸우는 시댁형제들을 위해 기도할 때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문득 ‘이 기도는 시댁형제들에 대한 기도가 아니라 우리 아이들이 사이좋게 지내기 위해서 하는 기도이다. 시댁 형제들과 내가 사이좋게 지내는 길이 우리 아이들이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거구나! 내 안에 있는 시비분별을 녹이는 길이 바로 형제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길이고, 우리 아이들이 사이좋게 지내는 길이다’라는 깨달음이 오면서 내 안의 시비분별을 녹이는 기도를 저절로 하게 되었다고 한다.
강화 통일전망대에서 하는 통일기도 역시 김미현 님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꾸준히 빠지지 않고 참가하고 있다. 김미현 님에게 있어 통일기도는 우리 민족에게 쌓여있는 원망, 미움, 분노, 갈등이 그대로 내 안에 있음을 알게 되고, 내 안에 평화와 화합을 이루는 길이 우리 민족이 통일되는 길과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되는 과정이었다고 한다.

강화평화전망대 통일기도에서의 발원▲ 강화평화전망대 통일기도에서의 발원

통일기도, 백중기도가 시어머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길로 연결되어

그러다보니 2년 전 백중 기간에는 조상님들과 연결이 되고, 또 어머님과 화해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경험도 하게 되었다. 분단과정에서 우익청년단에 의해 끌려가서 돌아오지 않은 시할아버지, 국군으로 참전하여 돌아가신 큰아버님이 있는 것이 바로 시댁의 고통스러운 가족사였다. 그리고 시어머니의 친정아버지 역시 우익청년단에 끌려가서 돌아오지 않으셨다고 한다. 시댁어른들을 모두 영가단에 올리면서 이 분들의 두려움과 원망과 분노가 녹아지기를 정성껏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참혹했던 시대의 아픔을 간직하며 살아오신 분으로 다가오니, 시어머니라는 상에서 비롯된 불편함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맏딸이라는 이유로 열네살 소녀가 가장이 되어야 했고, 홀로 되신 어머니와 함께 생계를 책임지며 동생들과 살아내면서 형성된 시어머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길로 연결이 된 것이다.

도반들과 강화평화전망대 통일기도를 마치고▲ 도반들과 강화평화전망대 통일기도를 마치고

남편의 반대도 시어머니의 꾸중도 그저 편안히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마음의 날개를 단 듯하다

김미현 님은 점차 남편의 반대도 시어머니의 꾸중도 그저 편안히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상대가 화내는 이유도 이해가 되었고, 누가 뭐라 해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갖게 되니, 예전과는 다른 편안한 마음이다.

"이제 그의 마음은 날개를 단 듯해요. 시어머니가 뭐라 하셔도 잠자코 순응할 뿐이죠. 그분은 그럴 수밖에 없고,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뿐이다 생각하니 그저 마음은 편합니다."

김미현 님.▲ 김미현 님.

김미현 님은 대표가 없었던 인천정토회의 첫 대표가 되어 다소 어떨떨하지만, 각 법당을 순회하면서 총무님과 부총무님들이 일에 바빠서 9차년 목표를 놓치지 않도록 살펴드리는 것이 대표로서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단다. 또한 정토회의 주인인 정회원들의 의견을 잘 듣고 반영하는 것이 대의원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본인이 강화에 살고 있고, 인경지부 상임위 활동을 하다보니 그 점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어서 미안한 심정이다.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수행법회라도 같이 하면서 귀기울여 듣고자 하는 것이 김미현 님의 생각이다.

김미현 님의 꿈대로, 아니 우리 모두의 꿈대로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위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진정으로 소중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글_김묘진 희망리포터 (인천정토회 인천법당)
편집_한명수 (인천경기서부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