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움이 없는 사람,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 이웃과 세상에 잘 쓰인다’는 서원을 세우고 꾸준히 수행하며 정토인의 귀감이 되는 ‘2017년 정토행자 대상’ 수상자 전해종 님의 수행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세상 사람이 다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9-4차 입재식 때 수상 후 법륜스님과 함께▲ 9-4차 입재식 때 수상 후 법륜스님과 함께

인연

2008년 대학 친구의 권유로 정토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정토회에 오기 3년 전인 2005년, 친구가 그러더군요.

“네가 하고 싶은 거 다 해보다가 정 안 되면 새로운 거 한번 해볼래?”

그 친구는 나에게 불교나 정토회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고 <월간정토> 1년 치를 구독해주고 <근본 교리> 테이프를 보내주었습니다.
어느 날 술자리에서 내가 약속하며 써준 너덜너덜해진 쪽지를 지갑에서 꺼내며 “내가 이거 3년 가지고 있었다. 지금쯤 한번 가보면 어떻겠니?” 하는데, 그 쪽지에는 ‘3년 동안 내 마음대로 해보다가 행복해지지 않으면 새로운 것을 해보겠습니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나중에 그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법을 만나니 내가 좋았고, 이렇게 행복해진 이야기를 같이 나눌 사람이 필요했다.”

그 친구는 지금도 나에게 둘도 없는 도반입니다.

2008년 1월 1일 아침에 백제 ‘천년의 미소’라고 하는 서산 마애삼존불을 보러 딸을 데리고 갔습니다. 어떤 스님이 서산 마애삼존불 앞에서 법문하는데 “종교라는 것이 뭐냐?”고 물었습니다. ‘종교가 뭐긴 뭐야, 아편이지’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스님이 “종교는 마루 종(宗)자에 가르칠 교(敎)다. 가장 으뜸이 되는 가르침이다.”라고 하는데 충격이었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여기 부처님이 이렇게 환하게 웃고 있는데 왜 웃고 있는지 아느냐?”고 했습니다. “예쁜 아가씨를 본 것도 아니고, 자식이 서울대학에 간 것도 아니고, 로또에 당첨된 것도 아닌데 부처님이 웃고 있는 이유가 뭐냐?”고 묻는데, 그때부터 내 화두가 됐습니다.
얼마 후에 친구가 3년 전에 약속한 쪽지를 보이며 정토회 얘기를 하는데, 이 두 가지가 겹쳐지면서 생각했지요. ‘지금까지 살면서 이것저것 다 해봤는데, 안 해본 것 중의 하나가 종교다. 마지막으로 한번 해보자.’

종교를 아편이라고 생각했던 나에게 다행이었던 건, 2008년에 정토회가 북한동포 돕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2004년 남북노동자대회로 평양에 간 적이 있는데, 평양 시내에서 6.15선언을 기념하는 6.15km 마라톤을 했습니다. 을미대 공원을 내려오는데 할머니들이 “손 한번 잡아보자”“통일합시다! 통일합시다!” 하며 눈물을 흘리는데, 그때 얼마나 울었던지....함께 눈물 흘리던 할머니와 아이들이 굶어 죽는다는 소식에 자연스럽게 정토회에서 북한동포 돕기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깨달음

우리 집은 시골이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 학교 갔다가 오면서 아카시아 꽃이 피어있는 풍경을 바라보며 그냥 눈물이 났습니다. 그때 들었던 마음이 ‘아, 세상 사람이 다 행복했으면 좋겠다’였습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그때 그 마음이 힘들 때마다 나를 지탱해주지 않았나 싶습니다.

대학 다닐 때 대전교도소 앞에서 민주화 운동으로 잡혀간 아들 얼굴을 보여 달라고 소리치는 어머니들을 전경들이 방패로 내려찍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무리 잘못해도 부모가 자식 얼굴을 보겠다는데 너무 한 거 아냐?’
그 후 점점 사회의식이 싹텄고, 세상의 변화를 위해서 이거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직장에서 노동조합을 만들었다가 결국은 권고사직으로 나왔습니다. 직장을 그만두면 좋을 줄 알았습니다. ‘퇴직금을 받으면 여행이나 실컷 다녀야지’ 했으니까요. 퇴직한 지 한 달 반쯤 됐는데, 내가 오후 3시에 혼자 공원서 소주를 마시고 있더라고요.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싶어서 해남에서 통일전망대까지 무작정 한 달을 걸었습니다. 걸으면서 얻은 결론은 ‘남을 미워하는 것만큼 내 인생을 파괴하는 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 노동조합 사람들, 이혼한 아이 엄마···. 많은 문제가 풀린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남을 미워하는 것만큼 내 인생을 파괴하는 건 없다’는 생각까지는 왔는데 여전히 힘들었습니다.

정토회 서원행자로 활동하면서 알코올 의존증으로 9일간 입원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과수원 일이 일찍 끝나 슈퍼에서 한두 잔 마셨는데 술이 안 끊기는 겁니다. ‘어? 이게 내 의지로 컨트롤이 안 되네?’ 너무 놀랐습니다. 우리 집 내력을 보면 할아버지가 알코올 의존증이 있었습니다. 병원에 물어보니 알코올 의존증은 99%가 유전적인 요인이고 안 먹는 거 말고는 치료법이 없다고 합니다. 기도해도 안 되고 뭘 해도 안 돼서 알코올 의존증 치료병원에 갔습니다. 마음대로 나갈 수 없는 병원 유리창 밖에 보랏빛 감자꽃이 보였습니다. '얼마 전에 심은 우리 집 감자도 꽃이 피었겠구나' 하는 생각에 울컥 눈물이 흘렀습니다.

과수원에서 어머니와 함께▲ 과수원에서 어머니와 함께

마음이 힘들어 동생에게 염주하고 매트를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매일 500배 절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유수스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담배로 치면 한 몇 년 끊었다가도 ‘별거 없네’ 하며 다시 피우고, ‘에이, 모르겠다’ 하고 그냥 사는 것은 수행자의 자세가 아니다. 아침에 끊었다가 저녁에 깜빡 놓쳐서 다시 피우게 되더라도 그다음 날 아침에라도 알아차리고 다시 마음을 내어 또 끊고, 또 끊고 하면서 ‘내 이번 생에 못 끊으면 다음 생에라도 반드시 끊으리라’ 원을 세우고 놓치면 다시 하고 놓치면 다시 하는 것이 수행자다.”

스님의 말씀이 없었다면 내가 알코올 의존증과 우울증으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 아마 자포자기했을 것입니다. 병원에서 남들이 보든 말든 살고 싶어서 매일 500배를 하며 한 가지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입니다. ‘지금 나에게 벌어진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우주에서 나밖에 없다, 나 이외에 누구도 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이렇게 받아들이니 문제가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두북에서 화광법사님과 밭을 맨 적이 있었습니다. 법사님이 물으셨습니다.

“거사.”
“예.”
“왜 이혼했어?”
“둘이 사는 것 보다 떨어져 사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그랬더니 밭을 매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문제를 나한테 돌리지 않으면 문제가 안 풀립니다.”

소임하면서 가장 잘 쓰였던 0.5t 트럭▲ 소임하면서 가장 잘 쓰였던 0.5t 트럭

마음

이혼하고 정토회에서 봉사할 때 처음 입재식을 가는데 법당 노도반님이 문자를 주셨습니다.

“거사님, 오늘 도시락 싸 오지 마세요. 제가 준비해 갈게요.”

도반의 이런 마음 때문에 지금까지 활동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전주법당 개원법회 영상을 만들 때였습니다. 불사 담당인 고경희 님과 개원법회 영상작업을 하는데, 주제를 ‘고마움 세 가지’로 잡고 사진을 보내달라고 하니, 고경희 님이 사진을 추려서 보내주셨습니다. 농사지을 때여서 밤새도록 편집해서 새벽 5시에 보내고, 2시간 자고 과수원에서 일하는데 카톡이 왔습니다.

“거사님, 사진이 한 장 잘못 들어갔어요. 그 사진 빼주세요.”

영상작업을 해보면 사진을 하나 빼면 모든 걸 다시 맞춰야 합니다. “예, 알겠습니다.” 눈웃음 이모티콘과 함께 답장을 보냈지만 ‘보낼 때 잘 보내지. 또 맞춰야 하네.’ 하며 짜증이 났습니다. 나도 영상작업에 초보자였고 프로그램도 안 좋은 걸 쓰던 때였습니다. 그다음 날 밤새도록 작업해서 보내면 또 카톡이 옵니다. “거사님, 글씨체가 이상해요.” 그렇게 다섯 여섯 번 하면 나중에 ‘네가 해라. 나 못하겠다.’ 이런 마음이 듭니다. 그래도 카톡에는 눈웃음 이모티콘을 보내고 영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유수스님이 개원법회에서 영상을 잘 만들었다고 칭찬을 하셨고, 도반들도 눈물로 감동했습니다.

그 이후에 정일사 수련에서 묘덕법사님에게 ‘이런 마음이 들었어요.’ 했더니, “거사님, 우리가 하는 일이 서로 조율하고 조정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어떻게 일이 되겠어요.” 하는 말씀에 나 자신이 많이 돌아봐졌습니다. 고경희 님은 불사하면서 같이 했던 도반들이 너무 고마워서 한 명도 빠짐없이 넣고 싶었던 거였습니다.

요즘 불교대학에서 봉사할 때 하는 “사용하는 사람의 마음을 잘 헤아려 잘 쓰여집니다.” 라는 명심문이 이때의 제 마음을 잘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사용하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야 했는데 ‘내가 내 것을 내 식대로 만들려고 했구나!’ 싶었습니다.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하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서 해야 봉사잖아요. 도반들에게 “어떻게 할까요?” 하고 물어보면서 일을 할 때 일이 잘 됩니다. 그리고 이럴 때마다 ‘아, 정말 도반이 소중하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JTS 영상물 편집을 하다 보면 봉사자들이 거리모금 할 때 표정이 참 밝습니다. 그 표정을 유심히 봅니다. 그때 “서산 마애삼존불이 왜 웃고 있는지 아느냐?”는 스님 질문에 대한 답을 얻었습니다. 사람은 ‘내가 먼저 이해하는 마음, 내가 먼저 베푸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 도우려는 마음, 그런 마음을 낼 때 이런 미소가 나온다. 부처님의 저 미소는 이런 마음에서 나오는 미소다.’

정토회 8차 연도 3년 동안 여기저기에 문제 제기를 많이 했습니다. 회의 관련 매뉴얼도 준비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고 했더니 유수스님이 정일사 수련에서 그러셨어요.

“회의가 수다인 줄 아는 단계까지 가야 할 텐데.”

당시에는 ‘회의가 수다’라는 유수스님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회의하다 보면 자식 얘기도 하고 남편 얘기도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이렇게 수다 떨면서 충분히 얘기하다 보면 굉장히 좋은 아이디어가 나올 때가 많습니다. 그때의 수다라는 건 내 의견을 고집하지 않고 편안하게 다 이야기할 수 있는 거로 이해했습니다.

유수스님 말씀이 “우리는 보통 소통이 쌍방향인 줄 안다. 소통은 한 방향이다. 내가 먼저 상대의 처지를 이해하지 않고 내가 먼저 상대의 의견을 잘 듣지 않으면 소통은 안 된다. 그래서 소통의 출발점은 한 방향이어야 된다.”는 거예요. 소통이라는 건 마음을 숙인다는 겁니다. 내가 먼저 아버지를 이해하지 않으면 아버지와 나는 소통이 안 돼서 불편하지요. 내 의견을 편하게 이야기는 하지만 고집하지 않고 상대의 이견과 조율해 나갈 때 소통이 되지요.

희망콘서트 때 도반들과 함께. 맨 왼쪽부터 여동생, 전해종 님, 고경희 님▲ 희망콘서트 때 도반들과 함께. 맨 왼쪽부터 여동생, 전해종 님, 고경희 님

행복

‘정토행자 대상’을 받았을 때 제일 먼저 여동생이 생각났습니다. 희망강연 때 내 0.5t 트럭에 강연 물품을 싣고 전북지역을 다니며 ‘우리는 부부 도박단이 아니라 희망 남매단이다’며 신나게 함께 활동했던 전북지역 희망강연 행사팀장인 둘째 여동생이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죽기 전에 그러더군요.

“오빠, 그래도 내가 사십 넘게 살면서 희망 강연 300강 쫓아다니며 도반들과 봉사할 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어. 힘들기도 하고 도반들과 다투기도 했지만, 지금 돌아보니 그때가 가장 행복했어.”
“걱정하지 마. 오빠 앞으로 계속 그 일 하면서 살 거다.”

그때 마음 정리가 다 되었습니다.

어쩌다 서원행자가 되고 대의원 소임까지 맡게 되니 할 일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그저 평소와 똑같이 아침에 일어나 기도하고 낮에는 농사일하고 저녁에는 법당에 나가 맡은 소임을 하며 법문 듣고 회의 있으면 회의하고...

희망 강연에서 스님이 마지막에 항상 하셨던 ‘행복도 내가 만드는 것이고 불행도 내가 만드는 것이다’는 말씀이 삶의 지침입니다. 봉사하면서 부담될 때도 있지만, 오는 대로 받으면 나에게 좋습니다. 그리고 약간 부담될 때 받으면 그럴 때 내가 성장합니다. 일하는 역량도 향상이 되지만 부담감을 넘어보니 점점 덜 괴로워진다고 할까요?
마음이 조금 더 열리는 경험으로 가능하면 앞으로도 오는대로 받으며 해 나가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_온라인 홍보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