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옥교법당
기적! 내가 달라지니 우리 남편이 달라졌어요!

"부총무님 덕분입니데이~" "팀장님 덕분이지예~"
폭염이 정점을 찍던 팔월 첫째 날, 옥교법당에서는 기상천외한 경쟁이 벌어졌습니다. 그야말로 듣도 보도 못한 감사 경쟁! 개원한 지 2년 6개월 만에 다복하고 짱짱한 수행공동체를 일궈낸 비결을 듣기 위해 주간부와 저녁부 책임자인 이명애 님과 조인숙 님을 모신 자리에서 서로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넘쳐났던 것입니다. 주·저가 화합하여 나날이 성장하는 옥교법당, 그런 옥교법당의 역사이자 든든한 뿌리인 이명애 님과 조인숙 님의 감동적인 수행담을 나누고자 합니다. 두분의 이야기를 한번에 담을려고 했는데 한분 한분의 수행담이 기적같은 이야기라 가능하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먼저 이명애 님의 수행담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인도성지순례에서 이명애 님(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과 조인숙 님(오른쪽 첫 번째)
▲ 인도성지순례에서 이명애 님(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과 조인숙 님(오른쪽 첫 번째)

모르면 묻고, 틀리면 고치고, 잘못하면 뉘우치면 된다고? 아이구야 뭐 이런 데가 다 있노!

저는 평소 종교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나만 똑바로 살면 된다는 생각으로 살아왔지요. 그런데 우연히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듣고 스님의 가르침에 푹 빠져버렸습니다. 그게 2013년 가을쯤이었습니다. 그러다가 2014년 봄, 더 배우고 싶은 뜨거운 마음으로 61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불교대학에 입학원서를 내러 울산법당을 찾아갔습니다. 그때 법당 앞에 큰 현수막이 걸려 있었습니다. ‘모르면 묻고, 틀리면 고치고, 잘못하면 뉘우치면 됩니다’ 그 문구를 보자마자 가슴이 탁 트이는 게 ‘아이구야 뭐 이런 데가 다 있노’ 싶었고, 저는 또 정토회에 홀딱 반해버렸습니다.

본격적인 수행담은 시작도 안 했는데, 2014년 봄불교대학 학생이었다는 말에 리포터는 벌써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2015년 경전반 학생으로 불사를 하고, 경전반 학생이 개원 법당의 부총무 소임을 맡았단 말씀이세요?” 이명애 님은 언제나처럼 유쾌하게 웃으며 그렇다고 답하였습니다. 사실 저는 놀라움을 넘어 충격을 받았습니다. 평소 남다른 리더십으로 법당을 이끄는 모습에, 옥교법당 소속이 된 지 얼마 안 되었던 저는 부총무님의 수행력이 족히 20년은 되었을 거라 짐작했기 때문입니다. 이쯤 되니 리포터인 저도 이명애 님의 수행기가 더욱 궁금해졌습니다. 이명애 님은 자신이 이토록 행복하게 총무 소임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불교대학 도반들 덕이라며 눈가가 촉촉해졌습니다.

귀한 나의 도반들! 내가 2014년 봄, 불교대학에 입학 안 했으면 어쩔 뻔 했노!

그렇게 입학을 하고 보니 우리 불교대학 동기들 중에 울산 중구에 사는 사람이 많았어요. 당시 울산의 다른 구에는 이미 법당이 다 있었고 중구에만 없었습니다. 그래서 울산법당으로 중구 사람이 몰리는 것이 당연했는데 그때는 그저 중구 사람 많다고 신기해했지요. 참으로 햇병아리 시절인데 저는 늦게 시작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금 급했습니다. 법문도 더 배우고 싶고, 봉사도 더 하고 싶고, 선배 활동가들을 보면 저분은 어찌 저리 수행을 했을까 싶어서 제가 먼저 선배님들께 손을 내밀었습니다. 중구에 사는 선배 활동가들을 제 차로 모시고 다닌 거죠.
그렇게 오며 가며 선배들의 수행담도 듣고, 안내해 준 두북정토마을 봉사도 적극적으로 임했습니다. 중구에 사는 불교대학 도반들까지 제 차에 한가득 싣고 다녔던지라 제가 두북에 봉사 다니는 것을 도반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이도 많고 넉살도 좀 있으니 ‘두북 가자’고 권하면 동기 도반들은 또 따라와 주고, 그렇게 중구에 살던 우리 도반들은 함께 봉사하며 참 많이 친해졌습니다.

문경 불교대학 특강수련에서 2014년 봄불교대학의 소중한 도반들과 함께 (앞줄 왼쪽 첫 번째 이명애 님)
▲ 문경 불교대학 특강수련에서 2014년 봄불교대학의 소중한 도반들과 함께 (앞줄 왼쪽 첫 번째 이명애 님)

옥교법당 불사! 곳곳에 올올히 박힌 땀이 사랑으로

도반들이 좋으니 불법 공부와 봉사가 너무 너무 재미났다는 이명애 님, 그렇게 2014년 봄 불교대학 학생들 사이엔 불같이 신심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런 학생들을 보고 울산법당의 활동가들은 중구 불사를 생각했고요. 그러나 당시 울산법당만 법당인 줄 알고 다니던 이명애 님은 구별로 법당을 내는 것이 정토회의 목표인 줄도 몰랐고, 선배들이 자신들을 중심에 둔 불사를 생각하고 있는 줄은 더더욱 몰랐다고 합니다.

불교대학을 졸업할 즈음 울산정토회 총무님께서 불사 얘기를 꺼내시데요? 불교대학을 마치고, 2015년 봄 경전반에 올라간 저와 우리 도반들은 울산법당에서 경전반을 다니면서 기쁜 마음으로 법당 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새로 지어 깨끗한 건물은 임대료가 비쌌고, 가격이 적당한 곳은 지저분하고 어수선하여 내키지 않았지요. 그러다 결국 돈에 맞춰 귀곡 산장 수준의 기괴함이 느껴지던 곳을 법당 자리로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곳을 우리 경전반 도반 10명이 매달려 구석구석 쓸고, 닦고, 광을 냈습니다. 막막했던 곳이 법당의 형태를 갖춰갈 때마다 얼마나 감동했던지...그렇게 법당 곳곳에 올올이 박힌 우리의 땀은 고스란히 법당에 대한 사랑으로 변했습니다.

법당 개원을 앞두고 쓸고 닦고 있는 이명애 님(왼쪽)과 도반 이두남 님(오른쪽)
▲ 법당 개원을 앞두고 쓸고 닦고 있는 이명애 님(왼쪽)과 도반 이두남 님(오른쪽)

정토회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 경전반 전원 개근!

불사의 힘이었을까요? 함께 봉사하며 경전반에 올라가 불사를 이뤄낸 우리 동기 10명은 전원 개근이라는, 정토회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 자랑스러운 저의 동기들은 옥교법당이 개원하자마자 소임을 맡았고, 지금도 함께 옥교법당을 일궈나가고 있습니다. 이 인연이 너무도 귀해서 요즈음 저는 종종 2014년 봄 불교대학에 입학을 안 했으면 어쩔 뻔했나 싶은 생각에 아찔해집니다.

2015년 봄경전반 졸업식에서 전원 개근한 도반들과 함께 이명애 님(앞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
▲ 2015년 봄경전반 졸업식에서 전원 개근한 도반들과 함께 이명애 님(앞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

부총무를 해보라고요? 이제 경전반 학생이고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데요?

그렇게 불사를 하고 경전반은 졸업할 때가 다 되어 가는데, 하루는 울산정토회 총무님께서 저를 찾으시더니 옥교법당의 부총무 소임을 맡아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하였습니다. 깜짝 놀라 저는 제가 잘못 들은 줄 알았는데 전후 사정을 알고 보니, 중구에 적을 둔 선배님들이 이런저런 사정으로 부총무 소임을 맡기가 어려워 차일피일 시간을 보내다가 "학생 중에 이명애 어때요?" 하는 얘기가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때 참 신기하게도 가슴은 놀라 쿵덕거리는데, 불교대학 입학할 때 보았던 ‘모르면 묻고, 틀리면 고치고, 잘못하면 뉘우치면 된다’는 문구가 떠올랐습니다. '그래, 모르면 물을 데 천지고, 거듭 물어도 질책 한 마디 없으니 걱정 말고 해보자' 하는 용기가 생기더군요.
"모르면 묻고, 틀리면 고치고, 잘못하면 뉘우치면 되지예? 내는 이 문구만 잡고 합니데이!"

그렇게 용기를 낸 이명애 님은 세상 돈은 벌만큼 벌었으니 이젠 저승노잣돈을 번다는 마음으로 봉사에 매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매사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이명애 님도 넘지 못한 숙제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남편의 빈정거림!

정토회 다니는 거 지지해주는 남자랑 하루만 살아봤으면!

남편과 함께 사업을 하면서 일과 가정을 진두지휘한 건 저였습니다. 남편은 언제나 저를 의지했고 제가 이끄는 대로 따라오는 쪽이었지요. 결혼 생활 내내 저는 그런 남편이 답답했습니다. 리더십 없고, 저만 의지한 채 늘 주눅 들어 있었으니까요. 저의 닦달에도 남편은 자기 의사를 분명하게 표현하지 못했고, 뚱하니 부어있는 것으로 불만을 드러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남편이 제 면전에 대고는 말을 못 하고 흘리듯이 슬쩍 빈정거리기 시작한 것이 제가 불교대학에 입학하면서 부터입니다.
“그 마이 똑똑한 사람도 더 배울 게 있는가베? 나는 뭐 세상에 니같이 잘난 사람 없다고 생각하는데 아이가?”
“그래 저래 하다가 집 나가고, 그래 저래 하다가 재산 다 날린다.”
“그러다 초가삼간 팔아가 다 절에 갖다 바치고 나중에 길거리에 나 앉는데이.”

이렇게 비약과 비아냥으로 제 속을 뒤집던 남편은 제 부탁에 마지못해 법당에서 쓸 장독을 실어다 주는 길에도 법당 앞까지 안 가고 멀리 차를 세웠습니다. 자기는 여기까지밖에 못 가니 네 도반들 불러다 들고 가라는데, 하도 기가 막혀 왜 그러냐 물었더니 무섭다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겁이 나서 법당 앞까지 못 간다고요. 말인즉, 제가 좋아서 다니는 곳이니 딱 저 같은 사람들만 모여 있을 것인데, 그런 법당 기운 자체가 무섭다는 것이었습니다.

가정에서 아무리 저보다 권위가 없는 남편이더라도 남편이 제가 하는 일을 싫어하니 그 자체가 괴로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제가 당당하게 제 일을 해내면 남편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렇게, 총무 소임을 받은 지 6개월 정도 지난 어느 날, 나야말로 뻔뻔한 여자라는 생각이 가슴을 쳤습니다.

남편과 함께 한 이명애 님의 생일
▲ 남편과 함께 한 이명애 님의 생일

그래 내다! 내가 바로 그 뻔뻔한 여자다!

지금껏 의존적인 남편이 답답하다고만 생각했지 남편을 대하는 제 행동을 돌이켜본 적이 없었는데, 나 하나 못 바꾸면서 감히 남편을 바꾸려 하는 나야말로 진짜 뻔뻔한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장 오늘 실천하자는 마음을 먹었지요.

그날 밤, 밥을 딱 차려놓고, 남편이 그렇게 듣고 싶어 하던 말을 했습니다. 콧소리를 섞어 “식사하이소~~” 라고요. 그게 뭐 그렇게 어렵냐 하겠지만, 같이 일을 하고 들어와서도 혼자 집안 일 다 하고 밥도 다 하는 저로서는 상 차리는 것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밥 차려 놓으면 딴전 피우며 밖으로 나가는 남편이 참 미웠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신혼 초부터 밥상을 차려 놓으면 밖으로 나가던 남편. 계모 밑에서 자라 눈치 보는 것이 습관이 되었고, 그런 자기를 제가 더 챙겨주기를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딸만 낳았다고 어머니를 구박하고 딸들을 천대하던 가부장적인 아버지 밑에서 어렵게 자란 저로서는 그런 남편의 마음을 품을 수 없었고, 저의 고단함을 위로해주지 않는 남편을 원망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딱 마음을 돌이켜, 그렇게도 하기 싫고 안 나오던 말을 한 뒤 얼른 주방으로 달아났던 그 날, 놀란 남편은 얼이 빠진 표정이었습니다. 그래서 내친김에 한 번 더 하자는 마음으로, 콧소리에 눈까지 맞추면서 말했습니다. “식사 하세옹~~~” 이라고요.

대전 워크샵 참석 후 장미와 함께
▲ 대전 워크샵 참석 후 장미와 함께

기적! 내가 달라지니 우리 남편이 달라졌어요!

그날이 기적의 시작이었습니다. 남편의 눈빛이 달라지더니, 저를 겁내는 것이 아니라 제가 불편한 것이 없는지 살피기 시작한 겁니다. ‘엄마야 이거구나, 별거 아니었구나!’ 싶어, 그날 전 주방에서 혼자 눈물을 쏟았습니다.

이후 우리 부부는 서로 눈 맞추며 대화 같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고, 그렇게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드디어 남편이 물었습니다.
"거기 가면 뭐 배우냐"
저도 모르게 탄성이 터졌지요. "옴마야 궁금한가베?" 라고요. 말은 퉁퉁하게 했어도 궁금했었다는 남편. 그런 남편에게 저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습니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당신한테 잘못하고 살았는지를 법륜스님과 정토회가 가르쳐준다고요. 잘 생기고, 부지런하고, 돈 잘 벌고, 가정적이고, 여자란 나밖에 모르는 남자를 카리스마 없고, 리더십 없고, 훌륭한 대학 나와서 나를 착착 리드 안 해준다고 괴롭힌 거 정말 미안했다고. 지금껏 나는 90%의 장점을 가진 당신을 몰라보고 10%의 단점만 부풀려 생각했었다고. 그렇게 나를 괴롭히고 당신을 못살게 굴어서 정말 미안하다고. 나는 내가 참고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껏 참고 살아준 것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었다고.

그날 전 처음으로 남편 앞에서 펑펑 울면서 사과를 했습니다. 그런 저를 보고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라 하던 남편은 그날 이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를 아끼고 존중해주는 것은 기본이고, 제가 법당에 나가는 것도 좋아하고, 사천왕사지 기도 갈 때도 짐 보따리만 싸 놓으면 알아서 착착 차에 실어줍니다. 그 쌘 마누라가 자기 앞에서 참회의 눈물을 쏟았으니, 남편에게는 저를 변화시킨 법륜스님과 정토회야말로 하늘 같은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만나는 족족 투닥거리던 부모가 달라지니 아이들도 행복해합니다. 삼일 일정으로 친정에 왔다가도 부모의 싸움에 휘말리기 싫어 하루 만에 가버리던 제 딸이 요즈음은 친정이 좋다며 삼일을 꼬박 채우고도 하루라도 더 있고 싶어 안달입니다.

죽음을 각오하는 마음으로 나를 살핍니다!

그렇게 기적을 보고 나니 남편을 무시했던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돌아가면 남편의 신뢰도 잃고, 정토회도 욕 먹일 것이니까요. 요즘도 가끔 업식이 치성하지만 죽음을 각오하는 마음으로 경계합니다. 그 덕에 저에 대한 남편의 감탄과 신뢰는 날이 갈수록 깊어지고, 저도 이제 더 이상 외롭지 않고 행복으로 충만합니다.

개원후 처음 맞이한 2016년 봄불교대학 학생들과 함께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 이명애 님)
▲ 개원후 처음 맞이한 2016년 봄불교대학 학생들과 함께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 이명애 님)

돌이켜보면 자신이 정토를 일군 것이 아니라 정토가 자신을 일궈줬다는 이명애 님. 봄볕처럼 싱그럽고 따뜻한 이명애 님의 에너지는 삶의 기적을 스스로 일궈낸 자의 법에 대한 확신이겠지요? 요즘은 남편이 자기를 너무 좋아해 준다며 환하게 웃는 이명애 님의 앞날에 평안이 가득하길 기원합니다. 이상, 맑은 마음으로 깨끗한 땅을 일구고 있는 이명애 님의 수행담을 소개해드렸고요, 다음 시간에는 또 하나의 눈물 나는 기적을 만들어 낸 조인숙 님의 수행담을 나누겠습니다.

글_정진옥 희망리포터(울산정토회 옥교법당)
편집_방현주(부산울산지부)

전체댓글 22

0/200

김영미

감사합니다

2020-02-29 03:41:07

하심

감사합니다_()_

2019-08-01 22:37:07

김정미

유쾌한 수행담입니다. 그 힘 받아갑니다.

2019-03-10 21:5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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