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아주 먼 옛날,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로 시작하는 전래동화처럼 정토회에는 ‘용두리 시절에’라는 말이 있습니다. 문경수련원도 없었고, 서초법당을 짓기도 훨씬 전인 ‘용두리 시절’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용두리 시절을 연 법광법사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도 그 시절을 어렴풋이나마 그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법광법사님 인터뷰
▲ 법광법사님 인터뷰

열등감, 내 마음에 빗장을 걸다.

정토회를 알기 전 딸은 조계사 어린이 법회에 다녔고, 저는 어머니회 활동을 열심히 했습니다. 남편과 함께 절에 다니며 100일 기도도 하고 매주 법회도 참석했지만, 법문을 듣고 저를 돌이켜 보는 것이 아니라 남편에게 잘하라고 강요하니 변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남편과의 갈등은 더 깊어졌고, 저의 화는 아이에 대한 이유 없는 매질로 이어졌습니다.

결혼해보니 시댁은 시부모님과 9남매의 대가족이었습니다. 가족이 많아져서 좋으면서도 너무 부럽고 배운 것, 가진 것 없고 부모형제도 없는 내 처지와 비교되어 열등감이 생겼습니다. 남편의 아무것도 아닌 말에 무시한다며 계속 꼬투리를 잡아 싸웠습니다. 남편이 옆에 있는 재떨이를 집어 던질 정도로 대들고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으면 머리를 스스로 벽에 찧기도 했습니다.

하루는 남편을 고쳐보겠다고, 술 한 잔 못 마시는 제가 남편을 위해 담가 두었던 아카시아 술을 큰 잔에 따라 꿀꺽꿀꺽 마셔버렸습니다. 보름 동안 앓아누워 자리보전을 했습니다. 남편은 제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가 “네가 나를 고치려고?” 하며 어림도 없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중이 되면 속이 시원하겠다.’라며 매일 집 나갈 생각만 했습니다. 열등감에 사로잡힌 마음은 굳게 닫혀있어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아무것도 듣지 못했습니다.

카세트테이프 법문,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리다.

1989년 어느 날 저녁, 남편과 또 다투고 나서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여덟 번째로 집을 나왔습니다. 마땅히 갈 곳이 없어 조계사 어머니회에서 친하게 지내던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친구는 최석호 법사님(現 법륜스님) 강의를 들었는데 좋았다며 저를 홍제동 정토 포교원(이하 홍제동 법당)에 데려다줬습니다. 법륜스님을 처음 뵌 것은 1985년 비원 포교원 개원식 1일 찻집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작은 부처님상이 있는 정토 포교원의 15평짜리 공간은 절 같지 않았습니다.

혼자 남은 제게 법당 일을 보던 분이 카세트테이프 법문을 틀어주고 나갔습니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대중 상담 법문이었습니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서 말씀을 하니 귀에 쏙쏙 들어왔습니다. 그 말씀이 꼭 제게 하는 말씀 같았습니다. ‘아, 이거구나. 이게 부처님 가르침이구나. 그럼 내가 잘못 살았네. 내가 집을 잘못 나왔네.’ 하고 깨달았습니다. 머리를 깎고 절에 가야만 수행이라는 엉터리 생각을 알아차리고 나니 돌아가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습니다. 그때 남편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뭐해, 안 들어와?” “나 들어가도 돼?” 기쁜 마음으로 집에 들어간 후 다시는 보따리를 싸지 않았습니다.

도반들과 함께
▲ 도반들과 함께

정토회 용두리 시절을 열다. 내 마음의 문을 열다

카세트테이프 법문을 들은 이후 법륜스님과 정토회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조계사 일요 법회처럼 정기법회가 있을 거로 생각하고 홍제동 법당을 찾아갔습니다. 마침 용맹정진 기간이라 8일 내내 법회가 열렸습니다. 8일 모두 참석하고 수요일 법문이 가장 좋아 수요일 법회에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날이 바로 정토회 수행 법회 날이었습니다. 매주 법회에 참석해서 그만하라고, 그만 끊으라고 해도 계속 질문 했습니다. 그만큼 답답했던 거지요.

당시 법당에는 청년대학생들이 많았는데 수련 장소를 찾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즈음 저와 남편은 도자기 장사를 하며 모은 돈으로 용두리에 작은 땅을 마련해서 한쪽에 비닐 집을 짓고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노는 땅이 있으니 수련원 지을 때까지 만이라도 빌려주자고 남편에게 의논하니 법당에 물어보라 했습니다. 정토회 다니며 제가 좀 달라지니 남편이 흔쾌히 마음을 내었던 거죠. 그래서 전화를 했습니다. “여보세요? 최석호 법사님 좀 바꿔주세요. 제가 법회 나가는 오정숙인데요. 수련장이 없다면서요? 내 조그만 땅이 있는데 비닐하우스 짓고 여기서 수련하면 안 되겠습니꺼? 경기도 용두린데요~” 스님께서 좋다 하셨고 남편은 재료비를 받아 비닐 수련원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눈썰미와 손재주가 좋았던 남편은 재료를 구하는 일부터 골격을 세우고 복도와 여러 개의 방을 만드는 일까지 척척 해냈습니다. 저는 옆에서 못 집어달라면 못 집어주고 잡아달라면 잡아주고 먹을 것 챙겨주며 도왔습니다. 외풍이 없도록 이중벽까지 만들어 몇 개월 만에 법당과 요사채가 완성되었습니다. 법륜스님과 정토회 모든 법사님이 생활하고 청년대학생들이 수련하게 되니 저녁이면 비닐 하우스 수련원 창문마다 불빛이 환했습니다. 시장에서 팥죽 장사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그 불빛을 바라볼 때면 눈물이 날 만큼 기뻤고 아침이면 우렁찬 소심경 소리에 환희심이 났습니다. 그곳 용두리에서 제1차 만일결사 중 제 1차 천일결사 제1차 백일기도 입재에 법륜스님, 법사님들 저를 포함한 전국 정토행자 200여 명이 참석했습니다. 제1차에서 제6차까지 <깨달음의장>이 열렸습니다.

지리산에서 봉사자들과 함께
▲ 지리산에서 봉사자들과 함께

환희심에 마음마저 불을 켠 듯 밝아지던 나날을 지내고 있을 때였습니다. 민원이 들어갔는지 무허가 건물 철거반이 굴착기를 끌고 와서 비닐 하우스 수련원과 비닐 집을 두 차례에 걸쳐 보일러까지 모두 철거하고 전기를 끊어버렸습니다. 법륜스님께서는 전기도 안 들어오고 지붕과 바닥도 다 헐린 자리에 쥐똥이 쏟아지는 비닐을 오므려서 촛불을 밝히고 며칠 밤을 주무셨습니다. 홍제동 법당에서 주무실 수도 있었는데 우리 마음을 살피고 위로해 주려고 일부러 함께하셨어요. 이런 마음을 알게 되니 참 스승을 만남에 더욱 감사했습니다.

그 후 철거된 자리에 정토회 법사님들과 청년들을 모아 남편과 저도 함께 다시 비닐 집을 지었습니다. 처음처럼 이중벽을 지을 겨를도 없어 외풍이 셌습니다. 법륜스님 방은 외풍이 더 세서 겨울에 몹시 추우셨다는 말씀을 듣고 죄송한 마음이었습니다. 용두리 비닐 집 수련원에서 법사님들과 법우들이 언제나 웃는 얼굴로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모습이 매우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그때부터 ‘돈을 벌어서 정토회를 후원할 것인가? 저분들 뒤를 따라 봉사를 할 것인가?’ 고민이 되었습니다.

봉사할 수 있어 행복합니다^^
▲ 봉사할 수 있어 행복합니다^^

내일 이 시간에 법광법사님의 두 번째 이야기가 찾아옵니다.

글_이영선 희망리포터(분당정토회 경기광주법당)
편집_전선희(강원경기동부지부)
속기_이현주 희망리포터(남양주 양평법당) 나현미(수원정토회 수원법당)
도움주신 이_이미정 희망리포터(용인정토회 기흥법당) 장석진(강원경기동부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