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법당 삼아 3년 넘게 가정법회를 열고, 수라간 무수리처럼 매주 김치담고, 국수 삶던 분이 있습니다. 지금도 대전 법당에서 큰 행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면, 이백 여명의 활동가들 손에 샌드위치 한 쪽씩이라도 꼭 들려 보내시곤 하십니다. 큰 손보다 마음이 더 큰 묘광법사님의 뭉클한 이야기 전합니다.

대전정토회의 산증인인 묘광법사님
▲ 대전정토회의 산증인인 묘광법사님

해우소에서의 작은 깨우침과 법륜스님과의 인연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쌀을 머리에 이고 절에 가시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어릴 적부터 사찰을 참 좋아했습니다. 결혼해서는 쌍둥이를 데리고 집 근처 가까운 절에 다녔습니다. 당시에는 절에 와서 불공을 드릴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참 고마웠습니다. 그 무렵 제겐 한 가지 큰 고민이 있었습니다. 새벽기도 중에 천수경만 읽으려고 하면 해우소(화장실)에 가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그 때만해도 예불중에 해우소에 가면 큰일나는 줄 알아, 갈 엄두도 못내고 참느라 안절부절 못했습니다. 어느 날 마찬가지로 막 천수경 독송을 시작하는데 화장실에 가고 싶었습니다. 평소처럼 참다가 문득 ‘어, 내가 뭐 하고 있지? 화장실 가고 싶으면 가면 되는데 왜 이러고 있나?’ 싶어서 벌떡 일어나 해우소에 갔습니다.

시원하게 볼일을 보는 순간, 온 세상이 환해졌습니다. 먹으면 내보내는 게 이치듯이, 물도 막아두면 썩으니 흘러야 하고, 재물도 움켜쥐지 말아야 한다는 걸 그 때 깨달았습니다. 그 길로 법당에 가서 책을 덮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자고있던 남편에게 이 경험을 이야기했더니, “밥을 먹고 나면 똥을 싸는 게 이치지. 그게 자랑이라고 말하나?" 자고 있는 사람 잠도 못 자게 깨우냐고 타박 아닌 타박을 주었지만 저는 좋았습니다. 이 때의 경험이 무주상보시를 할 수 있는 단초가 되었습니다. 그 경험으로 연기법도 어렴풋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1992년 무렵, 다니던 절의 스님이 읽어보라며 <월간정토> 한 부를 주셨습니다. 법회 안내 기사를 보고 친구와 함께 찾아간 곳은 한 아파트 가정집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거실에 모여 법문을 듣고 있었는데, 그곳에 법륜스님이 계셨습니다. 당시 법성게 강의를 하셨는데, “불수자성수연성”을 설명하시는 대목에서 그냥 눈물이 났습니다. "스스로의 성품을 지키지 않고 인연 따라 나툰다. 하고 싶다, 하기 싫다는 것을 중심에 두지 마라. 여기에 구애 받게 되면 업대로 일어난다." 스님께서 그렇게 법문을 하시는데, '여기다!' 싶었습니다. 그 길로 다니던 절을 “안녕” 했습니다.

가정 법회 때부터 함께 한 도반들(박정선 님, 묘광법사님, 이정선 님, 이소윤 님)
▲ 가정 법회 때부터 함께 한 도반들(박정선 님, 묘광법사님, 이정선 님, 이소윤 님)

3년 6개월 가정법회, 국수를 삶다

그 집에서 처음 3년 정도 가정 법회를 하다가, 사정이 생겨 계속할 수 없게 됐습니다. 너무 아쉽고 놓칠 수 없어서 고민한 끝에, 남편과 상의하여 우리 집에서 가정 법회를 열었습니다. 화요일은 불교대학 수업을 하고, 목요일은 법륜스님이 오셔서 법회를 했습니다. 법회에는 대략 70여 명의 사람이 왔습니다. 그분들에게 점심 공양으로 국수를 드렸기 때문에, 월요일이면 국수 준비와 김치 담그기, 과일 준비로 분주했습니다. 어느 날, 앞집 사는 교인 부부가 “쌍둥이 엄마. 집에 왜 그렇게 사람들이 많이 와?”라고 물었습니다. 스님께서 법문하시니 와서 들어보라 권했지만 오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법회 날은 부부가 등산을 하러 가니, 자신들 집을 이용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앞집에서 국수 공양과 설거지를 하며 그렇게 법회를 이어 나갔습니다.

서울정토회관 불사 때에는 도반들과 함께 김치 100포기를 아파트 지하실에서 담갔습니다. 밑반찬과 김치를 매주 두 번씩 고속버스 편으로 보내고, 집에서는 70여 명의 사람이 모여서 법회를 했는데, 참 신났습니다. 수라간 무수리라도 된 것처럼 국수를 삶으며, 대가족을 꾸리고 싶었던 어릴 적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스님이 오시고 사람들이 몰려오다 보니, 저를 무당으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3년 6개월의 법회가 이어졌고, 1999년에 여러 도반의 도움으로 드디어 대전법당(현 부사법당)을 개원했습니다.

아픈 손가락인 아들은 나보다 한 수 위

어릴 적 아들이 피아노에 머리를 세게 부딪쳤습니다. 이후 시름시름 앓다가 의식을 잃어 종합병원에 데려가니 뇌수막염이라고 했습니다. 치료를 잘해서 좋아진 줄 알았는데, 대학교에 들어가면서 간질 발작이 시작됐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이 사실을 도반들이 알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으니, 참으로 어리석은 엄마였습니다. 아이가 길에서 발작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으면 정신없이 달려갔습니다. 아들은 몸부림치면서 발작을 했고, 발작이 끝나면 풀린 눈으로 길가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때 그 마음을 어떻게 표현하겠습니까. 끌어안고 벽에 기대어 울기도 참 많이 울었습니다. 어느 날은 서울에 있던 아들이 병원에 있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가보니 3층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온몸은 피투성이고, 얼굴은 찢어지고 터져서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습니다. 뇌를 심하게 다쳐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계속되는 발작에, 제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때 누굴 원망하는 대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3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 3시에 일어나 300배를 했습니다. 기도하면서 불안했던 제 마음이 차츰 편안해졌습니다. 이전에는 뇌 수술을 하면 아이가 꼭 죽을 것만 같아, 병원에서 수술을 기다리는 아이를 데리고 나와버린 일이 있었습니다. 몇 년이 지나 수술하고 싶다는 아들의 말을 받아들였습니다. 잘되면 정말 좋겠지만 지금까지 최선을 다했으니 잘못되더라도 받아들이자는 마음을 가지니 담담해졌습니다.

아이가 수술할 때, 문경 대웅전과 서울 정토회관에서 많은 도반이 함께 기도해주었습니다.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그 공덕으로 아이는 점점 건강해졌습니다.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을까 했던 아들은 지금 직장에 잘 다니고 있습니다. 장애인 시설에 가서 봉사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아픈 만큼 성숙해졌고, 잘 쓰이고 있습니다.

아들은 한창 아플 때도 대중이 모인 곳에 가면 본인이 먼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지병이 있는데, 혹시 발작이라도 하면 구석으로 밀어 놔주세요. 놀라서 응급실 데려갈 필요는 없습니다. 금방 깨어납니다.” 이런 것을 보면 아들은 엄마인 저보다 한 수 위가 분명합니다. 처음부터 지혜로웠으면 바로 길이 보였을 걸, 제가 무지해서 가족에게 고생만 잔뜩 시키고, 돌고 돌아 여기까지 온 것 같습니다.

마음을 안아주신 스승님 덕분에 숙이는 마음을 알게 되다.

문경 수련원에서 4차 천일결사 입재식을 했던 때였습니다. 대전정토회 총무였던 저는 아이 문제와 도반과의 갈등이 겹쳐 심난한 상태였습니다. 어떡하면 이 문제를 풀 수 있을까 늘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무뚝뚝한 성격에 소통도 부족하고, 감당이 안 될 정도로 일은 잘 저질렀습니다. 이런 상황이니 봉사자들마저 서서히 한 명씩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 당시에는 입재식이 끝나면 법륜스님께서 문경 큰길까지 내려오셔서 일일이 악수를 해주시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전 입재식 까지는 다른 사람들 손 잡아준다고 스님께서 힘드실 것이라 생각해서, 살짝 스님을 피해 먼저 차에 탔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왠지 스님 손을 잡아야 이 답답한 문제를 풀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제가 "스님, 손 좀 잡아주세요" 그랬더니, 스님이 어떻게 제 마음을 아셨는지, “보살. 내가 손만 잡을 줄 아나. 안아줄 줄도 알아.”하면서 딱 안아주시는데, 그때 번쩍 정신이 들었습니다. 그 순간, 내가 사람들의 마음을 품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힘들었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문경에서 대전까지 2시간 넘게 걸리는 길을 얼마나 울면서 왔는지 모릅니다. 차에서 내려 도반들의 손을 잡고 "내가 잘못했어." 하면서 싹싹 빌었습니다. '내가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구나. 마음에 안 든다고 배척했구나. 내 뜻에 맞지 않는다고 외면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팍 숙이는 길이 자신이 사는 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때부터 도반들의 의지처가 되기위해 몸과 마음을 숙이는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병은 병일 뿐. 오늘 하루 다만 최선을 다할뿐입니다.

5년 전 행자교육 중에 갑상선 암 수술을 받았습니다. 처음 암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올 것이 왔구나. 고집 세고 드센 나를 숙이게 하는구나.'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법륜스님을 뵙고 "제가 이 병에 걸렸으니 정토회에 누가 될까 걱정입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그럼 서암 스님도 법정 스님도 암으로 돌아가셨으니 불교계에 누가 되겠구나." 하시면서 단번에 마음을 가볍게 해주셨습니다.

그때부터 '병은 병일 뿐이고, 아프면 병원 가고, 과로하면 쉬면서 그냥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한다.' 고 생각하니 마음은 가볍고 생활은 즐거워졌습니다. 이렇게 일체중생의 은혜 속에 살고 있습니다. 오래전 부모님도 암으로 돌아가셨는데, 지금 저는 부모님보다 10여 년 더 살고 있으니 이 또한 기적이고 감사한 일입니다.

인터뷰 중인 묘광법사님(가운데)
▲ 인터뷰 중인 묘광법사님(가운데)

정토회 활동을 하기 위해 묘광법사님은 가족에게 정성을 다하셨습니다. 혹시라도 가족을 등한시한다고 시어머님께서 걱정하실까봐, 매달 용돈과 함께 드시고 싶다는 밑반찬도 만들어 시부모님을 자주 찾아 뵈었다고 합니다. 바쁘게 운전하고 늦게 들어왔던 어느 날, 찬 밥을 데우며 미안해하는 묘광법사님에게 남편이 "나는 더운 밥 보다 찬 밥이 더 맛있다. 죽지만 말고 집에만 온나."라고 하셨답니다.

숙이고 또 숙이며, 전외자 님에서 쌍둥이 엄마로, 선주왕 보살에서 묘광법사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내일은 울고 웃는 수행의 길을 걸어오신 묘광법사님의 일상의 깨달음이 이어집니다.

녹음_신명옥 희망리포터(대전충청지부)
사진_허지혜 희망리포터(천안정토회 서산법당)
글_이애순 희망리포터(천안정토회 천안법당)
편집_하은이(대전충청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