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 한국에서 필리핀으로, 이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서 펼칠 인생 제3막의 목표를 ‘수행’으로 정하고 나니 매일매일이 행복하다는 황현미 님! 어느 날 맡겨진 공양소임을 "네!" 하고 맡아 세부법회를 그야말로 고향의 맛으로 채워주신 필리핀 세부법회의 든든한 맏언니, 황현미 님을 소개합니다.

할머니와 엄마에 대한 트라우마가 나를 움츠리게 하다

제 어린 시절 기억은 장사로 바쁘셨던 부모님 대신 늘 무섭기만 하던 할머니와 살던 우리 5남매에 대한 것입니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장면은 넷째 여동생이 세 살 때 오줌을 쌌다고 추운 겨울, 발가벗겨진 채 마루에 쫓겨나 있는 모습입니다. 할머니를 얼마나 무서워하고 싫어했는지 동생은 글자를 익힌 후로 장판이나 벽 여기저기에 할머니가 밉다는 글을 써놓곤 했습니다. 어린 저도 보통은 아니었는지 초등학교 3학년 때는 할머니가 싫어 무작정 집을 뛰쳐나갔다가 밤이 되어 무서워지자 집으로 돌아왔던 기억이 납니다. 예민하던 사춘기 시절 할머니는 유난히 제 친구들을 미워하셨습니다. 그래서 할머니가 교회에 가자고 하면 저는 성당에 가서 세례를 받고 할머니 미움을 더 받게 행동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저는 제 어린 시절을 부모님의 관심과 사랑은 받지 못하고 할머니의 미움과 구박으로 보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는 매사에 소극적이고 남 앞에서는 표현도 서툰, 자격지심과 피해 의식이 강한 아이로 자랐습니다
할아버지가 젊은 시절 많은 재산을 팔고 할머니 곁을 떠나셨다는 사실과 그로 인해 할머니가 참 힘든 세월을 사셨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뒤였습니다. 어렵게 자식들 다 키우고 늘그막에 손주들 다섯까지 떠안게 된 할머니 삶의 무게를 그때는 알지 못했습니다.

아이 둘 딸린 남자와 착한 여자의 고단한 결혼생활

성년이 되어 드디어 독립하여 혼자 살게 되었지만, 그 생활 역시 제게는 힘겹고 버거운 시간의 연속이었습니다. 동생들의 생활비도 보태줘야 하고 가족의 경제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시기에 지금의 남편을 만났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과 돌이 안 된 아이, 두 딸이 있는 상처한 남자였는데 가여운 마음과 내가 도와줘야겠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시댁에서는 상처한 지 얼마 되지 않고 사업도 힘들었던 시기라 결혼 얘기를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님은 성격 강한 남편을 고쳐서 살 수 있으면 살고 그렇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그만두라는 말도 서슴지 않고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 말이 어찌나 서운했던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님은 제 입장에서 남편의 쉽지 않은 성격을 미리 경고해 준 것이었는데, 그때는 은근히 나를 무시하고 거부한다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아이를 낳아본 경험도 없는 제가 두 아이의 엄마가 되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큰 시누이 손에서 자라던 둘째 아이를 가끔은 내가 가서 돌봐야 한다는 생각에 일주일에 두 번씩 갔는데,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식모처럼 남의 집안일을 해야 하나 생각하니 정말 하기 싫었습니다. 어느 날 남편에게 투정 부리듯 가기 싫다고 하자 갑자기 남편이 부엌에 있는 접시들을 던져 깨기 시작했습니다. 순간 남편이 너무 무섭고 두려운 존재로 느껴졌습니다. 남편은 자기 말에 순종적으로 무조건 따르는 아내가 되기를 바랐고 저는 겉으로는 ‘네, 네’ 하지만 속으로는 ‘왜 나만 이렇게 참아야 하나, 당신은 뭐가 그리 잘났나’ 하는 생각만 쌓여갔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 나같이 착한 여자가 아니면 이 아이들은 누가 돌보나 하는 생각에, 참고 견뎌야 한다는 책임감만 강해져 갔습니다. 큰 시누이에게서 자라다가 7살부터 함께 살기 시작한 둘째가 내가 낳은 딸을 미워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안 보는 곳에서 때리고 꼬집는 걸 알게 되니 그 아이가 보기 싫고 화가 올라왔습니다.

그 시기, 척추 수술로 거동이 불편한 시아버지의 병시중을 들어야 했고, 꼬장꼬장한 성격의 시어머니를 모시고, 늘 바빠 늦게 들어오는 남편, 그리고 엄마라고는 부르지만 서먹한 두 아이와 그 둘째 아이에게 구박받는 내가 낳은 딸을 바라보고 있자니 삶이 참으로 고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낳은 자식과 그렇지 않은 자식을 차별한다는 이야기를 들을까 야단치기도 조심스러워 마음이 늘 불편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제가 덕 보려고 선택한 삶이었기 때문에 무조건 참아야 한다는 생각에 내 표현 한번 제대로 못 하고 지냈던 시간이었습니다. 셋째 딸이 초등학교 5학년, 막내아들이 7살 무렵에 남편의 건강이 안 좋아져 몇 달만 필리핀 다바오에 가서 쉬다가 오자고 하여 필리핀으로 이주하였습니다.

지난 12월 9일, 9-7차 입재식(윗줄 왼쪽 첫 번째가 황현미 님)
▲ 지난 12월 9일, 9-7차 입재식(윗줄 왼쪽 첫 번째가 황현미 님)

삶의 활력소, 정토회와의 만남

우리가 필리핀에 머무는 동안 아버님을 돌보느라 힘드셨을 어머니께 조금이나마 수고와 걱정을 덜어드리고자 아버님을 다바오로 모시고 왔는데 오래 계시지 못하고 돌아가시는 바람에 임종을 보지 못하신 어머니와 사이가 더 나빠지고 말았습니다. 잠시만 쉬다 오자고 했던 필리핀 생활은 10년이 넘어가고 있었고, 그즈음 저는 갱년기 증상이었는지 기러기 가족으로 혼자 한국에 살고 있던 남편에 대한 원망하는 마음과 아들에 대한 집착의 마음이 혼재되어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태가 지속되었습니다.
세부로 오게 된 것이 이때였습니다. 우울하고 남편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했던 필리핀 다바오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남편의 새로운 사업차 세부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힘들 때마다 의지했던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바로 그 정토회가 세부에 있다는 반가운 소식에 한달음에 달려갔습니다.

나의 본성을 찾아가는 ‘마음나누기’

첫 모임 하던 날, 스님 말씀 듣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느닷없이 ‘마음나누기’를 하라는데 제 마음이 어떤지 많은 사람 앞에서 얘기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더럭 눈물부터 났습니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안 나고 다른 도반들 보기 창피했습니다. 이 ‘마음나누기’ 때문에 앞으로 이곳은 못 나오겠구나!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렇게 6개월, 또 1년이 지났습니다. 마음나누기가 큰 부담이었지만 한 달에 두 번 열린법회에는 꼭 참석했습니다. 그러면서 불교대학, 이어서 경전반 공부를 하며 이제 더는 마음나누기를 하며 울지 않고 담담히 얘기하는 나를 봅니다. '내가 이렇게 변했구나, 심지가 이리 단단해졌구나' 생각하니 빙긋이 웃음도 납니다.
마음나누기는 이제 보니 내가 겪었던 과거의 갖가지 실수, 회한과 아픔들 그것들과 화해하는 과정이었습니다. 나의 본래 마음을 찾아가는 시간이라 생각하니 마음나누기의 중요성을 다시금 알아차리게 됩니다.

불교대학 졸업수련 중(아랫줄 왼쪽 첫 번째가 황현미 님)
▲ 불교대학 졸업수련 중(아랫줄 왼쪽 첫 번째가 황현미 님)

세부로 와서 정토회 활동을 하며 내 업식의 두께를 알게 되었고 틀린 것이 아닌 다름을 인정하고 남편을 바라보니 남편을 보는 내가 편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다름을 인정하고 내 안에서의 문제를 보니 모두 새롭게 보였습니다.
사실 저는 법륜스님께서 ‘착한 사람이 제일 무섭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내가 착해서 가족들을 위해 참고 희생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리고 ‘저는 잘 몰라요, 저는 못 해요’ 하는 사람들이 깨닫기 힘든 사람들이라고 하신 말씀을 들으니 우선 나 자신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천일결사를 하며 내가 옳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내가 착하다는 생각도 내려놓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러면서 불교대학과 경전반 수업은 수행을 위한 기초를 탄탄히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니 수업에 더욱 열중하게 되었습니다. 정토회 활동의 취지를 알고 이해하게 되면서 앞으로 나도 주변 사람들에게 이 좋은 법을 알리고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마음의 위안을 주는 나눔의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겪은 나름의 우여곡절 삶이 괴로움에 사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는 경험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이 또한 모두 소중합니다. 나 하나 한다고 얼마나 달라질까 하던 마음에서 우선 나부터 실천하자는 적극적인 성격으로 바뀐 것도 큰 공덕입니다. 착한 사람, 효녀, 효부, 착한 엄마 상을 벗었더니 가족들에게 사랑한다는 말도 가볍게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비장터(윗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황현미 님)
▲ 나비장터(윗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황현미 님)

인생플랜, 수행이어서 좋다

탑 옆의 소나무처럼 살라 하신 스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늘 한결같은 마음으로 조화를 이루고 시비하지 않는 삶을 살겠습니다. 잘 물든 단풍은 봄꽃보다 아름답다는 것을 알려주신 제 인생 멘토, 법륜스님. 스님을 알지 못하고 정토회를 알지 못했다면 저는 여전히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며 상대방이 이러니 내가 불행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늙어갔겠지요.
몇 개월 후면 저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갑니다. 수행, 보시, 봉사를 더 적극적으로 할 수 있겠다 하는 생각에 마음이 기쁘고 가볍습니다. 인생 3막의 플랜을 수행으로 삼으니 절로 행복한 요즘입니다.

황현미 님은 희망리포터인 저와 불교대학과 경전반을 함께한 도반입니다. 인터뷰하는 동안 지난 세월 얘기에 눈물짓고 앞으로의 한국 생활에 설레어 환하게 미소 짓는 이 특별한 도반을 떠나보내기가 정말 아쉽습니다. 지난달, 매주 연재되었던 법사님들의 수행담을 읽으며 조심스레 저런 법사님들처럼 살고 싶다는 원을 내었다는 분. 지금까지 해오신 것처럼 앞으로도 꾸준한 수행이 주변인들에게 선한 보살행으로 꽃 피울 것을 알기에 황현미 님의 인생 3막을 응원합니다.

글_이채인 희망리포터 (세부법당)
편집_박승희(해외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