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서 구걸하던 한 아이를 떠올립니다. 어느 순례객이 들고 있던 음식 쓰레기 봉지를 뒤져서라도 먹을 것을 찾으려던 그 아이는 초콜릿을 외치며 한참을 따라왔습니다. 구걸하는 삶을 살지 않도록 돈이나 먹을 것을 주지 말라는 지침과 당장 그 아이에겐 초콜릿이 세상 전부인 것 같아서 주고만 싶던 주머니 속 초콜릿 사이 어디쯤에서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날의 기억은 인도 성지순례 내내 저를 따라다녔습니다."

밴쿠버에서 출발한 비행기는 14시간이 조금 넘어 인도 델리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밴쿠버와 인도는 13시간의 시차가 있기에 졸린 눈을 비비며 바라나시행 비행기를 기다리기 위해 공항 대기실에 머물렀습니다. 여기저기 JTS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보이자 오랜 비행시간으로 인한 관절 통증도 잊은 채 잃어버린 엄마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습니다. 이어 미세먼지로 뒤덮인 델리의 희뿌연 하늘에 마스크부터 찾던 불안한 마음은 부처님께서 처음으로 법을 설하신 사르나트에서의 일정을 시작으로 차츰 옅어져 갔습니다. 첫 순례지, 사르나트가 가장 인상적이었다는 이정호 님의 이야기입니다.

“사르나트는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후 최초로 설법을 하신 곳입니다. 같이 고행을 했던 다섯 비구에게 이곳에서 법을 설하시고 결국 그 다섯 비구 모두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또한 이곳은 최초로 재가불자가 탄생하여 계를 받은 곳이기도 합니다. 이런 뜻깊은 곳에서 세계 곳곳에서 모인 400명의 정토회 성지 순례자 모두가 가사를 수하고 수계식을 올리는 모습은 참으로 감동적이었습니다. 저절로 2600여 년 전 최초의 재가 수행자가 부처님께 계를 받는 모습을 떠올리며 시간을 초월한 불법의 영원함에 숙연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본격적인 성지 순례에 앞서 앞으로의 순례길이 힘들어도 수행자로 임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보자 하시던 법륜스님의 당부 말씀은 이후 모든 일이 불편한 순례길에서 분별심이 일어날 때마다 저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귀중한 가르침이 되었습니다. 지나고 보니 길게 느껴졌던 16박 17일의 일정이 꿈결과 같이 짧게 느껴집니다. 성지순례의 쉴 틈 없는 여정 때문에 차분히 누리지 못했던 감동은 점점 시간이 지나며 천천히, 그러나 오래도록 제 곁에 남을 것 같습니다. 혼자라면 불가능했을 이 순례를 즐거운 여정으로 만들어 주신 도반 여러분께 깊은 감사의 절을 올립니다.”

사르나트에서. 왼쪽부터 이정호, 장민용, 김보경, 김소희, 최정림, 허미영 님▲ 사르나트에서. 왼쪽부터 이정호, 장민용, 김보경, 김소희, 최정림, 허미영 님

사르나트와 갠지스강을 거쳐 사진과 영상으로만 보아오던 우리의 수자타 아카데미에 입성한 400여 명의 순례객들의 얼굴이 순간 환해졌습니다. 줄지어 반갑게 맞이해주는 수자타 아카데미 학생들의 환영 인사와 따뜻한 짜이 한잔, 그리고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수자타 후예들의 수준급 퍼포먼스는 말 그대로 최고의 ‘피로회복제’ 였습니다. 특히 지난 25년간 수자타 아카데미를 이끌어 온 JTS의 사업을 소개하는 활동가들의 앳된 얼굴은 그 자체로 큰 법문이었고, 제 앞가림 하나 제대로 못해 무수한 번민으로 보낸 저의 20대가 떠올라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렇게 수자타 아카데미에서의 밤은 깊어만 갔습니다.

짜이 한 잔과 함께한 수자타 아카데미에서의 오후▲ 짜이 한 잔과 함께한 수자타 아카데미에서의 오후

6년간 고행을 하셨다는 전정각산의 칼바위는 제게 아픈 기억입니다. 고소공포증이 있던 저는 업을 뛰어넘고자 길이 험하다는 스님의 엄포에도 굴하지 않고 도전하였건만 얼마 가지 않아 직립보행을 포기한 채 유인원이 되어 네 발로 기어오르자 향상법사님께선 제게 하산할 것을 명하였습니다. 부처님은 왜 이렇게 높은 곳에서 고행하셨냐고 불만을 토로했다던 쁘리앙카 교장 선생님의 목소리 빙의를 경험하며, 그리고 일어난 일은 모두 잘 된 것이란 스님의 말씀을 아무 데나 적용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볍게 내려왔습니다. 이루지 못하면 견디지 못하는 강한 성취욕의 업장이 또 이렇게 한 꺼풀 녹아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다음 날은 부처님께서 성도하셨다는 보드가야를 방문했습니다. 오랜 세월 힌두사원으로 알려졌던 보드가야 대탑, 엄청난 돈을 주고 탑을 수리할 수 있는 권한을 얻어 복원시킨 미얀마 왕의 공덕으로 마침내 우리 순례객에게도 참배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깨달은 후 선정에 들었던 7 장소를 돌아보고 부처님께서 얼마나 기쁘셨을까를 감히 상상해보며 전 세계에서 이곳으로 모여든 수행자들과 그 희열을 조금이라도 나눌 수 있음이 감사했습니다. 보드가야 대탑을 가장 가보고 싶었다는 김소희 님의 나누기입니다.

“순례길 내내, 마치 부처님께서 사시던 당시에 내가 들어와 있는 듯했습니다. 아직 도시화 되지 않은 자연환경과 이곳저곳 뚜렷이 남아있는 흔적들이 더 생생하게 그때의 느낌을 전달해주는 것만 같았습니다. 길가에 지나다니는 인도사람들을 볼 때마다 부처님도 저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한 인도인이었겠구나! 나와 다를 바 없는 한 인간이었겠구나! 생각이 들 때는 나도 부처님처럼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정말 가보고 싶었던 보드가야를 가던 길이 특히 기억에 남는데요, 부처님께서 고행하시다가 쓰러진 자리, 유미죽을 드시고 기운 차리신 자리들을 돌아보니 한 수행자가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깨달음을 얻고자 했는지 마음 깊이 다가왔습니다. 대탑의 웅장한 모습과 함께 남방불교의 거의 모든 국가와 티베트 사람들이 주위에 그룹을 이루고 앉아 명상하거나 경전을 읽고 있는 모습이 이곳에서 탄생한 불법이 대륙을 가로질러 한국으로 또 나에게 다다르기까지의 인연들을 생각해 보게 했습니다. 수행자 고타마가 붓다가 된 순간이 그림처럼 그려지는 것 같았고 나를 포함한 우리 순례단 그리고 세계각지에서 모인 수행자들이 모두가 붓다가 되는 순간이 있기를 마음 깊이 발원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성도 후 머무시면서 많은 설법을 하셨다는 영축산, 최초의 불교 절인 죽림정사, 부처님 열반 후 최고의 장로 500명이 모여 경과 율을 결집한 칠엽굴까지 불교대학, 경전반 수업과 <<인간 붓다, 그 위대한 삶과 사상>>의 책에서 보던 지명들이 실재하는 역사적인 장소로서 눈 앞에 끝도 없이 펼쳐졌습니다. 이어 부처님이 가장 사랑하셨다는 바이샬리로 향했습니다. 허미영 님은 바이샬리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버스 차창 밖으로 바이샬리를 떠나보내며….▲ 버스 차창 밖으로 바이샬리를 떠나보내며….

“우기로 마지막 안거에 들었던 바이샬리에서 부처님은 열반에 드실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그 마을에서 탐방하고 나오시면서 마치 코끼리가 뒤를 돌아보듯 천천히 몸을 돌려 지그시 바이샬리를 내려다 보시면서 여래가 이 아름다운 도시 바이샬리를 보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했던 곳, 부처님이 사랑하셨던 곳, 부처님의 진신 사리가 발견되었던 곳. 그리고 바이샬리를 떠나 북쪽으로 향하던 부처님을 따라오던 바이샬리 사람들… 안개 자욱한 케샤리아탑에서 떠나가시는 부처님을 안타까워하며 보내는 바이샬리 사람들이 된 것마냥 가슴이 시렸습니다. 어머니 마하파제파티의 출가를 여러 번 거절하시다 끝내는 허락하시어 최초의 여성 출가지가 된 이곳은 나에게도 특별한 마음이 들게 만드는 곳이었습니다. 조용히 앉아 호흡에 집중하면서 다른 어떤 곳보다 고요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부처님이 병들고 늙은 몸으로 바이샬리를 떠나는 모습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붓다가 인간이었음이 뼈저리게 느껴졌고 그분의 삶이 현실적으로 고스란히 이입되었습니다. 이번 순례에서 얻은 가장 큰 소득은 우상화 해 내 속에 존재했던 붓다를 인간 붓다로 만나면서 그분이 남기신 법에 의지하여 상구보리 하와중생의 삶을 살아갈 것을 다짐하게 된 것입니다. 힘들거라 여겼던 순례길은 도반들이 있어 평안한 여정이 되었습니다. 순례길 내내 감사함이 충만한 날들이었습니다.”

몇 년 전, 인간 붓다를 처음 읽었을 때, 부처님의 마지막 열반이 너무나 안타까워 춘다를 원망했습니다. 춘다의 공양을 말없이 그냥 드신 부처님도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순례 중 스님의 법문을 통해 의문은 풀렸지만, 쿠시나가라 열반당에 누워 계시는 부처님을 뵙자 안타깝고 가슴 아프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부처님의 열반상 앞에서 400여 대중의 우렁찬 발원문 낭독 소리는 여기저기서 새어 나오는 나지막한 흐느낌과 함께 열반당을 가득 메웠고 두 눈에 가득 고인 눈물로 발원문 글자들이 흔들렸습니다. 뒤에 기다리는 많은 사람을 위해 좀 더 오래 머물 수 없던 것이 무척이나 아쉬웠습니다.

▲ "부처님 편안히 계십시오, 이제 남은 일은 저희가 하겠습니다.” 쿠시나가라 열반당에서

이튿날 새벽 2시 30분, 천근만근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비비며 부처님이 나고 자라신 룸비니와 카필라바스투가 있는 네팔을 향해 달리는 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국경에서 대기시간이 길어졌지만 싸고 맛있는 길거리 음식이 지천으로 널려 있어 지루하지는 않았습니다. 위생적으로 보이지 않는 거리 음식에 배탈이 나면 어쩌나 하는 초반의 조바심은 네팔 만두 ‘모모’를 맛보자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다섯 감각을 잘 단속하지 못한 과보를 달게 받겠다는 대단한 각오를 하며 먹었던 기억이 나 피식 웃음이 납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정말이지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맛이었기에 잠시 수행자임을 잊었습니다. 참회합니다.^^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모모, 아, 또 먹고 싶다! 네팔 국경 변에서▲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모모, 아, 또 먹고 싶다! 네팔 국경 변에서

“인간 붓다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며 그분의 근본 가르침을 되새기며 후배 수행자로서 그분의 행로를 따라가고자 참가한 17일간의 일정 그리고 그 10대 성지 중 한 곳인 룸비니. 그분의 고뇌와 갈등 그리고 고행의 수행과 마침내 성도하고 승단의 기초를 놓으시고 열반하신 과정이 너무 뚜렷하고 극적이었기에 그분의 탄생지인 룸비니 순례는 상대적으로 가볍고 편안하게 다가옵니다. 아름다운 꽃동산으로 단장된 그곳에서 부처님이 탄생하시고 수많은 전생담의 신화와 같은 이야기는 사실의 여부를 떠나 우리에게 메시지를 제공합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 똑같이 소중하고 생명이 존엄하다는 그분의 가르침입니다. 현재 부처님이 비슈누 신의 여덟 번째 화신으로 힌두교에 흡수되어 있지만, 인도 사람들의 삶에 녹아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오늘날 인도와 전 세계에 퍼져 인간 평등과 생명존중 사상 그리고 진리와 자비에 대한 열망으로 어둠 속에 방황하는 인류에게 등불처럼 오늘도 빛나고 있습니다. 저도 수행자의 삶으로 그분의 길을 이어받아 열심히 나눔과 봉사의 삶을 살고자 합니다. 부처님, 뒷일은 저희에게 맡겨주십시오.”

룸비니를 회상하는 장민용 님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번집니다. 인도 북부에 바로 이웃한 이 작은 나라 네팔은 인도와 다르게 참 깨끗하고 정갈한 분위기였습니다. 오랜 고민 끝에 출가를 결심하고 모두가 잠들어 있는 시간, 칸타카를 타고 떠나셨다는 카필라바스투의 동문을 바라보며 칸타카의 터벅거리는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습니다. 이 동문을 떠나기 직전, 한 번쯤은 말을 돌려 서성이진 않으셨을까….부처님의 출가 당시의 심리를 마음대로 상상해 보며 부처님의 위대한 출가가 역사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사건인지 새삼 깨닫습니다.

순례 내내 가장 소중했던 도반, 송수신기. 카필라바스투에서▲ 순례 내내 가장 소중했던 도반, 송수신기. 카필라바스투에서

제30차 인도 성지순례의 마지막 성지, 상카시아는 마지막 성지라는 꼬리표만으로도 아쉬운 기억입니다. 최정림, 김보경 두 분의 나누기입니다.

“ 가사를 수하고 향을 들고 탑을 돌면서 마지막 성지라는 스님의 말씀에 아쉬움 살짝, 그래도 마지막까지 왔다는 안도감이 크게 들었습니다. 부처님의 첫 교화지였던 사르나트부터 수행, 성도, 탄생, 열반하신 성지들을 돌아보며 인간으로서의 붓다를 만나왔는데, 어느 안거 3개월간 천상의 마야부인을 위해 설법하시고 하강하신 곳으로 인간과 하늘을 잇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는 상카시아 성지에서 붓다가 오히려 더 인간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는 붓다의 신적인 행보가 석가족이나 힌두 종교인들에게 더 큰 영향을 준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700여 년이나 힌두사원으로 사용되었다는 상카시아 불탑을 올려다보며 형상은 무릇 허망한 것이라는 경전 말씀이 현실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성지순례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인간으로서의 위대한 붓다를 느끼게 해주신 법륜스님과 법사님들, 그리고 도반님들께 모든 것이 덕분임을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

“사실 제겐 순례길의 모든 곳이 좋았기에 어느 하나를 고르기는 참 힘이 듭니다. 저는 가장 마지막 성지인 이곳, 상카시아에서 비로소 부처님의 모든 발자취가 너무도 인간적인 모습으로 각인되었습니다. 태어난 지 7일 만에 엄마를 잃은 아기는 아버지와 이모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성장합니다. 그러나 아기에겐 절대적 존재임에 분명한 엄마의 부재와 어린 소년의 채워지지 않는 결핍감이 전해지자 그의 고뇌와 번민, 작은 생명마저 지나칠 수 없었을 섬세함이 느껴졌고 그렇게 성장하여 45년간 오직 중생을 위해 법을 설하고 생을 마치신 붓다의 삶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어 400여 명의 대중이 함께 부른 ‘어머님의 은혜’는 목이 메 차마 따라 부르지 못했습니다. 사르나트에서 잠깐의 명상을 통해 나 스스로가 귀한 부처임을 자각한 그 순간 또한 자비로운 부처님과 수많은 선지식, 2600여 년을 이어온 일체중생과 도반들의 은혜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이 모든 것이 인드라 그물에 연결된 빛나는 구슬임에 고작 ‘감사하다’란 네 글자로 마음을 표현할 수밖에 없는 언어의 한계에 아쉬울 뿐입니다. “

꿈의 나무, 수자타 아카데미 뒷 뜰에서...▲ 꿈의 나무, 수자타 아카데미 뒷 뜰에서...

16박 17일, 아니 밴쿠버 순례객들에겐 17박 18일이었던 인도 성지 순례의 대미를 장식한 마지막 숙소, 5성급 클락쉬라즈 호텔! 며칠간 온수가 나오지 않아 샤워는커녕 머리도 감지 못하던 여정에 찾아온 간만의 샤워기회를 놓칠 수가 없습니다. 쫙 ~!! 졸졸 흐르던 지하수가 아닌, 속 시원히 콸콸 쏟아지는 따끈한 물줄기가 피부에 닿는 순간, 영화 Gravity (그레비티)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무중력 상태의 우주를 미아처럼 떠돌던 주인공이 기나긴 여정 끝, 지구로 돌아와 중력을 느낄 때의 안도감… 너무 흔해 소중한 줄 몰랐던 것의 소중함을 깨닫는 그 찰나, 정말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달콤함도 잠시, 초콜릿을 외치며 따라오던 그 작은 아이의 먼지로 뒤덮인 까만 맨발이 떠오릅니다. 내가 누리고 있는 일상의 모든 것이 더는 예전과 같아 보이지 않는, 이 시선의 변화야말로 인도 성지 순례가 우리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스릴 넘치던 릭샤도 좋았고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모든 일정이 감동이었지만 그 아이에게 건네지 못한 주머니 속 초콜릿을 어떻게 전할 수 있을지…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어떻게 모두가 함께 행복해질 수 있을지, 이 자리에서 지금 바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글_김보경 희망리포터 (밴쿠버법당)
편집_박승희 (해외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