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발 4000미터가 넘는 알프스 산맥을 수행하듯이 트래킹 한다는 취리히정토회 김순조 님. 60살이 넘어서도 자연과 하나 되는 자유로움을 누릴 수 있어 늘 감사하다는 김순조 님의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취리히정토회와 멀지 않은 취리히 시내 전경
▲ 취리히정토회와 멀지 않은 취리히 시내 전경

알프스 산의 아름다운 설경처럼 희끗한 머리칼과 알프스 산처럼 넉넉하고 밝은 미소를 머금은 취리히정토회의 든든한 맏언니 김순조 님. 수행하는 마음으로 산을 오르다 보면 어느새 산이 내가 되고, 내가 산이 된다는 이 분의 자유로움이 궁금했습니다. 이런 자유로움을 갖기까지 스위스에 와서 정착한 지난 세월을 반추하면 그곳에는 적지 않은 고민과 번뇌의 흔적도 볼 수 있었습니다.

남편과 함께 설경 속에서
▲ 남편과 함께 설경 속에서

스위스에서 적응하기

저의 해외 생활은 1974년 파독 간호사로 파견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때는 모두가 힘든 시절이라 정신없이 일하고 적응하며 오로지 사느라 바빴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스위스 남편을 만나 다시 스위스에 정착한 지 어느덧 40년, 세월이 가는 것이 참 신기하네요.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고 한의사 자격증을 따서 남부럽지 않게 지냈다고 생각하지만 만만치만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스위스에 적응을 잘했다고는 하지만 자식 교육에 있어서 만큼은 남편과 충돌이 많았습니다. 특히, 밤늦게까지 딸아이가 돌아오지 않을 때면 우리 부부는 영락없이 언성이 높아졌습니다. 남편은 늦은 귀가를 허용을 하는 쪽이었고, 보수적인 저는 그것을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던 중 남편이 하루 14시간씩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서 한동안 남편과 떨어져 살게 되었습니다. 3년 정도 별거한 그 시간 동안 저도 한의사 공부를 시작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서로 소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저도 많이 지쳐갔습니다.

그때 저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한의사 실습을 위해 베트남을 다녀온 후에 딸아이가 쓴 편지를 한 통 받았습니다. 자기를 혼자 두고 어떻게 연수를 갈 수 있었냐고 묻더군요. 제가 어렸을 때는 대가족이어서 부모님이 계시지 않아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거든요. 하지만 아이는 달랐던 것 같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아이를 이해하고 남편을 이해하는 법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정신과 상담도 받고 조화로운 대화법에 대한 공부도 하면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본래 좋고 나쁨이 없다고 하는 것이 지금 보니 불법과 상당히 닮아 있습니다. '나도 옳고 남도 옳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참으로 유감스럽게도 저는 법륜스님의 가르침을 그 많은 어려움이 지나고서야 만났습니다. 그래서 요즘 법당에서 만나는 젊은 도반님들이 부럽기도 합니다. '나도 만약 어려운 시절, 스님을 조금만 일찍 만났다면 어땠을까'합니다. 남편, 딸아이와 힘들었을 때 싸우는 대신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다만 그대로의 존재로 볼 수 있는 법을 알았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정토회를 같이 다니고 있는 친동생 김말순 님과 함께
▲ 정토회를 같이 다니고 있는 친동생 김말순 님과 함께

정토회와의 인연

제가 법륜스님을 만난 것은 5년 전쯤입니다. 스위스에 같이 있는 제 동생이 '이거 한번 보라'고 보여준 동영상이 첫 만남이었죠. 스님의 구수한 말솜씨와 똑 떨어지는 화법이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밤낮으로 동영상을 보고 빠져들었습니다. 정토회와 인연을 맺고 나서 화도 많이 줄어들고 남편과의 관계에서도 유연해진 제 모습이 정말 신기합니다. 무엇보다도 제가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된 것이 가장 큰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남편과의 사이가 참 좋아졌습니다.

청소년 시절 가출했던 딸아이와도 소통할 수 있게 정토회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고등학교도 그만두고 아주 저렴한 곳에서 공동체 생활을 했던 딸을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아파서 지금도 눈물이 납니다. 내 욕심이 과해서 딸아이에게 부담을 많이 주었고, 딸아이는 그 기대치에 맞추지 못한 것이 자신을 더욱 힘들게 했던 것 같습니다. 방황을 하던 딸아이가 이제는 저와 눈을 맞추고 대화를 나누고, 심지어는 제 직업인 한의사에도 관심을 가지더군요. 그래서 지금 임신 중임에도 한의사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 참 대견합니다.

법륜스님을 만나고, <깨달음의 장>을 다녀오고, <인도 성지순례>를 다녀오면서 세상 보는 눈이 확 달라졌습니다. <깨달음의 장>을 다녀오면서 제가 불교와 정토회에 관심을 갖기 시작할 무렵, 현재 취리히정토회 부총무인 김옥선 님을 통해 스위스에서 <불교대학>을 시작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 무척 기뻤습니다.

경전반에서 목탁을 담당하고 있는 김순조 님
▲ 경전반에서 목탁을 담당하고 있는 김순조 님

저는 원래 종교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기복적인 신앙에는 더욱 거부감이 들었습니다. 심지어 정토회에 다니면서는 처음에는 예불을 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참 편안하고 좋습니다. 염불을 하고 목탁을 치면 내 마음이 어느샌가 편안해집니다. 특히 인도에서 새벽기도 예불을 드릴 때 그 감동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인도 성지순례> 기간 동안 최대한 간소하게 생활하고 남루한 숙소에서 여러 명이 공동생활을 한 것이 오히려 제게는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릴 수 있어 좋았습니다. 뜨거운 물을 받아와서 공동체가 차례차례 씻는 과정은 나를 자연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본래의 모습으로 회귀한다 하나 봅니다.

자연에서의 삶

보통 여름에는 수영, 클라이밍을 하고 봄, 가을에는 자전거, 등산 그리고 겨울에는 스키투어를 합니다. 저는 삶과 수행이 따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연 안에서 온전히 자연과 하나가 될 때면 더 바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입은 옷, 샌드위치 하나 그리고 물 한 병만 있으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습니다. 하기 싫은 어떤 것을 극복하는 것을 수행이라고 하듯이 자연 속에서 내 한계를 극복하고 이겨내는 과정이 아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해발 4000미터 알프스 고지 베르니나에 올라서
▲ 해발 4000미터 알프스 고지 베르니나에 올라서

어느 해 여름에 등산모임에서 스위스에서 가장 높은 산중에 하나인 해발 4000미터의 베르니나를 오른 적이 있었습니다. 막상 시작은 했는데 너무나 허기가 지고 지쳐서 중도에 여러 번 포기할 뻔했습니다. 베테랑인 사람들도 힘들어서 도중에 그만두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 마음을 다잡고 '끝까지 한번 해보자' 했더니 결국 끝까지 올랐습니다. 이런 경험들이 쌓이니 매일 아침 절을 하는 것에도 도움이 됩니다. 삶도 이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살다 보면 편한 일도 있고 어려운 일도 있는데 어려움을 극복하고 난 후에는 그 어려움이 결국에는 제 삶에 도움이 되었음을 실감합니다. 60이 넘은 나이에도 이렇게 자연 속에서 수행할 수 있는 제 삶에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생깁니다.

정토회에 다니며

정토회에 다니면서 저는 삶에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나를 사랑하고 남을 사랑하는 자세를 배운 것이 가장 감사합니다. 내 주위 사람을 이해해기 위해 먼저 나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 이런 것들이 내 삶의 기둥이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사실 말처럼 쉽지 않잖아요.

요즘은 제가 남편의 말에 많이 웃어주는 것이 보입니다. 이것 역시 정토회 덕입니다. 원래 말수가 적은 남편도 요즘은 저를 이해해 주는 면이 자주 보입니다. 예전에 서로 상처를 주며 싸웠던 때를 돌이켜보면 '그래! 이것이 수행의 덕이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제 화두는 아들과 아들 여자 친구와의 갈등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멕시코에서 곱게 자란 아들의 여자 친구가 저희집에 와서는 제가 보기에 예의없이 행동하는 것 같아 보이면 어느새 분별심이 올라옵니다. 이 과정에서도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불법을 알고 나니 제 삶과 자식의 삶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참회의 방법을 익히고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보다가도 실제 삶에서 또다시 내 집착에 끌려가기도 하고 그러다 결국 다시 한발 떨어져 보게 되는 연습을 하게 됩니다.

스위스 알프스 설경
▲ 스위스 알프스 설경


항상 밝은 미소로 법당 도반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는 김순조 님. 자연 속에서 한없는 자유를 느낀다 한 것처럼 앞으로의 삶 속에서도 온전히 자유로운 수행자이길 기원합니다.

글_권버미 희망리포터 (취리히법회)
편집_박승희 (해외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