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기운이 없어 눈이 안 떨어질 정도로 힘겨웠던 시절을 넘기고, 지금은 누구보다 행복한 마음으로 불교대학 팀장을 맡은 채명희 님의 이야기를 만나보겠습니다.

법당에서 가을불대생들과 수행맛보기(위에서 왼쪽이 채명희님)
▲ 법당에서 가을불대생들과 수행맛보기(위에서 왼쪽이 채명희님)

2014년 봄불교대학에 입학하다

“언니, 나 법륜스님 하는 정토불교대학에 입학원서 쓸 건데. 언니 것도 같이 쓴다?”
“응? 어, 어 그래.”
아는 동생의 느닷없는 말에 나는 얼떨결에 대답을 했고, 그렇게 2014년 봄불교대학에 입학을 했습니다. 뭔지도 모르고 입학한 봄불교대학에서 법륜스님의 법문을 들으면, “바로 저거야! 아, 그게 그런 거였구나” 하고 막혔던 의문이 풀리고, 속이 시원해져 일주일 동안 쓸 에너지를 듬뿍 얻어왔습니다. 일주일이 가볍고 행복했으니 얼굴이 밝아지고, 보는 사람마다 좋은 일 있냐고 물었습니다. 얼굴에 윤기가 난다고 물광 냈느냐고도 하고, 보톡스 맞았느냐고도 해서 불교대학 다니는 동안 참 행복했습니다.

암수술 그리고 투병 1년

1995년도에 작은 유아용품점을 시작했는데, 갑자기 집주인이 집을 팔아야 한다며 가게를 비우라는 바람에 1억원의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이자 갚기도 버거웠고 원금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힘이 들고 지친 화와 짜증은 고스란히 사랑하는 딸들의 몫이었습니다. 남편은 철부지처럼 늘 맛있는 것만 찾았습니다. 힘든 일주일이 지나면 일요일엔 너무 지쳐 잠이라도 실컷 자고 싶은데, 한주도 거르지 않고 시댁에 가야 했습니다. 시부모님은 일요일엔 당연히 당신들을 찾아와 한끼라도 해야한다고, 가지 않으면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힘이들어 울기도 참 많이 울었습니다. 가족 몰래 자다말고 가슴이 답답해 견딜수가 없어 베란다에 나가 숨죽여 울다울다 지쳐 들어와 잠든 적도 많았습니다. 어느날, 친구가 아침마다 삼배를 하면 하루종일 맘이 편하다고 하길래 삼배를 시작해보았습니다. 삼년 동안 빚 갚고 아이들 대학까지만 가르칠수 있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습니다.

그러다가 청천벽력 같은 암진단을 받은 것입니다. 2009년도에 유방암 수술하고, 1년 간 항암 8번, 방사선 27회를 했습니다. 머리는 다 빠지고, 입맛이 없어 먹지 못해 살은 빠질 때까지 빠지고, 아침엔 기운이 없어 눈이 안 떨어져 이대로 있다가는 굶어 죽겠다 싶었습니다. 혼자서는 물 한 모금 넘길 수 없었습니다. 너무 무서웠고 이제 7살된 막내딸 학교도 보내야 하는데 어쩌나하며 얼마나 울고 또 울었는지 모릅니다. 암치료 받는 1년 동안 지금껏 쉬지못한 보상이라도 받듯이 실컷 쉬었습니다. 병원도 원없이 다녔습니다. 늘 무서운 시부모님도 아프니까 조금 호의적으로 변했습니다. 암은 부처님이 매일 삼배한 공덕으로 쉬라고 내린 자비인 것만 같았습니다. 먹지못해 너무 힘이들었지만 마음은 한없이 행복했습니다.
그당시 한가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나는 정말 열심히 살았는데 나쁜 짓도 안했는데 왜 아픈걸까? 이게 벌받은 건가? 생각에 생각를 한 끝에 아, 자신을 돌보지 않고 스스로 괴롭히는 것에 하늘이 가장 큰 벌을 주는 것인가보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부터 나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싶었습니다.

봄불교대학생들과 산행중 새바위에서(앞줄 왼쪽 두번째 채명희 님)
▲ 봄불교대학생들과 산행중 새바위에서(앞줄 왼쪽 두번째 채명희 님)

새롭게 인생을 시작하게 해 준 <깨달음의 장>

불교대학에 열심히 다니는 것만도 내게는 큰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깨달음의 장>을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다고, 나는 다 알고 있다고 버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 도반님이 또 <깨달음의 장>이야기를 하길래 나는 너무 바빠서 갈수가 없다고 하니, 도반님 없어도 세상은 잘 굴러간다고 했습니다. 나는 더 이상 핑계를 찾을 수가 없어 신청을 했습니다.
<깨달음의 장>에 다녀온 이후 제2의 인생이 시작됐습니다. 원수 같았던 직장동료는 내 꼬라지를 가장 확실하게 말해주는 선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대부분 상대가 맘에 안 들어도 부딪히는 게 싫어 겉으로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나의 단점을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착한 병에 걸려 있었고, 누가 내게 잘못했다 하면 몇 날 며칠 잠도 못 자고 원망했습니다. 또 늘 화만 내고, 신경질적인 남편은 내 속이 얼마나 좁은지 알게 해 주는 부처님이었습니다.
나는 나 잘났다, 내가 옳다, 옆도 뒤도 보지 못하는 고집쟁이였습니다. 그 아집으로 사람들을 평가하고, 가족들을 괴롭히고, 나 자신을 괴롭히며 살고 있었습니다. 나는 남편과 아이들의 말을 늘 뒤통수로만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진심을 알 수도 없었습니다. <깨달음의 장>에 다녀온 이후로, 뒤통수가 아닌, 마주 보고 가족들의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남편의 반항

그렇게 나는 행복한 사람이 되어 가는데, 남편은 너무 많이 법당에 나간다고 무척 못마땅해했습니다. 나에게 화가 나있으니, 아이들에게도 늘 화내고, 신경질을 부렸습니다. 아이들까지도 내가 법당에 나가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남편이 말려도, 화를 내도, 내가 계속 법당에 나가니까, 남편은 마치 자학을 하듯 몸이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몸에 종기가 나서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혹시 나쁜 병은 아닐까, 너무 겁이 났습니다. 정말 법당에 그만 나가야 하나 갈림길에 섰습니다. 고민 끝에 나는 결심을 했습니다. 지금 여기서 그만두면 영영 돌이킬 수 없는 고집쟁이 남편으로, 다음엔 더한 방법으로 자신을 해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편에게 내가 필요할 때는 모든 것을 놓고 곁에 있으리라. 그러나 지금은 내가 없이도 남편은 혼자 걸어 다닐 수 있고,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니 나는 멈추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남편이 병원을 다녀온 그날도 태연히 법당에 갔습니다. 남편과 아이들을 두고 법당에 나가는 그것이 내게는 수행 그 자체였습니다.
그때 법당 다니기를 그만두었더라면 지금의 자유는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남편은 내가 법당에 가는 것을 싫어하고, 사이비라 비난하고, 마누라 때문에 절이 싫다 하면서 어깃장을 놓는 남편이지만, 그런데도 밉지는 않습니다.

어느 날 7살짜리 남자 아이가 자기만 혼자 두고, 금방 오겠다면서 나가서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엄마를 절대 보내지 않겠다고 옷자락을 잡고 온갖 방법으로 울고, 떼쓰는 아이가 보입니다. 그 아이는 바로 남편입니다. 이제는 금방 오겠다며 외출해서 늦도록 돌아오지 않아 그 아이를 두렵게 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돌아온다는 믿음을 주면서 법당에 갑니다. 다독여주고, 혼자 있어도 꽤 자유롭고, 행복하다고 알려줍니다. 늘 슬프고 겁먹은 아이들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지고, 조금씩 행복해져 가는 모습을 봅니다.

지난해 11월28일 결혼기념일에 남편과 함께
▲ 지난해 11월28일 결혼기념일에 남편과 함께

“불교대학 갈래?”
“응, 그래.”
할까 말까 하다 그냥 해보자 하며 가볍게 입학한 공덕으로 저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큰 선물을 받았습니다. 나는 지금 누구보다 행복합니다. 이 행복의 씨앗을 널리 널리 바람 타고 퍼트리고 싶습니다.

글_장영근 희망리포터(청주정토회 제천법당)
편집_하은이(대전충청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