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분연히 떨쳐 일어났던 3.1운동 100주년 기념일 아침! 수행, 보시, 봉사의 모든 면에서 귀감이 되는 정토행자에게 수여하는〈정토행자 대상〉을 수상한 이문희 님을 만나러 갔습니다. 해운대법당으로 들어가니 고운 회색 법복 빛깔처럼 희끗한 머리가 무척이나 어울리는 이문희 님이 희망리포터들을 반겼습니다. 추위를 녹이라고 내어주는 따뜻한 감잎차 한 잔을 마시며 이문희 님의 소중하고 값진 수행담을 들어봅니다.

“2018년, 정토행자 대상 수상자는 해운대 정토회 이문희 님입니다!!”

“제가 좀 울보라서 눈물이 나네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고자 스님과 법사님들께서 원을 세우고 가시는 모습이 너무 감사했어요. 그 길에 줄이라도 서서 힘이 되어드리자는 마음으로 정토회와 함께 한 지 20년이 되었습니다. ‘괴로움이 없는 사람,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문구를 보고, 제 인생의 문제가 다 풀리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은 ‘공유와 연대가 실현되는 새로운 문명’을 만들고자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 상은 지금까지 제가 정토회와 함께했던 시간에 대한 격려와 부족함을 채워가라고 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부족하지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2018년 12월 02일, 정토행자 대상 수상식에서 이문희 님
▲ 2018년 12월 02일, 정토행자 대상 수상식에서 이문희 님

우연히 시작된 인연

1남 3녀 중 장녀인 저의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아버지는 생활규율은 엄격했지만 보수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저희와 자주 영화도 보고 등산도 함께 데리고 다녔습니다. 아버지는 사회 정의와 열린 사고, 사회에 대한 거시적인 가치관에 관한 책 이야기와 다양한 지식을 많이 들려주고 저희의 생각을 묻곤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사춘기 시절 책 읽기를 좋아하고 삶에 대한 의문이 많았습니다. 내성적인 성격이었지만 아버지의 활동적인 면이 잠재되어 있어, 후에 스님의 가르침을 온전히 받아들여 정토회의 다양한 활동을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결혼은 꼭 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는데, 제가 혼기를 놓칠까 염려하는 부모님의 권유로 선을 보고 결혼을 했습니다. 다행히 저를 아껴주는 따뜻한 남편을 만났습니다. 남편은 사업적으로 경제적인 굴곡이 많을 때도 집에 와서 힘든 내색 한 번 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결혼 5개월 만에 남편은 해외파견 근무를 떠나고 다시 5개월 후 큰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시댁 어른들도 따뜻한 분들이었지만 제가 자란 환경과 다른 시댁의 문화에 적응하며 아들과 둘이 지내는 7년 동안 이런저런 일들 속에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두 아들은 건강하게 잘 자랐고 저는 아버지께 배운 대로 그리고 저의 방식대로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저의 교육기준에 따라 아이들이 뭐든 시키는 대로 공부도 잘하고 잘 따라와 주기를 바랐지만 6살 터울의 작은아들은 예민하게 반응하며 힘들어했습니다.

서초법당에서 불교대학 특강수련 기념사진 속 이문희 님(둘째 줄 맨 왼쪽)
▲ 서초법당에서 불교대학 특강수련 기념사진 속 이문희 님(둘째 줄 맨 왼쪽)

1999년, 불행하진 않았지만 특별히 행복하다는 생각도 없이 가까운 절에 다니며 지내던 중 우연한 기회에 라디오에서 법륜스님의 법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너무 재미있어 그날부터 법문 시간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법문을 들으며 스님을 직접 뵙고 싶던 차에 동래법당에서 하는 금강경 강의 포스터를 보게 되었습니다. 너무 반가워 지인들과 함께 해운대에서 동래법당까지 법문을 들으러 다녔습니다. 그땐 천일결사 입재를 문경에서 할 때인데, 뭔지도 모르면서 표충사 철야 신앙대회, 황룡사지 철야 정진 등 스님이 하라는 것은 다 따라갔습니다.〈실천적 불교사상〉, 〈근본불교〉 등 불교대학 수업이 너무 재미있어서 공부한 내용을 노트에 다시 옮겨 적어가며 참 열심히 했습니다.

스님의 즉문즉설 테이프를 반복해 듣던 중에, 내 속내는 따로 두고 좋은 사람 소리 듣고자 양손에 떡을 쥐고 있는 내 모습을 보게되었습니다. 내 마음이 편한 쪽으로 입장을 정리 하니 삶과 관계가 가벼워졌습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필요한 것은 제 욕심대로 지시하고 가르치는 엄마가 아닌, 아이의 힘든 마음을 안아주는 엄마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줄 세웠던 사다리를 눕히니 있는 그대로 아이들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도반들과 함께 불교대학 홍보 중인 이문희 님(왼쪽에서 두 번째)
▲ 도반들과 함께 불교대학 홍보 중인 이문희 님(왼쪽에서 두 번째)

이타적인 삶의 소중함을 느끼다

불교대학을 졸업하면서 첫 소임으로 환경 담당을 맡았습니다. 그 당시 정토회는 실천적 환경 활동에 집중되어 있을 때였는데 외부 강사를 초빙해서 강좌를 열었습니다. 총 7강으로 진행된 ‘생태적 삶, 단순하고 느리게’라는 환경강좌에서 사회를 보며 무농약 농작물을 재배하는 곳, 쓰레기소각장도 견학했습니다. 7강이 진행되는 동안 저는 환경 관련 자료도 찾아보고 《불교와 환경》등 정토 총서를 찾아 읽었습니다. 그러면서 삶에 대한 기준이 바뀌게 되고 환경의 소중함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환경 강좌가 진행되면서 비닐 쓰지 않기, 비닐 없이 사는 삶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육교 위에서 파는 삼베 주머니를 보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영감을 얻어 방수 천과 그물망 천을 사서 비닐 대신 쓸 수 있는 방수망, 투명망 견본을 도반들과 함께 만들었습니다. ‘환경지킴이 아줌마’ 퍼포먼스를 통해 사용을 장려하는 홍보도 하고, 전국 법당에서도 방수망, 투명망을 제작해서 판매하게 되었습니다. 작은 소임이었지만 환경을 살릴 수 있는 대안을 찾고 환경 공부도 하며, 요청이 오면 환경강좌도 하러 다니면서 재미있게 활동했습니다.

이 소임을 통해 드디어 내 개인의 문제에서 벗어나 내가 사는 세상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삶을 보는 관점과 아름다운 삶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물질적으로 잘 사는 것보다 자신의 자리에서 열심히 일하는 분들과 이타적인 분들의 삶이 더욱 소중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2001년 11월 제4기 생태학교 환경워크숍에서 진행자로 참여하고 있는 이문희 님(가운데)
▲ 2001년 11월 제4기 생태학교 환경워크숍에서 진행자로 참여하고 있는 이문희 님(가운데)

2006년 해운대 해수욕장 빈 그릇 백만인 서명 캠페인에서 이문희 님(모금함 뒤)
▲ 2006년 해운대 해수욕장 빈 그릇 백만인 서명 캠페인에서 이문희 님(모금함 뒤)

누가 불사를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부처님 법 공부와 정토회 활동을 통해 저는 단순하고 자유로운 삶이 무엇인지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남편의 사업이 어려워지게 되어 저는 일을 하기 위해 1년 정도 법당 소임을 쉬게 되었습니다. 쉬는 중에도 법륜스님의 법문을 테이프로 들으며 늘 함께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수련을 다녀온 한 도반에게서 해운대에 법당이 생기면 좋겠다는 스님의 말씀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 얘기를 들은 다음 날, 이 좋은 법문을 더 많은 사람들이 들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습니다. 불사 담당자도 아니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부동산 사무실을 다니며 법당으로 적합한 장소 대여섯 군데를 찾아보고 나서 동래법당에 연락을 했습니다. 이후 스님과 법사님들이 다녀가고 지금 이곳이 해운대법당 자리로 결정되었습니다.

요즘 불사는 불사 자리가 찾아지면 불사팀이 와서 공사를 하지만 그땐 달랐습니다. 일하는 분 공양과 참도 돌아가며 준비했습니다. 전기하는 도반이 와서 전기공사하고, 동래법당의 많은 도반들이 주말에 와서 직접 벽의 이물들을 벗겨내고 합판을 나르고 청소를 하며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800개나 되는 방석은 도반들이 일일이 재봉틀로 누비고 솜을 넣어 만들었고, 전국의 많은 도반들의 보시와 봉사 공력으로 해운대법당이 완성되었습니다. 노출 기둥이 있어 스님이 '여기 불상 모시면 좋겠다'고 한 자리가 지금 목불상이 모셔진 자리입니다. 해운대법당 개원 때까지 책임지고 불사를 맡았던 도반이 “이문희 보살은 왜 해운대 법당을 알아봐가지고...”라고 말해 한바탕 웃기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해운대로 575 국제빌딩 9층에 위치한 부산 2호 법당 해운대법당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해운대로 575 국제빌딩 9층에 위치한 부산 2호 법당 해운대법당

2005년 문경 천일결사 입재식에서 해운대법당 도반들과 함께(제일 오른쪽)
▲ 2005년 문경 천일결사 입재식에서 해운대법당 도반들과 함께(제일 오른쪽)

해운대법당이 생기다

2004년도 3월, 드디어 부산의 두 번째 법당인 해운대 법당이 개원했습니다. 법륜스님은 법당에 100일간 머물며 화요일, 목요일 아침, 저녁으로 법문했습니다. 그때 법문을 들으려고 온 사람이 대략 주간은 350명, 저녁은 250명 정도였습니다. 초기에는 활동가들도 없어 공양 준비를 못 해 며칠간 500인분 김밥을 주문해 공양했습니다. 그렇게 하니 돈도 많이 들고 쓰레기도 많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법문 들으러 왔다가 마음 내어준 분들과 함께 '공양 준비조'를 만들었습니다. 많은 인원을 수용해야 하는 엄청난 일이었지만 그만큼 많은 분들이 마음을 내주었습니다. 그리고 회의며 일을 잘 처리해가는 공동체 실무자들의 모습을 옆에서 보며 많이 배웠습니다. 100일 법문을 마치자 스님과 공동체 실무자들의 지원이 끝나게 되었고 해운대 법당 책임자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스님은 저에게 해운대 법당 총무를 맡아 해보라 했습니다.

총무 할 상황이 안된다는 저에게 밥 안 굶으면 해보라는 스승님 말씀, 그 순간 왜 그리 눈물이 났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는 지인들에게 전법 할 때 '몇억을 준다 해도 이 법 만난 기쁨과는 바꿀 수 없다'고 했던 제 말에 대한 책임이라도 지라는 듯이 법당이 개원할 때 쯤 남편 사업은 부도가 났습니다. 불사를 위해 유수스님과 통도사 암자를 둘러보러 간 날이 집이 경매로 넘어가는 날이었습니다. 집이 경매로 넘어가 월세로 이사하는 중에 해운대법당 개원도 하고 화요일, 목요일 법회 시간을 피해 이삿날도 수요일로 맞췄습니다. 그간 부처님 법과 스님의 가르침을 통해 흔들림 없이 지금의 일은 단지 일어난 일로 '내가 받아 갈 인연이면 기꺼이 받아 가겠다'는 마음으로 받아 안으니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나를 포장하고 있던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경험은 어디에도 구애받지 않고 당당하게 주인으로 살아가는 힘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일하던 가게도 접어두고 스승님 말씀을 온전히 받아 해운대법당 총무 소임을 맡았습니다.

그 당시 저는 '단칸방이라도 온 가족이 함께 살고 밥을 먹을 수 있으면 되지 않나'하는 생각으로 스님 말씀처럼 밥을 굶지않는 생존이 기준이었습니다. 군대에 있던 큰아들과 사춘기이던 작은 아들의 힘든 마음을 안아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은 후에 나누었습니다. 돌아보면 몸은 바쁘고 해야할 일은 늘 많았지만 무념상태인가 싶을만큼 편안하게 받아 정성으로 최선을 다한 시간이였기에 감사합니다.

통일의병 활동 중인 이문희 님(오른쪽)
▲ 통일의병 활동 중인 이문희 님(오른쪽)

도반의 힘으로 해내다

개원 초기에는 활동가들이 없었습니다. 금강경 강의를 마칠 즈음, 조금씩 거들어 주던 분들이 공양간을 관리하고, 몇 안 되던 불교대학 학생들이 부서 일을 봐주고, 컴퓨터를 다룰 줄 아는 지인이 사무와 도서 관리를 함께했습니다. 지금은 정토회에 오면 처음에는 배우고 적응한 후 활동가로 나아가지만, 그땐 정토회를 만나자마자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원칙을 통해 순수성을 지켜나가는 것과 대중들의 적극적인 동참을 끌어내는 과정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4년간의 총무 소임을 하며 아침부터 저녁부 마칠 때까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했습니다. 힘들 때면 때론 옥상이나 공양간에서 멀리 바다를 바라보며 혼자 울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힘들고 부족한 가운데에도 여러 도반들의 도움으로 사람들을 챙기고 받아주며 안고 가는 제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총무 소임 한 지 4년이 지나고 연임을 해야 했지만 할 수가 없었습니다. 법당일 뿐만 아니라 집에 가서도 완벽하게 준비해 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에다 약한 체질의 몸을 소홀히 하다 보니 2달 정도 하혈을 했습니다. 그러고 나니 말소리도 나오지 않았고, 대구로 회의를 하러 가는 데 기차가 달리는 저항도 못 견딜 만큼 기력도 떨어졌고 몸 상태는 나빠져 있었습니다.

해운대법당 부처님오신날 행사에서 이문희 님
▲ 해운대법당 부처님오신날 행사에서 이문희 님

왼쪽부터 정토행자 포교상 수상(이문희 님), 복지상, 환경상 수상(해운대 정토회)
▲ 왼쪽부터 정토행자 포교상 수상(이문희 님), 복지상, 환경상 수상(해운대 정토회)

주인 된 마음으로

총무 소임을 내려놓고 나니 바깥 활동도 없고 한가해졌습니다. 법당 안의 공양간 설거지나 주인 없는 일, 손이 가지 않아 비어있는 일을 하고, 총무 소임을 하면서 쌓인 경험이 있어 요청받는 일들을 도와주었습니다. 돌이켜보니 소임이 있을 때나 소임을 내려놓았을 때나 늘 주인의 마음으로 함께 했던 것 같습니다.

7차 년도에 정토회에 대의원제도가 처음 생겼습니다. 모두 문경으로 모였는데 정토회가 대중 중심으로 넘어가는 것에 대해 법륜스님께서 크게 기뻐하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 당시 대의원 제도가 처음 생겼기에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체계가 잡혀있지 않아서 지역회의와 지부회의를 많이 했습니다. 많은 시행착오와 모두의 노력으로 이제는 점점 대의원 제도도 체계를 갖춰 가고 있습니다. 대의원은 정토회가 지향하는 방향으로 잘 가도록 돕고, 알려주고, 채워주는 역할과 최고 결정 단위로서 정토회원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현장에서 부딪히며 알게 된 사실을 잘 전달하는 것이 역할입니다.

저는 8차 년도에 해운대 정토회 대표 겸 지부 대의원회 의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대의원들과 같이 논의하고 공유하며 서로 다른 의견을 조율하면서 정토회가 추구하는 지향점을 따라 하나씩 이뤄나가는 보람이 컸습니다. 주어지는 대로 하고, 없으면 찾아서 잘 쓰였던 시간이었습니다.

도반들과 JTS 거리모금 활동 중인 이문희 님(뒷 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 도반들과 JTS 거리모금 활동 중인 이문희 님(뒷 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내 인생의 나침반, 정토회

제가 소임을 하면서 일과 개인적 감정이 부딪힐 땐 늘 정토회의 방향을 나침반 삼아 생각했습니다. 일을 할 때도 내가 수순하고 있는지, 상대를 존중하고 있는지 돌이켜보았습니다. 해야겠다는 각오로 해온 것이 아니라 소임이 일상에 녹아들었던 것 같습니다. 소임을 하다 보면 힘들 때도 있지만 쉴 땐 쉬더라도 다만 끈을 놓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하라면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왜?’라는 의문으로 그 일이 지향하는 가치는 무엇인지 늘 생각해봅니다.

처음부터 ‘괴로움이 없는 사람, 자유로운 사람, 단순하고 가볍게’ 이 문구가 너무 좋았습니다. 내가 좋아서 이런저런 소임을 했는데, ‘과연 수행적 관점으로 지금까지 해왔던가?’ 하고 되돌아보게 됩니다. 그래서 정토대상도, 이렇게 수행담이라고 이야기하는 순간에도 부끄럽습니다. 대단한 각오로 온 것이 아니라 스승님과 정토회의 지향점이 너무 좋고 도반과 함께 가는 그 길이 좋아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살기 좋은 세상,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 가는 수행 공동체! 세상에 이런 순수한 단체 하나쯤은 우리 아이들 세대를 넘어 100년이 지나도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리고 이 길이 부처님 안 계신 지금까지 지켜져 온 것처럼 오래도록 지켜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불평, 불만보다는 건의와 제안을 많이 하는 편입니다. 돌아보면 제 삶에 그토록 의미 있고 알차게 산 순간들이 있어 참으로 보람차고 행복합니다.

“제가 좀 차갑게 보인다고들 얘기해요. 아는 사람들은 따뜻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사람들에게 좀 더 따뜻하게 느껴지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희망리포터들과 함께(왼쪽부터 노희동, 허승화, 이문희, 조영희, 최인정 님)
▲ 희망리포터들과 함께(왼쪽부터 노희동, 허승화, 이문희, 조영희, 최인정 님)


20년의 세월 동안 부처님과 법륜스님의 말씀에 수순하고 중생의 요구에 수순하며 봉사의 삶을 살아온 이문희 님! 그저 좋아서 온 길이라는 그 말씀이 소임마다 힘들다 하며 받는 우리에게 나침반이 되고 가르침이 되었습니다. 고운 얼굴과 다르게 이문희 님의 굵은 손마디가 어느 훈장보다 더 값지고 소중해 보였습니다. 이문희 님의 소망대로 지금도 어디선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잘 쓰이고 있을 그 마음이 오래도록 따스하게 느껴집니다.

글_최인정 희망리포터(동래정토회 동래법당)
속기_허승화 희망리포터(사하정토회 사하법당)
녹취_조영희 희망리포터(해운대정토회 기장법당)
인터뷰_노희동 희망리포터(해운대정토회 반여법당)
편집_방현주(부산울산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