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취리히법당에는 일 년의 반 이상을 세계 이곳저곳에서 그물에 걸리는 법이 없는 바람처럼 자유로운 삶을 사는 도반이 있습니다. 바로 취리히법회의 맏언니 이혜경 님인데요, 정토회를 통해 알게 된 바라지 봉사가 인생의 가장 큰 전환점이었다는 이혜경 님의 수행과 봉사 이야기입니다.

법회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김옥선 부총무와 함께 (왼쪽에 이혜경 님)
▲ 법회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김옥선 부총무와 함께 (왼쪽에 이혜경 님)

어린 시절

저는 말 잘듣는 착한 아이였습니다. 부모님을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원하는 대로 해드렸다고 생각했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울산에서 부산으로 사는 곳을 옮겨 혼자 독립해서 살았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니 그냥 제가 원하는 대로 산 것 같습니다. 그렇게 60살까지 달려왔습니다. 저 자신을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제 잣대로 가족들에게 요구만 하며 살았네요. 착한 가족들이 나한테 맞춰줘서 인생이 제가 원하는 대로 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산 거였어요. 참 미숙하고 어리석었던 것 같습니다.

스위스로 오기까지

부산에서 학교를 나와 강원도 병원에 취직했던 무렵이었습니다. 1970년대 친구들이 독일로 간호사 일을 하러 간다는 소식을 듣고 저도 같이 원서를 써서 보냈습니다. 그 후 3년 동안 독일에서 간호사로 일하면서 처음으로 이곳저곳 여행도 해 볼 수 있었습니다. 26살에 한국에 돌아와 보니 제 나이가 많아 시집을 못 간다 하시더라고요. 여자 나이 스물여섯이면 날아가는 새도 안 쳐다본다고요. 그러니 아무에게라도 시집을 가라는 집안의 권유에 못 이겨 한국에 다시는 안 돌아온다는 각오로 1978년에 한국을 떠났습니다.

한국 영사관도 없던 너무나 낯선 나라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에서 1년 정도 병원 근무를 했습니다. 그러던 중 지인을 통해 스위스에 좋은 취업 기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리비아 업무가 끝나자마자 바로 스위스 취리히 근처에 있는 주크(Zug)시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 병원에서 남편을 만났습니다. 작업치료사 인턴을 하고 있었는데 서로 여행을 좋아하는 공통점이 있는지라 금방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 사람 소원이 당시 호주로 이민을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전문치료사 3년 공부를 했고 저도 마취과 전문간호사 과정을 밟으며 차근차근 준비해 갔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을 거쳐 호주로 이민을 가려고 계획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한국 국적으로는 여러 나라를 거치는 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류상의 절차를 편리하게 하고자 1984년에 결혼을 했습니다. 요즘도 아이들에게 '엄마는 미국 가려고 결혼했어'라고 농담처럼 얘기하곤 합니다.

다음 해에 회사를 다 정리하고 이민 여행을 가기 직전 아이를 가진 것을 알았습니다. 미국에서 여행하고 한국에서 아이를 낳기 위해 6개월 정도 머물렀습니다. 아이가 3개월이 넘어가면서 이민수속을 마치고 홍콩을 경유해서 호주로 들어가려고 계획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인생이라는 게 참 알 수 없는 것 같아요. 2주 정도 머물기로 한 홍콩에서 아이가 밤낮으로 울며 아팠습니다. '아이를 데리고 외딴곳에서 지내는 것은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구나!'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제 몸 하나 믿고 달려온 인생이었습니다. 그 일로 직장 잡기도 쉽지 않은 외국에서 경제적인 독립에 대한 두려움도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냥 스위스로 돌아가자고 남편을 설득했습니다.

수행법회에서 목탁을 치고 있는 이혜경 님
▲ 수행법회에서 목탁을 치고 있는 이혜경 님

스위스로 돌아와 22년을 살았던 집

스위스에 돌아오자마자 일을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일과 육아를 병행 할 수 있었습니다. 남편이 사흘 일하고 저는 이틀 정도 일하는 공동 육아로 아이들을 직접 키웠습니다. 아이들은 부모가 직접 돌봐야 한다는 생각은 남편과 같았습니다.

맨 처음 스위스 왔을 때는, 집을 먼저 찾아야 하나 직업을 찾아야 하나 막막했었습니다. 일단 친구 집에 얹혀살면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집을 얻었습니다. 100년이 넘은 실 공장 노동자들 숙소로 만들어진 건물이었습니다. 허름했지만 그만큼 자유가 보장된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내열이 전혀 안돼서 첫겨울을 나는데 올리브 오일이 얼 정도로 몹시 추웠습니다. 그곳에 1년 동안 거의 무료로 사는 조건으로 세입자가 되었습니다. 세 가족이 공동으로 사는 주거 형태여서 아무나 드나들 수 있도록 문이 항상 열려있었고 난롯불로 난방을 하고 화장실도 적어서 힘들었지만, 친구들이 항상 방문해서 대가족 같은 생활을 했습니다. 그렇게 그곳에서 22년을 살았습니다. 물론 힘든 생활은 했지만, 아이들이 행복하게 잘 자라줘서 지금도 그 추억이 깃든 집이 고마운 마음입니다.

독재자 같은 엄마

첫째 아이는 정말 우리 도내에서도 유명한 아이였습니다. 한번은 고등학교 3학년 때에 5개 정도 점수가 미달이어서 한 학년을 다시 다녀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너무 어이가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그 아이를 저는 질책만 했습니다. 그 아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물어볼 생각은 꿈에도 생각 못 했었습니다. 반면 남편의 경우 '한 학년을 더 할 수도 있지'라고 편하게 대해줬는데 저는 무조건 미달된 점수를 다시 시험을 쳐서 다음 학년으로 가라고 단호하게 선을 그었습니다. 대학교도 그만 다니려는 아이에게 제 생각만을 내내 강요했습니다. 예술 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 아이였는데 여성은 무조건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제 생각을 늘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교육대학을 우선으로 전공하고 거리예술은 부전공으로 합의를 보았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아이와 갈등은 극으로 달해서 사이가 무척 안 좋아졌습니다.

제가 얼마나 오만하게 살았나 지금은 참회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남편과 그 어떤 문제로도 절대로 아이들 앞에서 싸우지 않겠다고 다짐을 해서 화를 내며 언쟁한 적은 없었다는 점입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아이들과 남편이 제 말을 다 들어준 것 같습니다. 독재자 같은 엄마였습니다.

세계 일주 중인 둘째 딸과 사위 그리고 사부인과 함께 (가장 오른쪽 이혜경 님)
▲ 세계 일주 중인 둘째 딸과 사위 그리고 사부인과 함께 (가장 오른쪽 이혜경 님)

바라지를 하며 참회의 마음을 내다

이제까지 살면서 사는 게 힘들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 제 나이 60살이 되던 해에 남편이 암 진단 6개월 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살면서 한 번도 제 맘대로 안되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나니 '이런 일이 왜 저한테 일어났나' 하며 원통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생전 처음으로 분노라는 감정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한 감정이 드니까 그전에 법륜스님의 법문에서 들었던 〈깨달음의 장〉이 떠올랐습니다. 그 시절 제게는 한 가닥 희망 같았습니다. 〈깨달음의 장〉을 다녀오면 해결이 될까 하고 막연하게 다녀왔습니다. 하지만 깨닫기는커녕 저는 오히려 반대였습니다. 나중에 집에 돌아와서 6개월 정도 지나니 그제야 참회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지도법사님께 용서를 비는 마음으로 정토회에 찾아갔는데 법사님이 바라지를 한번 해보라고 권하셨습니다. 그것을 계기로 정토회와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평소 일을 해본 적이 없어서 바라지를 하면서 처음으로 일하는 것에 대한 마음을 배웠습니다. 정성을 다해 음식을 만드는 마음 그리고 나누기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제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얼마나 좋은 환경에 있었나 하는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돌아보니 아이들에 대해서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페루사람과 결혼해서 페루에 사는 첫째 아이와도 사이가 많이 좋아졌습니다. 작은 아이는 지금 남편과 1년 넘게 자전거로 세계 일주를 하고 있습니다. 여행 중에 임신을 했는데, 어제는 자전거를 30킬로 넘게 타서 힘들다고 전화가 와서 걱정이 됩니다. 하지만 그냥 무리하지 말라고 당부만 했습니다.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봐주고 항상 칭찬해 주려고 합니다. 돌아가신 남편 살아생전에 칭찬 한번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이 속이 쓰릴 정도로 마음이 아플 때 가 있습니다. 그 마음을 아이들에게 참회하고 고마워하는 마음으로 돌리려고 합니다. 지금은 자유롭고 편안합니다.

제가 여행을 원래 좋아했지만, 제 남은 인생도 자유롭게 인연 닿는대로 다니려고 합니다. 이번 8월에는 순례길을 걷고, 10월에는 호주, 11월 말에는 말레이시아에서 아이를 낳는 둘째 딸을 도와주러 갑니다. 집에 있든 다른 어느 나라, 어느 곳에 있든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여행은 새로운 것을 경험할 수 있어서 즐겁습니다. 무엇을 먹고 어디에서 잘지 열려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편안함을 줍니다.

이란 여행 중에 (가장 오른쪽 이혜경 님)
▲ 이란 여행 중에 (가장 오른쪽 이혜경 님)

정토회의 의미

저는 정토회의 힘으로 사는 것 같습니다. 법문을 듣고 바라지를 하면서 내 생각을 순화하는 원동력으로 삼습니다. 내가 정토회를 만나지 않았다면 죄인 줄도 모르고 얼마나 어리석게 살았을까 하는 생각에 감사하고 참회하는 마음이 듭니다. 아이들에게 늘 제 생각을 다그치고 강요했던 일들을 떠올리며 지금이라도 많이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니 오히려 제가 편안해지는 것을 그때는 몰랐습니다. 아이들도 자연스레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남편이 너무나 큰 사랑을 주고 간 것에 고맙습니다. 남편은 죽는 날까지 자기 삶을 잘 살다 갔습니다. 본인의 장례식을 계획하고 '재를 어디에 뿌려주오' 라고 유언도 남겨줘서 가능한 한 남아있는 저를 배려해 주었습니다.

2019년 법륜스님 즉문즉설 취리히 강연 자원봉사 중 (오른쪽 이혜경 님)
▲ 2019년 법륜스님 즉문즉설 취리히 강연 자원봉사 중 (오른쪽 이혜경 님)

함께 가는 도반들에게 하고 싶은 말

불평을 안 하고 살아도 되는데 너무나 많은 투정을 했습니다. 그렇게 안 살아도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준 곳이 정토회입니다. 바라지는 나이가 많아서 이제 더는 갈 수 없지만, 저를 위해서 계속 수행을 해나갈 생각입니다. 그러면서 나날이 나도 편해지고 남도 편해지겠죠. 수행하는 것 자체가 좋습니다. 법문을 들으면서 아직도 호기심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내가 살아있음을 자각할 수 있어 고맙습니다. 제가 살아 움직일 수 있는 원동력인 것 같아요. 나를 자각하는 삶을 살도록 해 준 정토회에 감사합니다.

천일결사 후 취리히 도반님들과 (가장 왼쪽 이혜경 님)
▲ 천일결사 후 취리히 도반님들과 (가장 왼쪽 이혜경 님)


취재 에필로그

인터뷰를 하는 중 내내 든 생각은 이혜경 님과 따님들이 참 닮아있구나 하는 것입니다. 신기하기도 하고 그래서 절로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또 여행을 떠나시는 이혜경님은 늘 새털같은 가벼움만을 챙겨 떠납니다. 이번 인터뷰는 평소 여행을 갈망하지만, 준비과정에 지치고 두려움에 미리 포기하기 일쑤인 저에게 큰 용기를 주었습니다. 새로운 환경이 두렵고 짐스러운 것이 아니라 다만 즐거울 수 있다는 시선, 어쩌면 여행뿐 아니라 인생을 살아갈 때에도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시선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자유롭게, 그러면서도 무소의 뿔처럼 의연하게 가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다시금 새겨봅니다.

글_권버미 희망리포터 (취리히법회)
편집_박승희 (해외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