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내 희생이 투자되어 내일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다. 비록 지금 불행하지만 내일은 행복할 거야!‘라며 지금의 행복을 포기해야 내일이 행복한 줄 착각하고 살아오다가 불교대학을 다니면서 삶이 달라졌다는 송도 법당의 강종윤 님을 만나봤습니다.

불교대학 졸업 갈무리 때 소감문 발표하는 강종윤 님
▲ 불교대학 졸업 갈무리 때 소감문 발표하는 강종윤 님

후쿠시마 원전 사고, 물고기가 떡밥을 물다.

32살이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거의 무일푼으로 시작했지만 조금씩 성장하여 15여 년 만에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일본 거래처 소개로 한국 수산물 가공품을 수입하고 싶어 하는 일본 식품 유통 업체를 만났습니다. 전량을 일본에 팔아줄 테니 공장을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했습니다. 일본에 독점 공급권을 담보한 조건이고 초기 자본금 일부도 무상으로 투자하겠다는 좋은 조건이었습니다.
그때 상황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일본의 수산물 시장이 아주 불안정한 상태였습니다. 한국산은 중국산보다는 위생적으로 좀 더 안전하다는 일본인들의 인식이 높다고 들었고 망설일 이유가 없었습니다. 땅 짚고 헤엄치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위험성은 없어 보였고 다시는 못 올 기회인 것만 같았습니다.

드디어 내 꿈이 이루어지는구나.

기존 사업을 아내에게 맡기고 새로운 제조업에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내가 만든 제품을 가득 싣고 컨테이너가 공장문을 나가는데 '드디어 내 꿈이 이뤄지는구나!' 하며 가슴 벅찼습니다. '그래 탁월한 선택을 한 거야! 앞으로 조금만 더하면 10만 불 수출탑도 탈 수 있을 거야!' 장밋빛 미래만 생각하며 우쭐했습니다.
그러나 그 꿈은 3년도 안 되어 깨지고 말았습니다. 파트너 회사가 중국에 무리한 투자를 해서 도산에 가깝게 추락하였습니다. 수출 대금이 지연되는 일이 잦아지고 끝내는 회사가 파산되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당장 판로가 막혀 공장 가동률은 떨어지기 시작했고 창고에 쌓인 재고는 처리할 길이 막막한 상황이었습니다. 다른 판로를 개척하려고 여러 곳을 찾아다녔지만, 그 분야에 경험이 적었던 나로서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공장 인건비, 운영비는 계속 들어가고 적자는 순식간에 크게 불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텅 빈 공장에서 혼자 울다.

회사를 정리해야 했습니다. 창고에 있는 제품들은 냉동식품이기 때문에 유통기한 문제로 계속해서 가지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모두 무상 또는 헐값으로 관련 업체에 넘겼고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 설계해 만든 설비들은 해체해서 고물값으로 처리했습니다. 공장을 짓는 데는 그렇게 오래 걸리더니 해체하는 데는 순식간이었습니다. 꼭 모래성이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것 같았습니다. 아끼던 기계들이 다 철거되던 날, 참담함에 깜깜한 텅 빈 공장에서 혼자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살던 아파트도 정리하고 조그마한 아파트로 이사를 했습니다. 넓게 지내다 좁은 집으로 가니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가 거실에서 들렸습니다. 내 숨소리와 생각이 아내나 아이들에게까지 들릴 것 같았습니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했습니다. 다행히 아이들은 다 커서 큰애는 군대에 가고 둘째는 알아서 지방대에 입학하여 학교 기숙사로 들어갔습니다. 좁은 집이었지만 아내와 둘이서 그럭저럭 지낼 만했습니다. 어차피 신혼 때는 단칸방에서도 살았는데 이 정도면 넓은 편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가을불교대학 도반들과 통일 수업 후 강화 보문사에서 300배 정진(맨 뒷줄 가운데)
▲ 가을불교대학 도반들과 통일 수업 후 강화 보문사에서 300배 정진(맨 뒷줄 가운데)

내 인생의 전환점을 찾다.

회사를 정리하던 시점에 EBS 라디오 방송국 ‘책 읽어주는 라디오’라는 프로그램에서 법륜스님의《인생수업》을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묵직하고 구수한 목소리의 성우가 “잘 물든 단풍이 아름답듯이 늙음이 비참하지도 않고 초라하지도 않다. 순리대로 잘 늙어가야 한다.”라는 구절을 낭독하는데 큰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서점에서 책을 사서 읽고 인터넷으로 스님을 찾아보다 즉문즉설을 알게 되어 출근하면서 매일 듣기 시작했습니다. 즉문즉설을 들으며 스님께 질문 잘못했다가는 본전도 못 찾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스님의 즉문즉설은 내 인생에 큰 전환점을 만들어줬고 이를 통해 힘든 시기를 슬기롭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스님 말씀을 교훈 삼으면 다시 실패하지 않겠지.

공장을 정리하고 아내에게 관리를 맡겼던 본래 사업에 다시 전념하기 시작했습니다. 몇 년간의 빈자리가 컸지만 다행스럽게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고, 다시 한번 힘을 모아 새로운 다른 사업에 도전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우연히 동네 사거리에 붙어있는 불교대학 현수막을 보았습니다.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일주일에 딱 한 번 하는 수업이어서 부담 없이 등록했습니다. ‘이제 스님 말씀을 들으며 차분하게 재도전해보자! 현명하신 스님 말씀을 교훈 삼아 다시 시작하면 실패하지는 않겠지!’ 생각했습니다.

법륜스님과 첫 만남

경주 남산순례는 신라 불교에 대한 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그저 불교대학의 한 행사 정도로만 인식되었습니다. 불교대학 입학해서 처음 하는 공식 행사여서 서먹서먹한 마음이었습니다. 밤 12시에 만나서 4시간 넘게 버스를 타고 경주에 도착해서 묘수법사님의 안내로 유적지 설명을 들었습니다. 이어서 처음으로 법륜스님 실제 모습을 뵙게 되었습니다. 스님 말씀처럼 TV 화면에서 막 나온 것 같았습니다. 수많은 불교대학생들을 웃기고 울리고 감동을 주는 스님의 능력에 절로 고개가 숙어지는 첫 만남이었습니다.

나도 이젠 불자가 되었구나.

지금까지 살면서 절에 가도 대웅전을 들어가 본 적이 없고 절을 한 적은 더더욱 없었던 나에게〈문경 특강 수련〉은 의미가 큰 수련이었습니다. 문경수련원의 대웅전에서 의미도 모르고 처음 하는 절을 그것도 300배를 했기 때문입니다. 300배를 마친 후에는 ‘아~ 나도 이젠 불자가 됐구나, 누가 당신의 종교가 뭐요?’하면 나는 이제부터는 불교도입니다라고 말해야지‘ 하는 벅찬 감동이 올라왔습니다.

깨달은 날 홀로 라면을 끓여 먹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시고 수행하던 도반들에게 깨달음을 전하기 위해 길을 떠나셨듯이, 〈깨달음의 장〉을 나오며 빨리 가서 이 깨달음을 아내와 송도법당 도반들에게 전하고 싶었습니다. 아내는 전화로 수고했다 맛있는 거 해놓을 테니 빨리 오라고 했습니다. 휴게소도 안 들르고 전속력으로 집에 갔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자고 있었습니다. 맛있는 거는 고사하고 먹다만 밥 한 공기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라면을 끓여 먹어야 했습니다. 기가 막혔지만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 게 몇 시간도 안 지났는데 화를 낼 수도 없고, 첫날부터 부처님이 나를 시험하나 싶었습니다.
여태까지 결혼하고 자식 낳고 돈 벌어 집을 사고 늙어서 편안한 노후의 삶이 가장 이상적인 삶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 않은 삶은 이상한 삶, 불행하거나 특별한 삶이라고 생각했는데 〈깨달음의 장〉을 다녀온 이후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법륜스님이나 법사님들은 평생을 저렇게 잘 사는데, 꼭 결혼하고 집을 사고 자식이 있어야 그게 올바른 삶이라고 볼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생을 깨우치고 구제하기 위해 수행하고 봉사하면서도 저렇게 웃으면서 사는 걸 보고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봉사도 수행의 하나

선유동 봉사활동, 거리모금, 불교대학 홍보, 옥수수 모금 활동 등 가능한 참여할 수 있는 행사는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나는 것은 처음 참여한 선유동 봉사입니다.
선유동에 연수원을 리모델링하는데 일손이 부족하니 도와줄 수 있냐고 부총무님이 물었습니다. 흔쾌히 승낙하고 새벽같이 만반의 준비를 하였습니다. ‘재주는 없지만, 드디어 나도 쓰일 때가 되었구나! 무슨 일이든 시키면 열심히 해야지!’ 단단히 마음먹고 새벽같이 일어나 독립투사처럼 선유동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일은 시작하지 않고 현장 사무실에 빼곡히 모여앉아 마음 나누기를 하였습니다. 한 분 한 분 일어나 마음 나누기를 하니 40~50분이 훌쩍 넘어가 버렸습니다. 한술 더 떠 너무 열심히 일하면 옐로카드를 준다고 하더니 끝내 벌로 노래까지 불러야 했습니다. ‘몇 시간을 어렵게 마음 내서 왔으면 좀 더 많이 보탬이 되고 땀을 좀 흘리면서 일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일거리는 저렇게 널려있는데 이게 뭐 하는 거야, 귀한 시간 내서 왔는데,...’하는 분별심이 올라왔습니다.
몇 주 뒤에 한 번 더 갔을 때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면서 정토회에서의 봉사와 마음 나누기는 단순히 일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수행에 하나라는 것을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거리모금 때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모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한 명이라도 더 많이 불교대학에 들어오게 할까?’ 하며 결과를 더 중요시하는 수행자이긴 합니다.

거리모금(뒷줄 가운데)
▲ 거리모금(뒷줄 가운데)

성장의 비밀, 마음 나누기

불교대학을 다니면서 가장 힘들었지만 나를 크게 변화시킨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마음 나누기였습니다. 도반들도 처음 마음 나누기할 때 힘들어했다는 것을 나중에 들었습니다. 들추고 싶지 않은 과거나 나의 단점을 생각해서 꺼내 얘기하라고 하니 ‘굳이 그렇게 해야 하나, 불교는 나 혼자 조용한 곳에서 나를 돌아보고 참선을 하며 깨달음을 얻는 거 아닌가?’ 하는 불편함이 올라왔습니다. 어떤 때는 할 얘기가 없는데 하라고 하니 당황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대충 지어내는 말로 때울 때도 있었습니다. 도반이 얘기할 때는 ‘왜 저렇게 생각하지?’하며 반대의 마음이 올라올 때도 있었습니다.
마음 나누기 횟수가 점점 늘어나면서 도반 한 분 한 분의 마음 나누기가 들렸습니다. 진심이 느껴지고 진짜 어떤 깨달음이 온 것 같은 느낌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불교대학 담당인 박영희 님의 진심을 담은 마음 나누기는 크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굳이 내가 뭔가를 숨길 필요성을 못 느끼기 시작하니 마음 나누기가 편해졌습니다. 잘하든 못하든 길게 하든 짧게 하든 상관없이 다른 도반에게도 수행이 된다는 것을 알고부터는 진심을 담아 진실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졸업 갈무리, 댄스 공연의 추억

불교대학의 또 하나의 추억은 졸업 갈무리 날 댄스 공연을 한 것입니다. 공연 연습은 저녁에 수업 끝나고, 집에 가기도 바쁜데 남아서 춤과 노래를 맞춰 연습했습니다. 한 번은 평일에 모두 하루 휴가를 내고 강화도에 통일 정진 수업을 겸해 소풍을 하며 연습을 하였습니다.
노력에 비해 댄스 공연은 만족스럽지 못했지만, 준비하며 서로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의견을 모아 결론을 내는 과정에서 자신의 생각보다는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는 도반의 모습도 봤습니다. 불법을 만난 도반들이기에 가능한 일이라 생각이 들었습니다. 같이 수행하는 도반으로 끈끈한 공동체 의식을 가질 수 있는 기억에 남는 일이었습니다. 박영희, 남산원, 김숙경, 하미애, 신호철, 이세직, 안민, 김현정 님 모두 고맙습니다!

가랑비에 옷 젖으니 더 젖어 들고 싶다.

처음 적당히 가볍게 다닐 거라고 시작한 정토회 생활은 점점 내 생활 속으로 깊숙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1년 새에 내 옷은 완전히 젖어버렸습니다. 그냥 벗고 나가면 그만인데 나가질 못하고 그냥 더 젖어 들고 싶습니다.
언젠가 법당에 어떤 행사를 놔두고 아내와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여행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여행 내내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이렇게 구경하고 먹고 마시고 노는 거와 법당에서 법문 듣고 봉사하는 거와 어떨 때 나는 더 행복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아내와의 여행이 나빴던 건 아니지만 꼭 그런 것만이 행복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날씨 좋은 날에 조용히 앉아 법문 듣는 것도, 거리에 나가 모금함 들고 소리쳐 외치는 것도, 땀 흘려 절하면서 통일을 기원하는 것도 기쁨이고 행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아내와 여행을 가도 좋고 화창한 날에 어두운 법당에서 땀 흘리며 절을 해도 좋고 그것이 불법을 놓지 않는 행동이라면 어떤 것이든 당당하게 행동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불교대학에 다니며 나는 병을 얻었습니다.

그동안 나는 '오늘의 희생이 투자되어 내일의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다. 비록 지금 불행하지만, 내일은 행복할 거야'라며 지금의 행복을 포기해야 내일이 행복한 줄 착각하고 살아왔습니다.
내 주변 환경은 불교대학을 다니기 전과 후 별로 변한 게 없습니다. 여전히 갚아야 할 은행 대출금은 남아있고, 업체 간의 경쟁은 치열하고, 조금 더 출세한 친구의 잘난체하는 꼴을 봐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고통이 아닌 수행하는데 원림으로 삼는 도구로 생각하겠습니다. 내일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해도 그것은 하나의 사건이고 자연의 이치라고 생각하겠습니다. 그것이 기쁜 것, 슬픈 것, 그 어떤 것도 아니고 다만 그 일일 뿐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불교대학을 다니며 나는 새로 병을 얻었습니다. 화가 나지 않는 병! 걱정하지 않는 병! 영원히 낫지 않고 계속 이 병에 걸린 채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9-9차 천일결사 입재식(뒷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
)
▲ 9-9차 천일결사 입재식(뒷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 )

글_강종윤(인천정토회 송도법당), 황정의(인천정토회 송도법당 희망리포터)
편집_고영훈(인천경기서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