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초법당에는 수많은 활동가들이 봉사를 합니다. 오늘은 서초법당의 지장팀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봉사하는 구언련 님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17년이 넘게 봉사하면서도 늘 불평 없이 나보다는 남을 먼저 챙겼던 구언련 님에게 올 봄 비로소 빙그르 웃을 만한 ‘내 인생의 업식을 뚫고 나온 재미난 이야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구언련 님께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요?

불교대학 홍보하고 있는 구언련님
▲ 불교대학 홍보하고 있는 구언련님

죽음을 두려워하는 내가 지장팀에서 봉사를

구언련 님은 지장팀에서 활동하기 전에 10년 동안 서초법당 공양간 봉사를 했습니다. 현재 서초법당 지장팀 봉사 소임은 지난 8월로 만 6년이 됩니다. 지장팀은 영가(돌아가신 분)들을 위한 천도재를 지내는데 고인이 된 후 49일 동안 총 7번의 재를 올립니다. 현재는 다섯 영가를 위한 재가 진행되기 때문에 법주, 목탁 바라지, 차 바라지 하는 세 분이 한 팀이 되어 매일 법당에 나와서 재를 올립니다.

지장팀 일을 시작할 때 영단 앞에 서는 것이 매우 두려웠습니다. 7 살 때 내가 무척 따르던 친오빠가 광산의 갱도가 무너지는 사고로 돌아가시고 11살 되던 무렵 아버지마저 돌아가셨습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가족을 먼저 떠나보내는 경험을 한 후 죽음은 나에게 두려운 것, 외면하고 싶은 것이 되었습니다. 영단 앞에 서는 것이 무척이나 두렵고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상대를 힘들게 하면 안 된다’는 생각과 ‘상대의 부탁을 잘 받아주는 업식’ 덕분에 무섭고 두려운 마음이 들었지만, 지장팀 봉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처음으로 화를 내던 날, 무덤 밖으로 나와 우뚝 선 날

공양간 일도 힘든 일이었지만 특별히 내 업식을 거스르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올 봄, 대상포진이 올 정도로 몸이 너무도 힘들었던 그 날도 어김없이 법당에 와서 재를 지냈습니다. 그때 함께 하던 지장팀 도반의 “힘들다!” 고 했던 한마디가 내 마음에 ‘턱’하고 걸렸습니다. 내 평생 한 번도 남에게 내보지 않았던 화를 냈습니다. ‘당신만 힘드냐? 나도 힘들다!’ 는 반감이 생기면서 화를 냈는데 그 순간,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내 몸이 힘든 걸 좀 알아달라는 신호를 보내며 대상포진이 왔는데 그것도 무시한 채 나도 여기서 봉사를 하고 있는데 자기만 알아달라는 도반에게 갑자기 화가 난 것입니다. 화를 내면서도 “어? 내가 나를 처음 받아주네!” 하면서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 다음날 새벽 참회 기도 때 ‘내가 힘들면서도 지금까지 한마디 말도 못 했었구나. 나도 힘든 거였구나’ 하면서 엄마가 떠올랐습니다.

어렸을 때 엄마의 기억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남편 없이 혼자 사는 엄마가 안쓰러웠는지 동네 아저씨가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가라며 중매를 서려고 우리 집으로 왔습니다. 그때 엄마는 “내 목구멍은 편할지 모르나 자식들은 어떻게 하냐” 하셨고 그 아저씨는 그냥 벌떡 일어나 가버리셨습니다. 그때 내 나이 11살이었는데, 그 광경을 보고 “나는 절대 엄마를 울게 하는 자식이 되지 않겠다. 내가 엄마를 위해서 살아야지!” 하면서 결심을 했고 그 이후 어떤 힘든 일이 생겨도 일체 불만이 없이 엄마를 도와서 아빠의 역할도 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 습관이 지금 이 나이까지 지속되었고 한 번도 남에게 불만을 표시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잘 받아주었습니다.

처음으로 화를 내면서 ‘아! 나도 힘든 사람이구나! 남만 먼저 챙길 줄 알았지 정작 이 나이 되도록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픈지 나를 챙기지 못했구나’ 이 마음을 알게 되면서 그 순간 아버지 무덤 속에 갇혔던 내가 걸어 나와 푸릇푸릇 잔디가 덮인 무덤 위로 우뚝 서는 듯했습니다.

맨 뒷줄 오른쪽 두 번째 구언련 님
▲ 맨 뒷줄 오른쪽 두 번째 구언련 님

정토회에 처음 온 날, ‘나도 숨통이 좀 트이겠구나’ 생각했던 날

결혼 후 20년 동안 나는 바깥 외출 한 번을 제대로 못해보았습니다. 남편은 내가 사회생활을 하는 것도 혹은 친교 모임을 하는 것도 일체 못하게 했습니다. 그 흔한 문화 센터에 가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상대를 힘들게 하지 않겠다는 업식 때문인지 이 부분도 받아들이면서 남편에게 순종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가슴 한편에 뭔지 모를 얇은 납덩어리 하나가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은 답답함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그것이 뭔지를 몰랐습니다. 그러던 중 지인의 소개로 법륜스님을 알게 되었고 홍제동 시절 정토회의 반야심경 강의를 처음 듣게 되었습니다. 첫 강의 ‘조견오온개공’ 이란 구절을 듣고 그 뜻은 모르겠지만 내가 여길 오면 숨통이 좀 트이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습니다. 정토회를 가려고 하면 남편은 불같이 화를 내면서 반대를 했습니다. 언어폭력도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계속 반대를 하면서 정토회를 못 가게 했으나 지인이 소개해준〈깨달음의 장〉에 이혼도 각오한 채로 남편에게 일방 통보를 하고 한달음에 가버렸습니다.

그 당시에는 핸드폰도 없고 호출기(삐삐)만 있었던 때라〈깨달음의 장〉을 마치고 집에 돌아갔더니 남편이 거의 초죽음 상태로 있었고 가족들은 난리가 나 있었습니다. 남편은 내가 정토회 가는 것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바로 나를 묶어놓을 요량으로 상의도 없이 식당을 시작해 버렸습니다. 식당은 새벽 4시부터 준비를 시작해 밤 12시에 끝나서 꼼짝없이 정토회는 나가지 못하고 식당 일에 6년을 매달렸습니다.

식당을 문 닫은 후, 갑자기 주어진 시간에 막막해하면서 집에서 지내다가 이러다 내가 폐인이 되겠다 싶었습니다. 그 찰나에 생각났던 단어가 ‘정토회’ 였습니다. 수소문해보니 정토회가 홍제동에서 서초동으로 옮겨와 있었습니다. 2002년 12월 27일에 다시 정토회를 오게 되었는데 그다음 주 1월 4일 입재식1이 있다는 안내에 거부를 안 하고 받아드리는 업식으로 지금까지 수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집 밖으로 나가는 걸 극도로 싫어했던 남편에게 정토회를 가는 것이 좋아 보일 리가 없었습니다. 남편의 다혈질적이고 거친 언어폭력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내가 남편 말을 안 듣고 거역한 거니 남편이 뒤집어지고, 언어폭력 하는 것은 당연하네, 남편은 욕도 거칠고 맘도 거칠지만, 뒤 끝 하나는 없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때리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으로 매일 정토회에 나왔습니다. 집을 나갈 때와 들어올 때 하는 잔소리 폭풍만 참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공양간 10년 봉사를 했습니다. 매일 법당에 나오면서도 ‘아, 내가 또 내일 법당에 나올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교차했습니다.

입술이 파랗게 떨리던 남편을 안아주었습니다.

지장부의 봉사를 하면서 남편과의 문제가 해결되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그날도 남편이 임대 문제로 나를 심하게 다그쳤습니다. 또 입에 올리기도 심한 언어폭력을 하면서 나를 힘들게 했습니다. 그때 나는 ‘그냥 기다리면 되는데 저렇게 난리 칠 게 뭐람’ 하면서 무심코 남편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파랗게 변하면서 떨리는 입술과 손발까지 떨면서 격하게 화를 내는 남편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간 한 번도 화난 남편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습니다.

저렇게 발악하면서 힘들게 화를 내고 있는지는 전혀 몰랐습니다. 나도 모르게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화내고 있는 남편을 와락 껴안으면서 “뭐가 그리 두려운 거냐” 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뻣뻣하게 힘이 들어간 남편의 온몸의 긴장이 탁 풀리는 것이 느껴졌고 그렇게 무섭게 화내던 다혈질 남편이 울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은 “나도 얼마나 무서운 줄 아냐“ 고 말 했습니다.

’아 이 사람도 두렵고 이렇게 악을 쓰는 건 나름 살려고 했던 행동이었구나. 이런 마음도 모르다니 나는 마누라도 아니구나. 당신을 받쳐주고 맞춰 준다는 게 순전히 내 식대로였구나‘ 마음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습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그런 뜨거운 마음은 자비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시어머니는 남편이 5살에 되던 해에 돌아가셨습니다. 남편이 어렸을 때 ‘엄마가 장사를 나가 밤늦게 돌아오시다가 밤길을 헤매다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상여를 쫓아가다 어둑어둑할 때 집으로 돌아왔다는 기억을 저에게도 가끔 얘기했습니다. 남편은 5남매의 장손으로 늘 집안 대소사를 잘 챙기고, 일 처리도 똑 부러지게 잘했기에 그런 두려움을 늘 갖고 살았는지 몰랐습니다. 그런 업식으로 내가 바깥으로 나가는 걸 그렇게 두려워하고 극도로 싫어한 거였는데 나는 불법을 그렇게 오래 만났는데도 전혀 연관을 못 지었던 것 같습니다.

그날 이후 남편은 여전히 화를 내기는 하지만 화내는 횟수가 줄어들었고 한껏 치켜 올라갔던 말이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왜 안 와! 왜 이제 와!” 했던 말이 “어디쯤 왔어?”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잔소리 하는 사람은 싫은데 다행히도 잔소리를 안 하는 사람이랑 살았네. 내가 구언련 덕분에 살았다.”

활짝 웃고 있는 구언련 님
▲ 활짝 웃고 있는 구언련 님

엄마와 아버지 그리고 불법

어머니는 2018년, 100살 되시는 해에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비로소 알았습니다. 늘 내가 엄마를 위해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내가 엄마라는 커다란 바위 뒤에 숨어서 기대어 살았구나’를 오롯이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와의 이생의 인연이 그리 길지 않았지만, 힘이 들 때면 농부였던 아버지가 나에게 좋았던 느낌으로 스쳐 지나갑니다. “쌀 한 톨 그 작은 알갱이가 그냥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벼를 보면서 이 낱알 한 알 한 알이 작아 보여도 일 년을 기다려야 타작을 할 수 있다.”라고 말씀해 주셨던 아버지가 생각납니다. 가끔 스님을 뵈면 좋았던 기억의 아버지처럼 보입니다.

올해 내 나이 66살이 돼서야 비로소 불법이 무엇인지를 느낍니다. ‘그동안 나를 살피지 않고 살았구나’ 알아차립니다. 지금은 하루하루가 너무 감사합니다. 정토회를 왔다 갔다 하면서 불법을 알았다고 착각했습니다. 어린 시절 누에고치를 빠져나오려고 하는 나방이 하도 힘들어 보여 누에고치 실을 가위로 잘라 줬더니 금세 날아오르다 이내 푹 떨어져서 죽는 모습을 보고 스스로 나오도록 놔둘 걸 하며 죄책감을 느꼈던 적이 있습니다. 이제야 내가 내 힘으로 누에고치를 빠져나온 것 같습니다..

‘불법이란 참으로 묘합니다. 불법은 생활 도처에 있는데 불법 찾아 쫓아 다닐 필요가 없구나. 앙굴리마라는 죽을 때 깨달았다는데 나는 더 늦지 않게 깨달아서 참 다행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요즘엔 유머도 늘었습니다. “왜 늦었냐?”고 남편이 말하면 “차도 한잔 안 사주니 법당에서 차 한 잔 마시고 왔다”라고 웃으면서 넘어가기도 하고 “나도 아프다!”라고 표현도 해 봅니다.

구언련 님을 인터뷰하면서 ‘한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하나의 우주와 조우하는 것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담담히 자신의 얘기를 꺼내면서도 부끄러워하던 별 같은 구언련 보살님. 함께 정토행자로 나아갈 수 있는 것, 나도 언젠가는 해탈과 열반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구언련 님과의 유쾌한 대화를 마무리합니다.

불교대학 홍보중인 구언련 님(오른쪽)
▲ 불교대학 홍보중인 구언련 님(오른쪽)

글_박문구 희망리포터(서울정토회 서초법당)
편집_권지연(서울제주지부)


  1. 정토행자 천일결사를 백일 단위로 나누어 매 백일 마다 함께 모여 수행을 점검하고, 새롭게 백일기도를 시작하는 의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