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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회를 비판하다.7

수행자(구도자) | 2017-03-14 18:30:06 | 조회수 646

 

정토회를 비판하다.7  

 

 

 법륜 스님의 일화를 통해 바라본 깨달음의 한계와 가능성 

 

 

<삶의 전부일 수도, 별 것  아닌 것일 수도 있는 깨달음> 

 

 

<1979년 어느 날 아침, 법륜은 낯선 남자들에 의해 양팔을 잡히고 눈이 가려진 채로 어디론가 끌려갔다. 그리고는 어딘지도 모를 지하실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얻어터지기 시작했다. 눈이 보이지 않는 공포와 두려움에 더하여 이유조차 알지 못한 채 법륜은 모진 구타와 고문을 당하기 시작했다. 자연히 법륜의 내면에서는 울분과 분노가 그 끝 없이 치솟아 올랐다.  

 

 

그간 머리로는 부처님의 법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철석같이 믿어왔으나, 이제 타인에 의해 무지막지한 고문을 당하게 되자 살심이 크게 고개를 처들었다. 할 수 만 있다면 고문하는 자들을 가만두지 않겠다. 요절내고야 말겠다.는 것이 당시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법륜의 이러한 심경 변화와 무관하게 고문은 계속되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고문자들은 법륜에게 그들이 정한 답을 요구해왔다. 법륜은 그 답을 말할 수 없었다.  

 

 '내가 한 일도 아닌 일을 했다고 할 수 없고, 내가 모르는 일을 안다고 할 수도 없다.' 

 

 

 는 것이 고문자들의 요구에 법륜이 침묵할 수 밖에 없는 까닭이었다. 고문자들은 고문의 강도가 약하기에 법륜이 진실을 토로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는지 더욱 더 강하게 고문을 가했다. 물고문으로 법륜의 숨이 거의 넘어갈 지경이 되자 법륜의 입에서는  

 

"관세음보살" 

 

소리가 그 자신도 모르게 자연히 터져나왔다. 

 

"으아악~아아악~"
"으으으~으아악~"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아악~으아악~"
"관세음보살~관세음보살"
"아아악~으악~으윽~"
"관세음보살~관세음보살~관세음보살..." 

 

 법륜은 생명을 위협하는 고문이 불러온 고통과 두려움, 생명이 경각에 달해 있다는 극심한 공포로 비명을 내질렀다가 다시 관세음보살을 부르곤 했다. 법륜이 관세음보살을 부르며 정신이 아득해지는 어느 순간, 법륜의 뇌리를 스치는 영상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개구리 한 마리가 죽어가며 네 다리를 달달 떨고 있는 모습이었다. 어린 시절 시골에 살던 법륜은 개구리를 잡으며 놀곤 했다. 싸릿대를 가지고 논두렁의 개구리를 딱딱 때리면 개구리가 단번에 사지를 떨며 죽었다. 이렇게 개구리를 잡아서 그 주둥이를 줄줄이 꿰어 스무 마리 서른 마리씩 잡아와서는 닭 모이로도 주고 다리를 잘라 구워먹기도 하였다. 이제 법륜 자신이 죽음의 공포로 사지를 달달 떠는 모습이 바로 그 개구리가 죽어가며 네 다리를 달달 떨고 있는 모습과 똑같았던 거였다.  

 

 

 바로 이 순간, 법륜은 뉘우치고 또 뉘우치는 마음이 밀려왔다. 이것은 단순히 이해를 한다거나 미안하다거나는 정도를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다. 법륜이 그렇게나 많은 개구리를 때려 죽였으니 이제 그 자신이 고문자들에 의해 때려 죽임을 당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는 것을 법륜은 마음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또, 고문하던 수사관들이 고문을 하고 쉬는 시간에 자기 딸의 대학 입시를 걱정하는 얘기를 듣고 그들도 한 아이의 아버지이자 가장으로서의 모습을 느끼게 돼 충격을 받았다. 고문자들도 법륜과 똑같이 누군가를 그 어떤 존재를 때려죽이는 것을 그저 당연히 할 뿐이고 그들의 업무니 명령권자의 지시에 충실히 따를 뿐이라는 것을 깊히 인정하게 되었다. 이렇게 법륜이 크게 뉘우치고 한 마음 돌리니 살고자 하는 발버둥이 저절로 멈추어졌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거짓말같이 고문이 멈췄다. 훗날 법륜은 자기를 고문했던 사람에게  

 

 "대체 왜 그때 고문을 멈추었냐?" 

 

 고 물었다. 그러자 이런 답변이 돌아왔다. 

 

 "당신이 살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고 저항을 놓아버리는 모습을 보니 '아, 이 놈은 정말 모르는구나'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느닷없이 낯 선 사람들에 의해 어디론가 끌려가 인신 구속을 당한 것도 억울한데 말로 쉽게는 표현조차 못할 모진 고문을 당하고 목숨까지 내놓을 처지에 놓이면 그 당사자는 그 상처와 분노, 고통과 두려움에 얽힌 기억을 평생을 가도 쉽게는 치유하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잘 하면 폐인이 되고, 극단으로 치달으면 자기 목숨을 스스로 끊거나 그 분노를 주체 못해 엄한 사람 여럿 때려잡을 만한 일이 법륜 스님의 삶에 일어난 것이지요. 법륜 스님은 고문자들을 증오하고 복수하는데 인생을 저당잡히기는 커녕, 되려 그 자신의 삶을 돌이켜 반성하고 참회하여 어리석음을 뉘우쳤습니다. 한 마음 크게 돌리는 행위를 통해 폐인이 되거나 엉뚱한 사람 여럿 잡을 큰 화를 피해가게 된 겁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 사건은 생애 한번 찾아올까 말까한 무지막지한 큰 화라 볼 수 있으나, 법륜 스님은 이 기회를 통해 화를 복으로 전환하였으니 이것이야 말로 부처님의 가피라 볼 수 있겠습니다.  

 

 

이 일화를 통해 다음의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돈이 생기고 떡이 생기고 지위가 생기고 여자나 남자가 생기고 명예가 생기는 것만이 부처님의 가피가 아니라, 법륜 스님처럼 절체절명의 순간에 한 생각 돌이킬 수 있는 것이야 말로 부처님의 가피로구나.  

 

 

이 한 생각 돌이킴으로 인해 <자기도 죽고 남도 죽는 살생의 업>에서 벗어났으니 최소한 이  기준에서 법륜 스님은 운명에서 벗어났구나.  

 

 

머리로는 불법이라는 게 뭔지 이해했을 법륜 스님이 '고문' 사건이라는 자기 삶을 통해 그것을 이제 심득, 체득하게 되었고 이 경험은 법륜 스님에게 인생의 등불이 되고 신념이 되었겠다.  

 

 

아는 것 많은 그 명석한 법륜 스님도 절체절명의 순간에 딱 떠오른 것은 <그 찰라에 그 무엇>이었으니, 단 하나의 이치라도 제대로 내 것으로 심득 체득하는 것이 생사의 순간에서는 정말 중요한 것임을 새삼 느낄 수 있다. 이 관점에서 보면 <간화선>도 <절대적으로 옳기만 한 방편>이 될 수는 없을 지언정 <하나의 길>은 될 수 있겠구나.  

 

 

법륜 스님이 무아법, 인연과보법, 무상법, 연기법 등을 스스로 깨우친 이는 아니지만, 부처님께서 발견하신 불법을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면 부처님의 가피라 부를만한 일이 삶 속에서 가능하겠구나.  

 

 

이 일화와 <법륜 스님이 불교에 입문하게 된 일화>, <법륜 스님과 서암 큰 스님의 L.A 사찰에서의 일화> 를 연계해서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됩니다. 

 

 

'법륜 스님이 몇 차례에 걸쳐 깨달았어도 그 내용이 그때 그때 다르구나.' 

 

 

'가만, 법륜 스님은 불심 도문 스님의 '이놈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는 놈이 대체 바쁘기는 왜 바빠?' 라는 말에 '어? 정말 그러네?'라고 정신이 멍해질 정도로 이미 한 차례 깨친 바가 있잖아? 그 때 깨달은 내용과 이 때의 깨달은 내용은 또 다르구나.'  

 

 

'이미 한번 확연히 깨쳤어도, 그게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는가 보구나. 그래서 거울처럼 늘 닦고 또 닦아나가야 하나 보다'?  

 

 

'이러한 큰 깨우침이 이미 있었어도 서암 큰 스님이 익히 아는 사실을 법륜 스님은 모르고 있었으니, 한번 크게 깨우친 자라도 자기만 모르는 세계란 여전히 존재하는 거구나.' 

 

 

'정말 그런가? 정말 그렇네. 상이 군인이 법륜 스님을 찾아왔을 때도 법륜 스님은 자기가 기성 불교 및 지도자들과는 달리 굉장히 양심적이라는 고정관념이 철저히 깨지면서 큰 깨우침을 얻은 바 있지 않은가?' 

 

 

'북한 동포들이 굶어 죽어가는 현실을 법륜 스님도 처음에는 믿으려하지 않았었지. 이 순간에도 법륜 스님만 모르는 세계는 여전히 존재했지. 정말 그렇구나. 이 몇 가지 사실로 판단하건대 깨달음의 내용이 그 때 그 때 다를 수 있고, 또 한번 크게 깨달았다고 해도 그것이 영원히 강렬하게 지속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겠다.' 

 

 

깨달음이 그 자체로 <전지>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전능>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니, 적어도 이 시대에서는 완전한 깨달음은 존재할 수가 없겠구나. 다만 현실에서는 조직을 유지하고 권위와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깨달음>을 절대적이며 대단한 것인양 신성시하거나 신격화 하기가 쉬운 게 또 우리네 사람들이구나.  

 

 

돈도 명예도 권력도 내려놓고 진리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기에 그 자신들이 걸어가는 그 길 자체에 대한 에고 만큼은 죽었다 깨어나도 쉽게는 내려놓기 어려운 게 또 종교나, 명상, 영성 계통에 종사하는 이들의 속성일 수 있겠다. 이것이 이들에게는 전부일 수 있으므로.  

 

 

이런 점에서 도올 김용옥 선생님, 마광수 선생님, 강병균 선생님(포항공대 수학과) 박석 선생님(바라보기 명상)도 참 순진하시구나. 좋은 말과 합리적인 비판으로 변할 사람들이 아닌데, 김 선생님도 강병균 선생님도 법륜 스님이 젊은 시절에 겪은 경험을 겪고 계시구나. 그 사람들에게 그것을 요구하는 것은 어떤 이들이 도올 선생님께 책도 쓰지 말고 강연도 하지 말고 그 동안 번 돈도 다 내놓으라는 것과 같은 것임을 도올 선생님께서만 모르시고, 달라이 라마를 만나고 기독교와 얘기하는 등 참으로 동분서주하셨구나. 그들은 그게 생명줄이니 어찌 남에 말에 쉽게 내려놓겠는가? 

 

 

<그 길을 아는 것>과 <그 길을 실제로 두루 두루 겪으며 걸어가는 것>과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을 수 있는데, 그 길을 아는 자들인 <학자>들이 그 길을 실제로 걸어가는 이들인 <지도자>들에게 변하라 한다고 하여 그들이 쉽게 변할 수 있겠는가? 알고보면 인간계와 같이 종교계 명상계 영성계 또한 <복잡계>인 것을 똑똑하다는 유명한 학자님들만 되려 모르고 있구나.  

 

 

개인과 조직은 또 다르고, 조직은 한번 조직하거나 결성하기가 어렵지, 한번 조직된 조직은 그 자체로 하나의 생명체가 되기에 그 조직을 최초로 조직한 선구자 또한 그 조직을 자기 마음대로 변화시키기 어려운 것을 똑똑한 분들만 모르시는구나. 부처님 당시에도 큰 내분을 겪은 바 있지 않은가? 이는 수학단체도 마찬가지고, 의사협회 한의사협회 검도단체 무도단체 심리학회 등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조직은 조직원들 밥그릇 챙기기 등 조직으로서의 이익 추구가 그 무엇 보다 더 우선인 것이 아니겠는가?  

 

 

<결국 그 안에는 밥그릇 싸움이 엄연히 존재한다.> 

 

 

이분들은 그저 학자들일 뿐이지 <부처님>도 아니고 <예수님>도 아니고 <공자님>도 아니니, 지도자들이 뭐가 아쉬워서 그 말을 듣겠는가? 어차피 세상에는 희로애락, 생로병사에 고통받는 이들이 절대다수인 것을.  

 

 

이분들을 추종하는 이들이 수백만, 수천만에 이르는 것도 아니니 그 영향력이 기성 조직을 변화시킬 정도에는 이르지 못하지 않는가? 명성과 평판, 영향력, 권력 등이 기성 조직을 변화시킬 정도에는 이르지 못하니 어찌 기성 조직이 근본적으로 변할 수 있겠는가?  

 

 

실제로도 역사상의 큰 변화는 역사적 분기점 하에서 제국의 황제나 큰 왕국의 대왕, 일국의 대통령 주도 하에 일어나거나 다수의 대중의 자발적 참여에 권력자들이 합세해 이뤄진 경우가 대부분이지 않은가?  

 

  

최소한 이 점에 대해서는 법륜 스님과 정토회가 역사에 기여한 바 크구나. 기성 종교인들 기성 명상 지도자들이 정토회와 경쟁하게끔 만들었으므로 이 자체는 의미가 있다. 또 법륜 스님도 정토회 지도자들도 은퇴후에는 농사를 지으며 살아갈 방도를 찾고 있으니 기성 단체와 조직에 비하면 그 투명성 재정 건강성 등이 비교할 수 없이 깨끗하다. 적어도 이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별빛 교단>을 해체하고 스스로 교주에서 물러난 크리슈나 무르티도 유부녀와 통정한 일이 있다고 하고 그 가르침이 결국 엘리트층과 지도자층에 국한 된 한정된 것이었음을 살펴볼 때, 다양한 계층을 아우르는 정토회의 속성상 크고 작은 문제가 불거질 수 밖에는 없음에도 이 정도로  조직이 투명하고 깨끗하니 이는 분명 희유하고도 희유한 일.

 

 

이렇게 신성화 되고 신격화 된 <깨달음>에서 군더더기를 벗겨내고 <그 알멩이>만 남기는 작업을 해나가면 권위, 명성, 세력, 신분이나 지위 등에 속는 일이 현저히 줄어들겠구나. 종교판 명상판 영성계 등에 뛰어드는 이들은 적어도 이 정도 지혜는 갖추고 있어야 남에게 속거나 자기에게 속는 일이 현저히 줄어들겠다. 

 

 

있는 그대로의 <우주>와 <지구>, 그리고 <사람>의 기준에서 보면 이치가 자연히 그러한 것입니다. 부처님이 연기법, 인연과보, 무아법 등을 발견한 것은 그 시대와 부처님이 만나 빚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대 민족 안에 갖혀 있던 <민족 신앙적 진리>를 <보편 신앙으로서의 진리>로 승화 시킨 것도 시대가 그러했고 당대의 주류 문화 등이 그러했기 때문이요, 또 예수님이라는 당대의 탐구자요 연구자요 실천인이 그 시대를 살았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는 존 내쉬도 마찬가지였고, 아인슈타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시대 그 사람이 당대의 한계와 모순 등을 만나 새로운 길을 탐색하고 연구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일 중 분야마다 가치 있고 의미가 있다고 여겨지는 일을 일컬어 <발견> 내지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과학 분야의 발견은 발견 그 자체가 의미가 있고, 공식화, 법칙화 등을 통해 문명 전반에 걸쳐 큰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존재하나, 정신적 내면적 발견은 그 발견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삶을 통해 발현되고 구체화되어 그 시대 그 사람들을 통해 <진리의 수레바퀴>가 굴려지는 것이 더욱 더 중요합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도 내 기준으로는 모두가 깨친 분들입니다. 사람은 나면 죽는다. 나는 데는 순서가 있어도 죽는 데는 순서가 없다. 사람이 굶으면 결국 죽게 된다. 사람이 배설하지 않으면 결국 죽게 된다. 라는 사실들을 깨우쳤다.는 점에서 부처님만 깨우친 게 아니라 알고보면 누구나 저마다의 깨우침은 있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부처님도 그렇지만 법륜 스님 또한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이도 아니고, 그 깨달음이 영원히 확연하게 지속되는 것도 아닙니다. 또, 어느 순간에 그 무엇을 크게 깨쳤다. 고는 해도 그 때 그 때 자기를 놓칠 수 있는 것은 우리와 똑같습니다. <북한의 굶주리는 동포> 일화를 통해 드러나 듯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지 않는 때도 있다.는 점에서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에 불과합니다.  

 

 

다만 나름의 깨친 바와 아는 바 등을 통해 길을 제시하고 걸어가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인정할 수 있습니다. 또, 자기가 제시한 길을 자기 부터 실천해 나가는 사람이라는 점도 인정할 수 있습니다. 또 책과 동영상 등을 통해 할 수 있는 것은 할 수 있다. 경험한 바 있는 것은 경험해봤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 하는 기준에서는 솔직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우려가 되는 것은 <시대의 참 스승>을 갈구하는 민족 정서상 법륜 스님을 <생불> <부처님의 이 시대 재래>, <미륵불> 등으로 신격화하고 이를 절대화 하여 스스로와 집단을 세뇌한 나머지 <다른 집단>, <다른 길>을 배척하며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이들도 그 얼마든지 생겨날 수 있다.는 그 가능성 자체입니다.  

 

 

<법륜 스님>에게 여러모로 훌륭한 점이 있는데다 그 활동도 왕성하여 뛰어난 자 10명 100명도 해내지 못한 일을 당대에 이뤄나가고 있으니 <위대한 스승>께 귀의하고 싶은 이들이 -제대로 실천도 해보지 않고 제대로 스스로를 검증도 해보지 않은 이들(선무당)- <법륜 스님>이란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맹목적인 추종, 타 집단, <다른 길> 등에 대한 배타성을 꽃 피울 가능성은 여전히 미해결 숙제로 남겨진다고 생각합니다. 또 여기에 <즉문즉설> 동영상 등에 주의 및 경고, 부작용 등에 관해 충분히 설명하지 않기에 법륜 스님의 강의를 보고 <눈만 높아진 대중>이 법륜 스님의 말, 행동, 길 등을 절대화하는 또 다른 집단 세뇌 등이 이뤄지지 않는가. 하는 순수한 의구심은 여전히 듭니다.  

 

 

<정토회>와 법륜 스님이 책, 동영상, 활동의 투명성 등을 통해 대중의 눈을 확 틔어 준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그 눈이 트인 대중들이 법륜 스님 스스로도 경험한 바 있듯이 <선무당이 되어 멀쩡한 사람 여럿 잡을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법륜 스님과 정토회는 이러한 가능성에 대해 어떤 대처가 있는 지 궁금합니다. 이 시대 대중들의 눈을 활짝 틔어주는 일에 대해서는 대단히 활발한 활동이 있으나, 그렇게 해서 눈 뜬 사람들이 스스로 검증해 나가는 검증 작업에 대해서는 대처가 미흡해 보이며, 어찌 되었든 스승역을 맡고 계신 법륜 스님은 지나치게 바빠 보입니다. 이것이 나 혼자만의 의구심은 아니기를 바랍니다.  

 

 

법륜 스님도 스스로를 대단히 양심적이다. 나는 불법 이치를 확연히 깨쳤다. 나는 생사 경계를 뛰어넘었다. 라는 한 생각을 확신한 나머지 <선무당>이 된 적 있는 분이시니, 내가 우려하는 바를 능히 인정하고 이해하시리라 생각합니다. 나 또한 그런 경험이 많고 그 부작용 등을 몸소 겪은 바 있기에 정토회에 공개적으로 의견을 피력해 보는 것입니다.  

 

 

또 실제로 내 주변에서 정토회의 즉문즉설을 듣고 스스로 크게 깨달았다.는 한 생각에 사로잡혀 갑자기 사람이 돌변해 <정신분열>에 걸려 정신 병원에 입원한 이도 있는 게 사실입니다. 주변인인 내가 크게 깜짝 놀라 가슴을 졸인 바 있으니, 그 가족의 심정은 오죽했겠습니까? 하루 아침에 자식이 미쳐날 뛰다가 정신 병동에 강제 입원하게 되는 것을 직접 목격한 가족들의 심정은 어떻고 또 그 본인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그러니 그 부작용에 유념하고 이에 대처하거나 검증해 나갈 필요가 있다.라고 얘기해 보는 것입니다. 어차피 법륜 스님은 자신이 지은 <구업>으로 부터 벗어날 수 없으니 지금부터라도 이에 대처하고 정토회 조직과 방식을 검증하여 그 한계를 인정하고 그 부작용에 대처해 나가는 것이 지혜로운 일일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법륜 스님 말씀도 정토회의 방식도 그 온전한 뜻과 방법이 갖는 의미와 가치 등을 제대로 이해하거나  깨치지 못한 이들에게는 부작용이 있을 수 밖에 없고, 또 사람의 입장에 따라서는 동일한 말, 책, 강의라 해도 얼마든지 오해하여 자기 멋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책, 동영상 등을 잘못 해석하거나 잘 못 실천해 삶을 그르치는 부작용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에는 제대로 실천해서 자기 삶을 바르게 정립하려는 이들 보다는 <즉문즉설> 등 강의를 듣고 손쉽게 깨치려는 이들이 더 많은 게 현실입니다. 지금만 그러했느냐? 천만의 말씀입니다. 과거에도 그러했습니다. 오죽했으면 미야모토 무사시도 <오륜서>에서 이러한 세태를 비판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이런 성향의 수 많은 이들을 법륜 스님도 정토회도 바로 잡아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것이 <즉문즉설>이 갖는 근원적 부작용인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상 존재하는 단체들에 따라서는 기본 자질과 품성을 갖춘 자, 이를 투명하게 검증한 자 외에는 법을 전하지 않는 방식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정토회가 세가 크게 불어났다고 해도 정말 진실하게 그 뜻을 실천해 나가는 이들이 그 몇이나 되겠습니까? 이는 모든 조직의 숙명과도 같은 일일 것입니다. 정토회에 속한 절대 다수는 그저 저마다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그 조직에 머무는 것이 현실 그 자체입니다. 이것은 또 다른 부작용을 낳을 수 있는 근본 원인이 됩니다.  

 

 

<정말 그렇지요? 세상에 쉬운 일은 정말 하나도 없습니다.>  

 

 

건강해 보이고 투명해 보이는 정토회에도 분명히 부작용이 있으니까요. 특히 <즉문즉설>처럼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한 전달 방식에는 그 한계가 존재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정토회 조직은 양적으로는 엄청나게 커졌습니다. 헌데 그 전문성은 어떠한가요? 즉문즉설의 확확 깨치는 맛에 비해 정토회가 가진 전문성은 터무니 없이 낮은 수준에 머물러있다고 여겨집니다. 또 법륜 스님이나 소수의 지도자들은 몰라도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대중들은 스스로 검증하는 데 있어 충분한 대비가 없다고 여겨집니다. 이에 대해 대비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세와 조직은 이제 충분할만큼 커졌으니 그 내실을 다져 달마 대사가 혜가 선사라는 한 명의 제대로 된 제자에게 법을 제대로 전한 것처럼 법륜 스님도 정토회도 외연의 확장 보다는 내실을 다지는 것이 필요한 것은 아닐지요? 자칫 잘 못하면 기복 신앙 보다 더 큰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는게 법륜 스님의 길이요 정토회의 길이라는 생각 조차 들 때가 있습니다. 적어도 이 점에서는 정토회가 티베트 불교 등 체계가 잘 잡힌 곳에서 배울 필요도 있어 보입니다. 티베트 불교와 남방 불교는 전문성은 있으나 대중성은 결여되어 있습니다. 정토회는 대중성을 표방하나 전문성은 결여되어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대중성과 전문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것은 매우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이 문제를 정토회나 법륜 스님이 대체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지 정말 궁금합니다. 이는 나 또한 늘 고민하는 문제이기도 하니까요. 소수 지도자의 전문성에만 집중하면 이는 결국 대중들의 지도자에 대한 추종을 낳게 되고, 그렇다고 대중성에만 집중하면 이는 결국 전문성과는 멀어지게 됩니다.>  

 

 

<현실적으로 삶과 수행을 일치시킨다는 것도 그 표현은 좋을지 몰라도 현실적으로 이루기는 결코 쉽지 않은 목표입니다. 다만 말이 쉬울 뿐이지요.>    

 

 

지도자와 그 단체를 연구하고 탐구하다 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지도자의 성질이 그 단체에도 어느 정도는 반영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법륜 스님의 성질과 비범한 활동성과 실천성 등이 이 시대와 만나 정토회가 외연의 확장에 성공한 것은 알고보면 자연히 그러할 수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또 다른 선구자인 박석 선생님의 바라보기 명상이 그 대중성을 쉽게 구하지 못하는 것은 그 선구자의 성질과 방향성, 실천성, 추진력, 처한 입장 등이 이 시대의 욕구와 만나 큰 운동이나 큰 감동을 불러일으킬 정도에는 이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은 자연히 내 공부가 됩니다. 타는 나를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이지요. 

 

 

ㅂㅂㅂ 선생님께서 <수행게시판 13812 게시글>에 댓글을 통해 이 주제로 질문하신 바 있으므로 <내 입장에서 바라본 법륜 스님과 정토회>라는 주제로 글을 써나가는 것이지, 이 글을 통해 반드시 정토회나 법륜 스님이 변하리라 생각하지도 않거니와 꼭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내 공부 삼아 해나가는 것입니다. 나 또한 <길을 걸어가는 자>이기에 <타를 통해 나를 보고, 나를 통해 타를 본다.>는 이치에서 행하고 있는 것이지요.  

 

 

스스로 조직을 결성한 적도 있고 또 스스로 그 조직을 해산한 적도 있기에 경험한 자 입장에서 바라보는 견해입니다. 나 또한 목숨을 걸고 그 어떤 것을 깨달았다면 깨달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거니와 그렇다 하여 그것이 온 우주의 모든 이치를 다 깨달은 것이냐?고 하면 그렇지는 않다.라는 점에서는 그런 깨달음을 얻은 적은 없는 자입니다. 이렇게 다양하게 실제로 경험하며 그 길을 걸어가고 있다보니, 어떤 기준에서는 법륜 스님이 굉장히 존경스러운 면도 있고 또 어떤 면에서는 대단히 우려가 되기도 합니다. 이게 나의 솔직한 입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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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 구?|2017-04-17삭제
요때 정토 세계에 보냈어야 되는데 ??
내 생각|2017-03-30삭제
법륜이라는 사람.? 보살 님들을 모아놓고 즉문즉설로 ..또한 천일결사란 명분아래 세계아동복지 기금으로 하루에 천원이상 보시를 하도록 강요하고 그것도 모자라 깨달음을 더 얻어야 한다며 만일결사까지 가도록 다짐시키면서~~... 위에글을보면 정치꾼이 딱인데??? 빨리 북한에가서 포교 활동해야 하는데......
할렐루야|2017-03-22삭제
뭘 그리 장황하게 말하는지... 하여간 니 똥 굵다.
???|2017-03-20삭제
비판하다. 8 은 언제 올리는지요??
청담이 그립다|2017-03-19삭제
보시란 이름으로 돈모아 해외 관광 전문 박사모..여기 비하면 조족지혈. 정신줄 놓은 7푼이보다 못한 버러쥐 소굴이다. 장담하는데 정토회 천벌 받을것이다. 유부남 유부녀 가정소홀로 파탄 난집 산더미인데 너희들이 죄 안받으면 누가 받겠나. ..나무지옥귀 후딱왕림 소원합니다...
지나가다|2017-03-17삭제
법정스님은 무소유의 삶의 의미를 깨우치고 몸소 실천하고 생을 마감하신 분이고 동사섭의 용타스님은 공사상을 나름대로 정립하신 분이고..그런데 도대체 법륜이라는 분은 도데체 무엇을 깨달았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리는 것을 보면 뭔가 있긴 한 것 같은데 내 눈에는 선동가 정치꾼 교주로만 느껴짐은 왜일까요??? 정토 신자들 답 을 좀 주세요.....
???|2017-03-17삭제
똑 같은 내용이지만 계속 올려 봅니다. 무지한 저 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군요. " 이놈아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줄도 모르는 놈이 대체 바쁘긴 뭐가 바빠??" 이 말을 듣고 깨우쳤다니?? 아주 유아틱한 말에 깨우쳤다니?? "스님이 안되면 단명 한다니???" 참 웃기지 않나요??? ⇔정토회 **법륜** 한번만 읽어주세요 끝까지!!! ▶ 이제는 그만 하시지요!!! 너무나 많은 여러사람들이 당신 하나 때문에 많은 젊은이와 행복한 가정을 가진 사람과 불자들이 당신의 언변술에 넘어가 갈피를 못잡고 있습니다. 진정 삶의 구도자인지? 진정 부처님의 제자인지? ....제가 생각하기엔 선동가 외엔 아무것도 아닌것 같습니다. 정치판에까지 승복입고 한번 나가보실 생각이 없으십니까?? 즉문즉설 하나가지고 여러사람 선동 하지 마십시요. 청토회 자체가 무엇인지? 다른 종파에 귀속되어 하나의 단체를 이뤄감이 어떨련지요? 정토회가 아니라도 다른 사찰이 많이 있습니다. 해인사나 통도사에서 중생을 모아놓고 당신의 언변을 토하심이 옳지않을까요? 왜? 무엇땜에 각지역마다 법당을 차려서 보살들과 젊은층들을 동원시켜가면서 당신의 즉문즉설을 위해 자원봉사를 시키고 헛된 시간을 많이 소비하게 만드십니까? 감히 말하건데 부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당신이 추구하고자하는것들 그리고 중생들을 위한다는 핑계로 설법한다는것들... 이제는 포교활동을 그만 하십시요!! 정중히 말씀드립니다. 아무리생각해도 당신은 종교인은 아닌듯 합니다. 부처님의 이름을 헛되게 하지 마십시오. 너무나 방대해진 정토회에 실체의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정말 무서운 존재입니다 앞.뒤 맞지않고 두서없이 글을 써보지만 그만큼 제마음이 복잡하고 조급합니다. 거대한 바위덩이에 부딪치는 몸부림이지만 하는데까지는 한번 해볼려고 합니다. 그리고 나 하나만의 생각이 아니라고 봅니다. 나와 똑같은 마음을 가진 분들이 많이 있으리라 봅니다. 감히 부처님의 이름을 앞세워 승복을 입고 많은 젊은이들을 모아놓고 청춘 콘서트라는 명분과 또한 많은 대중을 상대로하여 즉문즉설이라는 설교아래 남모를 고민과 문젯점을 제시하면 남 보다는 앞서 조금빠른 결론을 내리는건 인정합니다. 그러나 어찌보면 결론은 누구나 다 똑같은 답이라고 볼수밖에 없습니다 종교에 빠지면 중독될수밖에 없습니다. 마약과도 같다더군요. 그러나 법륜의 말을 한번듣게되면 신기하게도 맹목적으로 빠져들수밖에 없더군요. 왜 그럴까요? 나쁘게만 생각해서 그런지 유병언 그리고 최태민이나 희대의 사기꾼 조희팔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왜냐하면 이제는 정토회에서 생필품까지 만들어서 배포를 하더군요. 완전히 자급자족이죠. 법륜! 당신이 추구하는것이 뭔지는 모르지만 당신의 뜻대로만 움직이게 할려고 하는것이 눈에 보입니다.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어렵게 직장생활하여 밭을 하나 장만했죠 한 천평정도 되었죠. 정토회 나가기전엔 밭 농사일도 좀 했었지요. 정토회에 나가고 부터는 법륜의 고향인 언양인가 어딘가에 작물농사하러 간다고 합디다. 그뒤론 땅이 필요없어서 팔아버렸죠. 가지고있어봐야 아무필요도 없고 농사일도 혼자서 해봐야 보람도 없을 테니까 .진정 본인의 밭을 일굴생각은 하지않고... 티격태격 말해봐야 언성만 높아지고 ~~ 그리고 한참 애들 공부시켜야할 이 시점과 경제적으로 맞벌이해도 모자랄 이 시기에 정토회에 자원봉사자로 즉문즉설에 빠짐없이 쫓아다니니 가정은 말할것도없이 뒷전이고. 허구한날 108배한다면서 눈이오나 비가오나 108배가 뭐가 그리 중요한지 새벽4시30분에일어나 법당에가서 기도하고 다시집에와서 자고있으면 나 나름대로 출근한다고 아침식사하자고 하면 몸도 좋지않을뿐더러 또다시 잠을 자다가 그 고통을이기려고 일어나는걸보면 진정 죽을려고 그러는지 살려고 그러는지?? 이제는 천일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해야된다는걸 그리고 당신의 지시되로 법당에서 한다는걸 우연히 저도 알게되었죠 . 법륜! 각 지역별로 열심히 하는사람에게 당신이 상 까지선물하고 칭찬까지 하더군요. 정말 가증스럽습니다. 천일결사란 용어까지 써 가면서 말입니다. 차라리 비구니가 되어 아예 당신절에가서 살았으면 하는생각도 해 봅니다. 법륜 ! 당신 신도들 전부 당신절에서 출가하여 끝가지 단체생활 하심이 어떨련지?? 그게 당신이 바라는거 아닙니까? 당신 말대로 집나가는것은 가출이고 절에가는것은 출가라고했지요 가출은 방황하다 집에 되돌아 올수는있지만 출가는 집에 다시올래야 받아주는 가족도없을뿐더러 받아주질 않기때문에 후회를하지만 오가지도 못하고 그 곳에 있을수밖에없고 또한 되돌이킬수없는 강을지났다고봐야 되지않을까요?/// 천일결사란 용어까지 써가면서 정토회를 의지처로 삶으려고 설득하지 마십시오. 가정이 있는 사람은 가정에서 당연히 삶의행복을 누려야 되지않을까요?? 당신을 추종하는 신도들이다고해서 함부로 설법하고 설득하지 마십시오. 법륜! 수행은 누가시켜서하는것이 아니라면서 왜? 시키시죠? .그리고 당신은 출가를 자꾸 종용하는데. 자식도버리고 남편도 버리고 가정도버리고 모든 인연을 버리라고 하는데 당신법회에 모였다가 왜? 다시 집으로 돌려보냅니까? 모든 것을 버리고 오로지 정토회에서만 생활할수 있도록 당신이 책임지세요!!. 법륜! 당신은 당신이 추구하는것을 위해 설교만 할줄 알았지 진정 다른사람을위해 희생을한번이라도 한 적이 있는지요?? 당신만의 자아에 도취되어 신들린것처럼 당신자신만이 부처님인양 행세하지 마십시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하나의국가아래 부처님의 이름을 빌어 거대한 당신만의 왕국을 건설하는것이지요~!!! 당신자신만을 위한 맹목적 포교활동은 이제그만 멈춰 주세요!!!!.
나름대로|2017-03-16삭제
부처님 보다 한수 위가 맞긴 맞는가 봅니다. 맹목적으로 부처보다 더 숭배할 정도니까?? 부처님의 이름을 빌어사리분별을 못하게 하고 있으니 가증 스러울 뿐이죠!! 종교인이 정치는 물론이고 남 의 인생까지 간섭하니 이게정 말로 선동가이지 뭐겠습니까!!!
나름대로|2017-03-16삭제
무슨돈으로 뭐 어떻게해서 각 지역마다 법당을 차리고 공양하면서 수행을 시키는지??? 성지순례는 왜 자꾸 해외로 가게하는지? 집에서 계획서 꾸미는거 보면 속에 천불 납니다. 가정이 풍비박산 전 입니다.
ㅂㅂㅂ님에게|2017-03-16삭제
ㅂㅂㅂ 님의 글을 읽고 그래도 부처님보다는 법륜스님이 한수 위이네요. 부처님은 밥도 주지 않고 걸식을 시키면서 수행을 시켰지요. 그래도 스님은 밥도 주고 따뜻한 방도 제공해주고 수행을 시키니 좀 더 자비가 있는 것 같네요
ㅂㅂㅂ|2017-03-15삭제
어떤분의 비판글입니다.... 종교 단체가 조직을 만든다는 자체도 이상하고, 백일결사, 천일결사, 만일결사 이건 북한에서나 사용하는 용어같구요.. 마음이 힘든분들이 수행하는것까지가 딱 인거 같은데. 조직을 결성해서 사람들을 이상하게 만들죠. 사이비 단체처럼요. 문경 정토원은 똘마니 생산하는곳 같구요. 그 중에 순진하게 잘 따르는 애들을 활동가라는 명목으로, 무임금 노동을 시키는것 같습니다. 또 조직자체내에서도 서로 우열을 가르죠. 가만히 보면 법륜이라는 스님도 아닌 사람의 사조직인거 같습니다. 순진한 애들 꼬셔서 강의하는데 이것저것 무임금으로 일시키고 자기는 얼굴 내밀고 인기 얻고, 보시라는 명목으로 돈 걷어서 법륜 이라는 분의 얼굴 나게 만들고(어디서 유명인이랑 사진을 잘찍어요) 여태까지 본 명망있다는 스님과 비교해 보면 너무 세속적인것 같습니다. 조직이라는 곳의 실체를 조금이라도 알게되면 어느정도 거리를 두고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는데. 너무 깊숙하게 들어간 사람들은 잘 보지를 못하죠.~참고로 성금 모인거 제대로 사용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누구처럼 해외로 자주가던데 누구 돈으로 가는지??
나름대로|2017-03-15삭제
잘 읽었습니다. 좀 더 쉽게 좀 더 날카롭게 비판했으면 합니다. 종교에 대한 전문 지식은 없지만 법륜 스님 이 추구 하는것이 뭔지 모르겠군요? 보편적인 우리의 생활에 너무 많이 침투해 있더군요. 맹목적으로 법륜 한 사람에게만 빠져들어 있더군요 진정 구도자님의 글을 한번 이라도 읽어보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잘은 모르지만 정토회의 법륜스님 은 너무나 커져 버려 ~~ 만약에 입적하면 어쩌려고.........
수행자|2017-03-15삭제
우뚝 솟은 큰 바위 밑에서 비를 피하며 서있다가 문득 한생각이 일어났다. 만약 이 바위가 앞으로 무너진다면 나는 이 밑에 깔려서 떡이 되지 않을까? 피를 피할 수 있어서 좋았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드니 바위의 고마움은 사라지고 마음속에 두려움이 일어나는 것은 무슨 연유에 의한 것일까요? 마음속에 한 의심이 일어나면 천하가 다 일그러지고 마음속에 한 생각이 사라지면 바위 밑에 누워서 잠을 자도 두려움이 일어나지 않는다. 자기의 마음속에 의심이 있다면 앞으로도 계속 이런 비판이 일어날 것이고 마음속에 의문이 사라지면 이런 비판의 질문은 일어나지 않는다. 질문은 법륜스님으로 부터 온 것이 아니라 바로 수행자의 의문으로 부터 시작된 것입을 알아야 합니다. 물위에 작은 돌 하나라도 떨어지면 파문이 일어나서 고요한 산속의 풍경을 다 일그러놓지요. 수행의 시작이 남을 의심하고 비판으로 부터 시작이 된다면 까막득한 날에 과연 마음이 열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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