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출가재일 기념 법문, 두북 농사 울력
진정한 출가의 의미, 먹고 일하고 쉬는 삶

오늘은 불가에서 큰 명절인 ‘출가재일’입니다. 스님은 아침 일찍 찾아오신 손님을 만나고 오전 10시에 서초동 정토회관에서 출가재일 기념 법문을 하였습니다.

“부처님의 출가는 말 그대로 ‘집을 나왔다, 왕궁을 떠났다’고 표현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집을 떠났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형식적으로는 집을 나오는 것이지만 집을 나온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여기서 ‘집’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여러분들에게 집은 어떤 곳입니까? 오늘도 법회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갈 텐데, 집이라는 곳은 달리 말하면 안온한 곳입니다. 그리고 집과 거의 비슷한 개념으로 쓰이는 용어가 또 하나 있는데 바로 ’고향’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일상적으로도 ‘집으로 돌아간다’, ‘고향에 돌아간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돌아간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데에는 ‘그곳이 본래 나의 자리다’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왜 그곳이 본래의 나의 자리일까요? 안온한 집은 우선 지붕이 있어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햇살과 비를 막아줍니다. 그리고 벽이 있어서 바람도 막아줍니다. 다시 말해, 소위 어려움으로 상징되는 비바람을 막아줍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먹을 것이 있고 잠잘 곳이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생활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는 곳입니다. 아무리 좋은 곳이라도 내 집 만한 곳이 없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집은 안온한 곳이면서 동시에 정반대의 다른 측면도 가지고 있습니다. 집은 속박과 굴레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지붕과 벽이 있다는 것은 비바람을 막아줘서 안온함을 제공하는 동시에 그 안에 갇혀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곳에는 부모님이 계셔서 안온하기도 하지만 부모님의 잔소리에 갇혀 살기도 합니다. 그곳에는 남편과 아내가 있지만 동시에 남편과 아내에 묶여있는 것이기도 하고, 자식이 있지만 동시에 자식에게 묶여있기도 해요. 또한 집에는 재물이 있지만 그만큼 내가 재물에 묶여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집은 나를 보호하는 동시에 나를 가두어놓는 곳입니다.

집에 살다보면 좋긴 하지만 어느 시점이 되면 답답하니까 가출을 합니다. 여러분들이 부모님 곁을 떠나고 싶다거나 집을 나가고 싶다, 이혼하고 싶다, 다 버리고 훨훨 날아가고 싶다면서 새를 부러워하는 것은 그만큼 그 안에 갇혀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새가 사람을 부러워해야지 왜 사람이 새를 부러워합니까.

집은 이렇게 두 가지 성질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나를 보호하는 안온한 곳임과 동시에 나를 속박하는 굴레의 역할도 동시에 하고 있습니다.

집에서 지내면서 안온함은 좋은데 속박이 싫으면 가출을 합니다. 막상 나가서 지내면 자유로움은 좋지만 안온함이 사라지고 의지할 데가 없어지니까 또 외로워집니다. 그때는 집으로 되돌아가는 ‘귀가(歸家)’를 합니다.

중생은 집의 안온함을 집착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속박에도 묶이게 됩니다. 반면 자유와 해탈을 추구하는 수행자는 자유를 얻기 위해서 안온함을 포기합니다. 그렇게 진정한 자유를 위해서 안온함을 포기하는 것을 출가(出家)라고 합니다.

그런데 집이 안온함과 속박을 가져오니까 ‘안온함은 더 크고 속박은 적은 다른 집이 없을까’하고 다른 집을 찾아서 지금의 집을 떠나는 것은 가출(家出)이라고 합니다. (대중 웃음) 가출은 방황입니다. 이 집을 떠나서 저 집에 갔다가 다시 속박이 느껴지면 다른 집을 찾게 됩니다. 그래서 오고가며 윤회를 합니다.

출가는 집을 불살라 버리는 거예요. 집을 떠난다는 것은 다른 집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집’이라는 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방황과 윤회의 고리를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집을 나갈 때 출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집이 안온하지만 동시에 속박의 근원이라는 것을 꿰뚫어 알아야 집을 불 사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개 집의 속박은 싫어하지만 또 그 속의 안온함은 좋아합니다. 그래서 버리지를 못해요. 안에서 살면 갇혀 있으니 답답한데, 밖에 나가면 또 외로움을 느낍니다. 외롭다고 다른 사람을 만나지만, 그러다가 또 같이 있다 보면 귀찮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헤어지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외로워집니다. 이번에는 다른 사람을 만나면 좀 나아질까하고 사람을 바꾸어가며 만나 봐도 얼마 지나서 다시 귀찮아지고 속박을 느낍니다. 그렇게 외로움과 귀찮음을 반복하며 오가는데, 그것이 윤회입니다. 그런 윤회의 고리를 끊어버리는 게 해탈이고 열반입니다.

윤회의 고리를 끊고 해탈·열반을 성취하려면 출가를 해야 합니다. 형식적으로는 안온하면서도 나를 묶고 있는 집으로부터 떠나는 것이지만, 그 ‘집’으로 상징되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부모, 아내나 남편, 자식, 친구, 일가친척 등 인간관계로부터의 떠남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물질이 주는 안온함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물질을 많이 가지려고 하는데, 이 물질로부터의 떠남이 있습니다. 이것은 물질에 의지하는 마음을 버리는 것, 그래서 모든 소유를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우리는 살면서 배우거나 갖게 된 믿음, 이념, 사상을 움켜쥐고 거기에 안주하는데, 그것 또한 버려야합니다.

그래서 출가라고 말할 때는 이념으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하고, 재물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하고, 권력이나 명예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하고, 인간관계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합니다. 출가는 그런 것을 모두 놓아버리는 거예요.

부처님께서도 왕궁을 떠날 때 가족 등 인간관계를 끊고, 왕자라고 하는 지위를 버리고, 자기가 가지고 있던 모든 재물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왕궁을 떠나면서 버린 것 중, 우리가 주의 깊게 살피지 않으면 놓치기 쉬운 아주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때까지 그가 가지고 있던 가치관, 믿음, 신앙도 모두 버렸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신앙은 ‘바라문 신에게 기도를 하면 복을 받는다’는 그 믿음도 버렸습니다.

경전에는 출가하시는 부처님의 모습에서 이러한 것들이 상징적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세속의 옷을 버리고 누더기를 걸쳤다는 것은 모든 기득권, 즉 왕위의 지위와 명성도 모두 내려놓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머리카락을 잘랐다는 것은 모든 이념, 믿음, 종교로부터 벗어났다는 것, 즉 가치관의 전환이 일어났다는 것을 말합니다.

부처님께서는 기존의 인간관계, 재물, 지위, 이념과 믿음 등을 가리켜 비록 안온함을 주지만 이것은 나를 해치는 달콤한 독약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지금은 달콤하지만 결국 나를 죽이는 것이어서 결국 물고기를 낚는 낚싯밥과 같고, 쥐를 유혹하는 쥐약과 같습니다.

이렇게 안온함이 곧 속박이라는 것을 꿰뚫어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면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안온함까지도 같이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자연스레 알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속에서 안온함과 속박을 분리시키고, 속박은 버리고 안온함은 유지하고 싶어 합니다.

이런 우리 마음을 부처님께서 대중들에게 쉽게 설명하신 것이 바로 공덕천과 흑암천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아름다운 여인이 대문을 두드립니다.
“누구십니까?”
“저는 공덕천입니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그리고 잠시 후에 아주 못생긴 여자가 또 문을 두드립니다.
“누구십니까?”
“저는 흑암천입니다.”
“당신은 들어오지 마십시오.”
“조금 전에 들어간 공덕천과 저는 자매지간이라 뗄레야 뗄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 어리석은 자는 공덕천에 미혹되어 흑암천을 받아들이지만, 지혜로운 자는 둘 다 쫓아버립니다. 여기서 공덕천은 즐거움을 말하고 흑암천은 괴로움을 말합니다. 이렇게 즐거움을 추구하면 괴로움은 필연적으로 따라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즐거움과 괴로움이 늘 되풀이 되는데, 이것을 윤회(輪廻)라고 합니다. 우리는 흔히 사람이 죽어서 개나 소로 태어나는 것을 윤회하는 삶이라고 말하는데, 죽어서 다른 동물로 태어나는 건 그저 인도에서 전설처럼 내려오는 옛날이야기입니다. 인류의 위대한 스승인 붓다는 구전(口傳)되는 옛날이야기를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작용에서 즐거움과 괴로움이 어떻게 생기고 반복되는가 하는 진리를 깨닫고 알려주셨습니다.

집이 갖는 안온함과 속박·굴레의 이중성에 비추어보면, 안온함이 공덕천이고 속박·굴레가 흑암천입니다. 그런데 이 둘은 뗄레야 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중생은 안온함 때문에 굴레를 받아들입니다. 사실 여러분들이 사는 모습을 가만히 보면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몸부림치는 것은 안온함은 좋은데 속박은 싫다는 말이에요.

남편이 인물이 잘 생겼을수록, 능력이 좋을수록 여러분들에게는 강한 속박이 됩니다. 나보다 나은 배우자일수록 강한 속박이 되는 거예요. 다른 누군가를 사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에게 득이 되는 사람에게는 여러분들이 되려 속박을 받습니다. 득이 된다는 것은 안온함을 얻는 거예요. 대신 그만큼의 속박을 받아요.

이렇듯 모든 안온함과 이득에는 늘 속박이라는 이면이 따라오는데, 지혜로워야 이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로우려면 안온함도 함께 포기해야 함을 압니다. 진정으로 고(苦)로부터 벗어나려면 낙(樂)마저도 버려야 하는 거예요. 고락(苦樂)을 같이 버리고, 안온과 굴레를 동시에 버리는 것이 해탈의 길입니다. 그래서 이 둘을 모두 버릴 때 비로소 출가라고 하는 거예요. 단순히 집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집을 버리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왕궁입니다. 왕궁은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진 안온한 곳을 말합니다. 즉, 중생의 모든 욕망이 결합되어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그런 왕궁을 떠났다는 것은 세속적인 가치관을 모두 버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속적인 가치관, 혹은 탐진치(貪嗔痴) 삼독(三毒)에 근거한 가치관으로는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모두 버리셨어요.

그런데 우리의 오해, 우리의 착각은 불교를 통해서 속박은 걷어내고 안온함만 유지시키려고 하는 데 있습니다. 그 둘을 분리시켜서 한 쪽만을 가지려고 하고, 고(苦)는 없애고 낙(樂)만 취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중생세계에서 추구하는 가치를 불교와 붓다의 이름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름하여 ‘기복 불교’라고 하는데, 이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복을 비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불교라고 하면 안 됩니다. 복을 비는 것을 불교라고 생각하면 잘못 알고 있는 거예요.

불법(佛法)은 부처님께서 그 모순을 아시고 진정한 자유를 위해서는 둘 다를 버려야 함을 알려주신 가르침입니다. 왜 둘 다 버려야 할까요? 안온함과 속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안온함이 곧 속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즐거움과 괴로움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즐거움 속에 괴로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붓다께서는 여러 가지 비유로 설명해주셨습니다. 그 중 하나가 ‘잘 채색된 항아리에 똥만 가득하다’는 표현인데 잘 채색된 항아리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낙(樂)과 즐거움을 상징하고, 똥은 고(苦)와 괴로움을 상징합니다. 항아리 안에 똥이 있다는 것은 즐거움 안에 괴로움이 있다, 즉 낙(樂)이 곧 고(苦)라는 말입니다.

경전에는 부처님께서 성도하기 전, 마왕 파순의 세 딸이 부처님을 유혹할 때 부처님이 손가락으로 그들을 가리키니 그들이 곧 노파로 변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젊은 여인은 낙(樂)을 상징하고, 노파는 고(苦)를 상징합니다.

이것을 꿰뚫어 알 때 진리와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첫 발을 내디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성제(四聖諦)라고 하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인 고집멸도(苦集滅道) 중 고성제를 터득한 것입니다. 고제(苦諦)를 증득했다는 것은 그저 ‘괴롭다’하고 아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이 곧 괴로움이고 안온이 곧 속박임을 간파한 것입니다. 그것을 여실히 알아야 일체(一切)가 모두 고(苦)라는 것을 알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세상 사람들 중 락(樂)이 곧 고 임을 간파한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늘 고(苦)를 멀리하고 락을 얻기 위해서, 락을 추구하지만 다시 고에 빠지는 것이 윤회하는 중생의 모습입니다.

이것을 선에서는 ‘흙덩이를 쫓는 개’라고 표현합니다. 사람이 개를 향해 흙덩이를 던지면 개는 그 흙덩이를 계속 피합니다. 그런데 이건 사람이 흙을 계속 던지는 한 끝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자는 흙덩이를 던지는 사람을 좇는다고 합니다. 흙덩이를 던지는 사람을 공격하면 흙덩이가 두 번 다시 날아올 일이 없어집니다. 이것은 지엽을 따르지 말고 바로 근본뿌리를 보라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출가절을 맞이하여 이런 출가절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이런 의미를 알고 나면 비단 머리를 깎거나 옷을 갈아입거나 집을 떠나는 것만이 출가가 아니라, 마음가짐이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형식적인 출가를 하고도 본질을 꿰뚫어보지 못한다면 다만 모양만 낸 것에 불과합니다.”

스님은 ‘출가’의 진정한 의미를 짚어주었습니다. 더불어 법문을 마무리하면서 출가절의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음을 살펴보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습니다.

“일반적인 절에서는 백중과 동지의 비중이 크더라도 정토회는 붓다의 근본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방향을 가지고 있는 만큼 출가절, 성도절, 열반절의 의미도 깊게 새겨야 하는데 어느새 정토회 마저도 백중과 동지의 비중이 커졌어요. 백중절과 동지 기도는 불교문화로서 존중하고 수용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탄생, 출가, 성도, 열반처럼 수행적 의미가 깊은 것은 아닙니다.

참석자 수를 떠나서 탄생절에는 부처님 탄생의 의미를 새기고, 출가절에는 부처님 출가의 의미를 새기고, 성도절에는 부처님 성도의 의미를 새기고, 열반절에는 부처님 열반의 의미를 다시 새겨서 우리가 수행자의 자세로 돌아가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내년부터는 정진과 더불어서 노래도 부르고 연극도 하는 등 문화 프로그램을 만들어 봐요. 정진과 더불어 명절 때 그 의미를 살려나가는 것도 좋습니다.”

스님은 법문을 마치자마자, 두북으로 출발하였습니다. 며칠 전 시작한 봄 농사 일감들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업무 시간 짬을 내어 김은경, 노옥재 님도 함께 하였습니다. 서울에서 두북까지 4시간이 넘기 때문에 한두 시간이라도 단축하려고 점심 공양도 휴게소에서 간단히 해결하였습니다.

두북에 도착하니 오후 4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도착하자마자, 옷을 가볍게 갈아입고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스님은 먼저 아궁이 불을 땠습니다. 아궁이 불 때는 법을 배우겠다고 하니 스님은,

“세 가지 방법이 있어. 먼저 종이나 낙엽을 불쏘시개로 하여 불을 붙이고 다음에 불을 붙여 크게 하고 불이 일어나면 장작에 불을 붙이면 되지.
장작을 넣을 때도 한 방향으로 넣으면 불이 잘 붙지 않으니까 격자로 어긋나게 넣어줘야 공기가 잘 통해서 불이 잘 타거든.”

다음번에는 직접 불을 때보라며 알려주고 스님은 아궁이 주변에 흩어진 나뭇잎 조각이나 잔가지들을 싹싹 쓸어 모았습니다. 흩어진 마른 땔감에 불이 옮겨 붙지 않도록 아궁이 입구는 늘 깨끗하게 쓸어두어야 한다는 중요한 지점도 일러주었습니다.

오늘 가장 먼저 한 일은 그늘에 쌓여있는 퇴비 더미를 정리하는 것이었습니다. 두둑하게 쌓여있던 퇴비를 퍼 옮기고 한두 삽씩 철망에 흔들어 골랐습니다. 곱게 골라진 흙이 보드랍게 내려왔습니다. 곱게 내려진 거름흙을 퍼서 밭으로 만들 곳에 옮겨 두었습니다. 역할이 자연스럽게 나눠지고 조금 지나 익숙해지니 물 흐르듯 일이 진행되었습니다.

오늘 준비한 거름흙은 화분에 모종을 심을 때 사용할 것입니다. 모종은 화분에서부터 심는 것이 효과적이라 하였습니다. 스님은 일이 진행되는 동안 다음 일을 준비하였습니다. 빈 화분을 꺼내 놓고 오가는 길에 떨어진 흙덩어리들을 쓸어 담아 체에 거르는 곳에 다시 넣었습니다. 또 장작을 패서 불 때기 좋게 쌓아두고 마른 나뭇잎과 나뭇가지 조각들은 따로 주워 모아 아궁이에 넣었습니다.

해가 지려는지 살짝 춥다고 느껴질 즈음, 일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사람 손이 무섭다는 말이 실감이 났습니다. 공구들을 정리하고 저녁 공양을 하였습니다. 일하고 먹는 밥은 많이도 먹힙니다. 배가 불러 꺼지지 않는다고 말들 하니, 스님은 개울가에 돌 가지러 가자고 하였습니다.

지난 번 비가 많이 내렸을 때 산에 있는 돌들이 개울가로 쓸려 내려왔는데 그 중에 큰 돌을 가져다가 밭을 구획하는 돌로 쓸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스님까지 다섯 명이 다시 장갑을 끼고 돌을 주우러 갔습니다. 짧은 거리기는 해도 돌이 무거워 차로 옮기기로 하고 박스를 가져다가 차에 놓았습니다. 세 사람이 개울에 내려가 돌을 넘겨주고 두 사람이 돌을 옮겨 실었습니다.

입구 감나무 밑에 돌 일부를 내려놓고 나머지는 밭을 구획하는 것으로 쓰기로 하였습니다. 아마 내일부터 새 밭을 만들 때 이 돌들을 쓸 것 같습니다.

“자, 수고했다. 오늘 일과는 끝입니다.”

오늘 일과가 마무리되었습니다. 내일 날이 밝으면 또 몸을 움직여 땀 흘려 일하려고 합니다.
우리들의 하루 일과입니다.

함께 만드는 사람들
임혜진 정란희 손명희 조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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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정으로 고(苦)로부터 벗어나려면 낙(樂)마저도 버려야 하는 거예요. 고락(苦樂)을 같이 버리고, 안온과 굴레를 동시에 버리는 것이 해탈의 길입니다]] [[ 그런데 오늘날 세상 사람들 중 락(樂)이 곧 고 임을 간파한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늘 고(苦)를 멀리하고 락을 얻기 위해서, 락을 추구하지만 다시 고에 빠지는 것이 윤회하는 중생의 모습입니다.]]
출가재일법문 넘 좋으시네요^^*농사일 하시느라 고생스러워 보이세요.. 곁에 찍히신 운전하시는 보살님도 넘 힘들어보이세요ㅠㅠ경상도 사투리로 엉크렀타 는 표현이 절로 나오네요 ㅠㅠ운전하시는 분은 좀 쉬시게 해주셔야 다시 힘내서 운전하실 것 같아서요..운전이 젤로 힘들것 같습니다 ㅠㅠㅠ

2017-03-13 03:05:05

스님 짱

직접 흙을 파고 몸을 써 일하시기에 이런 좋은 말씀이 나오시는 것 아닌가요? 대부분 종교지도자라하면 글만 읽으며 가져다 주는 밥 먹기만 하고 성도들에게 물질 거두는 것에 열심하던데.

2017-03-11 01:11:25

지나가다

스님의 일하시는 모습을 쓴 글을 볼 때면 금강경 제1분이 떠오릅니다. 한순간도 허투루 쓰지 않으시는 모습이 그대로 법문 같습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2017-03-07 08:3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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