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7. 03. 16 행복한 대화 - 강동 구민회관 편
눈을 밖에 두지 말고 자기 마음만 보세요

오늘도 스님은 아침 7시 회의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였습니다.

긴 회의 이후, 오후 3시에는 이번에 인도 수자타아카데미의 회계담당으로 파견되는 산무명 이미경 법우님이 스님께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정토회에서 공동체로 살아온 지 20년이 훨씬 넘는 산무명 법우님의 인도 파견 소식에 많은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특히, 인도의 3월은 무더위가 시작되는 시기라 사람들은 걱정을 많이 하였습니다. 조금은 염려가 되기도 하지만 새로운 시작에 가볍게 임한다는 산무명 법우님의 말에 스님은 환하게 웃으며 격려하였습니다.

산무명 법우님이 돌아가고 스님은 회의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행정처 임원들과 곧 진행될 입재식, 정토불교대학 입학 현황 등 현안들에 대한 점검 회의를 하였습니다.

회의를 마친 후, 오늘 ‘행복한 대화’ 강연 장소인 강동 구민회관으로 출발하였습니다. 퇴근시간과 맞물려서인지 도로가 차들로 꽉 차 있었습니다. 스님은 지도를 보며 빨리 갈 수 있는 길 안내를 하였습니다.

“이렇게 서울 시내로 다닐 때는 이동하는 인원도 많지 않으니 큰 차(스타렉스)를 타고 다니지 말고 작은 전기차를 타고 다니는 게 낫겠구나.”

스님은 이번에 평화재단에서 전기차를 신청하여 대기 중에 있는 것을 생각하여 이야기 한 것입니다. 친환경 자동차인 전기차는 차량 유지비도 적게 드는 데 비해 가격이 비싸고 충전소 보급이 경유차만큼 일반적이지 않은 것이 흠인데, 이번에 보조금 지원으로 전기차 구입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번에 써보고 다시 생각해 볼 일이지만 여러모로 기대를 해 봅니다.

거의 맞춰 강동구청 강연장에 도착한 스님은 바로 법복으로 갈아입고 무대로 올라갔습니다. 처음에는 빈자리가 좀 있어보였는데 시간이 지나자 600여 객석이 꽉 찼습니다.
오늘은 다섯 명이 질문을 하였는데 그 중에 타인의 마음이 느껴져서 고민이라는 몽골인 직장 여성의 질문을 소개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몽골에서 온 회사원입니다. 현재 무역회사에 다니고 있습니다. 저는 사람들의 감정이랄까 마음이 느껴지는데 그게 많이 힘듭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욕심이 많게 느껴지면 그 사람이 미워지고 숨이 막히는 것 같은데,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몽골 출신이라 그런지 무당기(氣)가 조금 있네요. (청중 웃음) 한국식으로 말하면 신기(神氣)가 있는 거예요. 사람을 보자마자 직관적으로 ‘욕심이 많다, 배신할 사람이야’ 하는 것들이 느껴지는 거예요.”

“네. 그래서인지 제가 귀신을 보고 안 무서워지는 데까지 5년이 걸렸습니다.”

“이참에 돗자리를 깔지 그래요? (청중 웃음) ‘돗자리를 깐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세요?”

“잘 몰라요.”

“’돗자리를 깐다’는 말은 판을 벌인다는 뜻이에요. 길거리에 돗자리를 깔아 놓고 관상이나 신수(身手)를 봐주거나 점치는 거 아시죠? 점을 보는 건 들어봤어요?”

“네, 들어봤어요.”

“질문자에게는 그런 소질이 조금 있어요. (청중 웃음)

우리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을 보고, 손으로 만져보는 것을 통해 무언가에 대해 알게 됩니다. 우리가 무엇에 대해 ‘안다’라고 이야기를 할 때 눈으로 본 것을 가지고 안다고 하거나, 누군가로부터 들은 것을 가지고 안다고 하거나, 코로 냄새 맡은 것을 가지고 안다고 하거나, 혀로 맛을 본 것을 가지고 안다고 하거나, 손으로 만져본 경험을 가지고 안다고 합니다.

눈을 통해서 아는 것은 그것의 빛깔과 모양을 바라본 것이에요. 귀를 통해서 아는 것은 그것의 소리를 듣거나 그것에 대해 듣는 것이에요. 코로는 그것의 냄새를 맡고, 혀로는 그것의 맛을 보고, 손으로는 그것의 감촉을 느끼는 것이에요. 이 다섯 가지를 오감(五感)이라고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 오감을 통해 사물을 인식합니다.

여기에 덧붙여 여섯 번째 인식하는 방법이 있는데, 이 오감을 통해 얻어진 정보를 취합하거나 어떤 것에 대해 ‘그거 뭐였지?’ 하는 생각을 통해서 ‘아, 그거야!’하고 알게 되는 경우도 있잖아요? 이것을 의식(意識)이라고 합니다. 흔히 우리가 ‘의식이 있다, 의식이 없다’라는 말을 쓰는데, 같은 의미의 ‘의식(意識)’입니다.

과거에는 인간이 사물을 인식할 때 이 여섯 가지 밖에 없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의식 아래에 무의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의식은 생각, 정신 작용을 말합니다. 지금 법문이나 강연을 듣고 이해하는 것은 모두 이 의식의 작용입니다.

그런데 마음은 주로 무의식의 작용입니다. 여러분들이 스님의 이야기를 듣고 ‘아, 맞어’하고 이해는 되지만 비판하는 것처럼 들려서 기분이 나쁠 때가 있어요. 이럴 때 의식은 스님의 말을 이해하는데, 무의식은 자기 마음에 안 든다며 기분 나빠 하는 거예요.

부부 사이에 싸울 때도 상대방이 하는 말이 모두 맞는 말이어서 이해는 되는데, 기분이 나쁠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주로 ‘똑똑하면 다야?’하면서 따지게 되기도 하죠. (청중 웃음) 혹은 말은 다 맞는데 뭔가 듣기에 기분이 나쁠 때 ‘말만 그럴 듯하게 잘한다’며 비아냥대기도 해요. (청중 웃음) 이런 말들은 모두 ‘말은 맞는데 기분이 나쁘다’는 뜻이에요. 상대방이 그런 반응을 보일 때는 ‘아, 지금 생각으로는 수긍은 가는데 마음은 기분이 나쁘구나’하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정신 작용에도 의식과 무의식의 작용이 있는데, 질문자는 누군가를 접하면 무의식적으로 뭔가가 느껴지는 거예요. 보거나 듣거나 냄새 맡거나 맛을 보거나 만져보거나 생각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그냥 느낌으로 탁 알게 되는 거예요.

이런 직관적인 느낌은 좋은 역할을 할 때도 있지만, 자칫 잘못 판단을 내릴 수도 있잖아요?”

“네, 그래서 그런지 우선 제 자신이 너무 힘들어요.”

“원래 무당이 힘들어요. (청중 웃음)”

“무당은 마음이 아픈 사람이 찾아오면 그 사람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분이 찾아오기라도 하면 그 슬픈 마음이 느껴지고 그래요. 그래서 무당은 힘듭니다. 그리고 무당이 기분이 좋아야 그렇게 느껴지는 것에 대해 술술 말을 잘하겠지요? 그래서 무당을 찾아가면 복채(福債)를 잘 줘야 해요. 복채를 안 주면 영험이 없어요. 그러니까 어디 가서 공짜로 뭘 봐달라는 말은 하시면 안돼요, 아시겠지요? (청중 웃음) 무당의 기분이 좋다는 것은 의식인가요, 무의식인가요?”

“무의식이요. (청중)”

“네, 무의식이에요. 무의식적으로 기분이 좋아야 그런 걸 느끼는 작동이 잘 일어나요.

질문자는 그런 게 느껴질 때마다 ‘나의 느낌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리고 혹시 상대편의 영혼이 내 안에 들어온 것처럼 느끼거나 하면 정신과에 가야합니다. 다른 사람의 무언가가 내 안에 들어온 것처럼 느끼면 다중인격자가 돼요. 그건 정신분열에 속하는 현상입니다. 그런 느낌이 들면 그것을 무시해야 해요.”

“그런데 무시가 잘 안 돼요.”

“그럴 때마다 ‘이건 그저 내 느낌일 뿐이다’하고 자꾸 자기 암시를 주어야 해요. 어떤 사람을 보고 뭔가 느낌이 들어도 그 사람이 실제로 그런 것이 아니라 단지 내가 그렇게 느낄 뿐이에요.

여러분들이 스님을 보고 오늘 스님이 참 피곤해 보인다고 느낄 수 있지요? 혹은 스님이 기분이 좋거나 안 좋다고 느낄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그런 건 여러분들 각자의 느낌이지 그것이 실제와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들 보기에 어떻게 보일지 모르지만 저는 지금 행복해요. (청중 웃음과 박수)

그러니 질문자도 그런 느낌이 들 때마다 ’이건 저 사람과는 관계없이 단지 내 느낌일 뿐이다’라고 알아 차려야 합니다. 그래야 그런 느낌이 일어나는 과정에 말려들지 않게 됩니다.

정신과 의사들에게도 전이(轉移)라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늘 환자들을 상담하면서 환자들의 감정이 의사들에게로 전이되는 거예요. 그 증상이 나타날 때부터는 엄밀한 의미로 정신 질환에 속합니다. 전이는 질환에 속하는 현상이에요.

정신적으로 힘들어 하는 사람들을 위해 무당이 내림굿을 한다는 것 들어보셨나요? 무당이 내림굿을 하면 그 사람의 병은 나아지는데, 대신 무당이 됩니다. 그러면 신(神)이 와서 ‘오늘은 이리로 가라, 내일은 저리로 가라’는 등 늘 나에게 뭐라고 하는 것처럼 느껴져요. 그 말에 지배당하면 결국 신의 종이 됩니다. 신을 섬기는 사람은 결국 신의 종입니다. 그런데 그걸 어기게 되면 몸이 아프거나 하는 증상이 나타나게 돼요. 무의식을 거부하기 때문이에요.

옛날에는 이것을 그냥 ‘신의 소리’라고 치부하고 말았어요. 그런데 프로이트가 정신분석을 하면서 이것이 무의식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거예요.

마치 옛날에는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것이 신이 만드는 움직임이라고 믿었다가 17세기에 들어서서 물리학이 발달하면서 그런 믿음이 사라지고 중력의 작용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생물은 모두 신이 만들었다는 창조론을 믿었다가 19세기 중반에 다윈의 진화론이 나오면서 그런 믿음이 사라지고 종(種)들이 진화하는 것을 알게 된 것과 같아요. 그리고 잘못된 믿음을 타파하고 제대로 이해해야 하는 과제로 남은 것이 인간의 정신 작용이었는데, 19세기 후반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나오면서 차츰 그 역할을 해내고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물질, 생명, 정신 작용이 모두 합리적인 이론에 의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점차 종교의 영역이 사라질 것입니다. 물질적으로는 이미 거의 다 사라졌어요. 생명적으로는 ‘유전공학’이라고 하는 유전자 조작을 통해서 전에 없던 종(種)을 만드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나아가 유기질이 아닌 기계를 통해 인공지능을 통해 정신현상을 모방한다면 앞으로 사람보다 더 똑똑한 기계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생명의 개념도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생명이라고 하면 유기체를 생각하는데, 인공지능은 유기체가 아닌데도 생명 작용을 보입니다. 이렇게 시대가 변해가고 그에 따라 우리의 이해도 달라집니다.

그런데 직관적인 느낌에 너무 의지하면 무의식의 종이 되고, 자기감정의 종노릇을 하게 됩니다. 질문자는 지금 자기의 느낌에 빠져있는 거예요. 이것을 딱 알아차려야 합니다.

영화에도 종종 등장하는데, 몽골의 경우 옛날부터 무당으로부터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도 그런 무속 신앙의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청중 웃음) 주변에 있는 여성분들 중에 예감이나 육감이 민감한 사람들 있잖아요? 집안 내력에 자살한 사람이 있거나, 어릴 때 너무 힘들게 자라서 트라우마가 많으면 무당기가 생기기도 합니다.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균형이 깨어지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생겨납니다.

그러니 우선 질문자는 그런 느낌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면 안 됩니다. 이건 그저 내 느낌일 뿐이고 상대방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해요. 상대방은 행복한데도, 그 사람이 불행한 것처럼 느끼면 내가 ‘저 사람은 불행하구나’하고 착각합니다. 그건 단지 내 느낌일 뿐이에요. 그러니 지금부터는 ‘내가 상대방을 느낀다’라는 생각을 지워버려야 합니다.

질문자는 어떻게 생각해요?”

“네, 저도 제 느낌이 틀리면 무시하기가 쉬울 것 같은데, 맞을 때가 많으니까 무시하기가 참 어려워요.”

“그러면 이제 차츰 무당이 되어가는 거예요. (청중 웃음) 이런 걸 징크스라고 합니다. 같은 것이 반복되면 그것에 어떤 규칙이 있는 줄 알고 나름 법칙을 만드는 것을 징크스라고 해요.

스님이 인도에서 운영하고 있는 학교가 있습니다. 어떤 해에 그 지역이 아주 가물었던 때가 있었는데 몇 개월 동안 가물었던 지역에 마침 제가 방문한 날에 비가 왔어요. 첫 해에는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갔어요. 그런데 그 이듬해에 같은 일이 또 일어났어요. 그랬더니 그 마을에 있던 사람들 중 ‘스님이 비를 몰고 온다’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어요. 그러다가 그 이듬해에 제가 도착한 날 또 비가 내렸어요. 그러다보니까 그 지역에서는 이 이야기가 신화가 되었습니다. (청중 웃음) 그 이듬해에는 다른 일정으로 방문을 못하고 있었는데, 인도에서 한국으로 ‘지금 가물어서 농사를 못 짓고 있으니 스님이 빨리 오셔야 된다’는 전화가 걸려왔어요. (청중 웃음) 이렇게 우연인데도 같은 일이 서너 번 연속해서 일어나면 신화가 생겨납니다.

또 다른 이야기로, 8월이면 중국에 가서 동북아역사기행을 하는데 8월 초 중국은 장마철이기 때문에 그 시기에 중국에서 백두산 천지를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곳에서 전문적으로 여행 가이드를 하시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도 그 시기에는 통상 30~35% 정도의 관광객만 백두산 천지를 구경하는데 성공한다고 해요. 열 명 중 서너 명 정도가 본다는 이야기죠. 그런데 스님이 동북아역사기행을 하면서 12년 연속으로 백두산 천지를 구경했어요. (청중의 놀라운 반응) 이 정도면 징크스가 생길만 하겠죠?”

“네! (청중)”

“저희를 안내하던 사람은 중국 공산당의 당원이었는데, 평소에는 종교를 우습게 알다가 이런 일이 반복적으로 벌어지니까 생각이 조금씩 바뀌는 것 같았어요. (청중 웃음) 그러다가 나중에는 천지를 못보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법륜스님과 함께 가면 무조건 보니까 걱정하지 마라’라는 이야기까지 했다고 해요. (청중 웃음과 박수)

그런데 열세 번째 해에는 결국 못보고 말았어요. (청중 웃음) 지금까지 스무 번 넘게 역사기행을 했는데 그 뒤로 또 연속으로 구경하다가 열일곱 번째 해에 또 못 보는 일이 생겼어요. 꼬리가 길어서 결국 밟힌 격이지요. (청중 웃음) 아마 한 열 번째나 열한 번째에 멈추었으면 신화가 만들어졌겠죠. 장마철에 잠시라도 그렇게 해가 나는 게 어려운 일이고, 그 어려운 일이 열 번 연속으로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제가 한 일이 아니고 모두 우연이에요. 그런데 제가 했다고 주장을 하게 되면 그 순간 신화가 되고 종교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 질문자도 아마 자기의 느낌이 맞을 때가 많으니까 이런 고민도 하고 오늘 이렇게 와서 질문도 하게 되었을 거예요. 그런데 정말 자기 느낌이 맞는지 아닌지 하나하나 다 확인 작업을 해보면 모두가 맞지는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거예요. 열 번 가운데 하나만 어긋나도 그것은 법칙으로서는 틀린 것에 속합니다. 법칙이라는 것은 늘 맞을 때 법칙이라고 하니까요.”

”사람에게 느끼는 건 다 맞는 것 같아요.”

“확인해봤어요?”

“네.”

“그럼 지금 스님보고 어떻게 느끼는지 이야기 해봐요. (청중 웃음과 박수)”

“스님은 욕심이 없고 편안하신 것 같아요. (청중 웃음과 박수)”

“맞기는 맞네요. (청중 웃음) 박수 한 번 주세요. (청중 웃음과 박수)”

“그런데 지금 스님이 딸국질이 자꾸 나오려고 해서 마음이 조금 불안해요. (청중 웃음) 스님 이야기의 핵심은 질문자의 느낌이 대부분 맞다 하더라도 그것에 신경 쓰지 말아야 합니다. 그건 내가 다른 사람에 대해 드는 느낌일 뿐이지 사실이 아니잖아요.

지금 강연장에 있는 이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도 ‘이 사람은 연애해서 헤어져서 괴롭겠구나, 저 사람은 사업이 부도나서 고민이겠구나, 그 옆에 있는 사람은 부부사이가 좋지 않아서 힘들겠구나’ 이렇게 하나하나 다 느끼면 어떻게 살아요? 그러니까 설령 그런 느낌이 든다고 하더라도 무시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 삶을 살 수 있어요.

그러니 그런 느낌이 들 때에는 ‘내가 저 사람의 심리를 안다’라고 생각하지 말고 ‘내게 이런 느낌이 드는구나, 내 심리가 지금 불안하구나, 내가 조금 힘들어 하는구나’하고 자기의 마음만 들여다보세요. 밖을 탓하거나 눈이 밖을 향하면 안 돼요. 밖을 보기 시작하면 종교가 됩니다. 항상 자기 마음을 보면서 ‘아, 내 마음이 지금 이렇구나, 내가 조금 괴로워하는구나’하고 계속 자기 자신을 보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질문자에게 드는 느낌에 지나친 의미 부여를 하지 마세요. 설령 열 번 모두가 맞다고 하더라도 의미 부여를 하면 자꾸 거기 빠지게 됩니다.

사실 질문자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어요. 첫 번째는 그런 느낌에 의미 부여를 하고 본격적으로 자리를 까는 거예요. (청중 웃음) 지금 다니는 무역 회사를 그만두고, 대나무 하나 꽂아놓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어떤지 봐주는 일을 하는 거예요. (청중 웃음) 두 번째는 그런 일을 할 생각이 없으면 자기에게 드는 느낌이 의미 부여를 하지 않아야 해요. 불교적으로 수행의 길을 가려면 내가 신의 종이나 감정의 종이 되면 안 돼요.

부처님께서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 데 있어서 주신 네 가지의 가르침, 즉 사념처(四念處)라는 수행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몸은 지(地)·수(水) ·화(火)·풍(風)의 사대(四大)가 모여 일시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써, 끊임없이 부정한 것들을 흘려내고 있는 부정한 존재라는 관신부정(觀身不淨), 둘째는 우리가 직관으로 느끼는 것은 모두 괴로움일 뿐이라는 관수시고(觀受是苦), 셋째는 우리의 마음은 항시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고 늘 생멸변화하는 무상한 것이라고 관(觀)하는 관심무상(觀心無常), 그리고 넷째는 모든 것에 실로 자아(自我)인 실체가 없다는 관법무아(觀法無我)입니다.

그 중 두 번째인 ‘우리가 직관으로 느끼는 것은 모두 괴로움일 뿐이라는 관수시고(觀受是苦)’는 우리에게는 즐거움과 괴로움이 있는데 사실은 그 즐거움마저도 괴로움이라는 것을 관(觀)하라는 것입니다.

사념처를 요약하면 ‘이 몸은 괴로움이다, 이 느낌은 괴로움이다, 이 마음은 항상 변하는 것이다, 법(法)에는 아(我)가 없다’입니다.

지금 질문자는 두 번째인 느낌에 너무 흔들리고 있는데, 느낌은 괴로움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거기에 의미 부여를 많이 하지 않아야 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청중 박수)”

호기심 반, 재미 반으로 듣기 시작한 대화가 ‘상대방의 느낌에 흔들리지 말고 내 마음을 보라’는 스님의 안내에 이르자 많은 분들의 박수 소리가 커졌습니다.
오늘은 다양한 사람의 다양한 이야기가 나의 삶에 더 많은 경험이 된 ‘행복한 대화’였습니다.

강연을 모두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딸꾹질이 다시 시작되어 스님은 따뜻한 물을 마셔보기도 하고 인터넷에서 딸꾹질의 원인도 찾아보았습니다. 스님은 하루 종일 딸꾹질을 하는 것을 보며

“아주 큰 걸 훔쳐 먹었나보네. 얼마나 큰 걸 훔쳐 먹었으면 딸꾹질이 멈추지 않을까.”

하여 행자님들이 걱정스런 얼굴이었다가 웃음반, 걱정반이 되었습니다.

서울 강연이어서 다른 날보다 조금 일찍 회관에 도착한 스님은 오늘만큼은 쉴 수 있겠지요.

함께 만든 사람들
임혜진 정란희 손명희 조태준

전체댓글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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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경

감사합니다. 늘 경청하고 따릅니다. 건강하시기를

2017-03-20 14:21:50

사과꽃

잘 듣었습니다. 나를 잘 본다는 것이 어쩌면 감정의 종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있는그대로 그냥 봐야겠습니다.

2017-03-20 10:31:13

몽실이

무의식적인 느낌에 의미를 부여하여 집착하지않겠습니다.
스님의 귀한 법문 덕분에 행복하게 살아가는법을 배워갑니다. 감사합니다.

2017-03-20 06: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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