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은 예불과 천일결사 기도를 마치고 아침 공양 후 태종 무열왕릉으로 향했습니다. 전국에서 온 청년대학생 280여 명이 경주순례를 하기 위해 모여 있었습니다.

우뚝 솟은 봉분 앞 그늘에 자리 잡은 청년대학생들의 환호 속에 스님은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해마다 벚꽃 날리는 이맘때 청년대학생 경주순례는 모든 것이 새롭게 피어나는 자연 속에 천년 고도 경주에서 새학기를 맞는 청년대학생의 호연지기를 기르는 차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스님은

“이번 대학 신입생 손 들어보세요. 네. 오늘의 주인공은 여러분이에요.”

절반 남짓의 학생들이 손을 들었고 스님은 신입생들을 반겨주었습니다.

지역별로 참가한 학생이 몇 명이나 되는지, 청년인지, 대학생인지, 재학생인지 신입생인지 즉석에서 소속별 인사가 진행되었고 바로 이어 스님의 역사 강의가 시작되었습니다.

“.... 오늘 이곳에서 우리가 순례를 시작하는 이유에 대해서 말씀드릴게요. 가야와 신라의 합의 통일이 얼마나 큰 시너지 효과를 가져 왔는지 알아야 합니다. 현대에서는 동독과 서독의 합의 통일이 있지요. 이 동독과 서독의 합의 통일은 독일이 유럽연합(EU)의 중심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우리가 현대에서 벤치마킹을 해야 할 것은 독일이고 우리 역사 속에서는 가야와 신라의 통합과정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남북한의 통일은 동아시아공동체로 나아가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여기로 온 이유입니다....”

스님은 ‘태종 무열왕릉’에서 시작하는 오늘 순례의 취지에 대해서 특히 강조하여 이야기하였습니다. 노트를 꺼내 메모를 하는 학생, 눈을 빛내며 진지하게 듣는 학생 등 다른 소규모 방문 팀에서 확성기로 안내하는 소리가 간간히 들려왔지만 청년대학생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스님의 강의에 집중하였습니다.

한 시간 남짓 강의 시간이 훌쩍 지나자 스님은 앞장서서 태종무열왕릉 일대를 둘러보고 이어서 뒷문을 통과하여 진흥왕릉, 진지왕릉을 둘러 내려왔습니다.

“오늘 날씨가 참 좋네.”

아침 기온이 뚝 떨어졌던 것에 비하면 갑자기 여름이 찾아 온 듯, 조금 걸으니 햇빛에 땀이 촉촉하게 뱁니다.
마을길을 따라 내려와 차도로 접하여 보니 벚꽃 길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차도 보다 안쪽에 접한 자전거 길을 이용하여 청년대학생 순례단의 행렬이 걸어갑니다. 바람이 부니 벚꽃 잎이 날려 머리와 어깨에 떨어졌습니다.

스님은

“벚꽃 길을 산책하면서 봄 노래 불러볼까요? 노래 부를 사람은 스님 옆으로 오세요. 잘 하지 않아도 됩니다. 기분 내는 거니까요.”

파란 하늘 아래 벚꽃 잎이 날리는 길을 걸어가니 흥얼흥얼 콧노래가 절로 나옵니다. 이렇게 김유신 장군묘까지 이어지는 벚꽃 길이 경주에서도 내로라하는 아름다운 길로 유명합니다. 김유신 장군묘 어귀에 들어서니 차량을 막아 시민들도 벚꽃을 즐기느라 축제가 벌어졌습니다. 스님은 10여분 동안 자유롭게 친구들과 사진도 찍으라고 안내하였습니다.

오늘은 단체 순례에서 있을 법한 ‘빨리 빨리’ 독촉하는 풍경이 없습니다. 10여 분이 지나 스님이 다시 안내하였습니다.

“자, 이젠 지금까지의 벚꽃 길과는 조금 다른 길로 안내할게요. 키가 아주 큰 벚나무들이 많아서 조금 전까지 본 풍경과는 분위기가 다릅니다.”

오늘, 아무래도 스님은 역사기행 안내자뿐만 아니라 벚꽃길 안내자인 것 같습니다. 스님이 말한 대로 조금 전까지의 소담하고 풍성한 벚꽃 길이 이제는 훌쩍 높이 자란 벚나무들이 하늘로 쭉쭉 뻗어 색다른 분위기가 느껴졌습니다.

순례단은 김유신 장군 묘에 도착하여 땡볕을 피해 계단 옆 그늘로 자유롭게 앉았습니다.

“김유신은 훌륭한 장군이었던 것과 동시에 정치적 감각도 뛰어났던 것 같아요. 황태자인 김춘추와 친한 친구 사이였지요. 자기의 여동생을 김춘추와 결혼시킵니다. 이렇게 정치적 판단이나 전략에 있어서도 뛰어났던 것 같아요. 김춘추가 왕 위에 오르자 왕의 처남이 되었고, 김춘추의 아들인 문무왕이 왕위에 오르자 왕의 외삼촌이 되었죠. 그렇게 되니까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는 데에 김유신의 영향력 또한 막강해졌던 겁니다. 김유신은 원래 가야 사람이었는데, 신라 안에서 이민자로서 가질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한계를 이렇게 극복함으로 해서 삼국통일에도 크게 기여를 하게 된 겁니다.”

역사강의 후, 일행은 김유신 장군 묘를 둘러보았습니다. 스님은 묘의 둘레에 생생하게 새겨져 있는 십이지신상의 모양을 짚어주며 ‘자기 띠는 어디에 있는지 한 번 찾아보세요’ 하였습니다.

김유신 장군 묘 아래의 흥무공원에서는 점심식사 시간과 함께 하는 문화 프로그램 시간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팀별로 김밥과 물을 받아 벚나무 아래, 소나무 아래 등 나무 그늘 아래 자유롭게 자리를 잡고 점심 식사를 하였습니다. 점심 식사 후, 스님과 팀별로 사진을 찍는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팀별로 돌아가면서 사진을 찍는데, 한 쪽에서 사진 찍는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햐~ 벚나무 아래 스님 앉아 계신 모습이 그림 같다. 그런데 나는 스님 돌아가시면 많이 슬플 것 같아.”

한 남학생이 이렇게 말하자 주변에 있던 학생들이 맞장구를 쳤습니다. 뜬금없는 ‘돌아가심’에 대한 생각이었지만 학생들에게 스님이 어떤 느낌으로 자리하고 있는지 전해졌습니다.

볕이 더 뜨겁게 달구어질 즈음, 흥무공원에서의 일정을 정리하고 분황사로 이동하였습니다. 차량이 막혀 거의 한 시간 반 뒤에나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분황사에서도 스님은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제가 여기서 고등학교 1학년 말부터 살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황룡사 9층 목탑과 황룡사 대종을 복원하자는 운동을 했어요. 그래서 매주 주말이면 친구들과 리어카를 끌고 다니면서 고철을 모으러 다녔어요. 그때 저쪽 끝에는 고철 더미를 쌓아뒀었는데 이제는 없지요.”

스님의 소년 시절 이야기는 역사와 어우러져 있었습니다. 요즘 우리들에게는 잘 볼 수 없는 원이 있고 그 원을 이루기 위해 움직이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경주에서 나고 자란 스님의 이야기가 가슴에 남는 것을 느끼면서 이어 황룡사지로 걸어갔습니다. 넓고 넓은 황룡사지를 걸으며 청년대학생 순례단은 스님의 역사 이야기 속에서 상상을 더하여 그려보았습니다.

“황룡사는 이미 진흥왕 때 시작했습니다. 원래 이곳은 왕궁으로 계획했던 곳이었습니다. 한참 후대, 100년 가까이 지난 후인 선덕여왕 때에 삼국통일을 발원하면서 이곳에 9층 목탑을 세웠습니다. 첫째는 외부로부터 침입이 잦으니까 국난극복을 발원하면서 세웠고, 둘째는 이런 국가 위기를 극복하는 최고의 방법은 바로 통일이었기 때문에 삼국통일을 발원하고 탑을 세웠습니다. 이 탑을 세운 후 30년이 지나서 통일이 되었기 때문에 선덕여왕은 바로 통일의 기초를 닦은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이 자리에 마을사람들이 소를 매어 놓는 자리로 사용을 했었어요. 여기다가 둘러메어 놓곤 했지요. 그래서 이 주위가 다 소똥 밭이었습니다.”(모두 웃음)

해가 지려는 듯, 노을빛이 조금씩 물들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황룡사지에서의 일정을 마무리 하였습니다.
스님은 스텝에게 숙소로 돌아가기 전, 일대의 벚꽃을 차로 둘러볼 수 있을지 살펴보기로 했는데, 길이 많이 막혀서 저녁 식사와 이후 일정에 차질을 줄 수 있을 것 같아 바로 숙소로 가도록 하였습니다.

숙소에 도착하여, 즉문즉설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스님이

“오늘 달이 참 밝아요. 달 밝은 가운데 벚꽃 구경도 좋은데, 즉문즉설 하지 말고 산책이나 할까요?”

라고 운을 떼자, 학생들이 와르르 웃었습니다. 하루 종일 걸어다녀 피곤한데도 청년대학생들은 빼곡하게 바닥과 의자에 나누어 앉아 스님과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스님과의 대화 중, 긴 시간이었지만 재미도 감동도 유익하기도 하였던 대화 한 가지를 소개해 드립니다.

“저는 경영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인데요, 오늘 스님 말씀 중에서 ‘지금까지 교육시스템은 모방을 위한 교육시스템이다. 앞으로는 모방이 아니라 창조를 위해서 나아가야 된다.’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제 공부에 어떻게 그런 원리를 적용해야 될지 궁금합니다.”

“그것부터 본인이 연구해야 돼요. (모두 웃음) 우리가 남의 얘기를 참고하는 건 좋습니다. 그런데 정해진 답을 구하려는 건 이미 우리가 모방시스템에 익숙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까 연구를 해야 돼요. 스님은 65살인데도 여러분보다 연구를 많이 하는 편이에요. 제가 특별히 창조적인 교육을 받아서 그런 걸까요? 그건 아니에요. 저는 뭐든지 연구하는 자세입니다. 돌이켜보면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형성된 것 같아요.

제가 장난감을 직접 만들었던 게 저에게 연구하는 습관을 길러준 것 같아요. 지금은 장난감을 돈 주고 구입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돈 많은 사람이 좋은 장난감을 갖게 되지요. 그런데 저희가 어릴 때는 장난감을 직접 만들어서 놀았어요. 집에서 팽이도 만들고, 연도 만들고, 썰매도 만들고, 구슬도 만들었어요.”

“(청중들 궁금한 듯) 구슬을 어떻게 만들죠?”

“자, 구슬을 어떻게 집에서 만들었을까요? 신기하지요? 구슬은 ‘쪼대’라고 하는 찰흙으로 만듭니다. 일반적인 흙 말고 아주 특별한 흙인데, 그것을 이렇게 손으로 비벼서 동그랗게 만들고, 그 안에 솜을 집어넣으면 더 단단해져요. 그것을 그늘에 말렸다가 불에 구운 뒤에 대나무로 문질러서 반질반질하게 하면 그릇에 윤이 나는 것처럼 됩니다.”

“(청중들)오∼”

“구슬을 만들어서 갖고 노는 방법은 두 가지였습니다. 구슬치기와 구슬 깨뜨리기였는데, 그 중에 구슬 깨뜨리기는 서로 구슬을 부딪쳤을 때 누구 것을 깨뜨리느냐를 겨루는 놀이였습니다. 그러니까 구슬을 단단하게, 잘 만들어야 되지요. 연도 마찬가지예요. 연은 첫째, 멀리 날아야 되고, 둘째, 연 싸움을 붙여서 이겨야 됩니다. 연 싸움을 붙인다는 건 ‘줄 끊어먹기’를 하는 거예요. 줄 끊어먹기에서 이기려면 연도 잘 날아야 되지만 다른 연의 줄도 잘 끊어야 돼요. 그러려면 연줄을 잘 만들어야 해요. 사기그릇을 잘 갈아서 가루를 만든 뒤에 풀에 개어 연줄에 먹여 바짝 말리죠. 그런 연줄로 상대편과 겨루면 상대편 연의 줄이 빨리 끊어지지요. 실은 명주실이 제일 강해요. 무명실은 무거워서 연이 그 줄의 무게를 견디기가 어렵고, 또 잘 끊어지기도 하지요. 연은, 목줄의 각도를 몇 도로 해야 바람을 잘 받느냐? 꼬리를 어느 정도 길이로 해야 되느냐?’ 계속 연구를 해야 해요.

팽이도 만들었어요. 형들이 하는 걸 보고 자기 나름대로는 잘 만들려고 굉장히 노력을 합니다. 친구들과 놀 때 팽이를 줄로 쳐서 돌려놓고 집을 몇 바퀴를 도느냐 내기를 하는데요, 어떤 때는 팽이가 집을 세 바퀴 돌때까지 돌다 넘어지고, 어떤 때는 다섯 바퀴 돌때까지 돌다 넘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팽이가 오래 돌도록 하려면 어떤 나무를 써야 되느냐? 생나무를 쓸 것이냐, 말린 나무를 쓸 것이냐?’ ‘또 팽이의 아랫부분, 아래로 갈수록 뾰족해지는 부분의 길이를 얼마만큼 할 것이냐?’ 팽이의 굵기에 따라서 길이를 조절해야 되거든요. 또 팽이의 맨 밑 부분, 팽이를 자꾸 돌리면 그 부분이 잘 닳으니까 거기에 못을 박거나 베어링, 즉 작은 쇠구슬을 박아야 돼요. 그때도 균형을 잘 잡는 게 중요합니다. 또 ‘팽이를 때리는 채를 무슨 줄로 하느냐? 닥나무로 하느냐? 삼으로 하느냐?’도 중요합니다. 그렇게 팽이를 길게도 만들어보고, 짧게도 만들어보고, 이 나무로도 만들어보고, 저 나무로도 만들어보고, 밑에 쇠구슬을 이걸로도 박아보고, 저걸로도 박아보는 등 친구들과 경쟁하면서 수없는 시행착오를 통해 팽이에 자꾸 변화를 주는 거예요. 실패하면 버리고 또 새로 만들고 그러느라 손이 다 상처투성이였어요.

그러니까 그런 걸 끊임없이 연구를 해야 되는 거였어요. 벤치마킹도 했어요. ‘누구 거 좋더라’ ‘어느 집 형이 잘 만든다’ 그러면 그 형 집에 가서 보고 온 뒤에 스스로 만들었어요. 그 시절에 장난감은 가끔 친형이 만들어주기도 했지만 거의 대부분은 스스로 만드는 거였어요.

그러니까 이런 작업이 결국은 작업을 이렇게도 해 보고, 저렇게도 해 보는 식으로 연구하는 자세와 해 보고, 또 해 보는, 그런 자세의 기초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그래서 제가 비교적 조기교육을 잘 받았다고 말하는 거예요.(모두 웃음) 그때 만약 부모가 부유해서 장난감을 사줬거나 했다면 그렇게 연습할 여유가 없었겠지요. 또 도시에서 태어났더라면 그렇게 만들 기회도 없었겠지요. 또 시골이라도 부잣집에서 태어났더라면 머슴이 해 주거나 누구 잘 만드는 사람이 해주는 걸 받아서 놀았겠지요.
제 창조력은 시골의 가난한 집에서 자랐기 때문에 형성이 가능했던 것 같아요. 보통 사람들은 ‘전생에 복을 많이 지어서 이생에 부잣집에 태어났다’고들 말하지만 저는 역으로 ‘내가 전생에 복을 많이 지어 이생에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조기교육을 받을 기회가 있었기 때문에 창조적인 사고를 갖게 되지 않았겠느냐’ 하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아이들에게 창조적인 교육을 시키려면 부모가 다 해 주면 안돼요. 아이들이 알아서 하도록 해야 하고, 더 좋게 하려고 아이들 스스로 애를 쓰도록 해야 해요. 그리고 정답이 없어야 해요. 그러니까 선생님이 과제를 줄 때도 ‘이 문제는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어서 아이가 ‘전 이렇게 하겠습니다’ 했을 때 선생님은 맞다, 틀리다는 판단을 하지 말고 ‘아, 그건 좋은 생각이다’, ‘저렇게 하면 되겠습니다’ 했을 때도 선생님은 ‘오, 그것도 좋은 생각이다’, ‘저는 이렇게 해 볼래요’ 했을 때도 선생님은 ‘오, 그것은 선생님도 생각을 못 해 본 방법이다.’ 이런 식으로, 어떤 시도든 다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다’라고 인정해 주는 게 중요합니다. 단, 아이가 앞뒤가 안 맞는 모순을 말할 경우에 그것은 지적을 해 줘야 됩니다. 저도 즉문즉설 할 때는 질문자의 모순만 지적합니다.

예를 들어 볼게요.
‘나이가 30살인데, 결혼을 아직 못 했어요.’
‘저도 아직 못 했어요. 30살까지 결혼 못한 게 무슨 큰일이에요? 나는 65살인데도 아직 못 했는데요. (모두 웃음) 안 해도 괜찮아요.’
‘결혼하고 싶어요.’
‘그래요? 그럼 하면 되지요.’
‘사람이 없어요.’
‘사람이 없어서 결혼을 못 하는 거예요? 눈이 높아서 못하는 거예요?’
‘저는 그렇게 눈이 높진 않은데요. 제가 부자를 원하는 것도 아니고, 지위가 높은 사람을 원하는 것도 아니에요.’
‘그럼 어떤 사람을 원하는데요?’
‘제 마음에 맞는 사람이요.’
‘그거야말로 진짜 어려운 거예요. 70억 인구에서 하나, 하나에 대한 정보를 다 컴퓨터에 넣은 뒤 질문자 맘에 맞는 사람을 검색어로 넣고 찾으면 ‘땡!’ 하는 소리와 함께 검색 결과가 없는 걸로 나올 거예요.(모두 웃음)’

제가 즉문즉설에서 여러분들과 이런 대화를 하는 거예요. 그럼 ‘결혼’이란 어떤 것이냐? 맞는 사람을 고르는 게 아니라 살면서 맞춰가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혼은 나이가 몇 살 됐을 때 하는 게 아니고, 돈이 얼마 있을 때 하는 게 아니고, 아파트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다른 사람과 맞춰가면서 살겠다’는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 때 바로 결혼할 준비가 된 거예요. 그게 안 된 사람은 결혼할 준비, 나와 다른 사람과 같이 살 준비가 안 된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결혼할 때 그게 준비됐는지 여부를 보는 게 아니라 아파트가 준비됐는지를 본단 말이에요. 아파트 같은 건 굉장히 부차적인 거예요. 이렇게 자기 생각의 모순을 지적해 주어야 해요.

그런데 결혼할 때도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하고, 이혼할 때도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한다면, 결정한 뒤에 늘 후회하게 된단 말이에요. 저는 그런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봐요. 한 번의 실수는 괜찮아요. 그러나 그 실수의 경험을 연구해서 ‘아, 그때도 그래서 이런 문제가 되었다면, 이번에는 그런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조금 더 살펴봐야 되겠다’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똑같은 행동을 아무 생각 없이 3번, 4번, 5번 반복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어리석은 사람이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제 이야기는, 삶에 대해 항상 연구를 해서 자기 삶의 어떤 모순을 조금씩 극복해 가는, 하루하루 지나면서 조금씩 발전해 가는 사유체계나 삶의 자세가 창조적이어야 된다는 겁니다. 호미를 하나 써도, 낫을 하나 써도 이렇게, 저렇게 해 보면서 어떻게 써야 효율적인지를 연구하게 자세가 바로 ‘창조’라는 거예요.

제가 중학교 때 자취를 했는데, 제 옆방에 자취하는 친구가 3일마다 한 번씩 연탄불을 꺼뜨리는 거예요. 그래서 항상 저한테 ‘연탄불 붙여 달라’고 부탁했어요. 그 친구는 처음에 연탄불을 1번, 2번, 3번 꺼뜨릴 때 연탄불의 성질에 대해서 연구를 하고, 또 그에 따라 주의를 해야 되는데 그러지 않았기 때문에 매번 연탄불을 꺼뜨렸던 거예요. 연구하는 자세를 통해 부주의로 연탄불을 꺼뜨리는 일은 반복하지 말아야 된다는 거지요. 그러려면 연탄불의 성질을 연구해야 되지요.
밥을 할 때도 마찬가지예요. 밥을 자꾸 해 보면 밥이 탈 때도 있고, 설익을 때도 있고, 죽이 될 때도 있는데, 해 보면서 불의 세기 등을 자꾸 바꾸어 가면서 연구해야 실패가 반복되지 않지요. 밥을 잘 하려면 첫째, 쌀이 어느 정도 건조되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햅쌀은 물에 너무 불리면 안 되고, 묵은쌀은 30분 정도 불려야 합니다. 묵은쌀과 햅쌀은 건조도에 있어서 차이가 있잖아요. 햅쌀일 때는 물을 조금 적게 넣고 밥을 해야 하고, 묵은쌀일 때는 조금 많이 불리고 물도 조금 더 넣어서 밥을 해야 합니다. 또 불의 온도는 처음에는 세게 하고, 끓을 때부터는 온도를 낮춰서 천천히 뜸을 들여야 하고요. 계속 온도를 높인 채로 끓여버리면 밑은 타고, 위는 설익게 되지요. 또 냄비 밥을 할 때는 뚜껑을 딱 닫아서 눌러놔야 돼요. 요즘은 전기밥솥으로 밥을 하니까 그럴 필요가 없지만 냄비 밥을 할 때 뚜껑이 가벼우면 내부의 온도가 100도가 안 되는데, 뚜껑을 돌로 눌러놓거나 해서 무겁게 해 놓으면 내부의 온도가 100도가 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산에 가서 밥을 할 때는 뚜껑 위에 돌을 얹어야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산에 올라가면 기압이 낮기 때문에 물이 100도가 안 돼도 끓어버리거든요. 그러면 밥이 설익게 되지요.

이런 식으로 연구를 해서 밥을 하면 처음에는 밥을 잘못 지었더라도 몇 번 거듭 하다보면 밥이 제대로 되는 겁니다. 그런데 3층밥 지었다가 2층밥 지었다가 죽 만들었다가 고두밥 만들었다 하는 사람은 연구하는 자세가 없는 거죠. 결과가 잘못 나오면 그것을 살펴서 뭐가 잘못됐는지를 알아보고 조정하는 게 아니라, 잘못 나오면 불평하거나 그냥 포기하거나 될 대로 되라는 식이 되어 버리지요. 아니면 남한테 해 달라 그러는 거예요. 그러는 것은 삶의 자세가 잘못 되어서 스스로 창조적으로 문제를 해결 할 줄 모르기 때문이에요.

그러면 왜 한국은 지금과 같은 이런 교육을 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지난 100년 동안 우리가 선진국을 롤 모델로 삼고 따라 배우기, 모방 교육을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교육은 ‘O, X’, 즉 ‘정답 맞추기’였어요. 그런데 앞으로 미지의 세계에는 답이 없어요. 그래서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불확정성 때문에 ‘어떤 것이 더 유리하다’, ‘확률이 높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그것이 반드시 맞다’고 말할 수는 없거든요. 그러니까 교육시스템이 전체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는 ‘창조나 연구’라 그러면 습관적으로 무슨 첨단과학기술만 생각하는데, 우리의 일상생활에도 창조나 연구가 필요하지요. 연애의 경우에도 여러분들은 한번 연애해 보고 헤어지면 상대에게 배신감을 느끼면서 미워하거나 원망하거나 울기만 하지요. 그런데 사실은 ‘뭐가 잘못됐던 거지?’ 이렇게 연구해야 될 거 아니겠어요? 그렇게 연구하면 5번 정도 실패한 후에는 연애박사는 물론, 어떻게 인간관계를 맺어야 될지에 대해 많이 알게 될 거 아니겠어요? 그런 자세가 바로 ‘창조’입니다.

그럼 그런 삶에 대한 기본자세가 여러분들에게 왜 부족할까요? 여러분들이 어릴 때부터 그렇게 연구하는 자세를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이지요. 여러분이 밥 달라고 하면 부모가 밥 주고, 옷 달라고 하면 옷 주고, 장난감 달라고 하면 장난감 주고 그러니까 ‘왜 쟤는 좋은 거 주는데, 나는 나쁜 것만 주느냐?’ 이런 생각만 했지, 어떻게 만들어야 되는지, 어떻게 하면 잘 될지를 연구해 본 경험이 거의 없잖아요.

지금까지 이런 교육이 효과를 본 이유는, 우리 사회 전체가 모방적 사회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겁니다. 그런데 미래사회는 누구도 가보지 않은 미지의 세계라는 거예요. 20년 후에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는 직업 중에 어떤 게 없어질지, 어떤 직업이 생길지는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겁니다만, 지난 경험을 살펴보면 지금 있는 직업 중에 상당수는 앞으로 없어질 거라는 거예요. 가장 대표적으로 10년, 20년만 지나면 택시기사가 필요 없어질 거예요. 이미 무인자동차가 나와 있고, 더 발전해 갈 것이니까요. 인터넷뱅킹을 이용함에 따라서 은행 직원도 없어질 수도 있어요.

제가 스님을 그만 둔다면 가질 수 있었던 직업 중에는 첫째, 수학 선생, 둘째, 여행 가이드, 셋째로 택시기사입니다. 제가 길을 잘 알고, 지도를 잘 보기 때문인데 이 세 가지 직업 중에 벌써 하나는 없어져버렸어요. 바로 택시기사입니다. 제가 길을 잘 안다는 건 더 이상 저의 재능이라고 말할 수가 없게 되었어요. 제가 미국이나 유럽을 가도 거기 사는 사람이 운전석에 앉으면 제가 조수석에 앉아서 지도를 보고 ‘어디로 가자. 어디로 가자’고 할 정도였는데 지금은 네비게이션한테 밀렸어요. 요즘에는 네비게이션이 교통체증 정보를 위성으로부터 받아서 파악도 해주니까요. 그렇지요?”

“(청중들) 예.”

“그래서 지금은 차만 타면 자요.(모두 웃음) 저보다 네비게이션이 훨씬 낫기 때문에. 이렇게 우리가 가진 재능 중에 여러 재능이 아무 쓸모없는 시대가 되는 때를 직면하게 된 거예요. 앞으로 또 어떤 우리의 재능이 순식간에 없어져버릴지 몰라요.

그런 것처럼 앞으로는 우리가 배운 것 중에 이렇게 단순지식을 쌓는 건 언제든 기계가 대신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창조는 기계가 대신하기 굉장히 어려운 문제예요. 기계란 우리가 모든 경우에 대한 정보를 일일이 다 입력해야 작동하는 거니까요. 그렇지만 앞으로는 우리가 굳이 조작하지 않아도 제 스스로 업그레이드를 하는 인공지능이 나올 겁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진화하는, 그런 임계점을 넘어버리면 상황은 엄청 달라질 겁니다.

앞으로 우리 앞에 펼쳐질 사회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발전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봐온 사회의 모습과 그것을 기준으로 형성된 윤리와 도덕으로는 감당하기가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철학도 바뀌어야 합니다. 새로운 사회에서는 이런 새로운 현상도 해명할 수 있는 새로운 철학과 사상이 요구될 것입니다.

새로운 사회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유가 창조적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종교나 철학이라고 부르는 많은 사상들은 짧게는 천 년, 길게는 2천 년 전 당시 등장하던 새로운 사회의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 등장한 사상들입니다. 물론 등장할 당시에는 획기적인 사상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까지도 2천 년에 등장한 사상들에 머물러 있는 사고는 낡은 방식이라고 볼 수 있어요.

어떻게 보면 우리가 고등 종교라고 부르는 사상들이 등장할 당시에는 그 사상이 가장 진보적이었는데, 요즘에는 가장 보수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어요. 예수님이나 부처님은 당시 가장 진보적인 사람들로서 미래를 내다보았는데, 오늘날 종교지도자들은 가장 보수적인 모습을 보이곤 해요. 요즘 어린 아이들도 학교에서 진화에 대해 배우는데, 여전히 진화를 받아들이지 않고 신의 창조를 주장하는 종교지도자들이 있잖아요. 이런 모순을 극복해가는 데에도 정답이 없는, 실제의 모습은 어떠한지 연구하는 창조적 사유가 필요합니다.

우리들의 사유도 가만히 보면 이러한 모순들을 많이 안고 살아갑니다. 이렇게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을 스스로 자각 하지 못하는 것이 어리석음입니다. 사실 스님과의 대화는 이러한 모순을 자각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어요. 스님이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질문자가 이야기하는 것 중 앞뒤 모순이 있는 것을 알려주는 거예요.

자기 안의 모순을 깨우치면 우리들의 삶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힘들지 않습니다. 그 모순을 깨우치면 누가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라고 말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다시 말해, 창조적이라는 것은 정해진 정답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이것이 창조적인 것이다’라고 정해버리면 그 순간 그건 더 이상 창조적이지 않게 되어버려요. 그러니 창조적이라는 것은 정해진 것 없이 끊임없이 연구하는 거예요. 실패를 하더라도 실패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 실패를 두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연구하는 거예요. 원인을 규명해서 ‘이번에는 이걸 조금 개선해보자’하고 시도해보고, 다음에는 ‘저걸 한 번 개선해보자’하고 시도해보고 그렇게 시도와 실패를 반복하는 게 정상이에요. 그러면 실패, 연구, 수정, 재시도를 통하는 과정이 바로 창조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창조는 우선 사유체계가 자유로워야 합니다. 기독교 신자라면 ‘하느님이 진짜 있을까?’하는 생각도 해볼 수 있어야 하고, 불교 신자라면 ‘부처님이 깨달으셨다고 하는데, 깨달음이 대체 무엇이고 또 깨달으면 무얼하는가?’하는 생각도 해볼 수 있어야 합니다. 불신의 의심이 아니라, 듣는 대로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고 실제는 어떠한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에요. 이 정도 생각의 자유 없이는 창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사회 시스템 적으로 창조성을 기르려면 실패를 용납해주는 시스템이어야 합니다. 당사자가 불법을 저질렀거나, 비도덕적이거나 혹은 게을러서 실패를 했다면 그에 따르는 책임이 있어야겠지만 그 사람이 최선을 다했는데도 실패했다면 창조라는 것 자체가 실패가 다반사이고 실패가 늘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시 시도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해주는 시스템을 갖추어야 합니다.

투자비용을 다른 데 썼다면 모를까, 성실하게 최선을 다했는데도 결과가 좋지 않다면 그건 사실 실패가 아니라 실험을 했는데 그 결과가 예상과 달리 나온 것이니까 부족한 점을 개선해서 다시 도전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사회적 시스템이 이렇게 바뀌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예요. 전통적인 교육대학교, 사범대학교를 나온 선생님들이 여러분들을 가르쳤고, 또 여러분들은 그 시스템 안에서 배우면서 자격증을 따고 또 지금 다음 세대를 가르치고 있는데 지금 배우는 아이들에게 하루아침에 창조성을 기대하기는 어렵겠죠.

그러니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이런 문제의식을 갖는 것이 창조성의 출발점입니다. 여러분들도 모방식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창조성을 기르는 교육을 하기는 어렵겠지만, 그런 와중에도 틈틈이 실험을 해야 합니다. 정답내기를 하지 말고, 아이들이 이렇게도 또 저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해요.

창조성을 기르는 일은 전반적으로 시간이 걸리는 일입니다. 스님이 여러분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도 사실 여러분들의 사유 체계를 조금 더 유연하게, 보다 자유롭게 해주려는 취지가 큽니다. 예를 들어, 이성 친구와 헤어지면 ‘어떻게 나를 배신할 수 있나’하는 생각 밖에 안 하는 것 같아요. 그럴 때 스님은 그 상황을 달리 바라볼 수 있는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제시해주는 거예요. 사실 같은 상황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는 것 자체가 창조성을 기르는 훈련이고 교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청중 박수)

집중된 대화의 시간이 무르익어 갈수록 밤도 깊어졌습니다. 스님은 모든 일정을 마무리 하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였습니다.

“인간관계든 뭐든 자기 삶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연구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삶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도 시험보고 버리듯이 일회용으로 공부합니다. 이왕 공부하는 거 내 삶에 지속적으로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하는 게 좋잖아요.

그럼 어떻게 공부를 하면 내 삶에 오래도록 남는 공부가 되느냐? 스스로 필요에 의해서 연구를 하는 공부는 자연스레 그렇게 됩니다.

그러니 부잣집에 태어나서 좋은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보다는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되도록 장난감을 잘 만들어보려고 노력하고 연구하는 것이 훨씬 더 좋은 교육입니다. 아이들에게는 뭐든지 해주는 것도 좋은 게 아니고 뭐든지 안 해주는 것도 좋은 게 아닙니다. 심리적으로는 상처입지 않도록 하되 늘 자기 일은 스스로 해보는 기회를 제공해주어야 해요. 그래야 아이 스스로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는 길이 열립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서, 오늘 잠자리가 다소 불편할 수 있겠지만 불편하다고 불평만 하지 말고, 하루 정도는 불편한 잠자리도 가져보고 하루 정도는 입에 잘 맞지 않는 음식도 먹어보고 하루 정도는 고단하게 보내보기도 하고. 이 모든 것이 다 경험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시정하면 좋겠다 싶은 게 있으면 마무리할 때 건의사항을 제안할 수 있잖아요. 그러지 않고 불평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불평한다고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부터 삶 전체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연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말씀을 다시 한 번 드립니다. 그럼 내일도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흥무공원에서 벚나무 아래 스님을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던 남학생들의 이야기가 기억났습니다. 그 남학생들의 느낌이 참 공감되는 밤입니다.

함께 만든 사람들
임혜진 손명희 정란희 조태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