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7. 04. 14. 봉화수련원 방문
천성은 타고나서 절대 변하지 않는 건가요?

오늘은 봉화수련원에서 아침을 맞이합니다.
봉화수련원을 방문하기에 앞서서 대전 동구청에서 있었던 ‘행복한 대화’ 중 한 사례를 나누고 시작할까 합니다.

“다음 질문자는 행복학교 학생이네요. 네, 질문하세요.”

“아이를 봐도 그렇고 어른을 봐도 그렇고, 사람은 그 사람만이 갖고 있는 그릇이 다 다른 것 같습니다. 그런 걸 두고 ‘천성’이라고들 하는 것 같은데요, 경험적으로 보면 그릇이 늘어나는 사람도 있지만 아무리 고난을 겪어도 그릇이 늘어나지 않는 경우도 있는 것 같아서 ‘천성’이라고 불리는 그 그릇은 정말 타고난 그대로 살게 되는 것인지 아닌지가 궁금합니다. 경험이나 고생을 했을 때 늘어나는 건지, 아니면 그냥 그 인생 자체로 끝나는 건지 궁금해서 질문 드립니다.”

“여러분들도 아마 그런 문제들이 궁금할 텐데, 이렇게 한번 얘기해 봅시다. 사람의 키가 태어날 때 ‘너는 몇 미터까지 자라라’ 하고 정해져 있을까요, 정해져 있지 않을까요?”

“정해져 있어요. 정해져 있지 않아요.”(청중 웅성임, 다양한 대답)

“이런 건 정해져 있다고도 말할 수도 있고 정해져 있지 않다고도 말할 수 있어요. 같은 사람이라도 영양 공급이나 이런 걸 잘 하면 달라질 수 있잖아요. 영양공급이 제대로 안 되면 1미터 50센티미터가 될 수도 있고 잘 하면 1미터 80센티미터가 될 수도 있겠죠. 후천적으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1미터 50센티미터가 될 수도 있고 1미터 80센티미터가 될 수도 있으니까 정해져 있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자란다 해도 사람의 키가 3미터를 넘을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어요.”(청중 대답)

“그러면 ‘이 사람이 아무리 해도 3미터 키는 못 넘는다’ 하는 건 정해져 있어요, 정해져 있지 않나요?”

“정해져 있어요.”(청중 대답)

“예, 정해져 있어요. 그러니까 기준을 뭘로 하느냐에 따라서 ‘정해져 있다’, ‘정해져 있지 않다’ 이런 말을 쓸 뿐이고 존재 자체는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안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에요. ‘기준을 뭘로 하느냐’에 따라 다르다는 얘기예요.”

“어린아이인데도 불구하고 이해심이 풍부한 아이들이 있고, 어른인데다가 고생도 많이 한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소갈머리가 없다, 속이 좁다, 그릇이 종지만 하다’ 이렇게 표현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아서...”(질문자 웃음, 청중 웃음)

“질문자가 그걸 두고 ‘좋다, 나쁘다’ 하는 기준을 갖고 보니까 그렇죠. 그건 좋고 나쁜 게 아니라 서로 다른 거예요.
얼굴 생긴 게 서로 다른데 우리는 그걸 두고 ‘잘 생겼다’, ‘못 생겼다’라고들 말해요. 그런데 객관적으로는 두 사람의 얼굴이 다른 거예요. 그런데도 이 사람은 잘 생기고 저 사람은 못 생겼다고 말하는 기준이 뭘까요? 기준이란 본래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객관적으로는 서로 다를 뿐이에요. 그런데 주관적으로는 잘 생겼다거나 못 생겼다고 말할 수 있는 거예요.
아까 얘기했잖아요. 존재 자체는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닌데 우리가 인식을 할 때는 크다고 인식을 할 수도 있고 작다고 인식할 수도 있어요. 존재 자체는 잘 생긴 것도 없고 못 생긴 것도 없지만, 우리가 인식을 할 때는 그 사람의 인식 습관에 따라서 잘 생겼다고 인식하는 사람도 있고 못 생겼다고 인식하는 사람도 있는 거예요.

만약에 사람이 객관적으로 평가가 된다면 서로 사귀다가 내가 ‘에이, 나쁜 인간이다’ 하고 헤어진 남자는 모든 여자가 관심을 안 가져야 하잖아요. 그런데 나와 헤어진 남자를 다른 여자가 사귀고요,(청중 웃음) 나도 다른 여자와 헤어진 남자를 만나고요. 아까 질문자는 남편이 바람을 피워서 헤어지려하던 참인데, 바람을 피운다는 건 질문자가 아닌 다른 여자는 이 남자와 만난다는 뜻이잖아요.

또 이 남자가 계속 한 여자만 안 만나고 늘 바람을 피웠다는 말은 고정돼 있지 않고 상대를 계속 바꾼다는 거예요. 그렇게 바꾼다는 건 심리적으로 불안하다는 증거예요. 그러니 ‘바람을 피웠나, 안 피웠나?’ 이렇게 아내 입장에서 보면 문제가 크지만, 스님이 볼 때는 ‘아, 저 남자는 심리적으로 불안하구나’ 이렇게 보여요. 심리적으로 불안하기 때문에 한 사람한테 꾸준히 붙어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남편은 바람 피워도 별로 걱정할 게 없어요. 살림을 차릴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하니까요. 나한테만 못 붙어 있는 게 아니라, 딴 여자한테 가서도 못 붙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불쌍해 보이죠. 어디 한 군데 가서 딱 붙어 있었으면 벌써 끝이 났을 텐데, 이렇게 돌고 있는 거예요.

그런 것처럼, 어떤 것도 그것이 ‘잘했다, 잘못했다’ 할 수 있는 건 없어요. 기준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서 ‘잘했다’고도 할 수 있고 ‘잘못했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거든요. 기준을 어떻게 정하느냐가 문제예요. 그러니까 사람의 키를 150센티미터를 기준으로 하면 ‘잘 먹이면 그 기준을 넘길 수 있고 못 먹이면 못 넘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지만, 3미터를 기준으로 하면 사람이 아무리 노력해도 3미터는 넘길 수가 없으니까 ‘그건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거예요. 반드시 노력한다고 된다거나 노력한다고 안 된다는 게 아니에요. 어느 게 꼭 맞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뭘 기준으로 하느냐에 따라서 ‘노력하면 된다’라는 말을 쓸 때도 있고 ‘노력해도 안 된다’라는 말을 쓸 수도 있는 거예요.

제가 TV로 올림픽 경기를 보다가 어떤 선수가 100미터를 10초에 달리는 모습을 보고 ‘야, 나도 해 봐야겠다’ 해서 10초를 목표로 3년을 연습해도 될까요, 안 될까요?”

“안 되죠.”

“안 되겠죠? 그런데 스님이 지금 뛰어보니까 100미터를 25초에 달린다고 합시다. 그러면 석 달 노력해서 24초에 뛰는 것을 목표로 하면 기록을 바꿀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가능하겠죠? 안 될 수도 있지만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에요. 그러면 스님은 25초에 뛸 수밖에 없다고 정해져 있는 게 아니잖아요. 24초까지 뛸 수도 있고, 더 연습하면 23초까지 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제 소질과 나이에 10초는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10초가 안 된다는 면에서는 정해져 있고, 25초에서 24초가 가능하다는 면에서는 안 정해져 있다고 볼 수 있는 거예요.”

“...”(질문자 침묵)

“자, 여기 두 사람을 보세요. 이 두 사람은 같은 사람이에요, 다른 사람이에요?”

“다른 사람.”(청중 대답)

“다른 사람이죠? 그런데 옆에 개가 있어서 개하고 이 두 사람을 비교한다면 이 둘은 같은 사람이에요, 아니에요?”

“같은 사람.”(청중 대답)

“같은 사람이죠? 두 사람을 두고 무엇과 비교하느냐에 따라서 어떤 때는 ‘둘은 다른 사람’이라고 말하고 어떤 때는 ‘둘은 같은 사람’이라고 말하잖아요.

파란 콩과 노란 콩을 두고 비교하면 서로 다른 콩이에요. 그런데 팥하고 비교할 때는 색깔이 파랗고 노랄 뿐이지 둘 다 같은 콩이에요. 콩하고 팥은 서로 다르지만, 채소하고 비교할 때는 둘 다 같은 곡식이에요. 채소하고 콩은 다르지만, 돌멩이하고 비교하면 같은 음식이에요. 그러니까 용어를 ‘같다’라고 쓰기도 하고 ‘다르다’라고 쓰기도 하는 거예요. 그러면 같은 걸까요, 다른 걸까요? 진리는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에요. 인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같다고 인식될 때도 있고 다르다고 인식될 때도 있다는 거예요. 이해하시겠어요?”

“예.”

“아까 바람피운 남편의 사례를 다시 생각해 봅시다. ‘나 말고 딴 여자를 만났느냐?’를 기준으로 잡으면 이 남자는 나쁜 남자예요. 그런데 기준을 뭘로 보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져요. ‘청소를 해주느냐?’ 이 기준으로 보면 어때요, 좋은 남자죠?(청중 웃음) 그러니까 이 기준이란 게 이렇게 하니 괜찮고 이렇게 하니 나쁘고, 그래서 지금 헷갈리는 거예요. 스님도 지금 ‘스님’이라는 기준으로 보면 괜찮은 사람이에요. 그런데 만약 스님이 결혼을 했는데 지금처럼 집에도 안 들어오고 매일 무료 강연이나 다니면 부인이 볼 때는 좋은 남자예요, 나쁜 남자예요?”

“나쁜 남자요.”(청중 대답, 웃음)

“그래요. 스님은 좋은 사람도 아니고 나쁜 사람도 아니에요. 어떤 기준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좋게 보기도 하고 나쁘게 보기도 하는 거예요.
그러니 여러분들이 ‘좋다’, ‘나쁘다’ 하는 건 다 어떤 기준에 따라 생긴 거예요. 우리가 어떤 사람은 ‘박근혜 나쁘다’ 하는데 또 어떤 사람은 좋다고 목숨 걸기도 하는 거예요. ‘마마!’ 이러는 사람도 있잖아요.(청중 웃음) 어떤 사람은 그게 웃기지만 그 사람 기준에는 또 ‘마마!’라고 부르지 않는 사람들이 이상한 거예요. 기독교 기준에서 보면 불교는 귀신 믿는 것 같고, 불교 기준에서 보면 기독교는 엉터리 같죠. 이렇게 기준에 따라서 다르다는 거예요. 이 기준을 내려놓으면 사물은 그냥 ‘믿음이 다르다’, ‘사상이 다르다’, ‘사람이 다르다’, 이렇게만 볼 수 있어요.”

“네. 감사합니다.” (청중 박수)

새벽이 밝았습니다. 희광법사님의 도량석 소리에 봉화수련원이 어둠에서 깨어납니다. 정성으로 아침 예불과 천일결사 기도를 마쳤습니다.
아침 공양 상에 쑥 된장국이 올라왔습니다. 희광 법사님이 아침에 캔 쑥으로 최보살님께서 쑥국을 끓여주셨습니다. 봄의 조촐한 아침 공양 상입니다.
공양을 마치고 스님은 봉화 수련원 뒷산으로 산책을 갔습니다. 봉화 수련원 뒷산은 송이가 나는 것으로 유명하다는데 희광 법사님은 ‘송이 자리는 아들한테도 안 가르쳐 주는 것’이라 한다며 아직 보지 못했다 하였습니다. 스님은 경주에서는 이제 지고 있는 진달래가 봉화에서는 한창 필 무렵인데 확인도 할 겸, 가볍게 산길을 올랐습니다.

“봉화는 진달래보다 연달래가 훨씬 많구나.”

올라가는 기슭에 피어있는 진달래보다 이제 꽃봉오리가 움트는 연달래 가지들이 많아 보였습니다. 진달래가 지고 나면 초록색 잎과 함께 진달래보다는 조금 큰 꽃잎, 연달래가 피는데 봉화 수련원 뒷산에는 연달래 나무들이 훨씬 많이 밀집해 있는 듯합니다.

길을 잘못 들어서서 가시나무 사이로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느라 몸을 한껏 움츠리고 다니는데 선두로 가던 스님이 이야기 하였습니다.

“산 속에서 길을 잘못 들면 묘를 찾으면 된다. 묘에는 분명히 길이 있게 마련이거든.”

바로 앞으로 무너진 봉분이 보입니다. 스님은

“길이 이쪽으로 나 있네.”

하며 길을 따라 내려갔습니다. 돌아와 보니 봉화 수련원 법당 쪽을 둘러 내려오는 길입니다. 내려오는 길에 스님이 응개나무(엄나무)를 발견하였습니다. 가시가 돋혀 있는 응개 나무 가지 끝에 응개나무 순이 예쁘게 달려 있었습니다.

“자연산 응개나무 보기가 쉽지 않은데 여기에 있네. 이것 봐라. 순도 달려 있다.”

산초나무나 제피나무, 진달래와 연달래 나무를 구분하는 법, 송이 채취를 한 흔적들, 잠깐이지만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입니다. 자연 체험 학습을 하는 기분입니다.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 짧은 코스로 산책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희광 법사님이 남아 있는 야채와 과일로 간단한 간식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연달래가 필 즈음, 다시 오겠다고 인사하며 봉화수련원을 나왔습니다.
춘양, 백암을 지나 영덕, 포항, 경주를 거쳐 두북으로 돌아왔습니다.

함께 만든 사람들
임혜진 손명희 정란희 조태준

전체댓글 11

0/200

이소룡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으시길 모두 바랍니다
아멘

2020-09-07 16:48:51

긍정의에너지

늘 스님 즉문즉답 잘보고있습니다
깨우쳐 주시는 말씀 감사드립니다^^*
아미타불()

2017-08-23 10:38:30

이주광

감동또감동입니다

2017-08-09 21:55:12

전체 댓글 보기

스님의하루 최신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