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7. 04. 15 두북 농사 울력
사람을 만날 때 어느 정도로 마음을 열어야 할까요?

오늘도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즉문즉설 한 사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인간관계에 대하여 어려움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아 지난 청년대학생 경주순례에서 ‘관계’에 대하여 질문한 것이 있어 실어보았습니다.

“저는 사람을 만날 때 어느 정도로 제 마음을 열거나 경계를 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사람을 만날 때면 복잡한 마음이 드는 것 같습니다. 스님 법문 중에서 굉장히 인상 깊었던 법문은, 자존감이 낮은 분께 스님께서 ‘모든 사람을 대할 때 좋은 점을 찾는 연습을 하고, 길에 있는 돌멩이나 풀 한 포기를 보고도 좋아하는 연습을 해 봐라. 그러면 돌멩이도 예쁜데 어떻게 자신이 예뻐 보이지 않겠느냐’고 했던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렇게 실천해 보려고 했는데, 요즘 세상이 워낙 무섭기도 하고, 그래서 제가 너무 마음을 열면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는 조언을 많이 들은 데다가, 실제 제가 여기 저기 많이 따라가 본 경험도 있어서요,(모두 웃음) 제가 굉장히 혼란스럽습니다. 제가 어느 정도로 사람을 경계하거나 어느 정도로 마음을 열어야 하는지요?”

“지금 질문이 저에게 많이 묻는 대표적인 질문 중 하나인데요, ‘어느 정도로 경계해야 하고, 어느 정도로 믿어야 하느냐’고요? 일단, 너무 경계하면 의심병에 걸릴 것이고, 너무 믿으면 맹종하게 되겠지요. 그 기준을 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질문자 스스로 연습을 해야 돼요. ‘믿어보니까 약간 지나치다’ 싶으면 경계를 해보고, ‘경계를 해 보니까 약간 지나치다’ 싶으면 다시 믿어보는 식으로요. 이 두 가지를 조금씩, 조금씩 다 해 보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한번은 확 믿었다가, 한번은 확 경계했다가, 그러면서 ‘이래도 실패하고, 저래도 실패하는데, 나보고 어쩌란 말이냐?’고 할 게 아니라 ‘믿음이 지나쳤다’ 싶으면 반작용으로 경계를 해 보고, ‘경계가 지나쳤다’ 싶으면 다시 믿어보되, 전에 갔던 것보다 조금 덜 가보는 거예요.

이렇게 2번, 5번, 10번, 20번, 50번, 100번 해 보면 양쪽, 즉 ‘경계와 믿음’의 균형을 적절하게 조정해 나갈 수 있을 겁니다. 스스로 그것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건 제가 얘기해 준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질문자의 질문에 스님이 매번 얘기해 주면 질문자는 죽을 때까지 스님한테 물어봐야 할 거예요. 그러면 질문자는 인생을 사는 데 있어서 실수가 적어질지는 몰라도, 사유와 판단의 자유를 잃게 되지요. 이와 같은 이유로 여러분들이 훌륭한 사람을 스승 또는 멘토로 두는 게 반드시 좋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거기에 너무 의지해서 ‘판단의 자생력’을 잃어버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제 말 이해하셨어요?”

“(청중들) 예.”

“훌륭한 스승의 말이라도 무조건 따르는 것은 좋은 게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훌륭한 스승은 제자의 자생력을 키워주는 사람입니다. 또, 좋은 부모는 자식한테 뭐든 다 해 주는 게 아니라 자식이 제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해 줘야 합니다. 그러니 요즘 부모들은 좋은 부모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요즘 부모들은 여러분들이 원하는 걸 다 해 줄지 몰라도, 그렇게 하는 게 여러분들이 자생력을 기르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20살이 되기 전에 자립을 해야 되는데, 30살이 되고, 결혼을 했는데도 여전히 부모에게 의지해서 산다면, 좋게 말해서 좋은 부모를 둔 거고, 나쁘게 말해서 아주 나쁜 부모를 둔 게 되는 거예요. 자녀 나이가 30살이 넘도록 자립할 수 있는 훈련을 안 시켰으니까요.
그런데 자연계의 모든 생물들은 어미젖을 뗀 뒤로부터 일정기간이 지나는 동안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자생력을 키웁니다. 예를 들어 새끼 제비가 어릴 때는 어미가 먹이를 날라다 먹이지만 시간이 지나서 새끼가 둥지를 날아가면 어미는 더 이상 새끼를 따라다니지를 않습니다. 그때부터는 더 이상 ‘새끼 제비’가 아닌 독립된 한 생명으로서 제비입니다.

그런데 첫째, 여러분들은 지금도 생물학적으로 독립된 삶을 살지 못하고 있잖아요. 부모한테 얹혀살잖아요. 둘째, 정신적으로도 독립이 안 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가끔 보면, 여러분들은 스님이 결정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질문을 하더라고요. 왜 스님이 여러분들의 인생에 간섭해서 ‘이래라, 저래라’며 대신 결정을 내려주겠어요? 예를 들어 결혼을 앞둔 사람들이 저한테 와서 ‘스님, 축하해 주세요’ 하면 저는 ‘그래, 축하한다’는 말을 절대로 안 합니다.(모두 웃음) 왜 그럴까요? 그게 축하할 일인지, 아직은 알 수가 없기 때문에.(모두 웃음) 조금 더 지나봐야 알지요. 그래서 저는 누가 ‘결혼합니다’ 그러면 ‘알았어. 너희가 결혼하는구나’ 합니다. 그런데 ‘스님의 주례사’를 가지고 와서 ‘여기 OOO와 OOO의 결혼을 축하한다고 써주세요’ 그러면 저는 그렇게 안 써줍니다. ‘OOO, OOO에게 드림’이라고만 쓰지요.

제가 ‘결혼을 축하한다’라고 쓸 수 없는 것은 ‘이혼을 축하한다’라고 쓸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결혼이나 이혼은 여러분들의 자유이니까 스님이 ‘결혼하는 게 좋다/이혼하는 게 좋다’고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결혼의 목표가 뭐예요? 이왕 결혼할 바에야 결혼하기 전보다 결혼한 후에 더 행복하려고 하는 거 아니겠어요?”

“(청중들) 예.”

“마찬가지로, 이혼 안 하는 것보다 이혼하는 게 더 행복할 것 같으니까 이혼하려는 것 아니겠어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청중들) 맞습니다.”

“예. 그러니까 첫째, 스님은 그런 걸 지적해 줄 뿐이에요. ‘당신은 지금 이혼하겠다는데, 이런 관점에서 이혼하면 나중에 후회할 수도 있다’거나 ‘당신은 지금 결혼하겠다는데, 이러, 이러한 상황에서 결혼을 한다면 곧 후회할 소지가 있다’고 지적해 주는 거란 말이에요. ‘궁합이 안 맞아서 그렇다’거나 ‘흑인이라서 그렇다’거나 ‘연령차이 때문에 그렇다’는 게 아니라 서로의 요구조건이 안 맞는, 그런 모순을 가지고 결혼하게 되면 결국 갈등이 심화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을 해 주는 거란 말이에요.

둘째, 그럼에도 결혼을 하겠다고 할 때 그냥 내버려 두는 이유는, 결국 갈등이 심화되어서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게 된다 하더라도 시정할 기회는 있잖아요? 뒤늦게라도 이치를 알고, 조정하면 또 시정이 되니까 제가 ‘결혼하라/마라’는 소리는 안 하지만 기혼자들에 대해서 문제를 시정할 수 있도록 조언을 하는 겁니다. 그런 얘기를 여러분들은 마치 스님이 이혼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처럼 듣는 모양이던데, 그렇진 않습니다. 스님은 ‘시정해서 다시 살아봐라’고 말해 왔거든요. 그런데 먼저 이혼을 해 버리면 시정할 기회는 없게 되잖아요. 그러니까 시정을 해 보고 안 되면 그때 가서 이혼하라는 얘기예요.

예를 들어 우리가 전쟁할 때 ‘계략’이라는 걸 세우잖아요. 그 계략에는 36가지가 있다는데, 맨 마지막 계략이 뭡니까? 도망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방법을 다 강구해 보고도 ‘지겠다’ 싶으면 어떻게 해야 된다고요? 도망가야 돼요. 그러니까 도망가는 게 나쁜 게 아니라 그건 ‘마지막 계략이 36계’입니다. 그래서 ‘안녕히 계십시오’는 마지막에 선택할 사항이기 때문에 그것을 처음부터 선택할 필요는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해 보지도 않고 도망가는 것부터 선택하잖아요. 그러면 ‘비겁하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는 거예요.

‘믿음과 경계’는 정해진 기준이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질문자가 경험해 보면서 결정해야 할 문제예요. 그러나 너무 남의 말에 혹해서 잘 따라가는 사람한테는 주변에서 ‘경계하라’며 주의를 좀 줘야 되고요, 너무 사람을 못 믿는 사람한테는 ‘제발 좀 믿어라. 믿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라고 말해줘야 되지요. 결국 그것은 치우침을 시정해 주는 것일 뿐, ‘믿으면 무조건 좋다’거나 ‘경계하는 게 무조건 좋다’는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늘 자기 체험을 통해 믿음과 경계의 균형을 잡아야 하지요.”

“그러면 제가 믿기로 결정을 했을 때 그에 따른 과보는 오로지 제가 감당해야 되는 건가요?”

“당연하지요. 달리 방법이 없어요. 왜냐하면 누가 선택했기 때문에?”

“(청중들) 내가.”

“예. 내가 선택했기 때문에. 그런데 과연 다음과 같은 말이 맞는지는 한번 검토해 보세요. ‘믿기로 결심했다.’ 이 말이 맞습니까? ‘하기로 결심했다’는 말은 맞는데, ‘믿기로 결심했다’는 말은 맞지 않아요. ‘믿음’은 저절로 그렇게 되는 거지, 결심할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 그러니 ‘내가 믿기로 결심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안 믿어지지만 억지로 믿어보려고 한다’는 뜻입니다. ‘저 인간을 못 믿겠지만 인물도 괜찮고, 돈도 좀 있는 것 같으니까 버리기는 아깝다. 그러니까 한번 믿어보려고 한다.’ 이렇게 자기 욕심 때문에 믿기로 결정하는 것뿐이에요.
‘결심’은 ‘의지’거든요. 그런데 믿음은 의지 이전에 자동으로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어야지!’ 한다고 믿어지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을 믿어야지!’ 하는 건 하나님이 믿어진다는 거예요, 안 믿어진다는 거예요?”

“(청중들) 안 믿어진다는 것.”

“예. 그런데 가장 확실한 믿음이란 뭘까요? 확실히 알아버리는 거예요. 확실히 알아버리면 ‘믿어야지!’라고 할 필요도 없이 저절로 믿어져요. 그래서 반야심경에 ‘반야바라밀다’, 즉 ‘확연히 깨쳐버리는 것, 확실히 알아버리는 것’은 믿음 중에 최고의 믿음이라고 해서 ‘대신주(大神呪)’라고 했습니다. 또 깨쳐버리는 것보다 더 나은 앎이란 없거든요. 그래서 또 ‘대명주(大明呪)’라고도 했지요. 우리가 그냥 지식으로 아는 건 틀릴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스스로 경험한 것은 지식을 넘어서는 문제거든요. 그래서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라고 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첫 번째가 믿음의 문제, 두 번째가 이해, 세 번째가 실천, 네 번째가 체험의 문제라는 뜻입니다. 이걸 한문으로 ‘신, 해, 행, 증(信解行證)’이라고 합니다. 이 4가지, 즉 ‘첫째 믿음, 둘째 올바른 이해, 셋째 실천, 넷째 체험’이 겸해져 있어야 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질문자가 ‘믿기로 결심했다’는 말은 좀 안 맞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생각이 아프다’고 하면 맞는 말이에요, 안 맞는 말이에요?”

“(청중들) 안 맞아요.”

“예. 그러면 ‘마음이 많다’는 말은 맞아요, 안 맞아요?”

“(청중들) 안 맞아요.”

“예. ‘생각이 많다’거나 ‘마음이 아프다’는 말은 맞지만 ‘생각이 아프다’거나 ‘마음이 많다’는 말은 안 맞지요. 우리의 정신작용을 굳이 나눠본다면, 절반은 이성적 작용, 즉 생각이나 사유에 해당되는 것, 나머지 절반은 마음이나 감정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정의 밑바탕은 무의식 세계로써, 마음은 무의식 세계의 영향을 받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유나 이성적 작용의 밑바탕은 의식 세계이고요. 그래서 우리의 정신작용에는 의식과 무의식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생각은 의식에 바탕을 두고 있고, 마음은 무의식에 바탕을 두고 있고, 이성은 의식에 바탕을 두고 있고, 감성은 무의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이성적인 것은 결심하거나 조율하는 게 가능하지만 감성적인 것은 결심하거나 조율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감성적인 것은 무의식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컨트롤이 안 되고, 나도 모르게 일어나거든요. 그래서 주로 ‘알아차리기’를 해야지, 참으면 터져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있는 거예요. 감정을 억제하면, 즉 ‘싫지만 해 보겠다’고 결심하면 3일을 못 넘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것은 굉장한 결심, 그냥 보통 결심을 해서는 안 되고 목숨을 건 결심, 즉 ‘대결정심(大決定心)’을 해야 겨우 컨트롤이 되는 거예요. 여러분 스스로를 돌아보세요. 뭘 결심해서 된 게 있어요?”

“(청중들) 아니요.”(모두 웃음)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결심을 해서 문제를 풀려고 해봤는데 잘 안 되면, 나중에 스스로에 대해서 굉장히 자학을 하게 됩니다. 자기가 뭘 해서 되는 게 없으니까요.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뭘 해서 안 되면 ‘의지가 약하다’고 말하는 거예요. 그러니 여러분, 섣불리 결심을 하면 안 되는 거예요. ‘담배 끊겠다’고 결심하면 안돼요. 주위에서 말들이 많거든요. 결국 실패하면 아내도 ‘남자가 자기가 한 말도 못 지킨다’고 구박하거든요. 원래 못 지키는 게 정상이고, 아내 스스로도 자기 한 말 지키면서 그런 소리를 한다고요.(모두 웃음) 그래서 ‘알아차림’만이 유일한 수행방법입니다. ‘내가 화를 안 내겠다’고 결심할 게 아니고 ‘내가 지금 화가 나는구나’ 하고 화가 날 때 화가 나는 줄 알아차리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방법입니다.

상대를 싫어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고 해서 싫어하지 않게 되는 게 아니잖아요? 그것은 이성의 컨트롤을 받지 않고 그냥 딱, 보면 싫은 마음이 무의식적으로 쑥, 올라오기 때문에. 그러니까 다만 ‘아, 내가 지금 싫은 감정이 생기는 구나’하고 알아차리기만 하세요. 알아차리면 어떻게 되느냐고요? 진정되는데 도움이 됩니다. 이것은 참는 것과는 성격이 달라서, 안 되더라도 ‘내가 하겠다’고 결심을 했던 게 아니기 때문에 자학증세가 안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고치려고 하지 말고 우선 알아차리기부터 하세요.

그러니까 질문자는 일단 ‘아, 내가 지금 약간 경계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구나’, ‘아, 내가 지금 무조건 저 사람 말을 믿고 싶어 하는구나. 따져보지도 않고 무조건 따라가려고 하는 구나’ 이렇게 알아차리세요. ‘그렇게 하지 말아야지!’ 이렇게 자꾸 결심을 할 게 아니라 알아차리기를 하게 되면, 우리에게는 심리적으로 ‘자정능력’이 있기 때문에 갈수록 좋아집니다. 인공지능은 아직 이 수준까지 못 왔는데, 우리 인간들은 알아차리게 되면 자율조절기능이 작동을 하거든요. 내가 지금 화가 많이 났는데, 남이 나에게 ‘너 화가 많이 났구나’ 하고 말해 주면 나는 싫은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나도 알아!’ 이러면서 거부하지요.(모두 웃음) ‘나도 알아!’라는 건 ‘나도 알지만 고치기는 싫어!’라는 뜻이거든요. 스스로 ‘내가 짜증이 많은 편이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것을 ‘자각’이라고 합니다. 자각을 하면 무의식의 세계에서 그것을 시정하려는 작용이 있게 됩니다. 이런 점이 인간 정신작용의 위대한 점입니다. 다른 생물한테는 없는 거거든요. 다시 말해서, ‘알아차림’이란 ‘자각’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못도 자각하면 고쳐지는데, 누가 야단을 치면 이성은 잘못한 걸 알아도 무의식에서 안 받아들이기 때문에 안 고쳐집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막 논리적으로 얘기하는 걸 들으면 머리로는 ‘그래, 네 말이 맞아’라고 수긍은 할지 몰라도 기분은 나쁘지요. 그런 경우가 있어요, 없어요?”

“(청중들) 있어요.”

“그러면 속으로 뭐라고 합니까? ‘말은 잘 하네’ 그러잖습니까? (모두 웃음) 말은 맞는데, 듣는 나는 기분이 나쁘니까 뭐라고 한다고요? ‘말은 참 번지르르∼하게 잘 하네’라고 비꼬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두 가지 정신작용이 서로 다른 겁니다. 그러니까 ‘믿으려고 노력한다’는 건 ‘안 믿어진다’는 뜻입니다. ‘노력한다’는 건 이성적 작용이고, ‘믿음’은 감성적 작용에 속하니까요. 그래서 앞으로 여러분들은 믿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어요. 그냥 믿어지면 ‘믿어지는 구나’, 안 믿어지면 ‘안 믿어지는 구나’ 이렇게만 알면 됩니다.

교회 다니면서 ‘하나님을 믿어야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걸 믿어야지! 천국이 있다고 믿어야지!’ 이러면 나중에 반발심이 생겨요. 그렇게 해도 안 믿어지니까 결국 신앙이 흔들리게 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믿어지는 건 그냥 ‘믿어지는 구나’ 하고 알고, 안 믿어지는 건 그냥 ‘안 믿어지는 구나’ 하고 알아차리기만 하면 되지, 믿으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는 거예요.

예를 들어 여자친구나 남자친구를 믿으려고 노력한다는 건 ‘믿어지지가 않는다. 뭔가 미심쩍다’는 거예요.(모두 웃음) 그런데 좋은 점도 있으니까 헤어지지 않는 건데, 그건 욕심과 불신 사이에서 갈등을 한다는 얘기거든요. 그러니까 본인이 그런 상태에 있다는 걸 알아차려야 해요.”

“예, ‘믿음, 이해, 실천, 경험’을 꼭 기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모두 박수)


새벽에 빗소리가 한참 들렸는데 어느새 잦아들었습니다. 예불과 천일결사 기도를 하고 나니 말끔히 개어 있었습니다.

스님은 아침공양을 하자마자 주변 정리정돈을 시작하였습니다.
잔디 사이에 잡풀이 더 퍼지기 전에 잡풀을 뽑고, 화단에도 잡풀들을 뽑았습니다.

온실 속 감자와 상추 사이에 난 잡풀도 뽑아주었습니다. 지난번에 미처 못 했던 화분갈이도 하였습니다. 흰색 할미꽃을 좀 더 큰 화분에 옮겨 심고, 선주법사님이 지리산 수련원에서 가져다 준 것들도 여유 있게 큰 화분으로 옮겨 주었습니다. 분갈이를 한 화분들을 나란히 줄을 맞춰 온실 옆으로 정리해 두었습니다.

오후에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에 맞추어 조금 몸을 빨리 움직였습니다. 아무래도 햇살이 비치는 하늘을 보니 빗방울이 떨어지기는 어려워 보였지만 비가 온다면 오는데 맞추어 준비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감자밭에 멀칭한 비닐을 뚫어 감자 싹이 햇빛을 볼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통일씨감자를 심은 지 꽤 되었는데 싹이 얼마나 났을지 기대도 되었습니다.

기대하며 감자밭에 가보았습니다.
먼저, 투명 비닐 멀칭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감자 밭에서 가장 먼저 감자를 심었던 곳이고, 일반 감자와 작년 통일 감자들을 심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이곳은 감자를 먼저 심고 멀칭을 나중에 하는 방식으로 했는데 아직 싹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스님은 감자는 원래 모래흙에서 잘 자라는데 그에 비해 흙이 너무 찰져서 감자 싹이 흙을 밀고 올라오는데 어려워서 그럴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번엔 까만 비닐 멀칭을 살펴보았습니다. 여기는 올해 구입한 통일씨감자를 심은 곳으로 비닐 멀칭을 한 다음에 구멍을 뚫어 감자를 심은 것입니다. 감자를 심은 다음, 구멍을 흙으로 덮어 주는 방식으로 마무리를 했는데 흙 위로 제대로 싹을 키워 올라온 것들이 몇몇 보였습니다. 혹시나 하여 덮어 준 흙을 살짝 들어보았더니 흙 아래에서 줄기를 비스듬히 하고 햇빛을 찾느라 열심인 것이 많았습니다.
어떤 싹은 흙을 막 밀어 올리는 중인 것도 있었습니다.

흙을 제대로 밀어 올려 흙 위로 싹을 틔운 것은 싹이 햇빛을 받아 초록색으로 튼튼했고, 흙 아래 비닐 속에서 햇빛을 찾는 중인 싹은 노란 빛이 많았습니다.
한 구멍에 하나씩 심었던 감자들이 이렇게 자리를 잡아 나가는 것을 보자니 경이로웠습니다. 그냥 쉽게 먹었던 감자, 어떤 때는 맛이 있느니 없느니 평 아닌 평을 하기도 했던 감자에 이런 생명의 과정이 있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니 생명 하나하나를 허투루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투명한 비닐 속 감자는 아직 싹이 자리 잡기에는 시간이 더 필요한 것으로 놔두고, 까만 비닐 멀칭을 한 감자는 덮었던 흙을 걷고 감자 싹이 햇빛을 볼 수 있도록 하나하나 비닐 구멍을 더 뚫어 주었습니다.

한 낮의 햇빛이 내리쬐었지만 감자 싹 보는 즐거움에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점심 공양 후, 햇빛이 아주 뜨거운 시간을 잠깐 피했다가 다시 감자 밭으로 가서 감자 싹 햇빛 보이기를 계속 하였습니다.

감자 싹 햇빛 보이기 일이 마무리 되어 갈 즈음, 스님은 온실 속에서 싹을 틔웠던 호박, 오이, 단호박, 옥수수 모종을 가지고 왔습니다. 감자 밭 뒤쪽을 일부러 비워둔 고랑에 호박과 오이, 단호박, 옥수수를 간격을 충분히 띄우고 심었습니다. 심은 후, 물받이 통에 모인 물로 물도 주었습니다.



일을 마치니 어스름히 해가 질 무렵이 되었습니다. 햇빛을 보게 된 감자 싹도, 새 장소에 자리를 튼 호박, 오이, 단호박, 옥수수도 비가 내리면 더 좋겠다는 생각에 일기예보를 기대했지만 아쉽게도 빗방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녁 공양을 한 뒤, 돈나물, 청경채, 겨자채, 상추, 고소를 솎아 주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채소들이 공양 시간을 풍성하게 합니다.
봄이 주는 선물입니다.



함께 만든 사람들
임혜진 손명희 정란희 조태준

전체댓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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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희

덕분에 봄의 선물 보내요^^

2017-07-19 23:52:48

연꽃

무의식으로 끌릴 땐 의식으로 그 무의식에 대해 불가능에 가까운 통제를 시도하기보다 그 무의식을 알아차리는 연습을 하다보면 자정작용에의해 그 무의식이 시정된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2017-04-24 11:56:17

내가 왜 그럴까 하는 의문이 풀리네요
무의식속의 감정이 일어남을 알아차림으로 제 안의 시정능력이 높아지기를 바래봅니다

2017-04-19 02:3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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