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7. 04. 16 세월호 3주기 _ 진도 팽목항, 목포 신항, 안산 합동분향소
세월호 미수습자 모두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새벽 2시, 달이 유난히 밝았습니다. 스님은 일찍 깨어 어제 보지 못한 원고를 정리하고 출발에 앞서 가만히 마음을 모아 기도하였습니다. 오늘은 4월 16일, 세월호 3주기로 진도 팽목항, 목포 신항, 안산 합동분향소에 참배할 예정입니다.

새벽 3시 20분, 깜깜한 어둠 속에 스님은 진도 팽목항으로 출발하였습니다. 출발 후, 차량에서 함께 예불을 드렸습니다.

아침 8시 20분, 진도 팽목항에 다다르자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오전 10시에 있을 추모제 행사 준비가 한쪽에서 조용히 진행되고 있었고 몇몇 사람들만 방파제 위를 걷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노란 리본상이 있는 제단으로 가서 묵념하고 등대까지 걸으며 바람에 펄럭이는 현수막을 살펴보았습니다.

‘보고 싶고 만지고 싶은 아이들’
‘잊지 않겠습니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습니다’
‘가슴으로 우는 우리를 꺼내주세요’
‘우리 가족을 못 찾을까봐 무섭습니다’
‘따뜻한 밥해서 같이 먹고 싶다’


사람들이 현수막에 염원을 담아 걸어두고 있었습니다.
▲ 사람들이 현수막에 염원을 담아 걸어두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찾지 못한 미수습자 9분에 대한 아픔이 고스란히 묻어있었습니다. 스님은 먹먹한 가슴으로 목포 신항으로 갔습니다. 진도 팽목항에서 목포 신항까지는 한 시간 남짓, 안개가 걷힌 목포 신항에는 뭍으로 올라와 한쪽으로 누워 있는 녹슨 세월호를 먼 발치서 바라보며 많은 사람들이 3년 전 오늘을 기억하고자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먼저 와 계셨던 월광 법사님과 함께 조계종단에서 마련한 법당으로 가서 기도드린 후 기다리고 계시던 미수습자 가족 중 은화 어머님과 다윤이 어머님을 만났습니다.

두 어머님은 스님을 뵙자, 웃음을 띄었고 스님은 두 어머님의 손을 꼭 잡아주었습니다. 3년 전, 세월호 사고 당시 팽목항에 법당을 마련하여 함께 기도하며 지냈던 월광 법사님이 다윤이, 은화 어머님과 스님을 가까이에 있는 가족 방으로 안내하여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스님, 얼마 전까지 세월호 올리기가 참 힘들 거라고들 했는데 이렇게 올라왔잖아요. 그런 기적이 있었던 것처럼, 미수습자 아홉 명이 또 한 번의 기적으로 다 찾아질 거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예, 우리도 열심히 기도할게요. 그럼 팽목항에 3년 동안 계속 계셨어요?”

“다윤이 엄마는 몸이 약해서 장거리를 다니기 어렵거든요. 그래서 2월 26일부터 청운동, 홍대에서 피켓을 들고, 저는 전국을 다녔고요. 본격적으로 인양작업 들어간 2016년 3월부터는 엄마들이 간담회 빼놓고 팽목항에 내려가 계속 상주하고 있었죠.”

“네, 저도 오늘 새벽에 출발해서 팽목항 갔다가 여기 왔어요. 미수습자 가족은 다 여기 계시나요?”

기억하겠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노란 리본이 물결처럼 달려있는 미수습자 9명의 사진 앞에서 한 소녀가 염원을 담아 리본을 달고 있습니다.
▲ 기억하겠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노란 리본이 물결처럼 달려있는 미수습자 9명의 사진 앞에서 한 소녀가 염원을 담아 리본을 달고 있습니다.

“아이가 저기 있잖아요.(한숨) 아이 옆에 있어야죠.
아이를 찾은 부모들은 추모하는 게 맞지요. 아이를 아직 못 찾은 가족들은 남아서 아이를 찾아야 하고요. 그리고 살아나온 생존자 아이들은 다 아픔 없이 살 수 있게끔 하는 게 맞지요.

저는 ‘세월호’는 사람의 생명이라고 생각해요. 세월호가 주는 교훈이 그거라고요.
찾아야 하는 생명, 살게 해야 하는 생명, 왜 이렇게 됐는지 밝혀야 하는 생명이 있잖아요. 그래서 국가가 무엇을 해야 하고, 국민을 어떻게 아껴야 하는지, 또 국민이 국가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으로 해야 하는지, 우리 모두가 어떤 의식을 갖고 살아야 하는지, 그런 부분들을 세월호를 통해서 알게 되어서 앞으로는 우리들도, 국가도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예전에 제가 스님 만나 뵈었을 때 스님 말씀 듣고 참 많은 생각들을 했었어요. 처음에는 왜 그런 말씀을 하시나 했는데 스님 말씀을 돌이켜 생각하다 보니까 ‘우리가 조금만 지혜로웠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은 그렇게 하려고 노력을 하는데 아직도 부족해요.”(웃음)

“지나고 보면 지혜가 생기지만 당시에는 지혜롭기 어려운 게 사람이잖아요. 그건 어쩔 수 없죠. 그래도 아픔을 딛고 또 살아가야 되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겪었던 이런 아픔을 다른 사람이 겪지 않도록 하는 것, 이게 수습이 끝난 뒤에 해야 할 일이겠지요. 사람이란 다 자기 문제만 끝나면 그만두기 쉽잖아요. 그러니까 다시는 이런 안전사고 같은 게 나지 않도록, 또 난다 하더라도 신속하게 구조하도록 해야 하는데... 이제 그렇게 되도록 같이 힘을 합칩시다.”

“네, 스님.”

“저희 미수습자는 소수인 아홉 명이잖아요. ‘만약 미수습자가 아홉 명이 아니라 서른 명, 쉰 명, 백 명이었으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은화 어머니나 저는 (울먹임) ‘소수여서 정말 다행이다. 저희 같이 아픈 사람은 정말 저희가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 하고 생각해요.”

 노란 리본 벽 너머로 세월호 선체가 보입니다. 저 안에 남아 있는 아이들의 흔적들을 생각하면 바라보는 이들의 가슴이 아파옵니다.
▲ 노란 리본 벽 너머로 세월호 선체가 보입니다. 저 안에 남아 있는 아이들의 흔적들을 생각하면 바라보는 이들의 가슴이 아파옵니다.

“사람이라는 게 원래 다수가 눈에 잘 보이지, 소수는 눈에 잘 안 보이잖아요. 앞에 있고 목소리 큰 쪽이 눈에 보이고 뒤에서 목소리 작으면 눈에 잘 안 보이고요. 정부나 국민들이 부처님이나 예수님이 아니니까요.(유가족들 울먹임) 너무 기대가 크면 자꾸 원망이 생기는데, 사람들이라서 어쩔 수 없는 것도 있어요.

우리도 살아보면 그렇잖아요. 앞에 있는 게 눈에 잘 들어오고 뒤에 있는 건 잘 안 보이는 게 인간이니까 어떤 세상이든 자꾸 다수 중심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어요. 세상사가 그래요. 그래서 소수자를 보호하자는 게 인권헌장에도 들어 있어도 현실의 우리 존재가 부족한 존재다 보니까 그렇게 잘 안 되죠.
이렇게 소수로서 아픔을 겪었으니까 이제 어떤 상황에든 항상 소수자의 입장을 존중하고 고려하는 걸 앞으로 우리가 함께 해내야 할 거예요.”

“스님이 지금까지도 기도해주시고 함께 해주셨던 것처럼 세월호 속에 있는 단 한 명의 미수습자도 남기지 않고 다 찾아서 가족의 품에 갈 수 있게끔...”(울먹임)

“예, 저도 그렇게 관심을 갖겠습니다. 저도 소수자를 자꾸 놓치게 돼요. 우리가 소수자가 되어 봤으니까 혹시 자기 아이를 먼저 수습하더라도 이번에는 아홉 명이라도 같이 가도록 해보세요.”

“예, 지금... 모르겠어요. 아홉 명 중에서 누가 먼저 찾아지게 될지, 아니면 못 찾는 사람이 나올지,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지금 바라는 건 아홉 명을 다 찾아서 ‘실종자’라는 단어는 안 쓰였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그리고 아홉 명, 개개인의 입장과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만약에 먼저 나오고 먼저 찾아서 가겠다고 해도 그것 또한 우리가 뭐라 할 수 없는 거고요.”

“맞아요.”

“다윤이 엄마랑 저랑 얘기하기로는 우리가 소수로 있어봤기 때문에 우리 둘은 기다리자고. 누가 빨리 나오든 상관없이 기다리자고요.”

“다른 사람을 생각해서 ‘우리 애가 제일 마지막으로 나오게 해 주세요’ 이렇게 기도해야 해요.”

“사실 그렇게 될까봐 마음을 얼마나 졸이는데요. 스님, 아홉 명 다 나오게 해달라고 하면 안 돼요?”(떨림, 웃음)

“ ‘우리 아이가 맨 마지막으로 나오게 해 주세요’ 하는 말이 아홉 명 다 나오게 해달라는 말이에요.”

“아, 맞다.”

“왜냐 하면 우리 아이는 꼭 나와야 하잖아요.”

“그렇죠.”

“우리 아이는 꼭 나와야 하니까 ‘우리 아이가 마지막으로 나오게 해 주세요’ 이렇게 기도하면 우리 아이가 나오려면 아홉 명이 다 나와야 하는 거예요.”

“그게 참 두려워요. ‘아홉 명 중에서도 다윤이가 맨 마지막으로 나오면 어떡하지’ 이런 두려움이 사실상 커요.(울먹임) 그런데 스님이 이렇게 말씀해주시니까 마음이 좀 편안해져요.”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 다윤이가 맨 마지막에 나오도록 해 주세요’ 이렇게 기도해야 편안하지요. 안 그러면 한 명 나올 때마다 애간장을 녹여야 하거든요. 우리 아이는 마지막에 나오니까 나는 편안하게 있어야 해요.”

“아...”

“그렇게 편안하게, 기다리면 돼요. 그러다가 좀 속된 말로 ‘재수 없이’ 먼저 나오면 할 수 없고요.(어머님들 웃음) ‘맨 마지막으로 나오게 해 주세요’ 이렇게 하느님께 기도를 하세요.”

“저희가 지금은 이래요. ‘아, 그래, 정부가 다 찾아봤지만 더 이상 없다고 할 때까지 다른 사람이 같이 있으면 좋은 거고, 아니면 간다고 해도 그것 또한 어쩔 수 없는 거다. 다만 우리는 마지막까지 그 자리를 지켜줘야 한다. 그게 3년을 버틴 엄마, 아빠, 사람의 몫이 아닐까.’
스님, 저희가 많이 넓어지려고 노력했죠?”(웃음)

“이야기를 들으니 도인이시네요.”(모두 웃음)

“스님, 감사드려요. 이렇게 찾아와 주시니까 저희가...”

스님 감사합니다, 은화, 다윤이 어머니의 눈물을 머금은 웃음에 무엇으로 격려 할 수 있을까요. 스님은 가만히 손을 잡아 주었습니다.
▲ 스님 감사합니다, 은화, 다윤이 어머니의 눈물을 머금은 웃음에 무엇으로 격려 할 수 있을까요. 스님은 가만히 손을 잡아 주었습니다.

“도움이 되어 주지 못해 미안해요.”

“그래도 저희가 많이 웃잖아요, 스님. 그래도 실낱같은 희망이 생겼어요. 저 바다 속에 (세월호가) 있을 때는 저희가 ‘올려야지, 올려야지’ 하고 동동거렸는데 그래도 이제 배를 앞에다 놓고 보면서 견뎌내는 거잖아요. 이게 기적인 거예요. 지금까지도 견뎠는데 ‘이 정도도 괜찮다’ 저희가 그러고 있어요. 이렇게 살아 있는 게 기적이죠. 감사합니다, 스님.”

“그래요. 건강 잘 챙기셔야 해요. 그래도 일찍 아픔을 견디고 정신을 차려줘서 너무 고마워요.”(웃음)

“스님, 감사합니다.”

(함께 계신 분들이 박수로 격려의 마음을 보내다)

‘내 아이가 마지막으로 나오게 해주세요.’라고 가슴에 새기는 어머님의 모습에 마음이 뭉클하였습니다. 시커멓게 녹슬어 누워있는 세월호를 보면서 당장이라도 달려 들어가고 싶었다는 다윤이, 은화 어머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식을 기다리는 부모님의 마음, 그 깊은 마음이 전해져 눈물이 흘렀습니다.

스님은 두 어머님의 웃는 모습을 보고 그래도 마음 놓아 하며 손을 꼭 잡아 주었습니다. 어머님들은 “스님, 우리 아이들 찾으면 그때도 꼭 와주실거죠?” 하시며 밝게 웃었습니다. 어머님들의 웃음을 스님도 웃음으로 답하고 안산으로 출발하였습니다.

주말이라 교통체증이 심하여 오후 4시가 다 되어서야 안산 합동 분향소에 도착한 스님은 긴 줄을 기다려 향을 올리고 304명의 넋을 기렸습니다.
합동 분향소 앞에 마련된 야외무대에서는 ‘기억의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무대를 바라보며 시민들과 함께 서서 행사를 한참 지켜보다 조용히 나왔습니다. 스님을 알아보고 인사하시는 분들이 사진을 함께 찍고 싶다고 하셨는데 가만히 합장으로 인사드리고 물러나왔습니다.

내년 이맘때는 다윤이, 은화 어머님을 비롯한 미수습자 가족들에게 더 이상 ‘실종’이라는 단어로 가슴에 멍이 드는 일이 없도록, 또 다른 세월호로 더 이상 가슴 아픈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세월호가 계기가 되어 안전사고를 방지할 수 있는 제도와 인식이 마련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입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 더위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함께 만든 사람들
임혜진 손명희 정란희 조태준

전체댓글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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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희

마음이 아프네요. 다들 어떠실지~ 잊지않습니다. 더 많이 사랑합니다

2017-07-18 20:50:14

몽실이

마음이 아프고, 가족과 스님의 대화는 뭉클하여 눈물이 납납니다. 꼭 9분 모두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017-04-19 06:25:57

세월호 미수습자 가족의 품으로 모두 돌아갈 수 있기를.
다시 한번 되내여 봅니다.

2017-04-19 02: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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