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7. 05. 11 진주 경남 과기대 100주년 기념관
남의 생각으로 결정한 것 같아 힘들어요

새소리가 아침을 엽니다. 스님은 예불과 기도를 마치자, 밭에서 상추 등 채소들을 뽑았습니다. 상추, 고소, 청경채, 치커리, 쑥갓, 많이 자라 밭 한켠을 차지한 아욱, 배추, 알타리까지. 어느새 행자님들도 뽑아둔 채소들을 다듬고 씻고 있었습니다. 해가 들기 전에, 햇빛 아래서 채소들이 시들기 전에 마무리 하려했는데 양이 늘어나 아침 공양을 한 뒤, 마저 하자 하였습니다.

서둘러 아침공양을 마치고 뒷마무리 작업을 하였습니다. 스님은 배추와 알타리 무는 최보살님께서 김치를 담을 수 있도록 다듬어 씻어드리고 나머지 채소는 깨끗이 씻어서 박스에 차곡차곡 정리하여 담았습니다. 서울 서초동 회관에 보내서 공동체 식구들에게 맛보여주자 하였습니다. 두 개의 박스에 담은 뒤, 최대한 시들지 않도록 아이스팩도 함께 넣어 포장하였습니다. 고속버스 편으로 바로 보내서 오늘 저녁 공양에 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시골집에서 보내주는 채소네요. 바리바리 싸서 보내주는 채소예요.”

어느 행자님이 이야기하였습니다. 시골에서 농사 지어 바리바리 보내주는 어머니 마음, 스님의 마음입니다.

햇빛이 습기를 머금고 있는 듯 후덥지근한 한낮입니다. 스님은 쉬지 않고 이 고랑 저 고랑 잡초를 뽑고 땡볕에 놓여있는 화분들을 그늘로 옮겨 주었습니다. 솎아내느라 뿌리가 흔들린 채소에는 물을 주었습니다.

스님은 늦은 점심 공양을 한 후, 진주로 출발하였습니다. 오늘은 진주에 위치한 경남 과학기술대학교 100주년 기념관에서 ‘행복한 대화’가 열립니다.

남강 변을 따라 가니 강연장인 경남 과학기술대학교 100주년 기념관이 나타났습니다. 넓은 로비에는 행복학교 선생님과 학생들이 역할을 나누어 오시는 손님들을 신나게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재밌는 사진 찍기 코너도 마련하여 오가는 사람들에게 안내하여 사진도 찍어 줍니다. 왁자지껄 시골 장날에 온 듯 이곳 저곳 눈이 갑니다.


오늘 강연에서는 모두 여덟 명의 질문자가 스님과 대화를 하였습니다. 이 중에 늘 자신이 결정을 하지 못하고 남에게 영향을 받는 것 같다는 고민을 이야기 하는 여학생의 사례를 소개합니다.

“저는 살면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결정들을 할 때마다 저보다는 남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돌아보면 제 삶이라기보다는 남의 생각이 많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도 큰 결정들을 많이 하겠지만 남의 생각이나 의견을 아예 안 들을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균형 있게 할 수 있을까 고민입니다.”

“이 세상 어떤 사람도 남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은 없어요.
제가 오늘 아침에 채소밭에서 상추를 땄어요. 그럴 때 옆에서 ‘내일 따지 그러세요? 날이 더워서 상추가 시드는데요’ 이러면 그 말도 일리가 있으니까 작업하다가 멈춥니다. 나무를 심다가도 ‘스님, 거기 심는 것보다 여기 심는 게 더 좋겠는데요. 거기는 이러 저러 하잖아요’ 하면 ‘어, 그 말이 맞다’하고 옮겨 심어요. 이렇게 저도 매일 영향을 받고 살아요.(청중 웃음) 사람이 다 그래요. 그런데 질문자는 구체적으로 어떤 걸 영향을 받아요?”

“제가 22살인데 대학을 안 다니고 있어요. 대학을 안 다녀도 잘 살 수 있다고 제가 생각한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그게 남의 생각이었는데 제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착각을 한 것 같아요. 대학을 가지 않은 게 지금 저한테는 좀 힘들거든요.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네요. 지금 마이크가 영향을 좀 주는 것 같기도 하고...” (모두 웃음)

“우리 인생이 다 질문자가 말할 것처럼 그래요. ‘빅데이터’라고 들어봤죠? 질문자가 어떤 질문을 할 때 어떤 영향을 받는지를 조사해서 질문자를 로봇처럼 조종할 수도 있어요. 여기 있는 사람 누구나 그래요.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도 실제로는 내가 매번 새롭게 판단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입력되어 있어서 그렇게 결정을 하는 거예요. 음식을 좋아하는 것도 어릴 때부터 그 음식을 먹어서 거기에 길이 들어 있어서 그런 거예요. 된장찌개 냄새를 맡았을 때 구수하게 느껴지죠? 된장찌개에 ‘구수함’이 들어있어서 그런 걸까요? 어릴 때부터 맡아서 거기 습(習)이 들었기 때문에 구수하게 느껴지는 거예요.
노인들은 장구 소리를 들으면 덩실덩실 어깨춤이 절로 나오지만 요즘 젊은 사람들은 장구 소리를 들어도 그런 춤이 안 나와요. 서양 팝송이 나와야 몸이 움직이죠. 그런데 노인들은 팝송을 들으면 시끄럽다고 하잖아요. 요즘 젊은 친구들은 구성진 트로트 같은 것으로는 흥이 안 나요. 조잘조잘 랩을 해야 해요.(청중 웃음) 그런데 우리 세대는 조잘조잘 하면 노래가 아니라 장난처럼 들려요. 이렇게 흥이 나는 것마저도 어떻게 습이 들었느냐에 따라서 다른 거예요. 이렇게 우리의 감정이라는 것도 다 습관 들이기 나름이에요. 어떻게 습관을 들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러니 엄격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그 습관의 노예 생활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습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자가 붓다예요. 부처는 극락 가거나 천당 가는 게 목표가 아니라 자유로운 삶을 사는 게 목표에요. 남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게 아니라 자기의 습으로부터, 자기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결혼생활 하면서 남편의 어떤 면은 싫어하고 어떤 면은 좋아하는 것도 여러분이 자란 환경과 매우 관계가 깊습니다. 여러분들이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술 마시고 야단치는 것을 보면서 굉장히 거부 반응을 겪었다고 해봅시다. 이렇게 감정적으로 그걸 싫어한 사람은 남편이 아버지 같은 행동을 하면 아주 질색해요. 여러분들이 어릴 때 어떻게 자랐느냐가 여러분들의 지금 삶을 좌우하는 거예요. 그래서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 감정적 안정을 가져다주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좋은 분유 먹이고 좋은 기저귀 갈아주는 게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면서 부부간에 싸우고 짜증내고 성질냅니다. 그건 잘못된 거예요.
부모 유전자가 자식 유전자에게 물려지듯이 정신적인 것도 그런 식으로 내려가요. 이걸 경상도 말로 ‘내리기’라고 해요. 아버지가 하는 걸 아들이 비슷하게 하면 ‘그 집 내리기다’ 이러잖아요. 누구나 다 그런 영향을 받고 있어요.

그런 데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우리의 목표예요. 그래서 자기를 이겨야 한다는 거예요. ‘자기를 이긴다’ 할 때의 ‘자기’란 자기 업식, 자기 카르마, 자기 감정을 말해요. 자기 감정으로부터 자기가 자유로워져야 해요. 기분이 좋다 해도 거기에 취하지 않고 자유로워져야 해요. 감정이 일어나는 걸 통제할 수는 없어요. 감정은 일어나지만 그 감정에 치우쳐 들뜨진 않아야 해요. 감정이 가라앉지만 거기에 매몰되지는 않아야 해요. 그걸 ‘알아차림’이라고 해요. 기분이 좋다고 들뜨는 게 아니라 ‘음, 기분이 좋게 일어나는구나’ 하는 거예요. 기분이 좋은 것도 하나의 카르마에 불과한 거예요. 카르마가 그렇게 작동할 뿐이에요. 습이 들어서 그렇게 작동하는 거예요.

운전 배울 때와 똑같아요. 빨간 불이 켜지면 차는 앞으로 못 가잖아요. 벽이 있어 못 나가는 게 아니지요. 왜 그럴까요? 그렇게 교육을 받아 습관이 들어서 그래요. 그래서 ‘신심명(信心銘)’의 첫 구절이 ‘지도무난(至道無難)’이에요. 지극한 도, 즉 ‘깨달음의 길’은 어렵지 않다, 다만 사랑하고 미워하지만 않으면 된다고 했어요. 사랑이라는 건 좋아하는 걸 말하고, 미워한다는 건 싫어하는 걸 말해요. 좋아하고 미워하는 이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해요. 그런데 우리는 좋아하고 미워하는 감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해요. 좋아하면 죽어도 해야 하고, 싫으면 죽어도 안 해야 해요. 거기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그런 감정적인 문제로부터 모든 게 다 영향을 받아요. 그런데 질문자는 이제 영향 안 받는 쪽으로 나아가고 싶다는 거지요?

질문자에게 집중해서 말하면, 질문자가 결혼을 하려는데 상대가 마음은 딱 맞지만 돈이 없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내 속에서도 가난한 게 마음에 좀 걸려요. 그런데 부모가 반대를 하면 갈등이 생겨요. 부모가 반대하기 때문에 갈등이 생길까요, 아닙니다. 원래 질문자 마음도 거기에 조금 걸려 있었기 때문에 갈등이 되는 거예요.
나는 감정적인 면을 보는데 다른 사람은 인물을 보고 인물이 못 생겼다는 거예요. 부모는 또 재력을 보고 재력이 문제라고 하고요. 이렇게 사람마다 다 다른 문제 제기를 할 때 질문자도 거기에 영향을 받는 건 질문자에게도 그런 생각을 했기 때문에 그래요.
부모나 친구가 결혼 하라며 중매를 자꾸 해서 ‘아, 힘들어 죽겠다. 부모님이 너무너무 결혼을 강요한다’ 이런 경우 있죠? 이럴 때는 내 속에도 거기에 대한 미련이 있다는 얘기예요. 그러면서도 부모 핑계를 대는 거예요.
내 속에 미련이 없으면 부모가 아무리 그래도 아무렇지 않아요. ‘네,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네, 네, 생각해 보죠’ 이럴 뿐이지요. 그 사람이 그렇다는 건 그 사람의 문제니까요.

절에 들어왔던 청년들이 부모가 와서 막 난리를 피우면 부모 걱정해서 많이들 따라가요.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있으니까 따라가는 거예요.(청중 웃음) 저는 절에 들어와 있는데 집에 가고 싶은 생각이 없으니까 부모님이 오셔서 ‘내가 약 먹고 죽는 꼴을 보려고 그러냐’ 이러셔도 아무렇지 않았어요. (청중 웃음)

그러니까 첫째, 영향을 받는다는 건 자기에게 원인이 있습니다. 두 번째, 남의 의견을 묻고 자꾸 거기에 영향을 받는 것은 책임을 안 지려는 심리가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나중에 잘못되면 ‘엄마가 하라고 했잖아!’ 이 얘기 하려는 거예요. 책임을 안 지려는 습성 때문에 그래요. 누가 뭐라고 했든 그건 그 사람의 얘기고, 결정을 하면 누가 결정한 거라고요?”

“제가요.”

“그래요, 질문자가 결정한 거예요. 그러면 책임은 누가 져야 해요?”

“제가요.”

“네. 질문자가 책임을 져야 해요.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듣는 건 좋아요. 그러나 결정은 내가 하는 거니까 ‘남의 영향을 받았다’ 이런 말을 하면 안 돼요. 영향은 누구나 다 받아요. 남의 영향을 받고 결정 했든 안 했든 결정에 대한 책임은 내가 져야해요. 엄마가 하라고 했든, 어쨌든, 결과는 내 책임인 거예요.

어린 시절 부모 성질이 어떻고 환경이 어떻고 해서 내가 이런 업이 생겼다 하더라도 현재의 내가 가진 이 업은, 부모의 업이 아니라 내 업, 내 것이에요.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내가 해결해야 해요. 그러니까 ‘남이 결정했다’ 이런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 외부의 영향을 받아서 결정했더라도 결정한 건 다 내가 한 거예요.
그러니 앞으로 이렇게 생각해야 해요. 어떤 결정도 결국 최종적으로는 질문자가 결정하는 거예요. 그러니 내가 책임을 져야 해요. 결정을 자꾸 미루는 건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예요.”

“네, 감사합니다.”(질문자 웃음, 청중 박수)

질문한 여학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습니다. 왠지 손해 보는 것 같은 느낌, 왠지 억울한 생각이 들 때 혹시 책임지고 싶지 않았던 건 아닌가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강연을 마치고 로비에서 사인회가 열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섰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빠 등 한 가족이 강연을 들으러 온 경우도 있었고, 친구끼리, 혹은 부모님을 모시고 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사인회를 마치고 행복학교 학생들과 스님이 함께 사진을 찍자, 행복학교 학생들이 ‘스승의 은혜’ 노래를 합창하였습니다. 곧 있으면 다가올 스승의 날을 미리 당겨 마음을 전한 것입니다. 노래를 하고 작은 꽃다발을 스님께 드리는 모습은 지켜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했습니다.

늦은 밤, 두북으로 돌아오는 길이 따뜻합니다.

함께 만든 사람들
임혜진 손명희 정란희 조태준

전체댓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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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희

결정은 내가 했다~이걸 자꾸 까먹어요^^
꼭 네가 하라그랬잖아~ 남탓이 하고파집니다. 정신차립니다~~~

2017-06-17 09:41:03

임무진

더 이상 남탓하지 않습니다. 선택도 가볍게 합니다. 늘 남탓하며 살았네요. 결정장애자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선택도 못했구요. 이 모두 털끝만치도 손해 보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나옴을 알았습니다. 회피하지 않습니다. 직시하고 직면합니다.

2017-05-16 15:0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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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니 엄격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그 습관의 노예 생활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습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자가 붓다예요. 부처는 극락 가거나 천당 가는 게 목표가 아니라 자유로운 삶을 사는 게 목표에요. 남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게 아니라 자기의 습으로부터, 자기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거예요.]
[ 그래서 ‘신심명(信心銘)’의 첫 구절이 ‘지도무난(至道無難)’이에요. 지극한 도, 즉 ‘깨달음의 길’은 어렵지 않다, 다만 사랑하고 미워하지만 않으면 된다고 했어요. 사랑이라는 건 좋아하는 걸 말하고, 미워한다는 건 싫어하는 걸 말해요. 좋아하고 미워하는 이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해요. 그런데 우리는 좋아하고 미워하는 감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해요. 좋아하면 죽어도 해야 하고, 싫으면 죽어도 안 해야 해요. 거기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

2017-05-15 02:5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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