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7.9.10 해외 즉문즉설 강연(14) 독일 베를린
외국에 사니까 소외감이 느껴져서 울컥하고 서러워요...

오늘은 시드니 현지 시간으로 9월 9일(토) 오후 9시 비행기로 시드니 공항을 출발하여 14시간 비행한 후 현지시간 5시 05분에 아랍에미레이트 아부다비를 경유하여 다시 베를린으로 6시간 비행하는 일정입니다. 스님은 하루에 한 도시에서 강연하는 일정으로 해외순회강연을 하고 있습니다. 시드니-베를린은 25시간 걸리는 노선이지만 시드니에서 9일 밤에 출발해야 일요일 낮시간 베를린에 도착하여 강연할 수 있습니다. 배웅 나온 정은지, 강여경님과 인사하고 게이트 앞에 도착하여 한국으로 원고를 송고한 뒤 비행기에 거의 마지막으로 탑승하였습니다. 9시가 되어 드디어 비행기가 이륙하였습니다.

14시간 비행이면 서울에서 직항으로 미국 워싱턴 디씨까지 가는 거리입니다. 비행기 속에서 스님과 수행팀은 업무도 보고 잠도 자고 휴식도 하였습니다. 비행기는 현지 시간으로 오전 5시 05분이 되어 아부다비 공항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곳에서 4시간을 대기한 후 베를린으로 출발합니다.

공항 곳곳에 밤새 기다렸다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여행객이 많이 보입니다. 아침 기도할 장소를 찾다 무슬림 신자를 위한 기도실을 1층에서 발견했습니다. 남자화장실 옆에 남자기도실, 여자화장실 옆에는 여자기도실이 있었습니다.

스님은 남자기도실에서 기도하였습니다. 여자기도실에는 휴식하는 분도 코란 앞에서 기도하는 여성분도 있었습니다. 공항은 조금 더운 느낌이 들었지만 기도실은 에어컨이 아주 시원하게 나오고 있었습니다. 기도실 바닥도 푹신푹신하여 절을 하는데 아무 무리가 없었고 아주 편안하게 명상까지 다 할 수 있었습니다. 알라신과 무슬림신자들 덕분에 우리도 편안하게 기도할 수 있어 감사의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부다비행 비행기 속 안내화면에도 기도시간 몇 분 전 표시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무슬림 신자들이 기도시간을 철저히 지키면서 신앙생활하는 것을 보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한국시간으로 아침 5시에 맞추어서 비행기 안 복도에 서서 새벽예불과 천일결사기도를 해보기도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조금 쑥스러웠지만 집중할 수 있었고 생각보다 편안하고 괜찮았습니다.
공항에서 무료로 인터넷이 되어 수행팀은 각기 업무를 보았습니다. 스님은 책을 읽기도 하였습니다.

9시 10분이 되어 베를린행 비행기가 다시 출발하였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아부다비는 사막의 먼지로 인한 것인지 도시전체가 뿌옇게 보였습니다.

6시간의 비행이 이제 조금 지루하기도 하고 피곤하기도 하였습니다. 현지시간으로 오후 2시 10분, 드디어 베를린에 도착하였습니다. 비행기에서보니 저멀리 전승기념탑이 보입니다.

베를린 국제공항 제 3터미널에 도착했는데 짐을 찾는데 1시간 이상 걸렸습니다.

짐을 찾는 동안 스님은 베를린 지도를 살펴보고 계십니다.

짐을 찾아 밖으로 나오니 유럽/중동/아프리카 지구장 김선희님과 베를린 총무 이희정님이 반갑게 인사합니다.

강연시간이 임박하여 촬영팀은 바로 강연장으로 출발했습니다. 스님도 시간이 여의치않아 숙소인 이희정 총무집에 수행팀의 짐만 내려놓고 바로 강연장으로 출발하기로 했습니다. 숙소에 오니 독일인인 성소현님 남편이 스님을 강연장으로 모시기 위해 와 있었습니다. 스님은 반갑게 인사하고 잘 있었냐고 안부도 묻습니다.

오늘 강연은 베를린자유대학교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강연장으로 들어가니 자원봉사자들이 반갑게 인사합니다.

스님은 대기실에서 잠깐 기다리다가 강연장소로 들어갔습니다. 오늘 강연에는 약 90여명이 참석하였고, 자원봉사자는 15명정도 되었습니다. 총 7명이 스님께 질문했습니다.

아팠을 때 도와주지 않는 남편을 어떻게 해야할지 묻는 분, 외국인 남자친구가 채식주의자인데 채식만 하는 것 때문에 고민이라는 분, 늘 재수에 강해서 왜 나는 늘 두 번 일를 해야 하는지 궁금하다는 분, 채식과 육식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분, 한국인으로 외국에 살면서 외국인으로 차별을 느끼며 살아오는 것에 대해 고민인 분, 현재 북한의 핵실험으로 인한 국내사정등 현재 한반도 정세에 대해서 독일친구들이 물어 올 때 어떻게 답변하는 것이 좋을지 스님께 의견을 구하는 분, 하우스메이트와 갈등이 있어서 어떻게 해야 할 지 고민인 분등 총 7명이 스님과 질문하고 대답하며 대화했습니다.
그 중에서 다음의 질문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

“독일에 살면서 한국에서와는 달리 좀 붕 뜬 듯한 느낌이 들고 긴장을 많이 하게 됩니다. 문화적 차이도 조심하려 애쓰다 보니 외국인으로 산다는 것이 쉽지 않고 간간히 받는 인종차별도 상처가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 이곳에서의 삶이 익숙해지면서 그런 인종차별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게 되었지만, 그만큼 독일인들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도 같이 커지고 제 마음의 문도 많이 닫혔습니다. 차별에 익숙해지다 보니 제 스스로도 가끔씩은 ‘그래, 내가 외국인이니까 사람들이 그럴 수 있어’ 라며 그런 차별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돼서 걱정입니다. 마음이 평온하지 못할 때 그런 일이 생기면 울컥하면서 예전에 겪었던 서러운 감정까지 함께 요동치곤 합니다. 이런 차별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지혜롭게 헤쳐 나갈 수 있을까요?”

“법률에 위배되는 제도적인 차별은 시정을 해야 합니다. 저항을 하든지 개선을 요청해서 시정해야 해요. 그런데 문화적이고 관습적인 차별은 개선되는 데 시간이 굉장히 많이 걸리기 때문에 그걸 바꾸려면 질문자가 굉장히 힘이 들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게 돼요.

여러분들이 어디에 살든지 법률에 위배되는 제도적인 차별은 권리로써 시정을 요청해야 합니다. 법률에 정해져 있지만 실제로 안 지켜지는 것은 교육을 통해 개선을 하게 한다든지, 법률이 정비가 안 되어 있을 때는 관련 법률 제정을 요청한다든지 해서 남녀든 인종이든 민족이든 차별이 없는 쪽으로 나가야 해요.

그런데 관습적이고 문화적인 차별은 아무리 법을 바꾸고 제도를 바꿔도 오래 갑니다. 이 현실을 우리가 이해해야 해요. 그래서 이것은 어느 정도 용인하는 게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한국에서 30호 정도가 사는 시골동네에 필리핀이나 베트남에서 여성이 한 명 시집을 왔다고 합시다. ‘저 사람은 베트남에서 왔기 때문에 형편없다’ 라고 대놓고 차별하지는 않더라도 동네 사람들이 관습적으로 쓰는 언어나 이야기 속에는 은연 중에 차별이라고 할 만한 것이 행해질 수밖에 없어요. 그건 시골에 사는 30호 사람들 모두가 평소 살아온 문화이기 때문에 그걸 모두 바꾸기는 어려워요.

또 그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가 학생이 50명 정도 되는 학교에 갔다고 생각해 봅시다. 아이들끼리 이야기를 하다가 그 아이가 마음에 안 들면 ‘쟤는 엄마가 베트남 사람이다!’ 이런 말을 하겠죠. 그렇다고 해서 그 말을 한 아이를 처벌할 수는 없는 일이에요. 그렇게 하지 말라고 교육은 시킬 수 있지만요. 사람이라는 건 싸워서 성질이 나면 뭐든지 상대의 약점을 잡아서 공격하려는 성질이 있잖아요. 욕설을 할 때도 보세요. 키가 크면 ‘키만 큰 놈이!’ 이러고, 키가 작으면 ‘키도 작은 놈이!’ 이렇게 얘기해요.(청중 웃음) 신체 특징을 가지고 뭐라고 얘기하면 안 되지만 성질이 나면 상대를 어떻게든 괴롭혀야 하니까 그러는 거예요. ‘얼굴이 시커먼 놈이’, ‘얼굴도 못 생긴 게’ 이런 식으로 뭐라도 트집을 잡아 욕을 하려니 이런 언어가 나올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이런 관습적인 차별은 그 나라 국민들이 외국인하고 살아본 경험이 많이 없어서 그래요. 시골이라 하더라도 전체 30호 중 외국에서 시집와서 사는 사람이 15명 정도 되고 초등학교에도 그런 아이들이 절반쯤 된다면 관습적 차별도 개선될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그때까지는 관습적인 것을 개선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제도적으로나 법률적으로 차별을 못 하게 해놓아도 실제로 일상생활에서는 관습적인 것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특히 외국인과 살아본 경험이 많이 없어서, 외국인이 한국에 와서 사는 경우에 여러분들이 독일에서 살 때 느끼는 것보다 차별을 훨씬 더 많이 느껴요. 한국 사람들은 외국 사람들이 보면 두 가지가 나쁘게 나타나요. 예를 들어 서양 사람에게는 필요 이상으로 친절하고 우대를 하는 반면, 동남아 사람에게는 필요 이상으로 하대를 합니다. 오래 같이 살아보면 이런 것이 없어지겠지만 아직은 경험이 많지 않으니까요.

북한에서 온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한국에 살지 않고 캐나다나 미국으로 이민 가고 싶다고 해요. 같은 민족임에도 차별을 느끼기 때문이에요. 한국 사람들이 북한 사람들을 일부러 차별하려는 건 아니지만 말씨가 다르거나 하면 어쨌든 북한에서 왔다는 걸 알 수 있잖아요. 한국에 와서 함께 산지 얼마 안 되다 보니 북한에서 온 사람들이나 조선족들이 지금의 현실에서는 직업적으로도 지위가 높기 어려워요. 주로 식당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든지 주로 막일을 하게 되니까 그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차별을 받는다고 느끼는 거예요. 한국식당에서 일하는 조선족들은 중국 안에서는 대부분 학벌도 괜찮고 사는 것도 괜찮은 사람이 돈을 더 벌기 위해서 한국에 온 겁니다. 자기 지역에서는 그래도 목에 힘주고 살다 왔는데 여기서는 최하층 직업을 갖고 하대를 받게 되니까 자존심이 더 많이 상하는 거예요.

북한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사람들도 대부분 북한에서는 시키는 대로 말을 잘 들었던 사람들이 아니었을 거잖아요. 북한 같은 체제 안에서도 저항 의식이 있는 사람들이 내려오는 건데 남쪽에 와서 이런 대우를 받으면 저항이 더 강합니다. ‘북한에서도 내가 저항하고 살았는데 네 같은 놈 말을 들을까보냐!’ 이렇게 욱 해서 싸움이 자주 일어나는 거예요.

현실에서는 이런 특성이 있으니까 여러분들도 이곳에 살면서 관습적인 차별은 좀 감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선 피부 빛깔부터 다르잖아요. 여러분들은 피부 빛깔이 다른 이유로 차별 받더라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는데, 진짜 살기 힘든 경우는 북한에서 남한으로 넘어와 살거나, 중국 조선족이 남한에 와서 살거나, 한국 사람이 일본에 사는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들은 자기가 약간만 숨기면 차별을 안 받을 수도 있어요. 외양은 바깥으로 표시가 안 나니까요. 그런데 이게 오히려 문제여서 마음고생이 심해요. 여러분들은 자신이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숨기려야 숨길 수가 없잖아요.(모두 웃음) 어쨌든 꺼내놓고 차별을 받든 저항을 하든 해야 해요. 그런데 만약 이 사실을 숨기게 되면 마음고생은 더 심해져요.

그런데 여러분들 같은 경우는 모양이 아예 다른 외국인이니까 숨기려야 숨길 수가 없잖아요. 이런 차별이 숫제 나아요. ‘숨길 수 있는데 드러낼 거냐, 말 거냐’ 라는 문제 때문에 일본에 사는 우리 교포들이야말로 사실은 마음고생이 제일 심하고, 북한에서 온 사람들이나 조선족들도 마음고생이 정말 심합니다. 얼굴이며 피부며 말이며 다 똑같은데 차별을 받으니까 차별에 대한 저항도 더 심하고, 그걸 피하려고 신분을 숨겨야 하느냐 하는 고민도 굉장히 깊어요.

북한에서 넘어와서 남한에 정착해 사는 사람들만 따로 모아서 즉문즉설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한국 구경도 시켜주고 한국에 살면서 생기는 고민들을 듣기도 하는데 그 중에 이런 질문이 있었어요.

‘아이 친구들에게 우리 가족이 북한에서 왔다는 신분을 밝혀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이런 문제가 부모로서는 고민이래요. 아이가 둘인데 둘 다 학교에서 공부를 잘 하다 보니 큰아이가 반장 선거에서 반장으로 뽑혔대요. 그런데 어떤 한 아이가 ‘쟤는 북한에서 온 애다’ 이렇게 얘기했다는 거예요. 그게 소문이 나서 학부형들이 반대를 하니까 선생님도 반장으로 임명해주지 못했다는 거예요. 한국이 이런 나라예요. 엄마들의 영향력이 크잖아요. 여기 독일에서 이랬으면 위법이에요. (모두 웃음)

아이가 어리니까 말씨는 거의 표가 안 나는데 북한에서 온 걸 어떻게 알게 됐을까요? 요즈음은 생일에 반 친구들을 초대해서 생일 축하를 해주나 봐요. 아이가 직접 말한 건 아니지만 초대받은 친구들이 집에 와서 집에 걸려 있는 사진 같은 걸 보고 부모님 말투를 들어보니 ‘아, 얘가 북한에서 왔구나’ 하고 알게 된 거죠. 그래도 그것이 문제가 안 되었다가, 반장 선거에서 떨어진 아이가 이걸 제기한 거예요. (청중 탄식)

이렇게 되니까 그 엄마가 굉장히 충격을 받아서 저한테 하는 말이 ‘둘째도 공부를 잘 하는데 얘도 반장이 되면 똑같은 일이 반복될 것 같으니까 아이 생일상을 집에서 차려주진 못하겠다’ 였습니다. 지금은 제과점에 생일상을 마련해놓고 아이들을 초대해서 생일을 치른대요. 아이들도 공부를 잘 하지만 자기도 이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서 사는 데 지장이 없는 수준인데도 이런 문제가 생기니까 이럴 땐 어떻게 하는 게 좋겠냐며 고민을 얘기했던 거예요.

이런 상담을 하다 보니 숨길 수 있는데 따르는 문제들이 숨길 수 없는 경우보다 실제로 고뇌가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제가 보기에는 외국에서 사는 사람들 중에 제일 힘든 사람이 재일 교포들 같아요. 특히 요즘은 한일 관계가 나빠지면서 혐한 분위기가 생기니까 지금껏 한국 국적을 가지고 일본에서 살다가도 국적을 일본으로 옮겨버리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어요.

여러분들은 국적을 독일로 옮겨도 딱 보기에 한국계잖아요.(모두 웃음) 외양은 숨길 수가 없으니까요. 그러니 오히려 떳떳하게 ‘나 한국 사람이다!’ 이렇게 신분을 밝히고 살면 돼요. 그런데 일본에서는 국적을 안 옮기고 한국 국적이나 조선 국적을 움켜쥐고 있는 사람은 한국 사람인 걸 밝히지만, 일단 일본으로 국적을 옮긴 사람은 자기가 한국계라는 사실을 절대로 안 밝힙니다. 애초에 한국계라고 해서 받는 차별 때문에 국적을 옮겼으니까요. 이렇게 자기 출신을 숨기는 게 심리적으로는 갈등이 더 심해요.

그러니 질문자의 경우는 아예 숨길 수도 없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관습적인 차별은 웃으면서 넘기는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법에 정해진 제도적인 것까지 차별하는 사람이 있을 때는 바로 소송을 제기해서 개선할 필요가 있죠. 그렇게 자꾸 문제제기를 해야 조금씩 개선이 되니까요.”

“그런데 제가 느끼기에는 그런 것들이 상처가 되거든요. 당시에는 좋게 넘기지만 그런 것들이 쌓여서 울컥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 제가 어떻게 제 마음을 다스려야 할까요?”

“그러면 한국에 가야죠.(모두 웃음) 제 이야기는 심리 치유의 관점에서 하는 얘기이지 제도적인 얘기는 아니에요. 심리 치유의 입장에서는 이건 감수할 수밖에 없어요.”

“일상에서 오는 불평등에 대해서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지혜롭게 헤쳐 나가고 싶지만, ‘아, 내가 외국인이니까 어떻게 보면 당연한 거구나’ 라고 제 스스로 생각할 때가 있거든요. 그런데 그런 생각은 옳은 것 같지 않아요.”

“아니에요. ‘외국인이니까 저 사람들이 문화적으로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고 받아들이고 웃으면서 그냥 지나가되, 법적으로나 제도적으로 차별이 된다면 문제 제기를 해야 해요. 예를 들어 식당에서 외국인이니까 들어오지 말라고 하는 차별을 받았다면 이건 문화적인 걸 넘어서는 문제잖아요. 그런 건 바로 소송을 해서 개선해야지, 외국인이라고 해서 위축돼서 살 이유는 하나도 없다는 거예요. 우리가 무슨 죄인인가요? 이 평등한 세상에서 피부 빛깔이 노랗고 한국계라는 게 무슨 죄예요? 성질을 내고 화를 내라는 게 아니라 그런 건 바로 시정을 해야 해요. ‘나 하나만 참으면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돼요. 그런 문제는 공익을 위해서도 개선을 해줘야 합니다.

그러나 일상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약간의 차별 정도는 소수자로서나 외국인으로서 어느 정도 감수를 해야 여기서 생활하기가 쉬워요. 그걸 다 민감하게 생각하면 내가 살기 어렵다는 관점에서 하는 얘기예요.

우리도 한국에서 살다 보면 소수자나 외국인에게는 은연중에 그런 태도를 취하기 쉬워요. 나는 차별 안 하는 것 같지만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또 차별 받는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 것이 관습적인 거예요. 관습적이고 문화적인 것은 내가 그냥 수용을 하고 적응하는 게 좋고, 제도적이고 법률적으로 보장된 것을 노골적으로 차별하는 경우에는 강력하게 항의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진짜 차별이 합리화될 수 있으니까요.”

“예, 잘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질문자 웃음)

강연을 마치고 바로 사인회를 하였습니다. 매번 스님이 오실 때마다 강연장을 찾는다는 분은 오늘도 참 좋은 시간이 되었다고 스님이 여기까지 오셔서 감사하다 했습니다. 오늘 채식문제를 질문한 분에게 소감이 어떤지 물으니 본인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하면서 내일 취리히에는 남자친구가 갈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중학교 3학년 남학생은 엄마가 함께 왔는데 스님 강연이 어렵지 않냐고 하니 오히려 재미있었고, 대부분 알아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고 해서 의외였습니다. 외국에서 살다보면 한국말이 서투른데 이 친구는 한국말도 잘 해서 스님법문을 잘 알아들을 수 있었던 모양이었습니다. 외국인 남편과 함께 와서 옆에서 조금씩 통역을 하면서 스님 강연을 들었던 임산부에게 남편도 좋아하냐고 물어보니 본인이 훨씬 더 좋았고, 본인이 스님강연을 들어야했기에 남편에게는 조금밖에 통역못해주었다고 환화게 웃으며 소감을 말하는 임산부의 모습에서 행복감이 느껴졌습니다.

강연의 사회를 본 성소현님이 삼촌께서 스님께 선물로 올리는 것이라며 단주와 향통을 드렸습니다.

오늘 베를린 강연참가자들을 보니 이전보다 연령대가 낮아졌습니다. 젊은 층들의 참석이 많아져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책 사인회 후 스님은 강연에 참가한 자원봉사자들과 단체사진촬영을 하고, 수고했다고 악수하였습니다.

이어 강연총괄 베를린 총무 이희정님과 악수하며 격려했습니다.

사진 촬영 후 스님은 봉사자들에게 오늘 비행일정이 길어 조금 휴식하겠다고 양해를 구하고 먼저 숙소로 돌아갔습니다. 묘덕법사님은 남아 봉사자들과 소감나누기를 진행했습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베를린을 처음 방문한 촬영팀장 김나영님에게 잠깐 차를 타고 시내를 한바퀴 돌면서 야경을 보여주기로 했습니다.
베를린의 대표적인 쇼핑거리인 쿠담거리를 지나 1953년 동베를린 시민들이 “우리는 같은 민족” 이라는 모토를 내걸고 궐기했던 역사적인 현장인 6월17일의 거리와 전승 기념탑, 통일 독일의 상징적인 건물 국회의사당과 브라덴부르크 성문을 차례로 지나갔습니다.

독일 국회의사당은 독일의 정치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1999년 완공시 지붕에 거대한 유리돔을 씌워 방문객들이 이곳에 올라 유리바닥 아래로 국회의원들이 회의진행하는 모습을 내려다 볼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독일 정부의 투명성을 상징하는 구조로 관광명소가 되었다고 합니다.
브란덴부르크 성문은 1788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명령으로 지어졌습니다. 문 위에는 사두마차를 끄는 승리의 여신인 빅토리가 조각되어져 있고, 베를린장벽과 같이 베를린의 대표적인 명소입니다. 예전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으로 나뉘었을 때 둘을 연결하는 통로이며 경계선이었던 건물입니다. 또한 허락된 사람들만 이 문을 통해 통행이 가능했다고 합니다.

한 바퀴 대충 둘러보고 숙소로 돌아오니 묘덕법사님과 이희정 총무도 봉사자들과 나누기를 마치고 귀가해서 숙소문을 열고 있었습니다. 간단히 저녁을 준비하여 함께 늦은 저녁식사를 하였습니다.

내일은 오전 9시 25분 비행기로 스위스 취리히로 이동합니다. 아침 식사후 오전 7시에 공항으로 출발하기로 했습니다. 아시아/태평양 강연을 무사히 마치고 베를린으로 이동하여 유럽강연의 첫번째인 베를린 강연도 잘 마치고 유럽에서의 첫 밤이 이렇게 지나갑니다. 내일은 스위스 취리히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전체댓글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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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희

ㅎ덕분에 세계가 가까워집니다~♡

2017-09-16 07:22:49

정지나

참고 견디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 아니고 적절하게 나를 표현하고 소통하는 것이 나를 확장하고 지금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배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꾸벅인사^^

2017-09-14 09:38:24

큰바다

차별이라... 제도적인 것은 열심히 문제를 제기해서 평등한 세상으로 나아가되,
과정에서 나 자신을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서 괴롭지 않게 살자는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나는 또 일상에서 관습적으로 남을 차별하고 있지 않은지 잘 살펴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7-09-13 11:3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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