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7.10.3 해외 즉문즉설 강연(37) 벤쿠버
라스베가스 총격 사건... 현실이 너무 불안합니다

새벽 4시 스님의 집전으로 아침을 열며 시애틀법당에서 함께 새벽예불을 합니다. 스님은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중생들이 자유롭고 행복해지기를 발원하였습니다. 수행 정진의 힘으로 이웃도 행복해질 수 있도록 전법하고, 보시, 봉사하는 정토행자들이 되기를 발원하였습니다. 더불어 워싱턴 주 시애틀 법당이 부처님의 정법을 북미대륙에 널리 전파하는 중심법당이 되기를 발원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은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한반도가 되기를 발원하며 하루를 시작하였습니다.

간단히 아침식사를 하고 6시 30분 밴쿠버로 출발하였습니다. 저 멀리 시애틀 다운타운을 보면서 밴쿠버로 향했습니다. 출근길에 차가 막힐 것을 염려하여 조금 일찍 출발하였더니 오늘 영어통역강연을 할 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 (UBC,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교)에 조금 일찍 도착하여 차로 캠퍼스를 둘러보았습니다. 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는 바다를 끼고 있으며 단풍이 곱게 물든 대학 캠퍼스가 아주 예뻤습니다.

오늘 강연은 한국학 연구소장 박경애교수님 초청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강연장에 도착하니 행사준비를 위해 미리 도착해있던 밴쿠버정토회 총무 최내영님과 전총무 박은선님이 스님께 반갑게 인사하였습니다. 국제국에서 자원활동하며 pomnyun.com 작업을 한 이도현 님과 때마침 출장나와있던 관악법당의 한 청년회원도 강연 준비에 합류했습니다.

강연을 시작하기 전, 스님은 박경애 교수님과 교수님의 연구실에서 잠깐 인사를 나누며 오늘 강연에 초대해주신것에 대해서 감사했습니다. 박교수님은 북한 연구를 하는 분으로서 특히 북한의 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는 교수들을 UBC로 초청하여 경제시스템을 가르친다고 합니다. 지식공유와 인력양성을 위한 이 교류 프로그램은 현재 7년째 진행중이라고 합니다. 스님은 좋은 일을 한다고 격려해주셨고 두 분은 북한 관련해서도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강연시작시간이 다 되어 1층 강연장으로 내려갔습니다. 오전 11시 30분에 시작함을 감안하면 정말 많은 분들이 와주셨습니다. 봉사자 포함해 총 92명이 함께 했고, 다섯 명이 스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그 중에서 어제 라스베가스에서 비극적인 총격사건이 일어났는데 이와 관련하여 질문이 나와 소개하고자 합니다.

"라스베가스에서 일어난 사건 이후로 우리가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폭력과 증오가 세상을 휩쓸고 있고 많은 사람들은 이와 같은 현실에 불안에 빠져있습니다. 희망이 없어보입니다. 다른 시대보다 더 안 좋아 보이는 이와 같은 시대에 어떻게 살아가야 될까요?"

"100이라는 숫자가 있습니다. 50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100은 많은 숫자입니다. 하지만 200이라는 수의 입장에서 보면 100은 적은 수입니다. 그러면 100은 많은 수일까요 적은 수일까요? 100이라는 수는 많은 수도 아니고 적은 수도 아닙니다. 그냥 100이라는 수입니다. 어떤 관점에서 보는가에 따라서 그것은 큰 수가 되기도 하고 적은 수가 되기도 합니다. 크다 작다, 많다 적다 하는 것은 수에 있는게 아니라 우리 인식에 있습니다.

한국의 예를 들어본다면요. 나이든 세대들은 어릴 때 아주 가난했습니다. 그들의 생각에 지금의 한국은 아주 좋은 사회에요. 근데 젋은 사람들 입장에서 볼 때는 그들은 자라면서 풍요속에 자랐습니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왔는데 직장이 없습니다. 빈부의 격차도 심하고요 여러가지 사회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이 볼 때 한국은 지옥이라고 표현 합니다. 똑같은 사회를 두고 어떤 세대가 보냐에 따라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한국 사회는 좋은 사회도 아니고 나쁜 사회도 아닙니다. 어디를 기준을 두고 볼까의 문제입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를 생각해보세요. 그 때보다는 지금이 훨씬 평화로운 사회입니다. 1세기 또는 2세기 전을 돌아보십시오. 노예 제도가 있었고, 아시아 아프리카가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학살을 당했습니다. 여성들이 심한 차별을 받았습니다. 그때보다는 지금이 나은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기준으로 볼거냐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사회가 좋다 나쁘다 할 수는 없습니다. 현재 사회를 먼저 이해하고 이것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려면 장애가 무엇인지 알고 시정해나가면 됩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다 될 수는 없습니다. 현실속에서는 언제나 점진적으로 변해갑니다.

라스베가스의 참사가 정말 잘못 됐다고 생각한다면 원인이 뭘까 물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한가지는 그 범행자가 정신적 질환이 있다는 겁니다. 오늘 우리는 정신적인 질환에 대해서 굉장히 무지합니다. 앞으로 갈수록 정신적 질환은 더욱 확대됩니다. 그것의 뿌리는 아주 어릴 때 형성됩니다. 또 살아가면서 그가 겪는 경험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 근본적인 원인을 밝혀 치료를 하면 완전히 없앨 수는 없지만 많이 완화시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육체질병의 치료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더 중요한건 정신질병의 치료입니다. 우리가 그것에 무지하다는 거예요. 거기에 어떤 대책을 세우고 있지 않다는 거죠.

또 다른 하나는 그런 정신적 질환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총기를 가질 수 없었다면 이런 대량참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가 칼이나 돌로 사람을 해친다고 하면 두 세 사람 이상 해칠 수가 없습니다. 이 문제를 개선 하려면 우선 당장 효과가 있는 건 총기사용에 대한 규제가 있어야합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이건 할 수 있는 일이잖아요. 결국 여기에 권력이나 돈을 가진 사람들의 이해가 중요하게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좀 더 근원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려면 아이가 자아가 형성될 때 심리적 상처를 받지 않도록 해야됩니다. 그러려면 첫째, 엄마들의 심리가 안정이 돼야 합니다. 태어난 아이는 누구나 다 자기 엄마로부터 사랑을 받고 싶어합니다. 모든 생태계가 다 그렇습니다. 자아가 주로 형성되는게 3살 까지입니다. 그러면 아이 엄마들에게 아이를 전적으로 돌볼 수 있게 3년간 유급휴가를 줘야합니다. 인간의 자아가 형성될 때가 가장 중요합니다. 여기에 돈을 써야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곳에 얼마나 많은 돈을 낭비합니까.?

둘째, 아기 엄마가 키운다고 해도 엄마가 심리적으로 안정돼야 합니다. 정신적으로 우울증이랄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분이 아이를 키우면 아이에게 나쁜영향을 줍니다. 그러면 아이엄마의 심리를 안정시키는게 필요합니다. 그러면 남편은 집에 일찍 들어가고 어쨌든 아내가 아니라 아기엄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야합니다. 아기 엄마 스스로도 아기를 갖게되면 개인으로서 행동하면 안됩니다. 이건 개인의 노력과 주위 사회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한 사람으로서 성장해가는 과정에 심리적인 상처나 정신적인 불안을 덜 겪도록 해야합니다. 이런 어떤 대책을 우리가 세워나간다면 우리는 훨씬 더 이런 문제를 예방적으로 대처 할 수 있습니다. 완전하게 없앨 수는 없지만 비율을 많이 낮출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의 상처가 있더라도 발병은 어떤 자극을 받을 때 일어납니다. 인종적인 차별을 받거나 성적인 차별을 받거나 장애라고 차별을 받거나. 어떤 자극을 받을 때 이것이 발병합니다. 이러한 시스템도 수정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 사회가 문제가 있다고 인식한다면 개선을 하면 됩니다. 이것은 전생의 죄 때문에도 아니고 사주팔자가 나빠서도 아니고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벌 받은 것도 아니에요. 문제는 우리가 현실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우리가 개선할만큼 개선해나가고 그것을 넘어서는 문제는 또한 받아들여야합니다. 이것이 저는 성인의 가르침이라 생각합니다."

또 다른 질문자는 학생이었는데 욕망에 대한 질문을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사랑하는 삶을 사는 동시에 욕망을 버림으로써 스스로의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요. 사랑과 욕망을 어떻게 분리 할 수 있을까요? 분리하는게 가능은 한가요?"

"욕망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습니다. 욕망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욕망은 때로는 기쁨도 가지고 오지만 때로는 괴로움도 가지고 옵니다. 문제는 우리가 즐거움만 추구하고 괴로움은 회피합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이 일어나면 괴로워합니다. 욕망을 추구하면 욕망자체가 나쁜게 아니고 그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걸 자꾸 회피하려고 합니다. 만약에 그러한 나쁜 결과를 내가 원하지 않는다면 내가 하고 싶지만 그 욕망을 절제 할 필요도 있습니다. 욕망을 절제하는게 좋다 나쁘다 그런게 아닙니다.

극단적인 예를 들면. 앞에 있는 여성이 너무 아름다워서 질문자가 껴안고 싶다 뽀뽀도 하고 싶다고 질문자가 포옹해 버렸다고 하면 질문자는 성추행범으로 처벌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후회를 하게됩니다. 그 때 조금만 참았으면 되었는데 하고 후회하기 쉽습니다. 이게 문제에요. 내가 만약 그런 행동을 했다면 3년형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저는 감옥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야됩니다. 과보를 기꺼이 받아야합니다. 그런데 만약 이 과보가 더 큰 손실이라면 내가 껴안고 싶더라도 나는 그것을 자제해야합니다. 자제하라는 것이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그것을 자제해야 합니다."

"제가 이야기 하는 사랑은 예를 들면 와이프를 평생 행복하게 하고, 건강하고 행복한 아이를 키우는 것과 같은 사랑입니다. 이런 종류의 사랑도 욕망이라 할 수 있겠지만 스스로에게 부정적인 것이라 생각하기는 힘듭니다."

"똑같은 욕망입니다. 욕망은 좋다 나쁘다 하는것이 아닙니다. 그 욕망이 내가 좋은 것이 상대도 좋아지는게 있고 내가 좋아하는것이 상대에게 괴로운 것도 있습니다. 그 두 차이 밖에 없습니다. 내가 좋아한다는 건 똑같아요. 그것을 상대가 받아들이면 서로 좋은 거고 안 받아들이면 상대에게 안 좋은 거예요. 그것은 상대의 반응이에요. 내가 좋다고 무조건 행하지 마라. 내가 좋아해도 상대가 싫어하면 상대에게 고통이다. 그래서 상대가 싫어하는 것은 내가 좋아도 하지마라가 하나의 계율입니다. 내가 행복할 권리는 있지만 남을 괴롭힐 권리는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상대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 그것도 욕망이에요. 부인이 내가 행복하게 해주는게 엄청난 부담일 수도 있어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한다고 하지만은 아이들에게는 무거운 짐이되고 속박이 될 때도 있습니다. 내가 누구를 행복하게 해준다는 건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그래서 상대가 행복하지 못하면 내가 매우 실망하게 됩니다. 저는 그것보다는 내가 너를 만나서 내가 행복하다. 당신이 내 부인이 돼줘서 내가 행복하다. 아이들에게도 너가 있어서 내가 행복하다. 그 때는 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듭니다. 그것이 훨씬 더 부작용이 적습니다.

너를 위해서 라는 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이에요. 그것은 미움의 원천이 됩니다. 내가 너를 만나서 행복하다. 감사하다 할 때는 아무런 미움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설령 헤어진다고 해도 지난 세월동안 너를 만나서 행복했다. 고맙다. 이런 마음이 일 때 부작용이 없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한다고 할 때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나중에 원수가 되기가 쉽습니다. 부모는 자식이 기대한만큼 되지 않으면 실망하게 되고 내가 고생한 것이 헛것같이 느껴지고 상대를 미워하게 되고 나에 대해서 지난 인생을 허무하게 생각합니다. 아이를 잘 되라고 해서 잘되는게 아니에요. 그리고 또 어떤게 잘되는건지도 알 수 없어요.

부처님이 출가 할 때는 부모가 반대했습니다. 만약에 부처님이 부모 말을 들었다면 붓다가 출현 할 수가 없습니다. 붓다의 길을 막은 가장 큰 장애는 부모였습니다. 제가 출가 할 때도 부모님이 반대했습니다. 나는 내 길을 갔지만 내 부모에게 가장 가슴 아프게 한 사람이 됐고 부모는 내 길을 가장 막는 사람이 됐습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했기 때문에 원수가 된 거예요. 그러니까 누구를 위해서 희생한다는 건 사실은 위험한 생각이에요. 우리는 항상 부인과 자식에게 감사하다 너가 있어서 내가 행복하다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해요.”

뒤로 갈수록 질문이 많아지고 분위기도 좋아져서 원래 1시간 30분 하기로 한 강연이 거의 1시간 50분이 되어서야 끝이 났습니다. 스님은 초청해준 박경애교수님과 직원들께 감사인사를 하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스님께 와서 강연이 좋고 재미있었다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 중에서 장춘대학교에서 왔다는 중국 분은 스님께 선물을 드렸습니다. 스님 강연이 어땠는지 물으니 아주 좋았다고 하였습니다.

UBC 대학교 교목님이신 Gareth Sirotnik 님이 오셔서 오늘 스님을 만난 것이 한국선불교를 처음 접한 것이라고 하면서 스님 강연이 너무 좋았다고 다음에도 UBC를 방문해주시면 좋겠다고 인사했습니다. 밴쿠버 총영사님도 스님강연을 잘 들었다고 스님께 반갑게 인사했습니다.

한국학과 Donald Baker교수님 부부도 오셔서 스님과 인사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스님책을 영어로 번역한 윤승서님도 밴쿠버에 살고 있어 강연장을 방문했고 스님도 반갑게 인사했습니다. 많은 분들과 인사를 나눈 뒤 스님은 박경애교수님과 근처 학교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점심식사를 하였습니다. 식사 후에는 캠퍼스가 예뻐 바닷가가 보이는 곳으로 올라가 잠깐 둘러보고 스님은 다음 강연이 있기 전까지 밴쿠버 법당에 들러 업무도 보시면서 휴식하였습니다.

시간이 되어 크로아시안센터 강연장에 도착하니 거의 강연시작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강연장으로 들어서며 스님은 봉사자들과 일일이 악수하며 감사인사를 했습니다. 오늘 약 264명이 참석하여 함께 좋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중 자원봉사자는 33명이었습니다.

우선 스님은 다음의 말로 서두를 열었습니다.

“추석 전날입니다. 한국 제사 지내는 시간과 겹쳐서 못 온다는 분들도 있어 강연 담당자가 많이 못 올거라 걱정을 많이 하던데 많은 분들이 오셨네요. 바쁜날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현대사회는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합니다. 제가 어릴 때는 대부분 대가족이었습니다. 제가 중년때 많이들 핵가족이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핵가족도 아니고 혼자의 시대로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어떤 것이 바른 것이냐 하는 혼란이 있습니다. 앞으로 저는 더욱더 혼란이 올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공지능, 사물인터넷이 더욱 더 발달하게 되면 지금과는 또 다른 사회가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올바른 가치관이라고 하는 것과 전혀 다른 개념이 생겨날 것입니다. 이런 문제들이 미래의 우리에게 닥친 과제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포함해서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고뇌라든지 인생에 대한 의문이라든지에 대해 얘기해봅시다. 또한 휴스턴에 일어났던 자연재해, 라스베가스 총기 사건 등 이런 문제들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최근에 북한과 미국 간의 갈등 이런 것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포함해서 개인문제, 사회문제, 과거, 미래 문제 등 특정 주제를 정하지 말고 여러분들이 경험한 것과 의문나는 것을 가지고 자유롭게 대화를 해봅시다.”

이어서 질문을 받았습니다. 오늘 강연에서는 총 7명이 스님께 질문하고 대화하였습니다.

캐나다에서 결혼하고 캐나다인남편과 결혼생활을 시작하는데 어떻게 살아야 할 지 고민이라는 분, 성격이 아주 다른 두 명이 결혼할려고 하는데 돈문제로 최근에 많이 싸우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스님의 조언을 구하는 분, 회사를 다니고 있는데 보람이 없고, 딱히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분, 어른이 되어 여러가지 안좋은 일, 갈등등을 자꾸 겪고 있는데 어떻게 사회생활을 하면 좋을지 묻는 분, 3년전에 교통사고를 겪고 회복을 하다가 다시 다쳐 언제 복귀를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라서 불안하다는 분, 인생이 허무하고 무의미해서 무엇을 할 지 모르겠다는 분, 낙태에 대한 스님의 의견을 듣고 싶다는 분 등 7명이 스님과 대화하였습니다.

그중에서 다음의 질문과 스님의 대화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저는 남자친구와 작년 가을에 만났습니다. 만나자마자 불같은 사랑을 하고 한국에 가서 상견례까지 마치고 이제 혼사(婚事)만 앞두고 있습니다. 너무 서두르다보니 성격, 습관, 경제관, 종교관 등이 여전히 많이 다릅니다. 저는 부지런하고 깔끔하고 계산에 밝은 유학생 마인드를 가진 반면, 남자친구는 느긋하고 여유있는 성격인데다 조기유학을 했을 만큼 경제적으로 풍족하게 자랐습니다. 종교적으로도 저는 기독교, 천주교, 불교, 이슬람교, 힌두교 등 다양하게 공부를 하고 있는 반면 남자친구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입니다.

근래에 가장 많이 싸우게 된 건 경제적인 이유인데, 저는 고장난 싱크대 등을 고치고 싶어 하는데 남자친구는 아끼는 게 최선이라며 돈을 꽉 쥐고 내놓지 않습니다. 싸울 때 저는 저대로 답답하고, 남자친구는 계속 제가 쪼아댄다며 불평입니다. 집 밖에서 다른 사람과 부딪히는 일로 저희 둘이 같은 편이 되어서 상대할 때도 주로 제가 뒷수습을 하게 됩니다. 최근에도 나 혼자 뒷수습을 한다는 기분이 들어 참지 못하고 물건까지 집어 던지게 되었습니다.

타국에서 이민자로 살아가면서 감내해야 하는 부분들도 많은데, 이렇게 둘이서 지옥처럼 싸우게 되니 어떻게 해야 할 지 잘 모르겠습니다. 기댈 곳이라고는 서로의 등 밖에 없는데, 이런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할 지 조언을 구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는 결혼을 하고 싶습니다.”

“아직 결혼할 수준이 안 돼요. 결혼할 사람이 혼자 사는 사람에게 물어서 결혼을 하려고 하는데, 이런 걸 어불성설(語不成說)이라고 해요. 그러니 결혼을 하고 싶으면 지금 결혼해서 사는 사람에게 가서 한 번 물어봐요.(모두 웃음)

지금 남자친구와 다르기 때문에 갈등을 겪고 있잖아요. 이런 경우에는 원리대로 말하면 같이 살기가 어렵습니다. 결혼하기 전에 그만두는 게 어때요?”

“그래서 열심히 싸웠는지도 모르겠어요.”

“정을 떼려고 싸웠으면 정을 떼어야죠. 정이 떨어져야 그만둘 수 있어요.

서로 다름이 갈등의 원인이 됩니다. 서로 다른 것이 왜 갈등의 원인이 될까요? 자기를 중심에 놓고 상대를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를 기준으로 삼고 상대를 바라보기 때문에, 굳이 ‘내가 옳다’고 고집해서가 아니라 내가 기준이 되기 때문에 내가 옳아지는 거예요.

가령, 두 사람이 길을 걷는데 남편은 앞에 가고 아내는 뒤에 간다고 해봅시다. 그럴 때 앞서가는 남편은 남편의 입장에서 ‘뭐한다고 꾸물거리냐, 빨리 와라’하고 생각을 하게 돼요. 자기를 기준으로 삼으니까 뒤에 오는 아내가 늦게 온다고 인식합니다. 반면 뒤에 가는 아내의 입장에서는 또 자기 입장을 기준으로 삼아서 ‘뭘 그리 서두르나, 저 사람은 매번 외출할 때마다 서두른다’라고 생각해요. 즉, 앞에 가는 사람은 자기를 기준 삼아서 뒤에 오는 사람에게 늦게 온다고 하고, 뒤에 가는 사람은 자기를 기준 삼아서 앞서 가는 사람에게 서두른다고 합니다.

이건 실제로 빠르고 느려서 그런게 아니라 각자가 자기를 기준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자기 기준에 비추어서 빠르다 혹은 느리다고 인식하는 겁니다. 이처럼 세상 모든 사람들은 사물을 인식할 때 자기를 기준으로 삼습니다. 이 세상에는 본래 빠른 것도 없고 느린 것도 없고, 옳은 것도 없고 그른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항상 자기를 기준으로 인식하다보니 늘 빠른 게 있고 느린 게 있고, 옳은 것도 있고 그른 것도 있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중심으로 놓는 사고로 생겨나는 싸움에는 끝이 없습니다. 남편은 자기를 기준으로 생각하니까 자꾸 아내가 느리다고 생각을 하고 ‘조금만 빨리 하지, 왜 그리 꾸물거려?’ 라고 말하고, 아내는 또 아내 자신을 기준으로 생각하니까 자꾸 남편이 서두른다고 생각을 하고 ‘조금만 천천히 하지, 왜 그리 서둘러?’라고 말합니다.

질문자의 경우에는 질문자가 행동이 빠른 편이다보니 남자친구를 보고 느리다고 말하고 있어요. 그런데 실제로 남자친구는 느린 사람이 아닙니다. 남자친구보다 더 느린 사람을 만나보면 오히려 남자친구가 빠르다고 느끼게 될 거예요. 질문자 스스로도 지금은 본인의 행동이 빠르다고 생각하지만 본인보다 성격이 더 급한 사람을 만나면 그때는 느리게 느껴질 거예요. 저도 성격이 급한 편인데, 저랑 같이 다녀볼래요? (청중 웃음)

질문자도 느긋한 성격을 가진 남자친구와 비교를 하니까 스스로가 빠릿한 것처럼 인식되는 것이지, 질문자가 빠르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즉, 질문자가 빠르다 혹은 남자친구가 느리다는 것은 서로에게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빠르고 느릴 뿐이지, 둘 다 빠른 사람도 아니고 느린 사람도 아닙니다. 단지 각자 다른 성격을 가졌을 뿐입니다.

종교관도 마찬가지예요. ‘종교라는 게 원래 믿음인데, 하나만 믿어야지 어떻게 종교를 마치 음식 고르듯이 이것 저것 가질 수가 있느냐’라는 관점을 갖고 하나의 종교만 믿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여러가지 종교를 갖는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반면 질문자처럼 ‘종교라는 것도 우선 여러가지를 공부해 본 다음에 나랑 가장 잘 맞는 것을 선택해야지, 왜 그 중 꼭 하나만을 고집해야 하느냐’라는 관점을 가진 사람은 한 가지만 믿는 게 이해가 안 돼요. 이 역시도 서로 바라보는 관점이 다른 겁니다. 서로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면서 계속 이야기하면, 의사소통이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갈등의 원인은 대부분 다름입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많은 갈등이 이와 같아요. 다름이 없다면 이런 종류의 갈등은 일어나지 않을텐데, 그렇다고 만약 우리가 모두 같다면 어떨까요? 같다는 게 꼭 좋을까요? 이는 마치 한 가지 음식만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밥을 먹을 때 반찬을 여러가지 먹는 게 몸에 좋지, 한 가지만 먹고는 살 수 없잖아요.

또 다르다고 해서 꼭 갈등이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나와 같기를 고집하지 않으면 갈등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즉, ‘네가 틀렸어’가 아니라 ‘너는 나와 다르구나’라고 다름을 인정하면 다름은 갈등이 아니라 다양성이 됩니다. 모두가 같기를 고집하면 북한과 같이 획일화된 사회가 되고, 다름을 인정하면 다양성의 사회가 됩니다. 이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기본입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인종, 성별을 비롯하여 의견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기초가 됩니다. 반면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민주주의의 토대가 흔들리는 것과 같습니다.

다름을 인정하면 이는 곧 다양성이 되고, 다양성은 곧 풍요로움으로 이어집니다. 이는 마치 여러가지 반찬이 어우러지면 상이 풍요로워지는 것과 같아요. 사과와 배를 먹을 때 사과는 사과 고유의 맛이 있어야 하고 배는 배 고유의 맛이 있어야 다양함이 사는 길이에요. 그렇지 않고 상큼한 사과가 달콤한 배에게 ‘배에게는 상큼한 맛도 없고 대체 무슨 과일이야?’라고 하거나, 배가 사과에게 ‘과일이라면 자고로 달아야 하는데 사과는 대체 무슨 맛이야?’라고 하면 다양함이 살지 못합니다.

질문자도 두 사람의 다름이 갈등의 원인이 되는 것은 각자가 자기의 습관, 경험, 종교, 관습, 가치관을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네가 틀렸어’가 아니라 ‘나와 다르구나’라고 다름을 인정하면, 다른 두 사람이 같이 살기 때문에 생기는 좋은 효과들이 있습니다. 빨리 처리해야 하는 일은 질문자가 담당하고, 그 와중에 생길 수 있는 실수들은 천천히 하는 남자친구가 보완해 줄 수 있어요.

세상에 다름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곳의 모습은 이와 같아요. 이를 소위 상생(相生)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결합을 할 때 같은 것끼리 결합하는 방법이 있고 서로 다른 것들을 결합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같은 것끼리 결합할 때는 1+1로 2가 됩니다. 반면 다른 것끼리 결합하면 서로의 효과가 상쇄되어 0이 될 수도 있고, 서로의 효과가 상생되어 10이 될 수도 있어요. 후자를 흔히 시너지(synergy) 효과라고 합니다.

두 사람이 같이 사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서로가 결합하여 0이 될 수도 있지만, 각자가 따로 사는 것보다 더 큰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시너지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서로가 다름을 인정해야 합니다.

지금 질문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두 사람은 서로 다름을 인정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현재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예요. 앞서 이야기한대로 ‘너는 너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살자’ 싫으면 ‘안녕히 계세요’ 하고 헤어지는 거예요. 그렇지 않고 같이 살고자 하면 최선의 방법은 나와 다른 상대방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옳은 것도 아니고 내가 옳은 것도 아니에요. 그저 두 사람은 다를 뿐입니다.

‘당신이 옳고 내가 틀린 것도 아니고, 또 당신이 틀리고 내가 옳은 것도 아니야. 당신은 나와 다를 뿐이야. 하지만 나는 당신의 그런 의견, 취향을 존중해.’

이런 입장이 되면 같이 사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오히려 서로의 장점을 잘 살릴 수 있어요.

이렇게 설명을 하면 많은 사람들이 집에 돌아가서 이 이야기를 상대방에게 적용합니다. 법문은 오로지 자기에게만 적용해야 합니다. 오늘 법문을 들었으면 내가 나와 다른 상대방을 인정하고 존중하는지를 점검하고 상대방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해요. 그런데 대개 상대방에게 가서 ‘너 오늘 스님 법문 들었지? 나를 존중하라는 말씀 들었지?’라고 말해요. (청중 웃음)

상대방에게 적용한 법문은 비수(匕首)가 됩니다. 같은 칼도 요리할 때 사용하면 유용한 도구가 되고 누군가를 찌르면 비수가 되듯이, 부처님의 말씀도 자신에게 적용하면 감로법(甘露法)이 되지만 남에게 적용하면 독(毒)이 됩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상대방에게 ‘너 자비로운 마음을 가져, 베푸는 마음을 가져’라고 하거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으니 나를 용서하고 사랑해, 포용하는 마음도 없어?’ 라고 적용하면 상대를 찌르는 비수가 됩니다. 성인의 말씀은 오로지 나 자신에게만 적용해야 합니다. 오늘 법문을 듣고도 ‘나와 다른 상대방을 인정하고 존중해야지’하고 나에게만 적용해야 해요. 그렇지 않고 상대에게 가서 ‘너 나를 인정하고 존중해’라고 하면 그것이 또 다른 갈등의 씨앗이 됩니다.

스님의 유튜브 법문도 혼자서만 들으면 괜찮아요. 아내나 남편이 혼자서 보면, 상대방은 안 들었으니까 상대에게 적용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둘이서 같이 들으면 같은 법문을 듣고 그걸로 싸운대요. (청중 웃음) 서로가 ‘너 스님 법문 안 들었어? 스님이 이렇게 하라고 했잖아’, ‘너는 스님 법문을 들어놓고도 그렇게 밖에 못 해?’ 하면서 서로에게 비수를 꽂는 거예요.

법문의 내용은 항상 자기에게만 적용해야 합니다. 그러니 법문을 듣고 나서 ‘너 스님 법문 들었잖아’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그런 말을 하거나 그런 생각이 든다면 이미 상대방에게 적용하고 있는 거예요. 법문도 자기에게 적용하면 유용한 도구가 되고, 상대방에게 적용하면 비수가 됩니다. 여기 계신 분들도 오늘 들은 이야기를 각자 자기에게만 적용해야지 상대방에게 그 내용을 요구하면 안 됩니다.

질문자도 오늘 이야기를 들었으니 스스로 자신에게 남자친구를 인정하고 존중하는지 물어보고 다름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지, 남자친구에게 그걸 요구하면 안 돼요. 남자친구를 인정하라는 게 상대방이 옳고 내가 그르다는 게 아니에요. 그냥 각자가 서로 다를 뿐이지 한 쪽이 옳고 다른 한 쪽이 그른 게 아닙니다. 이렇게 그저 다름을 인정하는 것을 존중이라고 해요.

또 한 가지는, 여러분들은 결혼할 때 무엇을 가장 중요시합니까? 남자가 여자를 만날 때 그리고 여자가 남자를 만날 때 가장 우선시하는 조건이 무엇인가요? 인물이죠? 만남에 앞서서 사진 교환하고 그러는 게 다 인물을 중요시한다는 말이에요. 두 번째 보는 건 무엇인가요? 학교는 어디를 나왔는지, 직장은 어디인지, 집안이 어떤지를 봅니다. 이건 능력을 보는 거예요. 주로 인물과 능력, 이 두 가지를 보고 결혼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결혼을 해서 같이 살 때 부딪치는 문제들을 보세요. 인물이나 능력 때문에 부딪치는 경우는 별로 없어요. 결혼해서 같이 살 때 가장 많이 부딪치는 부분은 성격과 생활 태도예요. 샤워할 때 수건을 몇 번 쓰는지를 두고도 싸우고, 양말을 벗어서 어디에 두는지를 두고도 싸워요. 그리고 서양식 좌변기는 남자들이 서서 소변을 보다가 주위를 더럽게 해서 아내들이 불평을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옷을 매일 갈아입는 사람과 며칠에 한 번씩 갈아입는 사람이 다투기도 하고, 살다보면 작지만 다른 습관 하나하나가 갈등의 요인이 됩니다.

이렇게 살면서 실제로 부딪치는 문제는 성격과 생활 태도에서 비롯되는 게 대부분인데, 결혼에 앞서 이 문제를 크게 고려하지 않는다는 게 큰 모순입니다. 막상 살면 인물은 사는데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그런데도 인물을 가장 먼저 고려한다는 게 어리석잖아요. 이렇게 실제로 중요한 부분을 고려하지 않고 부차적인 것만 따지는 것이 실제로 같이 살면서 갈등을 많이 겪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동거 생활이든 결혼 생활이든 두 사람이 같이 산다는 것은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 맞추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대방을 내 방식대로 뜯어 고치려고 하면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어요. 내 식대로 고치는 게 최선인 것 같이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내 관점에서의 최선을 고집하다가 결국 최악의 결과를 맞게 됩니다.

우선 내가 상대방에게 맞추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다가 잘 안 되면 상대방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거예요.‘내가 맞추려고 하는데 잘 안 되니까 당신이 조금만 도와줘’ 하는 자세를 갖추면 누구와도 같이 살 수 있어요. 반면 자기를 고집하면 누구하고도 함께 살 수가 없습니다.

질문자는 만나자마자 둘이 반했다고 하는데, 굳이 악담을 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경우에는 둘이 헤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첫눈에 반한 경우에는 대부분이 오래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첫눈에 반했다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것을 의미이기 때문이에요. 첫눈에 반할 정도로 상대에게 거는 기대가 큰 겁니다. 그런데 막상 살아보면 그 기대는 충족되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헤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고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에요. 이걸 알고 나면 상대에 대한 요구 조건을 낮추면 됩니다.

조선시대 여성들은 남편 될 사람의 얼굴도 못 보고 결혼하는 경우가 많았잖아요? 그런데도 잘 살았어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쉽게 헤어질 수 없는 사회적인 관습도 있었지만, 상대방이나 결혼생활에 대한 아무런 기대가 없었기 때문이에요. 그 당시에는 ‘결혼하면 죽었다’고 배우고 결혼을 하기 때문에 기대가 낮았어요. 시집 가기 전에 ‘결혼하면 죽었다고 생각해야 한다. 3년은 눈 감고 살고, 3년은 귀 막고 살고, 3년은 입 다물고 살아라’라고 가르칩니다. 이 말은 9년 동안은 죽었다고 생각하고 지내라는 말인데, 그만큼 아무런 기대를 하지 말라는 말이에요. 그런데 막상 살아보면 듣던 것보다는, 죽어지내는 것보다는 나아요. 자기가 생각한 것보다는 나으니까 입가에 미소가 도는 겁니다.

반면 요즘 사람들은 연애도 해보고 동거도 해보는데도 결혼생활이 오래가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기대가 너무 높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질문자도 첫눈에 반했다고 하는데, 기대를 높게 가지고 있으면 그만큼 헤어질 확률이 높습니다. 헤어지지 않으려면 이제 첫눈에 반했다는 과거에 대한 생각은 버리고, 상대에 대한 기대를 낮추어야 해요. 결혼생활은 동거예요. 친구와 동거하듯이 그냥 나와 다른 사람과 같이 사는 거예요.

친구와 동거를 할 때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요? 밥하고 청소 등 해야 할 일을 제때 하는 신뢰가 가장 중요합니다. 같이 사는 데에는 신뢰가 가장 중요하지 인물과 돈은 모두 부차적인 것입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책임을 다하는 자세가 서로에게 신뢰가 오래갈 수 있습니다. 질문자도 연애할 때 따끈했다는 생각은 오늘 질문을 함과 동시에 버리는 게 좋아요.

외국인과 결혼해서 사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처음에는 좋을 것 같지만 막상 살아보면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갈등이 많이 생깁니다. 그럴 때 서로를 존중해야 같이 지낼 수 있지, 아까 질문자처럼 자기를 고집하고 한국에 있는 가족을 그리워하면 같이 살기 어려워요. 이렇게 잘 아는 스님도 혼자 사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왜 결혼을 했을까? (청중 웃음)

질문자는 이렇게 기도를 해보세요. 부처님을 믿으면 부처님께,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 혹은 조상님을 믿으면 조상님께 ‘당신을 만나서 저는 행복합니다’ 이렇게 기도해보세요. 내가 너를 위해서 희생한다고 생각하면 오래가지 못합니다. ‘당신을 만나서 저는 행복합니다. 저와 살아줘서 고맙습니다’라는 마음으로 지내면 같이 살 수 있어요. 그런데 현재의 조건을 가지고 자꾸 따지면 같이 못 지낼 확률이 높아요.”

“네, 감사합니다.” (청중 박수)

2시간 15분동안 즐겁고 유쾌한 한 편의 즐거운 쇼처럼 참가한 많은 분들이 행복해한 시간이었습니다. 강연을 마치고 스님은 책사인회를 하였습니다. 줄이 길게 늘어섰지만 스님은 모든 분들께 정성껏 사인을 해주었습니다.

오늘 질문하신 두 분께 어땠는지 물어보니 한 분은 스님께 혼나서 속상하기도 했지만 후련하다고 했고, 다른 한 분은 욕심이 앞섰고 결혼하려는 마음이 아니었구나 싶어서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강연에 참가한 한 분은 스님의 강연에 두번째 참가했는데 질문자들과의 대화를 듣고 있다보니 마음이 맑아졌고, 본인의 고민이 해결되었다고 매우 좋아하였습니다.

이어 스님은 강연에 참가한 모든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기념사진촬영을 하고 감사인사를 하였습니다.

강연의 실무총괄을 한 최정림님과 밴쿠버정토회 총무 최내영님께 감사인사와 함께 사진 촬영을 하였습니다.

사진 촬영을 마친 후 스님은 봉사자들을 격려하며 한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미래에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것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혼란을 겪을 것입니다. 사회시스템이나 가치관에 큰 변화가 와서 더 큰 혼란을 겪을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대비는 단순한 지식으로 되지 않습니다. 항상 탐구해야 창의력을 가진 사람이 됩니다. 서로 다른 것들이 있으면 갈등하거나 방황하게 되는데 다름을 인정하게 되면 다름이 다양함과 풍요로움으로 옵니다. 수행은 나를 행복하게 하고 주위사람을 행복하게 합니다. 밴쿠버정토회원들이 수행정진하여 밴쿠버와 캐나다에 진리를 전하고, 보시하고 봉사하는 정토행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부지런히 수행하여 행복하고 자유로운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묘덕법사님과 나누기를 하라고 하고 시애틀로 이동하였습니다.

서둘러 시애틀로 내려오니 거의 밤 1시가 되었습니다. 스님은 급하게 보셔야 할 원고교정업무를 보셨습니다. 묘덕법사님이 나누기를 하고 내려와서 내일일정을 공유하고 오늘 하루를 마감하였습니다. 긴 하루였습니다. 내일은 오전 7시 40분행 비행기를 타고 산호세로 이동합니다. 내일도 스님은 낮시간에는 몬트레이 미해군대학교 대학원에서 강의가 있고, 저녁에는 산호세에서 강연이 있습니다. 내일은 산호세에서 소식전하겠습니다.

*영어 통역 강연 녹취 정리는 이도현님이 해주셨습니다.

함께 만든 사람들
김순영 이준길 손명희 정란희 조태준

전체댓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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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규태

감사합니다!!!^_^

2017-10-13 17:10:56

정지나

" 내 관점에서의 최선을 고집하다가 결국 최악의 결과를 맞게 됩니다."
순간순간 나에 생각을 고집합니다. 오직 나만을 살피고 살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7-10-12 09:09:41

큰바다

세상에는 참 많은 일이 있습니다. 사실은 어떠한가 잘 살피고,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 잘 알아서, 나에게도 좋고 남에게도 좋고, 지금도 좋고 나중에도 좋을 길을 잘 살아야겠습니다. 오늘도 참 긴 하루였네요. 스님. 건강하십시오. 감사합니다.

2017-10-09 18: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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