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7.12.10 정토불교대학 특강수련 & 화엄반 수련
“불편하지만 불만은 없다”

오늘 스님은 정토불교대학 특강수련 강의를 한 후 화엄반 수련에 함께 했습니다.

캄캄한 문경 새벽입니다. 서울, 제주, 대구, 경북 지부 불교대학교 학생 240여명이 문경정토수련원 대수련장에 모였습니다. 학생들은 6시부터 9시까지 법륜스님과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실천적 불교사상을 마치고 부처님의 일생을 막 공부하기 시작한 학생들은 귀 기울여 스님 말씀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학생 10명이 질문지를 써냈습니다.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나왔습니다.

“자신이 게으른데 이 게으름 병을 이대로 둬도 되는지?”
“수행을 해야만 마음이 편해지는지, 언제까지 수행을 해야 되는지?”
“사회에 왜 전쟁과 폭력이 있는지?”
“깨달음은 한 번에 깨달으면 끝나는 건지, 계속 깨달아야 되는 건지, 지혜와 지식의 차이를 알고 싶고 깨달음, 무아, 해탈이 진짜 좋은 건지?”
“상대가 험담을 할 때 기분이 나쁜데 이럴 때 참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우리나라에 정말 전쟁이 일어날지, 지금 우리나라가 얼마나 위험한지?”
“스스로 행복을 못 찾아가는 집사람을 보면 연민이 생기고 집사람의 무지한 모습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돈을 빌려서 안 갚는 언니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어린아이가 성폭행을 당하는 일, 위안부피해자들 같은 일은 어떻게 인연과보로 설명이 되는지?”
“왜 우울증이 있으면 깨달음의 장을 할 수 없는지?”

오늘은 그 중에서 어떻게 하면 내가 옳다는 생각을 내려놓을 수 있는지를 물은 질문을 소개하겠습니다.

“참회문에서 화가 나거나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내가 옳다’는 생각을 내려놓으라고 가르치는데, 살다 보면, 물론 애매한 경우도 많지만 옳고 그름이 명확해 보이는 경우도 자주 접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오계는 마땅히 지켜야 될 도리인데 그것을 상대방이 어김으로 인해서 제가 괴로움을 당할 경우에도 내가 옳다는 생각을 내려놓을 수 있는지, 어떻게 내려놔야 하는지 궁금해서 여쭤봅니다.”

“질문자가 어떤 일을 당했는지 구체적으로 얘기해 보세요.”

“아...”(모두 웃음)

“그냥 생각으로 ‘이럴 땐 어때? 저럴 땐 어때? 천당, 지옥이 있으면 이것 문제잖아. 저것 문제잖아.’ 하는 건 다 생각의 문제예요. 그러니까 제가 구체적으로 질문자가 어떤 일을 당했기에 그런 질문을 하는 거냐고 묻는 거예요. 질문자가 고민하는 문제가 질문자가 죽을 때까지 실제로 안 일어날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그런 건 고민할 필요가 없는 문제지요. 자기 생각으로 만들어서 질문을 하지 말고 질문자가 실제 겪은 일을 가지고 질문을 해야 탁, 다가온다는 말이에요. 그러지 않고 계속 머리만 굴리면 번뇌만 커질 수가 있거든요.”

“말씀을 드리자면... 저의 행동을 오해해서 험담을 한다든지...”

“상대가 나를 험담했다? 입이 있어서 말하는 걸 어떻게 해요?(모두 웃음) 그리고 질문자 말대로 그 사람은 오해를 한 건데, 오해를 했다는 건 그 사람이 그걸 진실인 줄 알고 그러는데요. 그게 화를 낸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잖아요. 그 사람은 그렇게 정보를 받아들여서 그렇게 알고 있는데요. 그럼에도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게 아니다. 그건 사실이 아니야’라고 말해 주는 거지요. 그렇게 말해도 그 사람이 고집하면 놔둬야지요.

그런데 누가 내 험담을 하면 기분이 나쁘다는 건 이해는 되지만 사실 기분이 나빠야 할 이유는 없어요. 여러분들이 수련원 화장실이 불편하다고 불만이 많은 건 이해는 돼요. ‘살아온 습관과 다르니까 저렇게 불편해서 불만이구나.’ 하고 이해는 되지만 그게 꼭 불만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는 거예요. 불편하다? 그건 습관이 다르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불편하다’고 하면 ‘불편을 느꼈겠구나’ 하지만 ‘불만이다’고 하면 그 불만이 이해는 되지만 불만을 가져야 할 이유는 없다는 말이에요. 불편할 때 이 불편이 타인의 잘못에서 비롯되는 줄 잘못 알면 불만이 생기지만 그 불편이 나의 습관에서 생기는 줄을 알면 불만이 생기지는 않습니다. 불편하구나! 하고 알아차릴 뿐이지요.

다른 예를 들어보면 뒷담화를 한다고 불만인 사람이 있던데, 그럼 앞담화를 하면 더 좋겠어요?(모두 웃음) 이렇게 따져보면 뒷담화가 더 낫잖아요.(모두 웃음) 저는 뒷담화가 훨씬 나은 것 같아요. 제가 이렇게 법문을 하는데 여기서 누가 손을 번쩍 들고 ‘스님, 법문을 그렇게 해서 되겠어요?’(모두 웃음) 이렇게 이 자리에서 막 삿대질하고 그러는 게 낫겠어요?(모두 웃음) 아니면 법문 끝나고 돌아가면서 자기들끼리 ‘스님 법문이 뭐 그래’이러는 게 낫겠어요? 물론 뒷담화를 안 하면 더 좋겠지만 그래도 앞담화하는 거보다는 낫지요?”

“(대중들) 예.”

“그러니 굳이 그런 소리를 듣고 화낼 필요는 없어요. 그러나 문제가 있으니까 오해를 풀어야 된다면 연락을 해서 ‘그건 사실이 아니다’라고 대화를 할 필요가 있겠지요. 부처님의 말씀은 대화를 하지 말라거나 오해를 풀지 말라는 얘기는 없고, 다만 ‘그걸로 괴로워하거나 화내거나 미워하지 말라’는 얘기만 있거든요. ‘해명하지 마라’는 얘기는 없어요. 참회에는 세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 스스로 잘못한 줄 알고 반성하는 걸 보통 참회라고 하고요, 둘째, 대중 앞에 드러내놓고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는 걸 포살이라고 합니다. 셋째, 자자라는 게 있어요. 내가 뭘 잘못했는지 내가 잘 모르니까 대중들한테 ‘여러분들이 저를 봤을 때 제가 뭘 잘못했는지 말씀을 좀 해 주세요’라고 청해서 듣는 걸 자자라고 합니다. 이 ‘자자’가 제일 어려워요. 자자를 받을 정도라면 벌써 수행이 굉장히 깊은 거예요. 상대가 말해 주는 걸 듣고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건 수행이 굉장히 깊은 건데, 여러분들이 막상 자자를 받아보면 알겠지만 기분은 좀 나빠요.(모두 웃음) 스스로 청해 놓고도 기분이 나쁘다고요. 그런데 우리가 나도 나의 잘못을 모르니까 도반에게 청해서 듣는 건데, 들을 때 무조건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라고는 안 되어 있어요. 그게 오해로써 사실이 아니라면 그때 해명을 할 수도 있고, 자기가 잘못한 게 맞으면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이렇게 참회 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해명이 변명이 되면 다시 자자를 받습니다. 그러니까 언제든지 해명은 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기분이 나쁜 상태에서 하면 해명이 아니라 변명이 되기가 쉽다는 거예요.

제가 젊은 시절에 사회 활동할 때 제일 이해가 안됐던 게 보왕삼매론 중에 열 번째 ‘억울한 일을 당해서 밝히려고 하지 마라’는 부분이었어요. 그땐 저도 ‘이건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얘기다’라고 생각했는데, 이것도 수행 차원에서 이해를 해야 돼요.

이걸 ‘역행보살’이라 그러는데, 이게 수행의 마지막 관문이에요. 내가 좋은 일을 해서 세상의 모범이 되는 걸 ‘보살’이라 그러고, 나를 나쁘게 만들어서 세상에 도움이 되는 걸 ‘역행보살’이라 그러는 건데, 역행보살 되기가 쉽겠어요, 어렵겠어요?”

“(대중들) 어려워요.”

“그러니까 깨달음이라는 건 꼭 그걸 해 내야 얻을 수 있는 게 아니고, 즉 내가 불안해서 문제라면 그 불안한 걸 꼭 극복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 내 업식 때문에 내가 불안한 줄을 알면 불안할 때 남을 탓하지 않게 되는 거예요. 그게 깨달음이에요. 재래식 화장실을 이용할 때 불편하면 ‘이건 내 습관으로부터 불편이 일어나는 거다’는 걸 알면 그 불편함은 극복을 못 해도 불평하는 건 극복할 수가 있다, 즉 불평을 안 하는 존재로 나아갈 수는 있게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수행이라는 건 사실 어려운 게 아니에요. 또, 그래서 자각이 굉장히 좋은 거예요. 그런 단계로 점점 가다 보면, 비난을 받으면서도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한다는 게 어렵지만 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수행을 잘 하신 분이 경허스님이에요. 조선시대에 스님들은 천민계급에 속했으니까 당시 양반들은 스님들을 종 취급 했거든요. 그래서 양반이 길을 가다가 짚신을 논에 빠뜨렸어요. 양반은 젊었고, 경허스님은 사, 오십 세가 되어서 나이가 들었는데, 지나가던 경허스님한테 ‘중놈아, 내 짚신 좀 건져라.’ 그랬어요. 그랬더니 경허스님께서 ‘예!’하고는 논에 들어가서 짚신을 잡아 논 한가운데로 던져버렸어요.(모두 웃음) 그러니까 양반이 경허스님을 엄청나게 두들겨 팬 거예요. 코피가 터지고 그러는데도 두들겨 패니까 길 가던 사람이 말렸어요. ‘아무리 잘못을 했기로 스님을 그렇게 폭행을 하면 되나?’ 그러니까 경허스님이 그 말리던 사람한테 씩 웃어 보이면서 ‘남의 신을 논 가운데로 던졌는데 두들겨 맞는 게 당연하지’라고 하셨다는 거예요.(모두 웃음) 그러니까 경허스님께서는 그런 걸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인 거죠. 우리는 그런 경우 양반과 싸우든지, 안 그러면 때리는 걸 두려워하든지 했을 텐데, 경허스님께서는 양반이 해 달라는 걸 일단 안 해 줬지요?”

“(대중들) 예.”

“안 해 줄 때는 두들겨 맞을 각오를 한 거예요. 욕 얻어먹을 각오를 한 거예요. 그러니까 말리는 사람한테 ‘쓸데없는 짓하지 말고 가라’고 한 거죠. 이게 역행이에요. 우리도 그렇게 ‘좋고 나쁘고, 옳고 그른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세상의 비난과 칭찬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경지로 나아가야 되는 거예요. 세상의 비난과 칭찬은 그 사람들의 기분이거든요. 거기에 구애받지 않는 경지로 가려면 이 마지막 관문을 넘어야 되는 거예요.”

“감사합니다.”

“예.”(모두 박수)

스님은 즉문즉설을 마치시면서 불교대학 과정이 인생에 엄청난 이익이 될 수 있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불교대학을 꼭 마칠 것을 당부했습니다.

문경 대강당에서 불교대학생을 위한 특강수련 즉문즉설을 마친 스님은 바로 이어 1수련장에서 11차 화엄반 정기수련을 하고 있는 화엄반 행자님들과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모두 26명의 화엄반 행자님들은 스님께 질문할 것을 미리 준비해 두고 있었습니다. 현재 불교변천사 영상 법문을 통해 학습을 하고 있는 터라 불교변천에 대한 질문이 많았습니다. 그 중, “행자하는 1년 안에 깨닫지 못하면 영영 공부할 기회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을 듣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는 질문에 스님은 이렇게 답변을 해주었습니다.

“공부는 죽을 때까지 하는 겁니다.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은 만약, 여러분이 법사수계를 받게 되면 상대편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은 이렇게 하는 것보다 저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가르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다고 볼 수 있죠. 그런데 그 권한은 남을 도울 수 있는 좋은 점도 있지만 자기 공부에는 굉장히 위험한 문제가 따릅니다. 그러지 않아도 ‘내 옳다’는 생각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데 ‘내가 옳다’는 것을 합리화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사람들과 대화할 때도 동등하게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아니, 법사한테’ 라며 자기 공부에 있어서는 문을 닫는 경우가 많아져요.

그러니 행자 생활 할 때, 아직 가르칠 수 있는 권한이 없을 때 이런 문제를 어느 정도 극복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이지요. 가르치는 역할을 하다보면 새로운 직업병이 드는 거죠. 그런 위험이 있습니다.”

미리 받은 질문을 다 마친 후, 추가로 궁금한 점에 대해 대화를 더 나눈 후 스님은 화엄반 행자님과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저녁에 필리핀으로 떠나야 해서 서둘러 인천공항으로 출발하였습니다.

스님은 12월 11일~13일 3일 동안 필리핀 민다나오 지역을 방문해 JTS 사업장을 둘러보고 초등학교 준공식과 중 고등학교 기숙사 준공식에도 참석할 예정입니다.

함께 만든 사람들
김재우(글, 사진) 정란희(녹취) 박효정(편집)

전체댓글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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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진

스님.좋은말씀 감사합니다.

2017-12-15 20:46:41

정지나

칭찬과 비난은 세상에 기준이며 각자에 느낌과 생각입니다.
늘을 넘실넘실 출렁이는 나를 다시 한번 살펴봅니다.
감사합니다^^

2017-12-14 09:36:23

김봉석

수행에 대해 좀더 심오한 말씀이지만 오히려 더 좋은거 같습니다..지혜에 대한 지식만으로 머물지 않도록 일상생활에서 알아차림을 연습하도록 해야겠네요..보통은 상대방과 다툼에 해명하기 쉬운데 억울함을 해명하려 하면 내 생각이 옳고 남은 틀리다는 생각에 더 에너지를 주는 행의라는 것을 알겠습니다.

2017-12-13 18:0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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