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7.12.19. 평화재단 미팅
“영생을 얻는 길은 무엇입니까?”

스님은 아침 7시 30분에 북한현실 전문가모임에 참가하기 위해서 평화재단으로 출근했습니다. 전날 눈이 많이 내린 터라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행히 모두들 제 시간에 맞춰 도착했습니다.

아무래도 가장 최근의 이슈는 이번 방중 성과와 과제에 대한 의견들을 나누었습니다. 한반도의 정세 불안정과 전쟁 위기가 고조되는 분위기 속에 우리 정부의 외교 전략이 어떠 해야 하는지 세세하게 짚어보기도 했습니다.

연구위원들 중에는 최근 영화 '강철비'가 한반도 정세를 실감나게 다뤘다며, 우리 국민들이라면 한 번 보면 좋겠다는 짤막한 소개평도 해주었습니다. 약 2시간에 걸쳐 북한 내부 상황과 동향에 대해 각자의 분석과 전망을 나눈 뒤 다음 모임을 기약하며 송년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이후에는 강화에서 지역운동을 하는 분이 찾아와 지역주민운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점심공양 후에는 평화선언문과 중앙일보 영자신문 칼럼에 실을 원고를 꼼꼼하게 마무리 점검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후에는 약 15년 전 아프간에 난민지원을 할 때 한국군기지에서 스님이 한국군 대상으로 법문을 했었는데, 그 때 한국군에 파견이 되어 여러 가지로 도움을 많이 주었던 채수문 전중령님이 오랜만에 스님을 찾아와서 인사를 드렸습니다.

이제는 중년이 다 되신 채 전중령님이 돌아간 후, 흥사단 이사장님과 통일운동 관계자들이 스님을 방문했습니다. 한반도 전쟁 위기 상황에 대한 우려를 나누었고 어떻게 협력하여 평화롭게 이 문제를 풀어갈지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하루 종일 미팅만 있었기 때문에 법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12월 6일에 있었던 부산 금정구청 강연 중에 유익했지만 소개해드리지 못했던 즉문즉설 한 편을 함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영생을 얻는 길은 무엇입니까?”(모두 웃음)

“영생을 얻어서 뭐하려고요?”(모두 웃음)

“영원히 살고 싶어서요.”

“영원히 살면 뭐가 좋은데요?”

“아름다운 환경도 볼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지낼 수도 있고, 또 신이 있다면 그분을 섬기면서 지낼 수도 있기 때문에 좋지요.”

“나 혼자 오래 살고 다른 사람들은 다 죽어버리면 그게 좋을까요?”(모두 웃음)

“예.”(모두 웃음)

“질문자 혼자 그렇게 살아서 뭐가 좋다고 그래요?”

“음... 그래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저는 끝까지 볼 수 있잖아요. 마지막까지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증인으로서.”

“세상은 늘 이렇게 돌아가요. 꼭 오래 살아야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알아요?(모두 웃음) 과거에 어떻게 돌아왔는지를 알면 미래에도 어떻게 변할 건지 대충 짐작이 되지요.”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저도 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모두 웃음)

“그래요. 그건 오래 안 살아도 알 수 있는 거예요.”

“알겠습니다.”

“첫째, ‘영원히 산다’는 건 자기의 생각이에요. 생각! 어쩌면 질문자는 영원히 살지도 몰라요. 왜냐하면 죽었다는 건, 몸뚱이가 죽는 거 아니에요? 자기 생각이 만약에 독립적으로 남아있다면 아마 자긴 죽은 줄 모르고 계속 돌아 다닐 거예요. 그래서 그건 걱정 안 해도 돼요.(모두 웃음) 그러나 우리는 영원히 살 수가 없어요. 그건 하나님을 믿어도 안 되고, 진시황처럼 권력을 쥐어도 안 되고, 돈이 아무리 많아도 안 돼요. 왜? 태어난 것은 반드시 죽게 돼있고, 생겨난 것은 반드시 소멸하게 돼있어요. 그 기간이 짧으냐, 기냐의 차이밖에 없어요.

인간의 수명은 앞으로 100세, 200세, 300세까지 늘어날 수 있습니다. 수명을 좀 늘리는 건 그렇게 과학적으로 어려운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인간의 세포에는 ‘몇 번 분열하고 죽어라.’ 하는 잠금장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잠금장치를 풀어버리면 암처럼 계속 활동할 수가 있거든요. 그래서 아마 100세, 200세, 300세까지 사는 건 얼마 안 가서 과학으로 해결할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그게 좋다는 보장이 전혀 없다는 거예요.”

“최근에는 냉동인간도 가능하다고 하던데요.”

“냉동인간도 충분히 가능하지요. 그런데 냉동됐다가 1000년 후에 깨어나서 무슨 재미로 살으려고요?”

“‘세상이 많이 바뀌었구나’ 하면서 최첨단 과학기술 문명의 혜택을 받고 싶어요.”

“그거 받아서 뭐하려고요?”

“다양한 즐길 거리를 누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달도 가고, 우주도 가고요.”

“그런데 달에 가보면 지구보다 훨씬 못 해요. 아무 것도 없어요. 거기 가서 뭐해요?”

“그래도 저는 가고 싶습니다.”

“거기 가고 싶으면 일단 돈을 많이 버세요. 상업용 로켓이 곧 나오니까 한 100억 원만 주면 갈 수 있을 거예요.”(모두 웃음)

“100억 원이요?”(모두 웃음)

“지금 거기 한번 가보고 오면 되지요. 그런데 달에 가봐야 아무 것도 없고, 공기도 없고, 돌하고 땅밖에 없어요. 거기 가보면 지구가 너무너무 예쁘게 보여서 지구에 오고 싶을 거예요. 우주에서 보면 지구가 진짜 아름답대요. 지금 질문자는 제일 좋은 데에 살면서도 좋은 데에 사는지를 모르는 게 문제예요.”

“아, 그렇네요...”

“우리의 존재는 변화하는 거예요. 변하지 않는 건 없어요. 그런데 ‘변한다’는 것이 ‘없어진다’는 건 아니에요. 변화할 뿐이에요. 그런데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니까 ‘생겼다, 없어졌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거예요. 예를 들어 등산갈 때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등산을 가서 어떤 계곡에 사람이 많으면 질문자는 사람이 없는 쪽으로 가서, 그러니까 제일 꼭대기로 가서 맑은 물에 밥을 지어먹고 놀고 싶겠지요?”

“예.”

“질문자는 친구들과 함께 등산했을 때 친구들이 행동하는 걸 한번 보세요. 산을 올라서, 계곡에 도착해서, 배낭을 풀어서 뭐합니까? 위로 올라가서 채소나 쌀을 씻고, 조금 아래로 내려가서 세수하고 발을 씻을 거 아니에요?”

“예.”

“위는 깨끗하고 아래는 좀 더럽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그런데 거기서 조금 더 위로 올라가 보면 그 위에 있는 사람들도 똑같이 그렇게 하고 있어요.(모두 웃음) 그러니까 그 위에 있던 사람들도 가능하면 더러운 건 밑에서 하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밑으로 내려오고, 밑에 있던 사람은 가능하면 위가 깨끗하겠다고 생각해서 위로 올라가다가 계곡이 딱 꺾이는 지점에서 마주치면 어떨까요?(모두 웃음) 위에 있던 사람들이 발 씻는 밑에서 상추를 씻어야 되잖아요?”(모두 웃음)

“예.”

“이와 같은 게 우리 인생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각자 자기가 보는 세계 안에서나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이지, 본래 시작과 끝은 없습니다. 계속 ‘변화’만 있어요. 그러니까 변화만 있지, 시작과 끝은 없다는 게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는 거예요. 불생(不生)이라는 건 생이 없고, 불멸(不滅)이라는 건 멸도 없다, 즉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이걸 ‘무시무종(無始無終)’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니까 불생불멸은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아니면 변화하기 때문에 생하는 것도 없고 멸하는 것도 없다는 뜻이에요?”

“변화하기 때문에 생하는 것도 없고 멸하는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니까 변화가 일어나면 생멸(生滅)이라는 인식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런데 ‘변한다’는 관점을 가지면 생하는 것도 없고 멸하는 것도 없습니다. 즉 바다에서 파도가 일어날 때 파도 하나만 보면 파도가 생기고 사라지고, 생기고 사라진다는데, 바다 전체를 보면 물이 그냥 출렁일 뿐이지, 생기고 사라지는 게 아닌 것과 같아요.

그래서 어떻게 사물을 봐야 되느냐 하면, 넓게 보면 존재는 다만 변화할 뿐이고, 좁게 보면 생하고 멸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육신을 ‘그대로, 온전하게, 오랫동안, 무한히’ 유지할 순 없어요. 그런 건 없어요. 그러나 좀 길게는 유지할 수 있어요. 그래서 질문자가 ‘좀 길게 살겠다’ 하면 냉동해 달라고 했다가 한 100년 후에, 의술이 많이 발달하면 해동시켜 달라고 해서 한 500세까지 살다가 죽으면 되지요. 그러나 ‘해탈’이라는 것은 뭐예요? 이치를 알아버리면, 깨달아버리면 괴로울 일이 없다는 것이지, 이 몸이 영원히 사는 게 해탈이 아니에요.”

“예.”

함께 만든 사람들
김은경, 정란희

전체댓글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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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포에 잠금장치가 있군요~모르시는 것이 없으신 스님^^\'변화\'할 뿐,생하는 것도 멸하는것도 없다는 말씀,와 닿습니다~첫번째사진은 여름사진 아닌가요?

2017-12-22 22:03:18

고동하

이생에서의 삶은 유한합니다. 죽지 않고 영생하려는것이 다 인간의 욕망에서 기인된겁니다. 이 욕망에서 벗어나는 것이 인간을 자유케하는것이고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합니다. 죽음으로부터 자유케되는것이 결국 인간에게 참 영생의 길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게 되는겁니다. 새로운 눈이 열린 인간은 이 세상에서 진리와 평화의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하게됩니다. 그것이 세상과 자신의 욕망에서 벗어나는 길이고 이타적인 삶으로 자신을 이끄는 힘이됩니다. 그 힘이 바로 인간을 창조한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믿는/사랑하는 마음이 인간으로하여금 영생의 길을 얻게합니다.

2017-12-22 19:48:55

조정

고맙습니다.덕분입니다._()()()_

2017-12-22 17: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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