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8.1.15. 제29차 인도성지순례 10일째_네팔 카필라성
‘함께 사는 길은 무엇일까?’

새벽 2시 30분, 기상을 알리는 송수신기 메시지가 울렸습니다. 한창 잠이 깊이 들 시간이지만 순례객은 벌써 일어나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특히나 오늘은 탄센으로 일출과 설산을 보러 가는 일정이라 더 일찍 잠이 깬 모양입니다.

스님은 ‘몸이 불편한 사람은 숙소에서 쉬고 계세요’ 라며 안내하였는데 숙소에서 쉬겠다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오늘 가는 탄센은 부처님 성지와는 관계가 없지만 그 옛날, 부처님이 태어나신 카필라바스투에 속하는 지역이라 부처님께서 태어나신 주변 환경 등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짙은 안개를 헤치고 400 대중을 실은 버스가 열을 지어 한참을 달렸습니다. 꼬불꼬불, 절벽 같은 길을 큰 버스가 달리기를 한참, 어둠과 안개가 걷혀 주변이 환히 드러났습니다. 햇빛에 반짝이는 집과 나무와 푸른 잎들이 깊은 골짜기 길에 보였습니다.

“지금 이 곳은 해발 1800미터 높이에 있는 고산지대에요. 우리는 구름보다 위에 있어요. 경치가 참 좋습니다.”

스님은 안개 속을 다니다가 오랜만에 보는 햇빛의 이유를 알려주었습니다.

얼마 후, 너른 공터에 차를 주차시키고 400여 명의 순례객은 몸을 가볍게 하고 스님의 안내에 따라 걸어 올라갔습니다. 층층이계단식으로 집과 가게와 병원과 학교가 들어선 마을 골목길에 동네사람들이 나와 순례대중들을 구경(?)하였습니다. 스님은 “다른 사람들이 다니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한쪽으로 붙어서 열을 지어 가도록 한다.”고 안내하였습니다. 30분 쯤 골목길을 오르고 올라 숲 속으로 들어섰습니다. 마을길을 가는 동안 아침 해가 어느새 솟아올라 따뜻해져서 껴입었던 옷을 하나씩 벗어 메고 걸었습니다.

“여기에서 보면 설산이 보이는데 지금은 그 자리에 집을 지어 버렸네요. 해 뜰 때 잠깐 설산이 보이는데 지금은 어떤가요, 보이나요?”

“네. 저기 어스름하게 보여요.”

“업장이 두터운 사람 눈에는 잘 안 보여요. (대중 웃음) 다 보이죠?”

“네!”

오랜만에 쬐는 햇빛을 기분 좋게 받고 조금 더 숲 속 길을 걸었습니다. 공터가 나오는 곳에서 뒷 사람들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겸 노래도 함께 부르며 기분을 내었습니다.

차가 주차해 있는 곳까지 내려와서 둘러 앉아 도시락을 먹고 난 다음 순례 지역인 랑그람으로 출발하였습니다.

“부처님 열반 후 화장한 뒤 그 유골을 수습하여 8개의 종족이 8분의 1씩 나누어 가졌는데, 그 가운데 부처님의 아버지 종족인 석가족도 8분의 1을 받아갔고, 부처님의 어머니 종족인 꼴리족도 8분의 1을 가져와서 현재의 이 위치에 사리탑을 쌓았습니다. 여러분들이 얼른 보면 모르겠지만 이곳은 강 가운데 있는 섬입니다. 강물이 양쪽으로 흘러가는 여의도 같은 그런 섬입니다. 여기에 이 사리탑을 모셨습니다.

그런데 아쇼카 왕이 사리 일부를 꺼내서 부처님의 8대 성지, 10대 성지에 새로 쌓은 탑에다 나누어 넣었는데, 이 사리탑에서 만큼은 사리를 꺼내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여기에 있는 용왕이 ‘당신이 나보다 사리를 더 잘 모실 수 있으면 가져가라. 그렇지 못한다면, 지금 내가 극진히 모시고 있으니 여기에는 손대지 마라’고 했다고 합니다. ‘용왕’이라는 게 뱀이에요. 아마 당시에 여기 뱀들이 많아서 발굴을 막지 않았나 싶어요. 그래서 이 지역에서는 이 탑을 발굴하려는 사람들이 다 갑자기 죽고 그래서 여기는 손대면 죽는다는 징크스 같은 게 있어서 누구도 손을 안 댔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이 밑 부분만 이렇게 발굴을 했어요. 그래서 대강 이 탑이 어떻게 생겼는지 윤곽을 알기 위해 발굴한 뒤 다시 묻어놨어요. 그러니까 여기는 꼭 무덤 같지요? 탑이 이렇게 허물어져서 그 위에 잔디가 자라고, 나무도 이렇게 크게 자라 있습니다. 인도 벽돌은 오래 못 가고 이렇게 삭아서 도로 흙이 되다 보니까 그 위로 나무가 많이 자랍니다.

어쨌든 여기는 아직 발굴을 안 했기 때문에 사리가 그대로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는 주로 담마(曇摩, dharma), 즉 진리로서 불법을 만나지만 신앙으로 불교를 만나는 사람들은 최고의 공덕으로 사리친견 공덕을 말하지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불교인, 또 신앙인으로서 이곳을 참배한 공덕은 엄청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리탑에 예불 공양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유적지 앞에서부터 순례 대중은 가사를 수하고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탑돌이를 하였습니다. 400대중이 여법하게 탑돌이를 하는 모습을 보고 동네사람도 함부로 떠들거나 하지 못하고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탑돌이를 마치고 스님의 설명을 들은 뒤 고요하게 명상을 하고 경전을 독송하였습니다. 모여있는 아이들에게 법사님들이 사탕을 나눠주는 동안 순례 대중은 조용히 차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로히니 강을 차에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로히니 강을 사이에 두고 동쪽으로는 꼴리족의 데바다하(Devadaha)라는 나라가 있었고요, 서쪽으로는 석가족의 카필라바스투(Kapilavastu)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이 두 종족은 왕족끼리 서로 결혼하는 결혼동맹관계였습니다. 그러나 나라가 다르고 종족이 다르다보니까 때로는 자존심 싸움, 감정 싸움이 많았다고 경전에 기록돼있습니다. 그러다가 두 종족이 전쟁을 할 뻔 한 적이 있어요. 어느 해 흉년이 들어서 가뭄이 몹시 심하자 로히니 강의 물이 아주 적어진 거예요. 그러니까 이 강물을 양쪽으로 나누어서 대니까 이쪽도, 저쪽도 다 부족했어요.

그래서 꼴리족이 먼저 석가족에게 ‘이렇게 물을 나누어서 대면 너희도 농사도 망하고, 우리 농사도 망한다. 어차피 망할 바에야 너희가 양보해라. 그럼 우리라도 농사가 잘 될 것 아니냐?’고 제안을 했더니 석가족이 ‘말 잘 했다. 너희가 양보해라. 우리가 잘 되어야 될 것 아니냐?’ 이렇게 해서 물을 가지고 시비를 하다가 나중에는 주먹다짐이 오갔고, 더 나중에는 패를 형성해서 서로 돌멩이를 집어던지며 패싸움을 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의 머리가 터져서 피가 나고 이러니까 자기 나라 군대에 가서 ‘석가족이 우리 물을 빼앗아가면서 우리를 때려가지고 이렇게 피가 났다’고 하소연을 했어요. 석가족도 ‘꼴리족이 우리 물을 빼앗아갔다.’ 이렇게 해서 처음에는 농민들의 물싸움이었던 게 패싸움이 되고 결국 전쟁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양쪽에서 군대를 동원해서 ‘이번에는 용서가 없다. 본때를 보여주겠다’며 전쟁을 준비하게 되었어요. 요즘 우리 남북관계랑 비슷하지요?

부처님께서 이 소식을 들으시고 ‘이 어리석은 자들이 자칫 하다가는 전쟁을 하겠구나. 내가 가지 않으면 틀림없이 전쟁이 날 것이다. 내가 가봐야 되겠다’고 하시며 이 강가로 오셔서 강 가운데에 허공에 뜨시는 신통을 보여주셨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중립적이었다는 의미겠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부처님이 오신 줄을 다 알고 부처님을 맞이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여러분들, 피가 소중하오? 물이 소중하오?’
‘그야 말할 게 뭐있습니까? 피가 소중하지요. 어떻게 하찮은 물에 비교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왜 그 하찮은 물을 위해서 피를 강물처럼 흘리려고 하시오?’

하시니까 그들이 전부 감정에 북받쳐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는

‘아이고, 저희가 어리석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해서 전쟁이 멈춰지고 그 전쟁을 할 힘을 수로를 개설하는데 씀으로써 그해 가뭄을 잘 이겨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 남북관계와 똑같지요? 우리도 서로 자존심 싸움을 하다가 지금은 ‘도저히 용서를 못하겠다.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하고 있잖아요.

경전에 로히니 강물에 대한 기록이 있으니까, 직접 강가에 차를 세우고 로히니 강을 보면서 경전독송을 하겠습니다. 하차했다가 다시 승차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니까 차에 탑승한 채 강가에 차를 세우고 독송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1호차 기사님은 로히니 강을 건너자마자 바로 세워주세요. 차는 강을 천천히 지나 가주시기 바랍니다. 자, 경전을 펴주시기 바랍니다.”

다음 순례지역은 카필라성이었습니다. 원래는 어제 일정으로 준비가 되었는데 어제 국경 통과 수속이 예상치 못하게 길어지는 바람에 오늘 순례하기로 하였습니다.

서문을 통해서 들어갔는데 태자 궁터에 다른 일행이 있어서 동문자리까지 갔습니다. 동문자리에서 자리를 펴고 앉아 스님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어린 싯다르타 태자가 농경제에 참여했다가 새가 벌레를 쪼아 먹는 것을 보고 ‘하나가 살기 위해서는 왜 하나가 죽어야 할까?’라고 의문을 품는 대목이 있어요. 우리는 보통 하나가 살고 하나가 죽는 건 너무 당연하고, 무엇보다 내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가 제일 중요하다고 여기며 그런 방법에 대한 연구가 이 세상에서 말하는 학문이라는 건데, 부처님께서는 하나가 살기 위해서 하나가 죽어야 하는 이 모순을 보시고 ‘함께 사는 길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품으셨습니다.

결국 부처님께서는 보리수 아래에서 연기법을 깨달으시고 나서야 그 의문을 풀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이런 의문을 품고 세상을 보셨을 때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모순투성이였습니다. 그런 모순에 대해 하나, 하나 스스로 의문을 제기하고 참구하는 것, 이것이 그분의 젊은 시절 삶이었습니다. 보통 사람은 주어진 삶을 그저 살고, 그런 중에 쾌락을 만끽하는데 몰두하지만 붓다는 오히려 모순에 더 큰 의문을 가진 것입니다. 우리들은 다 왕이 되고자 하잖아요?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왕위를 버리고 고행의 길을 떠나셨고, 좋은 음식을 버리고 거친 음식을 드셨으며 좋은 옷을 버리고 누더기를 걸치시고, 좋은 집을 버리고 나무 밑에서 주무셨습니다. 말이 쉽지, 그게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부처님의 이름을 빌려서 좋은 옷, 좋은 음식, 높은 지위를 구하잖아요. 또 그런 것이 얻어지면 ‘부처님의 가피’라 그러고요. 굉장한 모순이라는 거지요. 그래서 우리가 부처님의 일생을 알고, 부처님의 젊은 시절의 문제의식을 공유한다면, 우리가 복을 구하는 건 도무지 불교와 어울리지도 않고, 불교에 합당하지도 않다는 걸 알 텐데, 이런 모순이 버젓이 우리 불교 안에 존재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그분이 깨달았다, 부처 됐다는 것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분이 왜 그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스스로의 삶에 그렇게 큰 혁명적 변화를 이루었는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당시 주류가 브라만이었고, 거기에 반대해서 일어난 게 비주류인 사문으로 브라만이 추구한 게 쾌락주의라면 사문류가 추구한 건 고행주의인데, 그 쾌락과 고행을 떠난 제3의 길, 이것이 붓다가 가셨던 길입니다.

이것이 인도사회에 크나큰 파장을 불러일으켰으며 인도를 넘어서 동아시아지역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종교의 시대가 허물어져 가고 있는 이때에 다시 새 희망으로써, 종교로서의 불교가 아니라 진리로서의 불교가 다시 조명되는 이런 시대에 우리가 놓여있음을 정확히 봐야겠습니다.

특히 순례객들 중에는 청년들도 많은데, 우리는 그분의 젊은 시절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다 왕궁을 추구하는데, 어째서 그분은 왕궁을 버리셨던 것일까요? 왕궁을 버리고 그런 고행을 통해서 무엇을 추구하셨던 것일까요? 이런 문제의식들이 순례를 통해 우리들에게 새로운 문제의식으로 다가오도록 해야 합니다. 여기서 더 많은 얘기를 할 수도 있는데 시간이 많지 않아서 이만하고, 경전에 자세히 쓰여 있으니까 경전독송을 해 보겠습니다.”

북문 밖에 있는 정반왕의 탑
▲ 북문 밖에 있는 정반왕의 탑

이 문으로 나서서 부처님은 삶의 현실을 보았구나. 이 문으로 나서서 삶의 현실을 보고 많이 아파했구나. 자신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모든 것들을 허투루 보내지 않으셨구나. 상세하게 기록된 경전을 읽어 내려가며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던 감동이 느껴졌습니다. 싯다르타 태자의 고민이 그대로 가슴으로 전해지는 듯 하였습니다.

경전을 읽어 내려가며 때때로 스님은 젖은 눈시울을 손수건으로 훔쳐내었습니다. 카필라성 동문자리에서 스님도 싯다르타 태자의 고민을 함께 하고 있는 듯 하였습니다.

동문자리에서 명상으로 마무리 한 후, 북문을 거쳐 들판을 가로질러 주차장까지 가기로 하였습니다. 유채꽃이 만발하고 달 나무가 그득한 들판을 걸어오며 ‘이 아름답고 풍요로운 곳에서 싯다르타 태자는 아름다운 한 면만 보지 않고 아름답고 고통스러운 삶의 양면을 꿰뚫어 보았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님이 먼발치 앞서 걸으며 ‘동구밖 논두렁길’ 하면서 동요를 흥얼거렸습니다. 순례대중들도 노래를 받아 ‘동구 밖 논두렁 길 유채꽃이 활짝 폈네~’로 가사를 바꾸어 노래를 불렀습니다.

차에 오른 대중들에게 스님은

“어제 우리가 못 간 일정을 오늘 소화하려면 오늘은 탄센 일정을 취소해야한다는 의견을 스텝 측에서 강력하게 냈는데 그래도 좋았지요? 덕분에 좀 바쁘게 일정을 진행해야 합니다. 쿠단 유적지까지 보고 가려니까 순례대중은 서둘러주세요.”

양해 겸, 이해를 도와 스님은 다음 일정을 안내 하였습니다.

서둘러 달려온다고 달려갔지만 쿠단 유적지에 도착했을 즈음, 이미 해가 지고 어스름한 기운이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왕사성으로 가셔서 빔비사라 왕이 죽림정사를 창건케 하시고, 수다타 장자의 초청을 받고 코살라국의 수도인 사위성에 가셔서 기원정사를 창건케 하시고 그러니까, 요즘에 비유하자면 북경과 뉴욕에 가셨는데 그 나라의 최고 지도자가 교화된 거잖아요. 그래서 한 마디로 유명해지셨어요. 그 소문이 고향 카필라성에까지 들렸어요. ‘석가족 출신의 왕자가 도를 이루어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사가 됐다’고요. 그런데도 부처님은 고향을 찾질 않는 거예요. 정반왕은 아들이 보고 싶었거든요. 아들이 출가해서 마음 상했는데 이제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고 하니까 자랑스럽기도 하고 해서 빨리 아들을 봐야겠는데 아들이 고향에 오질 않는 거예요. 그래서 ‘가서 부처님을 고향으로 좀 모셔오라’고 전갈을 보냈어요. 그런데 그렇게 간 사람이 돌아오지 않는 거예요. 전달하러 가서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깨달아서 출가한 스님이 되니 안 돌아간 거죠. 그러니까 꿈속에 어머니 심부름 갔다가 꿈 깨면 심부름 가요, 안 가요?”

“(순례객들) 안 가요.”

“예, 그와 같은 거예요. 사위성은 여기서 가깝거든요. 부처님께서 사위성에 오신 게 성도 후 3년이었으니까 몇 년 동안 이런 일이 벌어지자 왕이 상심이 컸어요. 그때 우다이라는 대신이 ‘제가 가보겠습니다.’
‘아이고, 가지 마라. 너도 갔다가 안 돌아오면 어떡하느냐.’
‘그런 말씀하지 마십시오. 저는 수행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저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니까 걱정 마시고 저를 보내주십시오.’
‘그럼 다녀오라.’

우다이가 그렇게 말한 이유가 있어요. 우다이는 여자들한테 인기 만점인 플레이보이였거든요.(모두 웃음) 그래서 스스로 수행과는 거리가 멀다고 한 거예요. 어쨌든 우다이가 기원정사에 이르렀는데, 천 명이 넘는 비구가 산다는 숲속이 조용한 거예요. 사람소리 하나 안 들려서 마치 사람이 없는 숲 같았어요. 그래서 약간 마음이 조심스러웠던 거죠. 그런데 들어가서 보니 이게 웬일입니까? 천 명이 부처님을 둘러앉아 조용히 설법을 듣고 있는 거예요. 그 분위기에 자기도 동화되어서 뒤에서 듣고 있다가 깨달아버렸어요. 그래서 출가를 하고 스님이 됐어요.

쿠단 벽돌에 새겨진 아름다운 문양들
▲ 쿠단 벽돌에 새겨진 아름다운 문양들

그랬어도 우다이는 정반왕과의 약속은 지켰나 봐요. 부처님께 ‘정반왕께서 부처님을 오래도록 기다리고 계신다’고 전했더니 부처님께서 ‘고향으로 가겠다’고 승낙을 하셨어요. 그러니 우다이는 비구가 된 몸으로 먼저 카필라성으로 돌아와서 왕께 ‘앞으로 칠일 후에 부처님께서 오시기로 했습니다’ 하고 전했어요. 그래서 왕은 너무너무 기뻤어요. 아들이 집 떠난지 12년이 됐잖아요. 그때가 성도 후 6년째이니까요. 그래서 온갖 준비를 해 놓고도 카필라성에서 기다리지 못해서 성 밖에 나와서 6, 7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내려가서 거기다가 천막을 치고 태자를 맞을 준비를 해놓고 기다렸어요. 그런데 부처님이 그리로 오지 않으시고 가난한 동네에 가서 걸식하고 계시다는 거예요. 그래서 왕은 속이 상한 거예요. ‘내 아들인 태자가 어떻게 남의 집에 가서 밥을 빌어먹는단 말인가?’ 그렇게 이미 준비한 공양은 때를 놓치고, 걸식을 마친 부처님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부인과 아들을 오래 만에 만난 곳이 지금 우리가 있는 쿠단(Kudan)입니다. 후대에 아쇼카 왕이 거기에 기념탑을 세운 것입니다. 오랜만에 정반왕이 부처님을 만났을 때 대뜸

‘갖가지 맛있는 음식을 차려놨는데, 어찌하여 여기 와서 먹지 않고 길거리에서 얻어먹었단 말이냐?’
이렇게 먹는 문제를 제기했어요.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걸식은 우리 가문의 전통입니다.’
‘우리 석가족 가문에 걸식의 전통은 없다.’
‘출가사문의 전통입니다.’

즉 부처님은 ‘나는 석가족이다’ 하는 걸 이미 다 떠났다는 걸 의미합니다. 출가사문으로서 자신의 본분만을 지키겠다는 뜻이지요. 이렇게 부처님은 카필라성으로 돌아오셨고,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많은 카필라성의 석가족이 출가를 했습니다. 젊은이들의 출가가 유행이다시피 했어요.”

“그렇게 가족이 만났을 때 아버지 정반왕도 부처님께 가서 인사하고, 어머니도 인사를 할 수 있고, 아들도 인사를 할 수 있는데, 출가수행자가 된 부처님과 인사하기가 제일 껄끄러운 사람이 누구예요? 부인이지요. 야소다라공주 입장에서는 부처님이 진짜 얄미운 사람이겠지요. 숫제 죽어버렸다면 아들을 왕으로 만들어서 태후가 되어 잘 살든지, 아니면 남편이 왕이 됐다면 자기가 왕후가 되든지 했을 텐데, 남편이 출가해서 고행하고 있으니까 부인이 되어서 잘 먹고 살 수도 없었을 것 아니에요? 재혼도 할 수없고요. 그러니까 야소다라공주는 억지춘향이 된 거예요. 그렇다고 남편이 왔다고 다가가서 인사도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가는 쿠탄에는 정반왕의 탑, 마하파자파티의 탑, 라훌라의 탑은 있는데 야소다라의 탑은 없어요.

어둠 속에서 차분히 명상을 하는 순례 대중과 스님
▲ 어둠 속에서 차분히 명상을 하는 순례 대중과 스님

부처님이 출가하실 때 아들 라훌라를 낳았으니까 그 아들이 이제 12살쯤 됐을 것 아니에요? 그런데 라훌라는 아버지를 처음 보니까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어요. 그러니 야소다라 공주가 아들 라훌라한테 말했어요. ‘저기 계시는 저분이 너의 아버지이시다. 아버지한테 가서 인사를 드리고, 상속물을 달라고 해라’고요. 말에 뼈가 있지요. 출가수행자는 거지형편이니까 상속물이랄 게 없잖아요. 야소다라 입장에서는 부처님이 야속해서 좀 심술궂게 군 거예요. 라훌라는 어머니가 시킨 대로 아버지한테 인사를 드리고 ‘아버지, 저한테 상속물을 주십시오.’ 하니까 부처님께서 아들을 물끄러미 보더니 옆에 있던 사리푸트라에게 ‘이 아이를 출가시켜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출가’라는 상속물을 준 거죠.(모두 웃음) 야소다라가 가만히 있었다면 나중에 라훌라가 왕이 되어서 자기는 태후로 살 수 있었을 텐데 아쉽게 되었지요. 또 정반왕은 부처님이 돌아와서도 왕을 안 한다고 하면 손자를 왕위에 앉히려고 했는데 손자까지 출가시켜버리니까 상심이 컸어요. 그래서 부처님께 ‘미성년자를 출가시킬 때는 반드시 부모의 허락을 얻도록 해 주십시오.’ 하니까 부처님께서 합당하다며 승낙하셨어요. 그러면 라훌라의 출가는 ‘미성년자는 부모의 승낙을 받아야 출가할 수 있다’는 기준에도 합당 안 합니까? 합당합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인 부처님께서 결정하신 거니까요. 그래서 라훌라는 최초의 사미가 됐습니다.

그래서 성년은 출가를 스스로 결정하면 되지만, 미성년자는 반드시 부모의 승낙, 즉 ‘동의서’가 첨부되어야 출가가 가능합니다. 그래서 미성년자가 출가하면 ‘사미’라 그러고 성년이 출가하면 ‘비구’라 하는 데, 사미는 반드시 부모의 동의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사미는 예비승려죠. 그러다가 성년이 되면 정식 승려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처음 출가해서 들어오면 예비승려라고 하고, 예비승려가 4년 과정의 강원을 거쳐서 드디어 강원을 졸업하면 비구계를 주는 시스템입니다. 그런데 부처님 당시에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성년이면 누구나 다 바로 비구가 되는 거였어요. 그래서 당시 비구와 사미의 차이는 성년과 미성년의 차이 밖에 없었어요.”

어두워진 탑 앞에서 대중은 손전등을 켜고 경전을 독송했습니다.

언제 부처님의 흔적이 남아있는 이곳에 다시 올까요. 지금 이 순간, 이런 기회가 주어진 것에 감사하면서 느낄 수 있는 만큼 충분히 부처님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생생하게 느끼고 가고 싶을 뿐이었습니다.

400 대중을 싣고 온 차량도 불을 밝혀 순례대중을 밝혀주고 있었습니다.
오늘도 하루를 꽉 채워 잘 살았습니다.

함께 만든 사람들
글 문수팀
사진 배성화 문수팀
녹취 정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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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안의 개구리

특히 순례객들 중에는 청년들도 많은데, 우리는 그분의 젊은 시절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다 왕궁을 추구하는데, 어째서 그분은 왕궁을 버리셨던 것일까요? 왕궁을 버리고 그런 고행을 통해서 무엇을 추구하셨던 것일까요? 이런 문제의식들이 순례를 통해 우리들에게 새로운 문제의식으로 다가오도록 해야 합니다. 여기서 더 많은 얘기를 할 수도 있는데 시간이 많지 않아서 이만하고, 경전에 자세히 쓰여 있으니까 경전독송을 해 보겠습니다.”

정말로 부처님이 왜 그러셨는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네요.머리를 한 번 띵하고 맞은 느낌입니다.

2018-02-05 13:57:33

정지나

들어도 들어도 새롭고,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부처님에 고뇌와 고민에 수준은 역시
우리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 고민들입니다. 참, 부끄럽습니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그리고 함께하신 여러분들요 꾸벅인사!

2018-01-23 09:21:45

송미해

손해가 곧 이익이라는 모순 속에서 함께 사는길을 찾아 봅니다
감사합니다

2018-01-20 19: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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