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8.1.20. 제29차 인도성지순례 15일째_델리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장 빨리 이해했던 계층

오늘은 인도에서의 모든 일정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귀국하는 날입니다.

어제는 무슬림 공휴일인 금요일이라 타지마할 관람을 하지 못해서 오늘 아침 일찍 타지마할 관람과 오후에 델리 박물관 관람 일정만을 남겨 두고 있었습니다.

어제 아그라에서 모처럼 여유가 잠깐 있어 스님은 인도 역사에 대한 강의를 해 주었는데 이해를 돕고자 강연 중 일부 내용을 싣습니다.

성지와는 분위기가 전혀 다른 델리의 복잡한 도로
▲ 성지와는 분위기가 전혀 다른 델리의 복잡한 도로

“인도대륙, 즉 인디아반도에 원주민이 있었고, 인도 북쪽으로 올라가면 아프가니스탄이 있는데 거기는 유목민족이고, 이 남쪽은 농경민족입니다. 어떤 때는 북방에서 유목민족이 내려와 인도대륙을 차지했다가, 어떤 때는 인도에서 올라가서 북쪽까지 점령했다가, 이렇게 왔다 갔다 하면서 인도의 역사가 이루어진 거예요.

델리박물관에 가기 전에 이런 걸 좀 알고 가야 박물관 구경을 제대로 할 수가 있어요. 사르나트박물관은 그 지역에서 나온 유적만 전시해 놨기 때문에 그것만 보면 되지만, 델리박물관은 국립박물관(National Museum)이니까 전 인도의 역사가 전시되어있거든요.

그러면 인도의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됐을까요? 인더스문명으로 시작이 됩니다. 지금으로부터 한 5,000년 전, B.C. 3000년 경입니다. 델리박물관에 가면 인더스문명관이 있는데 거기에는 B.C. 2500년 유물이 주류입니다. 한참 번성했을 때의 유물들로써 4500년 전 유물이지요. 그러니까 그것은 지금의 인더스강 유역에서 아주 고대의 문명을 이루었던 것들입니다. 이 문명을 주도한 민족이 누구일까요? 원주민인 드라비다족(Dravdian)이라고 합니다. 인도대륙에 살던 원주민이 바로 드라비다족이거든요. 지금의 인도를 지배하는 민족은 아리안족(Aryans)입니다. 이 아리안족은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이 있는 파미르 고원(Pamir Mountains) 위쪽의 중앙아시아에 있던 민족이에요. 이들이 내려와서 인도를 점령한 거예요. 그래서 인더스문명은 민족적으로는 드라비다족이 주도했고, 드라비다족은 인종적으로는 흑인에 가까운 민족입니다. 세계 3대 인종은 황, 백, 흑인이잖아요. 이들은 완전히 흑인도 아니고 황인도 아닌 독특한 하나의 민족입니다. 그래서 드라비다족은 말레이계열이나 흑인계열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에 북방의 백인계열인 아리안족이 파미르 고원을 넘어서 지금의 파키스탄지역으로 내려왔어요. 그래서 거기서 일파가 서쪽으로 갔습니다. 이란을 거쳐서 오늘 날 유럽으로 간게 함족, 샘족, 아리안족이고, 이 사람들이 펀잡 지역에서 동쪽으로 이동해 온 걸 동아리안이라 그래요. 이들이 지금의 이 힌두스탄 평원(Hindustan 平原)을 점령해서 문명을 이루었는데, 인도 역사에서 이 동아리안족이 힌두스탄 평원에 이룩한 이 문명이 인도의 전 역사에서 볼 때 두 번째 문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걸 아리안문명 또는 브라만문명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브라만계급이 주도한 문명이기 때문에. 이게 지금의 인도문명의 뿌리입니다. 그들은 브라만 신이 우주를 창조했고 브라만 신의 입에서 브라만 계급이 창조되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브라만이 지배하는 문명이라고 생각하고 계급제도가 나왔습니다. 브라만, 짜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이런 계급제도로써 신분제에 의한 사회를 만든 거예요. 이건 4시기로 나뉩니다. 첫째가 베다시대로서 초기 자연신을 찬양하는 시대, 둘째가 종교시대로서 계급이 정착하고 브라만 신을 섬기는 시대, 셋째가 우파니사드 철학시대, 넷째가 문명의 쇠퇴기로서 브라만의 관점에서 보면 문명의 쇠퇴기이고, 인류문화사적으로 보면 문명의 부흥기로서 인문학이 급속도로 발달한 시기예요. 이 시기가 붓다의 시대입니다.

멀리 보이는 인디아게이트
▲ 멀리 보이는 인디아게이트

그 시대는 어땠냐 하면, 300여개의 크고 작은 나라가 평화롭게 살다가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처럼 약육강식으로 절대 왕국으로 통합되는 과정입니다. 정치적으로 엄청난 혼란기로써 전쟁이 끝없이 진행됐어요. 그래서 사람 죽이는 걸 파리 죽이듯이 했기 때문에 전통적인 브라만의 사상으로는 이해도 안 되고 설명도 안 되는 거예요. 사람을 죽이면 벌을 받아야 되는데, 사람을 몇 십만 명이나 죽여 놓고도 아무 벌도 안 받고 오히려 왕이 되고 그러니까요. 그래서 어떤 철학이 나오느냐 하면 무인과론(無因果論)이 나옵니다. ‘사람을 죽여도 죄가 안 된다. 살인이란 그저 칼날이 몸 사이를 지날 뿐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극단적 주장까지 나왔던 것은 그때까지의 사상으로는 도저히 당시 세상을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브라만의 권위가 점점 허물어지고 이 세상을 새롭게 이해하려는 새로운 사상들이 수도 없이 등장하는데, 이 신흥사상을 통틀어서 사문류(沙門類)라고 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어떤 브라만도, 어떤 사문도 이 음식은 소화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잖아요. ‘어떤 브라만이나 사문도 붓다만한 사람은 없다’는 뜻인데, 경전에는 ‘브라만과 사문’은 항상 붙어서 나오거든요. 당시 주류와 비주류 사상의 양대 산맥이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출가해서 사문류에 참여하셨다가 결국 양쪽을 다 한 차원 높은 데서 통합해 내는 중도(中道)를 발견하셨지요. 이게 B.C. 5-6세기의 일로서 당시는 인류문명의 황금기입니다.

인디아 게이트와 일직선 상에 있는 대통령 궁
▲ 인디아 게이트와 일직선 상에 있는 대통령 궁

이 당시 중국은 춘추전국시대로서 공자가 나와서 중용(中庸)을 주장했고, 인도에서는 붓다가 나와서 중도(中道)를 주장했고, 이 당시 유럽은 그리스문명이 한창 꽃피던 시기로서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이런 분들이 나오는 시기였어요. 역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도 중용을 얘기했지요. 그러니까 전연 다른 지역들에서도 인류문명의 발전은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가 되면서 이 중도니 중용이니 하는 진리가 나오게 된 거지요. 그 관점도 실제 거의 비슷합니다. 다만 플라톤의 중용사상과 공자의 중용은 주로 정치에 적용해서 ‘정치를 할 때 극단을 피하고 중간을 취하라’는 거고, 부처님의 중도는 주로 수행하는 과정에서 고행과 쾌락이 아닌 제3의 길을 중도라고 한 거지요. 관점은 비슷한데 적용은 서로 다르다는 얘기입니다.

이런 시기에서 부처님께서는 ‘사물을 한 면만 보지 말고 전체적으로 봤을 때에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하셨어요. 이걸 지혜라 그러고, 한 면만 보는 걸 편견, 아집이라 그러지요. 그런데 부처님 당시에는 300여개의 나라가 있었고, 그 각 나라에서 사람들이 태어나서 자기 나라에서만 살다보니까 자기도 모르게 세상의 한 면밖에는 볼 수가 없어서 극단적인 주장이 나왔던 건데, 붓다의 가르침은 그 전체를 보고 진리를 얘기한 것이니까 당시 사람들은 이해하기가 굉장히 어려웠어요. 그 시대에 붓다의 가르침을 가장 빨리 이해했던 사람은 지식인이고 종교인인 브라만도 아니고, 우파니사드 철학주의자도 아니고, 사업을 하는 장자들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장사꾼은 여러 나라를 오가며 무역을 하면서 전 세계를 돌아다니다 보니까 붓다의 가르침을 가장 빨리 이해해서, 당시 불교의 가장 강력한 후원세력이 이 장자계급이었던 거예요. 여러분들도 잘 아는 수닷타장자, 칼란다장자가 있고, 위사카부인도 장자의 딸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사업하는 게 경제인들 아닙니까? 경제인들은 온 세계를 돌아다니다 보니까 ‘이건 한쪽으로 치우친 주장이다’ 하는 걸 금방 알 수 있잖아요. 요즘은 경제인보다도 더 객관적으로 사물을 보는 과학자라는 집단도 있어서, 이 과학자나 경제인들이 아마 불법을 제일 빨리 이해할 수도 있겠지요. 아무튼 시대가 그런 시대였다는 것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럼 언제 불교가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을까요? 바로 아쇼카 왕이 전 인도를 통일했을 때입니다. 전 인도를 통일하니까 보통 사람도 모든 것을 한 눈에 볼 수가 있게 되어서 여러 사상들이 다 편협한 주장에 불과했고 ‘아, 붓다의 가르침이 이 모든 걸 설명할 수 있구나’ 하고 깨닫게 된 거예요. 변화된 세계를 새롭게 설명할 수 있는 게 붓다의 가르침이다 보니까 아쇼카 왕 시대에 와서야 불교가 전 인도로 확산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류문화사적으로 보면 불행히도 이 시대에 한 번 큰 사상의 지각변동이 있었고, 그 후로 2000년 가까이 사상의 지각변동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의 모든 사상은 훈고학(訓?學), 즉 옛날 것을 재해석한 것에 불과해요. 중국에서도 춘추전국시대를 제외하고는 지금까지 어떤 새로운 사상의 전개가 없습니다. 공자나 논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문제로 양명학이다, 주자학이 등장했을 뿐이고, 유럽도 마찬가지, 인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지식의 암흑시기를 거쳐서 유럽에서는 지금으로부터 4, 500년 전에 ‘그리스를 재발견하자’는 르네상스가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인문학이 부흥을 했지요. 그러나 아직도 종교적으로는 2000년 전 기독교, 2500년 전 불교를 계속 우려먹고 있잖아요. 그런데 앞으로 과학이 발전해서 유전자가 발견이 되고, 새로운 IT사업이 등장하고, 인공지능이 출현하고 그러면 옛날 사상이나 종교로는 더 이상 새로운 세상을 설명할 수 없을 거예요. 그래서 지금 이 한편으로는 대혼란기이자, 문예부흥적 측면으로 볼 때는 이 대혼란을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철학과 사상이 등장할 때입니다. 아인슈타인 박사가 ‘과거의 종교 가운데 우주시대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종교는 불교다’고 얘기했답니다. 그만큼 담마, 법, 진리는 시공을 초월한다는 거지요.

아무튼 인도에서 아쇼카왕 시대를 마우리아 왕조(Mauryan dynasty)라고 부릅니다. 그 핵심적인 시기가 B.C. 3세기입니다. 그래서 델리박물관 들어갔을 때 조각 밑에 ‘B.C. 3세기’라고 쓰여 있다면 그건 마우리아 시대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도 역사에서 첫 번째 시기가 인더스문명시기, 두 번째가 아리안문명시기, 세 번째가 마우리아 시대로서 이때가 부처님의 발자취가 정리된 때입니다.

그런데 이 마우리아 시대는, 마치 진나라가 얼마 못 가고 망하고 한나라가 되듯이, 아쇼카 왕조가 금방 망하면서 막을 내립니다. 그리고 또 새로운 왕조가 생기고, 또 새로운 왕조가 생겨도 이걸 다 합해서 마우리아 시대라고 합니다. ‘한 사람이 왕이 되면 왕의 아들이 무조건 왕이 되고, 이건 신이 왕이 되도록 정했다.’ 이런 가르침이 지배적일 땐 이 왕조가 500년씩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처럼 계급도 부정하는 합리적인 사고를 가르치는 사상에서는 ‘이 사람이 왕이 됐으면 이 사람이 전생에 복을 많이 지어서 왕이 된 것도 아니고, 제 아버지가 왕이라 왕이 된 것도 아니고, 이 사람이 똑똑해서 왕이 된 것이다.’ 이렇게 가르치니까, 신하도 왕이 되지 말란 법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쿠데타를 일으켜서 또 왕이 되고, 쿠데타를 일으켜서 왕이 되고, 그러다 보니까 우리가 말하는 하나의 왕조가 오래 가기는 어렵지만 이건 그 나라 안에서의 정권변화, 즉 대통령이 바뀌었을 뿐이지 하나의 시대이기 때문에, 통틀어서 마우리아 시대라고 하는 겁니다.

하라파 시기, 두 마리의 소가 끄는 쟁기
▲ 하라파 시기, 두 마리의 소가 끄는 쟁기

그 다음에 지금 아프가니스탄이 있는 북쪽에서 두 번째 북방민족이 일어나서 남쪽을 지배하게 됩니다. 그걸 쿠샨 왕조(Kushan dynasty)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마우리아 왕조가 망하자 인도는 또 각 민족별로 분열이 됐어요. 그런데 쿠샨왕조가 내려와서 다시 인도 북부를 통일했어요. 그런데 쿠샨왕조는 불교국가입니다. 그래서 아프가니스탄이 지금은 비록 무슬림 국가이지만 천여 군데가 넘는 불교 유적지를 갖고 있습니다. 제가 아프가니스탄에서 구호활동을 한다고 가봤더니 탑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것을 탈레반들이 전부 파괴했지요. 세계에서 가장 큰 불상이 아프가니스탄 바미얀이라는 데에 있었는데 이것도 다 파괴했거든요. 그래서 ‘A.D. 1, 2세기’라고 써놓은 조각은 쿠샨시대의 것이라고 보시면 돼요. 쿠샨시대에나 와서 불상이 나옵니다. 회색에 아주 차가운 암질로써 그리스의 조각처럼 매끄럽게 생겼으면 그건 간다라 양식(Gandhara art)의 유물입니다. ‘간다라’라는 건 유럽 그리스의 영향을 받아서 지금의 파키스탄 간다라지역의 대표적인 유물로 남아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는 겁니다.

지금 아그라보다 약간 북쪽으로 50킬로미터쯤 가면 마투라라는 지역이 있습니다. 이 지역의 붉은 사암에 아주 육감적으로 조각한 건 마투라 양식(Mathura art)이라 그럽니다. 그래서 간다라 양식 불상은 통가사를 입어서 몸 전체를 가리고 있고, 마투라 양식은 인도전통문화를 따라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모습으로 조각되어있어요. 여성들 가슴이 아주 풍만하게 묘사되어있거나 아랫도리가 다 노출되어있고 그러면 그건 마투라 양식입니다. 이게 쿠샨시대입니다.

그 후, 원래 마우리아의 중심지에서 일어나 부흥해서 인도를 통일한 왕조를 굽타 시대(Gupta Period)라고 합니다. 이건 5세기 왕조입니다. 3세기부터 6세기까지 계속됐지만 이들이 왕성할 때가 5세기였어요. 이때는 간다라 식과 마투라 식이 통합된 시기예요. 그래서 우리가 사르나트 박물관에 갔을 때 본 유물들이 바로 간다라 식과 마투라 식이 통합된 양식이었어요. 그래서 델리 박물관에 갔을 때 마우리아 시대, 쿠샨 시대, 굽타 시대라고 쓰여 있으면 이건 B.C. 3세기, 이건 A.D. 1, 2세기, 이건 A.D. 5세기, 이렇게 이해하시면 돼요. 굽타왕조 때까지는 불교국가였어요. 그래서 지금도 불적지에 남아있는 어마어마한 탑들을 보셨지요? 대부분 굽타시기의 것입니다. 바깥에 또 쌓고, 또 쌓아서 어마어마한 규모가 되었기 때문에 현재 우리 눈에 보이는 탑은 다 굽타시기의 것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아시타 선인의 예언을 표현한 굽타 시대의 유물(상부)
▲ 아시타 선인의 예언을 표현한 굽타 시대의 유물(상부)

굽타왕조가 망한 후로 더 이상 인도에 통일국가는 없었습니다. 인도는 민족도 다 다르다고 했잖아요. 그러기 때문에 한 민족이 다 자기네 민족국가를 건설한 거예요. 지금의 유럽과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유럽을 한번 통일해 보겠다고 나섰던 사람들이 있었지요? 나폴레옹도 그랬고, 히틀러도 그랬지만 유럽은 통일국가가 잘 안 이루어졌어요.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 유럽연합이 거의 통일국가나 마찬가지지요. 지금 유럽연합이 유럽합중국을 만들려고 하잖아요. 그런데 중국대륙이나 인도대륙은 몇 번 통일된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절반은 통일국가로, 절반은 각각 독립국가로 있었어요. 그런데 인도는 굽타왕조이후로는 통일국가가 없이 각자 자기 민족국가를 이루고 이렇게 내려왔는데, 7세기가 되면서 무슬림이 일어나서 8, 9세기 때 인도대륙에 무슬림이 들어왔어요. 그래서 인도대륙의 북쪽은 무슬림왕국이 됩니다. 그러나 통일국가는 아니에요. 이때를 ‘노예왕조’라고 하는데, 궁중노예들이 일어나서 왕조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한나라 때에도 환관들이 권력을 잡은 적이 있었잖습니까.

이렇게 인도는 1000년 동안 분열국가였습니다. 사실 ‘분열’이란 말은 맞지가 않아요. 원래 자기 민족끼리 나라를 형성하는 게 정상이니까요. 하여튼 통일국가 없이 각각 발전하는데, 북쪽은 무슬림, 남쪽은 힌두왕국이 되었어요. 그리고 불교는 종교나 수행의 가르침으로는 남아있었지만 이후에 왕국의 중심사상은 된 적이 없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왕국(王國)이라는 건 ‘신이 왕한테 권력을 부여했다’는 사상적 배경이 좀 있어야 생명이 오래갈 거 아니겠어요? 그래야 자식이 왕이 되는 것도 허용이 되잖아요.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은 좀 합리적이고 민주적이다 보니 왕조사상으로는 맞지가 않는 겁니다. 그래서 힌두교가 오히려 부흥을 하고, 그래서 왕국은 대부분 힌두왕국으로 형성됩니다.

그런데 13세기쯤 오면서 무슬림이 점점 남쪽으로 내려와서 인도의 중앙까지 다 점령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불교가 극심한 탄압을 받고 절멸하는 시기를 거쳐서 6, 700년간 인도의 주무대에서 사라지고, 북쪽, 히말라야나 동쪽, 소수민족 지역에만 남아있는 암흑기를 거치게 됩니다. 1526년, 즉 16세기에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에 있던 이란 계통의 바부르라는 사람이 인도로 쳐내려와서 지금의 델리에 있던 왕조를 멸망시키고 세운 제국이 무갈제국(Mughal Empire)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인 후마윤 대에 와서 결국 전쟁에 져서 왕국이 망하고 이 사람은 지금의 이란 즉 페르시아 쪽으로 도망갑니다. 그러다가 1600년경에 다시 델리로 쳐들어와서 왕국을 복원합니다. 그리고 그 아들인 악바르 대제(Akbar the Great)가 3대 왕이 됩니다. 악바르가 제위에 올라서 무갈제국이 인도의 대부분을 통일하게 됩니다.

간다라 영향을 받은 불상의 모습을 보며 초기 불상의 형태에 대해 설명하는 스님
▲ 간다라 영향을 받은 불상의 모습을 보며 초기 불상의 형태에 대해 설명하는 스님

이건 중국역사와 비교하면 청나라와 같은 시기입니다. 청나라도 마찬가지로 최고로 강했을 때가 강희제 때입니다. 강희제가 7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서 황제가 됐잖아요. 7살에 왕위에 올랐다는 건 실제로 정치는 왕의 엄마가 했다는 겁니다. 악바르도 13세살에 왕이 됐어요. 그러니까 실질적으로는 엄마가 정치를 했다고 볼 수 있지요. 이 악바르 시대의 특징은, 무슬림 왕국이 자기네 종교만 위하고 다른 종교를 탄압한 것과 달리, 힌두를 전부 수용해서 사람을 등용할 때 종교를 따지지 않고 등용을 했습니다. 이건 강희제가 친중정책을 쓴 것과 똑같습니다. 강희제도 대신을 등용할 때 한족, 만주족을 구분하지 않고 등용했거든요. 악바르는 부인도 힌두여자를 왕후로 삼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힌두교계를 차별하지 않음으로 해서 안 싸우고 평화적으로 통합을 해 갔거든요. 이 시대에 만든 게 아그라 성입니다. 처음에는 델리에 붉은 성을 짓고 나중에 수도를 아그라로 옮겨서 아그라 성을 쌓았습니다. 이건 궁성입니다. 처음은 군사적 요새로써 쌓았다가 평화시대가 되니까 저 안에 사치스럽도록 아름다운 궁궐 건축물을 많이 짓게 됐다는 거예요. 악바르 후대로 내려가면서 제국이 점점 더 안정되고 넓어지게 됩니다.

오늘 들은 인도 역사는 델리 박물관에 가셔서 확인하시고, 아그라 성에서는 무갈제국의 역사를 보시게 될 겁니다. 그런데 아우랑제브 이후에 왕위쟁탈전이 일어나면서 제국의 힘이 약해졌고, 각 인도 지방 왕국들이 다시 부흥했는데, 그때 마침 영국이 식민통치를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무갈제국은 이름만 남고 형식적으로 남았다가 결국 1800년에 들어와서 없어졌어요. 영국은 형식적인 무갈제국도 식민통치에 장애가 된다며 없앤 거예요. 그래서 무갈제국이 망했습니다.

그것은 청나라가 망한 것과 비슷합니다. 청나라 말에도 태평천국의 난처럼 온갖 혼란이 있지 않았습니까. 대신 외국에 의해서 망한 건 아니고 손문의 신해혁명(辛亥革命)에 의해서 망했지요. 망할 때 직접 식민지 지배는 안 당했지만 아편전쟁이라든지 이런 걸 겪으면서 거의 식민지나 다름없는 신세로 전락했지요. 그래서 연해주도 러시아한테 넘겨주고, 대만은 일본한테 넘겨주고, 홍콩은 영국한테 넘겨주고, 마카오는 포르투칼한테 넘겨주고, 상해에는 프랑스가 조차를 하고, 이렇게 서구열강에 짓밟히다가 1949년도에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서면서 부흥했지요.

인도는 1947년에 독립을 합니다. 그렇게 되면서 인도는 비교적 민주주의적인 발전과정을 걸어서 현재에 이르게 됩니다.”

 마투라 양식의 대표적인 특징인 둥근 눈매의 두상
▲ 마투라 양식의 대표적인 특징인 둥근 눈매의 두상

어제 아그라성 앞에서의 스님 강연을 기억해 가며 타지마할 관람을 하고 순례객은 항공편 별로 차량에 나누어 타고 델리 박물관으로 향했습니다. 박물관으로 향하는 시내는 1월 26일 ‘인도 공화국의 날’ 준비로 곳곳에 교통 통제가 되고 있어서 많은 차들이 우회 도로를 이용해야 했습니다. 인디아 게이트에서 대통령궁으로 이어지는 일직선상의 도로에서 기념식을 준비하느라 관람용 의자가 어마어마하게 깔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스님은 이러한 광경을 차 안에서 설명해 주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그냥 스쳐 지나 갈 때와 내 눈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의 차이는 이렇게 알고 보는 것과 모르고 보는 것의 차이임을 확연히 느끼게 됩니다. 스님은 델리 박물관에 가장 먼저 도착하여 순례객들이 차량별로 도착할 때 마다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석가족이 세운 삐쁘라하와의 진신사리탑 내부에 안치되어 있던 사리의 모습. 
‘카필라바스투’라고 새겨진 명문이 사리함에서 발견되었다
▲ 석가족이 세운 삐쁘라하와의 진신사리탑 내부에 안치되어 있던 사리의 모습. ‘카필라바스투’라고 새겨진 명문이 사리함에서 발견되었다

국립 박물관인 델리 박물관에서 인도 역사의 전반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좋았지만 무엇보다도 삐쁘라하와의 진신사리를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순례객들이 핸드폰을 들고 사진부터 찍으려 하자, 스님은 “우선 참배부터 하겠습니다. 우슬착지, 오른쪽 무릎을 땅에 닿도록 하여 세 번 인사드리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차분히 살펴보시고 다른 분들에게도 방해되지 않도록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원을 그리며 돌아보고 나오겠습니다.”

라고 안내하였습니다.

내 앞에 진리로서의 가르침을 남겨주신 부처님께 저는 믿음으로서의 부처님으로 대할 때가 많았지만 오늘 이 순간에는 ‘사리라는 부처님의 흔적’ 앞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오롯이 받들고 익혀나가는 제자가 될 것임을 다짐하는 마음을 내어보았습니다.

송수신기에서는 또 다른 차량을 처음부터 안내하는 스님의 목소리가 울려오고 있었습니다. 16박 17일 동안 눈이 있으되, 진실을 보지 못한 붓다의 제자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생생하게 전해주신 법륜스님과 이러한 기회를 만들어 주신 법사님, 스텝, 차장, 조장 도반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앞으로 남은 것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생생하게 실천하는 것’이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도착한 모든 차량에 설명을 마치고 델리 공항으로 먼저 나서는 사람들에게 손 흔들며 인사하는 스님께 사람들은 함께 손 흔들며 가슴 뿌듯했을 것입니다. 지난 시간보다 앞으로의 할 일이 많음에 감사하면서 말입니다.

함께 만든 사람들
문수팀, 정란희

전체댓글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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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광

수고하셨습니다.
앞으로 좋은 일 많이 많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8-02-01 07:32:40

건모친

마지막날까지 친히 박물관 설명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많은 지식들은 어디에서 나오시는지 무에 하나 걸림이 없으십니다.
존경하고 위대하십니다.
동시대를 사는것이 행운임을 알아 부지런히 정진하겠습니다.
늘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머리에 파스 붙이시면서까지 중생을 위하는 그 애 쓰심!! 헛되지 않도록 저도 작은 힘 보태겠습니다.

2018-01-29 21:19:03

송미해

인도의 역사가 한눈에 잘 들어옵니다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2018-01-26 18:5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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