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8.2.20 정초 순회법회 (4) 대전충청지부
“수행해도 왜 분별심이 사라지지 않나요?”

어제 밤 10시에 마산 정토법당에서 정초 법회를 마친 후 서울로 올라온 스님은 아침 7시부터 평화재단에서 북한 현실 전문가 모임을 가졌습니다.

평화연구원 전문가들과 함께 북한 현실에 대해 다양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는데요. 먼저 북한 주민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쌀값과 환율 등 물가 상황을 점검하면서, 유엔의 대북제재가 실제 주민들의 삶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확인했습니다.

또 올림픽을 전후하여 북미 간 외교전에 대해 평가해 보았습니다. 연구원들은 북한과 미국의 대화 가능성은 열려 있으나 대화를 위한 의제와 조건에 대한 합의가 잘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라고 진단하는 분도 있었고, 오히려 북한의 핵무력 완성 선언은 자국 방어에는 충분한 군사력이 확보되었다는 의미로 봐야 한다고 말하는 분도 있었고, 아직 북한의 운반 능력이 미완성 단계에 있어 미국에 가공할 위협이 될 상태가 아니고, 일시적인 힘의 균형 상태에 놓여있어 대화 가능성은 열려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북한은 평화 공세로 국제 사회에 평화의 메시지를 보내면서 남한과의 관계 개선을 꾀하고 있고, 이런 외교가 미국을 압박하는 모양새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 미국의 반발과 압박을 가져올 수 있어, 조금 더 안정적인 정치 기반 하에 외교 전략을 구사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를 함께 나누면서 북한 현실 전문가 모임을 마쳤습니다.

이어서 대전으로 이동한 스님은 오후 2시부터 대전충청 지부 정토회 정회원들 16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정초 법회 법문을 했습니다.

한반도의 중심에 있는 대전 법당은 평소에도 많은 회의와 모임들이 있는 곳이라 활기찬 편입니다. 오늘은 특히 오랜만에 만난 도반들이 반가워서 인지 기분 좋게 들떠있는 분위기로 법당의 곳곳에서 이야기 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오후 2시가 가까워지며 법회 시간이 다가오자 대전 법당은 올해의 실천 사항 중 하나였던 앞자리부터 앉기에 맞춰 자리가 차근차근 채워졌습니다.

짧고 굵게 지역 소개가 끝나고 대전 법당의 재주 많으신 소리꾼 이신근 님과 대전 법당 연화회 보살님들과 활동가들의 신명 나는 공연이 이어졌습니다.

공연이 끝난 후 지난 1년간 대전충청지역의 활동을 담아낸 영상을 보며 우리 지역의 지난 한 해의 활동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영상 시청 후 스님의 정초 법문이 시작되었습니다. 스님은 정회원이란 어떠해야 하는지,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 복을 비는 신자가 아닌 수행자로서 정회원의 자세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허황된 욕망을 버리면 우리 모두는 있는 그대로 완전한 존재라는 말씀에 마음이 밝아졌습니다.

정토회 활동을 하다 보면 정회원의 본래 의미에 대해서 잊게 되곤 하는데 스님의 명철한 법문으로 다시 한번 정회원이 된다는 것의 의미와 신자가 아닌 수행자로서의 마음가짐을 다잡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 선택한 길, 내 인생의 주인으로서, 정토회의 주인으로서 정회원의 정체성을 가지고 활동해 나가기로 다짐할 좋은 기회였습니다.

뒤이어 곧바로 정회원들을 위한 즉문즉설이 이어졌습니다. 스님께서는 정회원으로 활동하면서, 또는 생활하면서 의문점이 생기는 것을 자유롭게 질문하도록 해주셨습니다. 총 3명의 질문자가 질문을 했습니다. 첫 번째 질문자는 시어머님을 모시고 사는데 남편의 중심이 시어머님과 자신과의 중간에 놓여있는 것에 대해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속으로 서운함이 있다고 질문했고, 두 번째 질문자는 친정 부모님의 제사를 큰오빠와 작은오빠의 의견이 달라 집에서와 납골당에서 두 번 지내게 된 문제에 대해 질문했으며, 선량한 기독교인이라는 세 번째 질문자는 불교란 석가모니 부처님을 꼭지점으로 해서 2천600여 년간 지속하여 온 종교라 생각했는데 과거세 7불이 있다는 말을 듣고 헷갈리기 시작했다는 문제점과 요즘 한창 이슈인 북한 핵 보유에 대해서 미국은 강대국이라 핵을 보유해도 되고 북한은 보유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강대국의 힘의 논리인 것 같다며 이것은 불합리하지 않은지 질문했습니다.

세번째 질문자가 질문한 북미 관계에 대한 스님의 답변 내용 중에 한반도의 전쟁 위기 가능성에 대한 언급이 있었는데요. 법회를 마친 후 대중들도 지금 한반도 정세에 대해 깊은 위기감을 우려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법문이 끝나고 나서 올 한 해 스님의 건강을 기원하며 대전충청지부 의장 금강행 유인자 님이 꽃다발을 올리었습니다.

법회가 끝나고 대전충청지부와 다 같이 모여 단체 사진 촬영 후, 스님은 환한 웃음과 함께 한 분 한 분 악수를 하며 한 해의 활동을 격려해주었습니다. 손에 작은 태극기를 나누어 쥐고 노래를 부르며 한반도의 평화를 바라는 마음을 모으는 시간으로 주간반 정초 법회를 마무리했습니다.

저녁 7시 무렵이 되자 대전충청지부의 각 법당에서 오신 도반들로 대전 법당이 가득 찼습니다. 총 125명의 도반들이 저녁 반을 위한 정초순회법회에 참석하였습니다.

먼저 대전충청지부 상임법사이신 덕생 법사님께서 늦은 시간 각 지역에서 먼 길을 달려온 도반님들을 격려하는 인사 말씀을 하셨습니다. 법사님은 ‘복을 지어라’는 법륜 스님의 정초 법회 때의 덕담을 다시 한 번 강조해 주셨습니다.

이어 대전충청지부의 지난 1년 동안의 활동 영상을 함께 하였는데, 미소를 머금고 영상을 보는 도반님들의 모습에서 정토행자로서의 자부심과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참가한 정토회별로 참가자 소개가 있었고 ‘스님 사랑합니다. 도반님 사랑합니다.’라며 짧지만 귀여운 퍼포먼스를 보여준 천안정토회가 도반님들의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도반님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청법가를 불렀고, 스님의 법문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느 순간에도 자신이 수행자라는 관점을 분명히 하라는 말씀을 통해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이어 두 분이 그동안 수행하며 들었던 의문들에 대해서 질문을 하였습니다. 첫 번째 분은 회사 생활이 힘들어서 정토회를 찾게 되었고 지난 3년간의 수행을 통해 예전과는 많이 달라지고 행복해졌는데, 지금도 몇몇 상황들에 부딪히면 분별심이 올라와 힘들 때가 있어 이 부분을 점검받고 싶어 했습니다. 두 번째 분은 신기하고 복잡한 인류의 정신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궁금하다고 질문하였습니다.

“저는 정토회를 알기 전에는 회사에서 굉장히 시달렸습니다. 일주일에 5일 출근해서 4일 이상 밤 늦게까지 일해야 할 때도 많았고, 퇴근하고도 일이 머릿속에 남아서 편하게 잠을 못 자는 생활을 반복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일했는데도 회사에서 억울한 일을 당해서, 이제 저를 위해서 뭔가를 해야겠다 싶어 정토회에서 수행을 시작했습니다.

3년 전에 비하면 지금 제 모습은 정말 많이 변했습니다. 회사에 가기 싫던 발걸음이 가벼워졌고 마음도 많이 밝아졌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출근해서 컴퓨터를 탁 켜는 순간 영문은 모르겠지만 감사한 마음도 솟아났습니다.

예전보다 상태가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다른 일들을 마주했을 때는 아직까지 분별심이 곳곳에서 올라옵니다. 저는 빨리 그 사로잡힘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생각처럼 잘 안 되는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을 만나면 자책하기도 하고 때로는 제가 하는 수행을 의심하기도 합니다. 참 좋지 않은 패턴의 반복을 바꿔보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요? 스님께 제 수행의 관점을 한 번 짚어 주시는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청했으니까 얘기 할게요. 질문자는 수행자가 아닙니다. 수행적 관점이 아니에요. 돈을 빨리 벌고 싶은데 빨리 안 벌려서 내 존재를 한탄하는 것이나, 빨리 변하고 싶은데 빨리 안 변해져서 내 존재를 한탄하는 것이나, 이 둘은 아무 차이가 없는 중생적 관점입니다.”

“‘이 상황을 빨리 좋아지게 하고 싶다’라는 마음조차도 문제인가요?”

“그것도 지금 집착하고 있는 거지요. ‘이렇게 변했으면 좋겠다’ 하는 걸로 끝나야 하는데 그게 안 좋아진다고 자학을 하면 그건 집착했다는 뜻이에요. ‘돈을 벌고 싶다’ 하는 건 문제가 없어요. 그런데 안 벌린다고 한탄하면 그건 벌써 돈에 집착하는 거죠. ‘전쟁이 안 났으면 좋겠다’ 하는 건 우리의 원이지만, 기도를 했는데도 상황이 나빠진다고 해서 밤잠을 못 자고 술을 마시며 괴로워하면 그건 집착이죠.

‘나는 깨닫겠다’ 하고 선방에 앉아 참선을 하는데 10년이 지나도 안 깨달아진다고 해서 ‘나는 수행이 안 맞나 봐. 집에 갈까?’ 이러고 다리 뻗고 울면 똑같은 중생이지, 그게 무슨 수행이에요? 그건 그냥 욕망의 대상이 돈이 됐다가, 권력이 됐다가, 수행이 됐다가, 깨달음이 됐다가 하는 것뿐이에요.”

“예, 알 것 같습니다. 그러면 여전히 일상생활에서 복병처럼 솟아나는 분별의 상황들은 앞으로 수행하면서 어떻게 넘기면 되겠습니까?”

“ ‘아, 내가 여기에 이런 문제가 있구나,’ ‘내가 돈에 약하구나,’ ‘내가 여자에 약하구나,’ ‘이러이러한 것들은 그래도 극복이 되는데 이런 것은 아직 내 무의식 깊숙이 강한 까르마가 남아 있구나,’ 이렇게 그냥 알 뿐이죠. 이게 없어지면 뭐가 나오고 그게 또 없어지면 또 뭐가 나올지 그건 몰라요. 백 년을 수행해야 없어질지 천 년을 수행해야 없어질지도 아무도 알 수가 없어요. 다만 할 뿐이에요. 나오면 알아차리고 또 알아차리고, 사라지고 또 다른 게 나오면 알아차리고, 안 사라지면 안 사라지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면 되죠.”

“스님, ‘알아차린다’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다음에 똑같은 상황을 만나면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그 상황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까?”

“자유롭지 못하면 ‘자유롭지 못했구나’ 하고 알아차리면 되요. 길 가면서 주의를 하면 안 넘어지겠죠. 그런데 주의를 놓쳐서 넘어지면 ‘넘어졌구나’ 하고 일어나면 되는 것이고, ‘더 주의를 기울여야지’ 하면 되는 것이고, 그래도 넘어지면 ‘아차, 내가 놓쳤구나’ 하고 또 일어나면 되지, 그냥 거기 주저앉아서 울래요? ‘나는 이걸 벌써 다섯 번이나 놓쳤네’ 이러고 앉아서 운다고 그게 무슨 도움이 될까요?”

“도움이 안 됐습니다.”

“그러니까요. 다만 아, ‘나는 이런 까르마가 있구나’ 하고 인정하면 돼요. 그건 까르마잖아요. 프로그램일 뿐 그것은 나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프로그램, 요즘 쓰는 말로 하면 알고리즘이 자동 반응하는 것뿐이에요. 그게 자동 반응한다는 걸 내가 분명히 알아차려야 해요. 의식을 놓치면 자동 반응을 했다는 걸 알아차리고, 더 나아가 자동 반응을 한다는 사실 자체까지 딱 알아차리면 자동 반응 안 할 수도 있잖아요. ‘이리로 가면 물에 빠진다’ 하는데 모르면 빠지지만 알면 안 갈 수도 있는 것이니까요.

질문자는 지금 조급한 거예요. 즉 욕심이 안 버려진 겁니다. 뭐든지 욕심으로 하고 있어요. 전에는 일을 욕심으로 하다가 이제는 수행을 욕심으로 하는 거죠. 정작 버려야 할 건 욕심인데 욕심은 놔두고 ‘일’에서 ‘수행’이라는 이름으로 대상만 바꿨어요. 빵 먹다가 고구마로 바꿨을 뿐이라는 말이에요. 그래서 ‘그냥 중생심이다, 수행심이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그러니 다시 수행적 관점으로 돌아와야 해요. 수행적 관점을 가지면 넘어지든 자빠지든 아무 문제가 안 돼요. 넘어지면 ‘넘어졌구나’ 하고 일어나면 되고, 가다가 또 넘어지면 또 ‘넘어졌구나’ 하고 일어나면 되는데, 욕망을 내면 ‘왜 나는 자꾸 넘어지지? 빨리 가야 하는데!’ 이러면서 괴로워지기 시작합니다. 그런다고 빨리 가지는 게 아니잖아요. 넘어지면 벌떡 일어나서 가는 게 중요하죠.

그래서 부처님이 늘 말씀하시잖아요. 화살을 맞아서 상처가 났으면 빨리 화살을 뽑고 치료하는 게 중요하지, ‘어느 놈이 쐈느냐? 무슨 화살이고 독은 무슨 독을 발랐느냐?’ 이렇게 따지다가 죽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첫마디로 수행적 관점을 놓쳤다고 한 겁니다.

이건 정말 많은 수행자들이 범하는 일이에요. 빨리 안 깨달아지니까 한탄하는 이유가 스트레스가 엄청나게 쌓여서 그래요. 여러분들의 스트레스하고는 비교가 안 돼요. 그건 전부 욕심으로 해서 그래요. 콱 깨달아서 도인 한 번 돼 보겠다고 덤비니까 안 되는 거예요. 지금 여기에 내가 깨어있어야 수행입니다.”

“예, 제 문제를 분명히 알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대중 박수)

“정토회에 들어오는 순서를 보면 처음에는 자기가 괴로워서 찾아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부인이 남편이 술을 마셔서 괴로워 죽겠다며 이 절, 저 절을 다니면서 ‘우리 남편 술 안 마시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하다가, 아무리 영험하다는 절에 가도 해결이 안 되니까 이제 정토회에 와서 물어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대답하죠.

‘당신 남편은 속이 답답해서 미칠 것 같으니까 술을 마셔야 삽니다. 당신이 보기에는 술 마시면 안 될 것 같지만 제가 보기에는 술을 마시니까 그나마 안 죽고 살고 당신한테 행패도 덜 피우는 거니까 매일 마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남편에게는 술이 보약입니다’ 이렇게 기도를 하라고 해요. 보약은 매일 먹어야 하니까 안 마시고 오면 집에서 먹이고, 남편이 알아서 마시고 오면 ‘감사합니다, 알아서 먹고 오니 얼마나 좋은가’ 이렇게 생각을 바꾸라는 거예요.

그렇게 기도를 하면 이제 남편이 술을 마시든 말든 상관이 없어져요. 술을 마시는 건 좋은 일이고, 안 마시고 오면 주면 되니까요. 항상 안 마시고 올 때를 대비해서 술을 준비하고 있는데 자기가 마시고 오면 안 줘도 되니까 좋은 일이고, 안 마시고 오면 줘서 좋은 일이고, 그게 무슨 문제겠어요?

그러면 다음에는 ‘아이고, 스님!’ 이러면서 좋다고 찾아와요. 남편 입장에서 어떨까요?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어떤 남편은 부인한테 스트레스를 덜 받으니까 전보다 좀 덜 마실 수도 있어요. 그래도 계속 마시는 사람도 있지만 보통은 덜 마시는 일이 일어나는 편입니다. 이렇게 덜 마셨다 그러면 이제 난리가 나요.(모두 웃음)

‘아이고, 스님! 그렇게 안 되던 게 스님 말씀대로 기도하니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 남편이 드디어 술을 덜 마셔요.’ 그러면 이때 벌써 수행은 놓치고 기복으로 돌아간 거예요. 이걸 좋아하면 벌써 기복으로 가버렸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그 부인이 막 보시를 합니다. 그러면 제가 ‘당신 지금 수행 놓쳤어요’ 이렇게 말합니다. 보시까지 했으니까 칭찬을 해줘야 할 텐데 칭찬은 안 해주고 ‘당신 수행 놓쳤습니다. 그러면 과보 받아요’ 이렇게 말하니까 못 알아들어요. 그래서 기도를 어떻게 하는지 알아요? 하루에 108배를 하라는데 자기 혼자 신나서 하루에 300배를 해요.(모두 웃음) 더 많이 절하고 더 많이 수행하면 남편이 빨리 변할 거라고 생각하니까요.

그런데 자기는 더 열심히 했는데도 남편의 변화 속도가 늦으면 불만이 생겨서 또 말이 오고 가겠죠. 남편이 다시 술을 많이 마시거나 마시는 양이 안 줄어들면 기도가 소용이 없다며 다시 찾아와서는 ‘아이고, 스님, 그렇게 열심히 제가 하루에 300배를 했는데도 이 인간은 안 되나 봐요. 조금 변하는 것 같더니 또 돌아가 버렸어요’ 이러고 있어요.(모두 웃음)

그건 상대를 바꿔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게 행복이라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이게 독입니다. 이걸 놔야 하는데, 이게 처음에는 되다가도 남편이 변하는 걸 보고 홱 돌아가지고 도로 가버리는 거예요. 이게 두 번째 장애에 걸리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지금 대부분 두 번째 장애에 걸려 있어요. 개인사며 집안일로 힘들어하다가 법문 듣고 얘기하고 나니 남편도 좀 나아지고 애도 나아지고 해서 ‘아, 절에 다녀서 좋아졌다’ 그러죠. 그러면 이제 절에 와서 이렇게 봉사도 하고 뭐도 하잖아요. 그런데 지금 여러분들은 두 번째 병이 도졌어요. 도반을 보고 ‘수행자라면서 뭐 저런 인간이 다 있나’ 하고 ‘스님, 법사가 왜 저래요?’ ‘업무를 왜 이렇게 줘요?’ 이래가지고 저한테 또 찾아와서 뭐라고 해요.(모두 웃음)

여러분이 남편은 변할 거라고 생각을 안 해요. 남편은 수행자가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내가 변해야 한다’ 이건 되는데, 여기는 다 수행자들이 모였으니까 ‘너도 변해야 하지 않느냐!’ 하는 거예요.(모두 웃음) 그래서 남편한테 ‘너, 술 적게 마셔라’ 하는 것과 도반이나 정토회를 분별하면서 똑같이 관점이 딱 뒤집어져서 힘이 들고, 그러다가 그만두는 거예요.

남편과의 갈등을 ‘이혼할까, 집 나갈까’ 해서 해결하듯이 ‘정토회 그만두면 되나, 봉사를 그만두면 되나’ 하고 있어요. 봉사를 그만두려니까 그래도 좋은 법문은 계속 듣고 싶고, 다니려니까 일이 너무 많고, 싫은 사람은 꼴도 보기 싫고 이런 거예요.(모두 웃음)

이전에 남편하고 이혼하려니까 애도 있고 계속 같이 살려니까 맨날 술 마셔서 미웠잖아요. 이거랑 똑같은 문제를 안고 두 번째 과제에 직면해 있는 거예요. 자기는 수행 좀 했다 싶으니까 처음에는 남을 비난합니다. ‘정토회가 뭐 이래?’ ‘스님, 수행자라는 사람들이 왜 이래요?’ ‘법사가 왜 저래요?’ 이렇게 얘기하다가 두 번째는 ‘저는 아마 수행이 안 맞나 봐요, 정토회 그만둬야 하나 봐요’ 이렇게 얘기해요. ‘정토회를 그만두면 될까, 팀장을 그만두면 될까, 총무를 그만두면 될까, 안 나오면 될까’ 이렇게 해결하는 방식이 ‘이혼하면 될까, 뭐하면 될까’ 하던 것과 똑같은 반응으로 돌아간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전에 남편 얘기를 할 때는 스님 얘기를 들어요. 스님이 남편을 편 들 리가 만무하니까요. 그런데 두 번째 과제에서 ‘그건 분별심이에요. 지금 수행 관점을 놓쳤어요’라고 하면 스님은 정토회하고 이해관계가 걸려 있으니까 스님 말을 안 들어요. (모두 웃음) 그래서 이런 얘기를 할 때 저는 가능한 말을 안 해요. 말을 해도 효과가 없잖아요. 이미 이 사람이 볼 때 스님은 정토회에 이해관계가 걸린 사람이기 때문에 ‘스님은 정토회니까 그 사람을 두둔하는 거다. 정토회니까 나를 여기에 붙들어 놓고 일하게 하려고 저런 말을 한다’ 이렇게 생각해요.

지금 여러분이 정토회를 갖고 한창 분별이 나서 얘기하는 건 스님이 볼 때는 수행적 관점을 놓쳐버린 거예요. 지금 여러분은 분별심도 세속적 관점으로, 해결책도 세속적 관점으로 보고 있어요. ‘이혼할까, 헤어질까’ 이런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과 똑같이 머리가 돌아가거든요. 그래서 여러분이 고민이라며 얘기해도 제가 말해봐야 법문의 효과가 없으니까 그냥 기다리는 거예요. 그래서 첫 번째 장애보다 두 번째 장애가 더 어렵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장애에서는 방금 질문자도 그랬지만 그걸 수행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관점이 돌아갔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기지, 수행을 덜해서 괴롭거나 수행에 뭔가 다음 단계가 있는 게 아니에요. 수행은 단계가 없어요. 수행이란 관점을 잡는 것, 딱 하나입니다. 여러분에게 문제가 생기면 이렇게 관점을 놓친 거예요. 욕망을 놓는 게 수행인데 욕망의 대상으로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용기를 내어 질문해 준 도반 덕분에 수행의 관점을 되돌아볼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수행의 과정에서 흔히 겪는 일이라 많은 정회원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법회를 마친 후 2017년 정토행자 대상을 받은 전해종 님이 스님께 감사의 꽃다발을 드렸습니다. 도반들은 새해 인사로 스님께 세배를 드렸습니다.

늦은 시간 법회가 마무리되었지만, 스님의 법문을 통해 다시 한 번 수행자로서의 관점을 분명히 한 도반님들의 모습은 가벼워 보였습니다.

이로써 대전충청지부 정초순회법회를 모두 마쳤습니다. 내일은 서울 분당에서 강원경기동부지부 정회원들을 위한 정초법회가 있습니다.

함께 만든 사람들
이하야나, 김성욱, 고재영

▼ 삶을 바꾸는 공부, 법륜 스님과 함께하는 정토불교대학
http://edu.jungto.org

전체댓글 13

0/200

명법

살아 계신 부처님이십니다.

천만억 화신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나무 마하반야바라밀()

2018-02-28 08:21:51

낮달

수행은 단계가 없어요. 수행이란 관점을 잡는 것, 딱 하나입니다. -번뜻 머리가 맑아졌습니다. 감사합니다.

2018-02-26 17:58:08

정지나

자학이 반성이라고 생각했는데 욕심이며 집착이라는 스승님 법문은
아~~그렇쿠나 수행마저도 욕심으로 하고있는 나를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아~나는 그렇쿠나 하고 단지 지켜보며 알아차림만이 있을 뿐입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2018-02-25 19:36:58

전체 댓글 보기

스님의하루 최신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