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8. 6.8 INEB 방문단 통도사, 운문사 사찰순례
“같이 사는 사람과 불편할 때, 어떡하죠?”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오전에 INEB(국제참여불교네트워크)에서 온 동남아 스님들과 정토수련원 내의 농장을 둘러보시고 통도사, 오후에는 운문사를 안내하여주었습니다.

통도사를 가는 길에 먼저 이번 INEB 동남아 스님들이 정토회를 방문할 수 있게 재정 후원을 해주고 있는 원만성 보살님 댁을 찾아가 감사 인사를 하고 차담을 나눴습니다.

동남아 스님들이 거실에 모두 자리를 잡고 앉자 스님이 원만성 보살님을 소개했습니다.

“여러분들이 한국을 방문하는 경비는 원만성 보살님이 보시를 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원만성 보살님은 갑자기 뇌경색으로 머리를 다치셔서 몸을 잘 못 움직이세요. 그래서 자신의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고, 자식들의 동의를 얻어서 좋은 일에 쓸 수 있도록 보시를 해주셨어요.

여기 거사님은 의과대학 교수님인데 환자들을 돌보면서 제3세계 어린이들을 돕는 일도 하시는 분이에요. 보살님과 거사님은 불교를 같이 공부하던 친구 사이였는데, 보살님이 건강할 때도 좋은 일에 기부하고 싶다고 늘 얘기를 해오다가 건강이 나빠지니까 정토회로 인연을 맺어준 겁니다.”

소개가 끝나자 동남아 스님들은 선의를 베풀어준 보살님에게 감사하며 다함께 기도를 해드렸습니다.

동남아 스님들의 정성스런 기도에 원만성 보살님은 왈칵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스님은 보살님의 두 손을 꼭 잡았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보살님은 큰 목소리로 여러 차례 ‘고맙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거사님은 보살님은 평소에 말은 다 알아들으시지만 표현을 잘 못하시는데, 오늘 스님이 오시니 말을 잘 하신다며 기뻐하였습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계속 이어졌지만 오래 머물 수 없어 짧은 만남을 마치고 통도사로 이동하였습니다.

통도사는 한국의 8대 총림 가운데 하나입니다. 총림은 선원, 강원, 율원을 모두 갖춘 사찰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또 한국의 3대 사찰로 법보사찰은 해인사, 승보사찰은 송광사,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님의 사리가 봉안되어 있는 불보사찰은 통도사입니다.

주차장에서 내려 돌로 된 구름다리를 건너자 ‘영축산통도사’라는 편액이 걸려있는 일주문을 만났습니다. 여기서 다함께 사진을 찍고 본격적으로 통도사 경내를 둘러보았습니다.

이어서 천왕문에 들어서 나무로 조각한 사천왕상이 두 눈을 부라리며 서 있었습니다. 그 앞으로는 아침저녁 예불의식에 사용하는 사물(범종, 법고, 목어, 운판)을 걸어 둔 2층의 범종각과 만세루가 나타났습니다. 범종각의 오른편에는 극락보전과 이를 마주 보고 있는 약사전, 그 사이에는 부처님의 일대기가 그려져 있는 영산전이 있었습니다.

불이문을 통과하니 저 멀리 대웅전 건물과 관음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관음전 뒤로는 용화전이 있었는데, 용화전 앞에는 선불교에서 스승이 제자에게 법을 전하는 징표인 발우모양의 봉발탑이 서 있었습니다. 통도사를 처음 세운 자장율사의 영정을 모신 곳도 있었습니다.

“이 절을 처음 세운 스님의 영정입니다. 그 이름이 자장율사라고 하는데, 한국 비나야 마스터(율사)의 첫 번째입니다. 스님이 될 때는 여기 와서 계를 받습니다.”

계를 중요시 하는 테라밧다 스님들이어서인지, 자장율사에게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대웅전 옆에는 응진전, 삼성각, 산신각이 있었습니다. 스님은 삼성각에는 산신과 칠성(하늘), 아라한(독성)을 모시고 있는데, 한국에 불교가 전파되는 과정에서 한국의 민간 신앙을 불교가 수용하여 절 안에 삼성각이 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그 가운데에 ‘구룡지’라는 연못도 있었습니다. 스님은 왜 여기에 연못이 있게 되었는지 설화를 얘기해 주었습니다.

“이곳은 아홉 마리의 용이 있는 연못이라는 뜻의 ‘구룡지연’입니다. 원래 이 지역은 습지였습니다. 그것을 메웠어요. 이 습지에 아홉 마리의 용이 있었는데, 자장 율사가 그것을 다 내보냈습니다. 그런데 눈 먼 용 한 마리가 있어서 자기는 갈 수 없다고 하면서 이 절을 지키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그 용이 여기서 살도록 이 연못을 남겼다고 합니다. 신라시대는 용이 나라를 지켜준다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마침 사시예불 시간이라 대웅전을 비롯한 절의 곳곳에서 사시예불을 드리고, 대웅전에도 예불을 드리는 사람들로 꽉 차있어 들어가 보지 못했습니다. 동남아스님은 한국의 기도시간에 대해 물었고 스님은 부처님의 공양시간인 9-11시 사이, 보통 10시에 전국의 사찰에서 기도를 올린다고 하며 ‘붓다즈 밀 타임(Buddha’s meal time!)’이라고 하자 모두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대웅전 뒤로는 통도사의 상징인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진신 사리탑이 있고 이곳에 금강계단을 설치하여 한국의 스님들이 계를 받는다고 설명하자, 동남아 스님들은 크게 관심을 보였습니다.

공양시간 전까지는 강당에 둘러앉아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습니다. 한국 사찰의 운영방식과 한국에서 스님이 되는 과정과 현황 등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점심공양을 한 후 운문사로 이동하였습니다.

운문사에 도착한 후 스님은 “이곳은 현재 비구니 사찰입니다. 많은 건물들이 보이시죠? 비구니가 되는 대학교가 이 안에 있습니다. 학생 스님이 약 150명 정도 있고, 상주하는 스님이 50명 정도 됩니다. 예전에는 농사를 지어서 자급자족을 했습니다.”라고 소개하고 동남아 스님들을 대웅전으로 안내했습니다.

대웅전에 들어가 운문사 주지 스님으로부터 환영 인사를 듣고 운문사 경내 곳곳을 둘러보았습니다. 비구니 스님들의 성품 그대로 곳곳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습니다.

주지 스님은 INEB 동남아 승가방문단 일행을 차를 마실 수 있는 강당으로 안내해 주었습니다. 강당 안으로 들어가니 앉는 자리마다 차가 한 잔씩 예쁘게 놓여져 있었습니다.

비구니 스님들은 운문사를 방문해준 스님에게 “정말 귀중한 시간을 내어 오셨다”고 하면서 “저희들에게 먼저 좋은 법문을 설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질문을 해야 답하는 사람이라며 공부할 때 망설이지 말고 물어야 공부라며 웃으셨습니다. 잠깐 침묵이 흐르다 질문이 이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큰 방에서 대중과 함께 지내는 것이 힘들 때가 있습니다. 수행자이면서도 인간관계로 인해 힘이 들 때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좋을지 궁금합니다. 교리를 통해 배우는 내용을 실생활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매일 24시간 같은 방에서 함께 지내는 동안 부딪히는 현실적인 갈등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요?”

“이곳에서 대중 생활을 못한다면 속세에 돌아가도 결혼생활을 못합니다. (대중 웃음) 제가 평소 즉문즉설 대화에서도 종종 이야기를 하지만 연애와 결혼은 다른 문제입니다. 연애는 좋은 감정이 있어야 이루어지지만, 결혼은 함께 사는 문제입니다. 즉, 별거하는 상태에서 가끔 만나는 관계가 연애라면, 동거하면서 일상적으로 만나는 관계가 결혼입니다. 그래서 결혼생활에서 나타나는 갈등은 거의 대부분 동거로 인한 갈등이에요. 그 중 생활 태도가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두 사람이 룸메이트로 같이 자취를 한다고 생각해봅시다. 한 사람은 깔끔한 것을 좋아하는데 다른 사람은 어지르는 성격이면 둘 사이에는 갈등이 있기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편인데 다른 사람은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면 그 생활 리듬이 갈등의 요인이 될 수 있어요.

이렇듯 결혼생활의 핵심은 동거생활이고, 갈등의 주된 요인도 동거로 인한 부분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어떤 생활 습관을 지녔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그 다음으로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이 성격이에요. 무슨 이야기만 하면 화를 벌컥 낸다거나,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말을 아예 안 하거나, 밖으로 나가버리거나 꽁하게 지내면 갈등이 생기기 쉽겠죠.

이렇게 같이 지낼 때는 생활 습관과 성격이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대중 생활도 마찬가지예요. 이건 한 사람과 함께 지내던, 두 사람과 함께 지내던, 한 방에 스무 명이 함께 지내던 차이가 없습니다. 핵심은 동거로 인한 갈등이에요. 함께 지내는 와중에 생활 습관의 차이, 성격의 차이로 인해 서로 부딪히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의 성격은 동일합니다.

동거 생활을 하려면 서로 생활 습관과 성격이 다르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다름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수행자들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모두 다르기 때문에 대중 생활에서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너무 당연한 현상입니다. 가끔 그런 모습을 보고 신도들 중에는 어떻게 스님들이 싸우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런 사람들에게 저는 ‘좋은 감정으로 만나서 한 이불 덮고 자는 부부도 싸우는데, 좋은 감정으로 만난 것도 아니고 그저 스님이 되어서 만난 관계에서 어떻게 안 싸울 수가 있겠느냐’고 말합니다. (대중 웃음)

동거에서 생기는 갈등이 얼마나 해결하기 어려운가하면 서로 좋아해서 결혼하고 아이까지 가진 부부도 그 갈등으로 인해 나중에는 더 이상 같이 못 살겠다는 말까지 할 정도니까요.

그러니 질문자도 우선 좋아해서 만난 사람들도 그렇게 동거의 갈등을 겪을 정도니까 좋아해서 만난 것도 아닌 사람들과의 대중 생활에서의 갈등은 당연한 거라고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수행이라는 것은 당연히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는 현재에서 갈등이 없는 미래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참선을 하거나 경전을 읽는 것이 수행이 아니라, 이렇게 갈등이 생기는 상황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수행입니다. 그리고 참선이나 경전이 가르치는 내용도 바로 이 점입니다.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우선 상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계율이나 규칙이 있으면 나는 계율과 규칙을 지키려고 노력을 하지만, 다른 사람이 지키지 못할 때는 지금까지 살아온 습관 때문에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사실 이 두 가지가 핵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내가 규칙을 잘 지키면 지키지 않는 다른 사람을 잘 봐내지 못합니다. 착실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을 잘 봐내지 못해요. 그래서 갈등이 생깁니다. 그리고 규칙을 잘 지키지 않는 사람은 대개 규칙을 지키지 않는 다른 사람을 방치합니다. 규칙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나도 못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그걸 지키라고 하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 수행자는 우선 자기는 규칙을 지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동시에 지키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어려움을 생각하며, 지키지 않는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마음을 내야합니다. 내가 직접 해보니까 쉽지 않은 게 느껴지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쉽지 않을 거라고 이해하는 겁니다. 이렇게 이해를 하면 화나 짜증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지켜지지 않는 것에 대해서 지적해줄 필요도 있습니다. 규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내 눈에 보기 싫기 때문에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포용할 수 있지만 우리 모두 계율과 규칙을 지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공동의 목표가 있기 때문에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고 계율에 대한 원칙을 상기시켜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로 정리하면 쉽지만 실전에서 이것을 적용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현실에서는 그 모습만 보면 성질이 바로 올라옵니다. (대중 웃음)

계율이나 규칙에 대한 이해도 필요합니다. 우선 규칙은 지키려고 만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규칙을 지켰을 때 우리 모두에게 편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각자가 스스로는 규칙을 지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못 지키는 사람이 나오는 것도 당연합니다. 모두가 그걸 지킬 수 있으면 처음부터 그런 규칙을 만들지 않았을 거예요. 그러니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받아들이고, 그들을 이해하고 포용해주어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 모두 그것을 지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니까 끊임없이 함께 지키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보통 사람은 대개 남이야 어떻게 하든 나만 지키면 된다고 생각하거나 내가 지키기 때문에 너도 지키라고 강요하는 쪽으로 가는데, 이 둘은 모두 한 쪽으로 치우친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스님은 학인스님들에게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하면 좋을지에 대한 말씀을 청했습니다.

“이런 문제는 길게 봐야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감이 잡히지 짧게 보면 답이 보이지 않습니다. 제 경험을 돌이켜봐도 짧게만 보고 이런 저런 아이디어를 내고 시도한 것들은 결실을 맺지 못했어요.

세계 여러 곳을 다녀보면 물질적으로 부족한 환경에서는 불교를 전해도 물질적인 욕구를 채워달라고 비는 기복적인 방향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돼요. 물론 물질적인 부분이 해결되어도 여전히 더 많이 가지겠다는 사람들로 인해 기복적인 요인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다수의 사람들에게는 기복의 요인이 많이 사라지게 됩니다. 요즘 우리나라에도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어요. 종교를 가진 사람들의 비율이 절반이 채 안 된다고 하잖아요. 미국이나 유럽은 이미 오래 전에 이런 현상을 보였습니다.

반면 종교가 기독교인 사람들도 법문을 듣는 자리에 많이 참석하는 이유는 복을 비는데는 종교가 필요하지만 실생활에서 겪는 부부간의 문제 등은 신앙으로는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실생활에서 겪는 문제들은 교회나 절에 가서 아무리 기도를 해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법문을 듣고 마음을 달리 내어 문제가 해결되는 경험을 하게 되면서 종교와는 관계없이 법문을 계속 듣게 되는 거예요.

그런 것처럼 사람에게 생겨나는 번뇌는 앞으로 경제가 아무리 좋아지고 문명이 발달된다고 해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어쩌면 문명이 발달할수록 번뇌가 더 복잡해질지도 몰라요. 저는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불교의 종교적인 부분이 아니라 붓다가 당시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한 내용들이 오히려 현대 사회에 필요한 가르침입니다.

싯다르타 태자는 먹고 사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번뇌를 벗어내지 못해서 인생이 무엇인지를 고뇌한 사람이에요. 당시 인도에서 고타마 싯다르타와 같은 고민을 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지만 오늘날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아마 전인구의 반 정도는 당시 싯다르타 태자와 비슷한 고뇌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을 거예요. 그러니 싯다르타 태자가 깨달은 바가 우리 모두에게 보편화될 소지가 아주 많습니다. 이는 경제적으로 발달한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양에서 불교가 학문으로 자리를 잡으면 각 대학마다 불교학과가 생겨날 거예요. 그렇게 되면 교수 수요도 폭발적으로 늘어날 거예요. 지금도 불교를 전공으로 한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대부분 종교학이나 철학 전공자 혹은 아시아 학문 전공자들이 불교를 가르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학문적인 부분과 더불어 고뇌하는 사람들을 위한 전법의 수요도 급격히 늘어날 거예요. 중국의 경우 지금 한창 경제적인 발전을 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현재는 기복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만 지나고 경제적인 발전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면 기복으로만 해결되지 않는 측면이 부각되기 시작할 겁니다. 이는 인도도 마찬가지예요. 인도에서는 이미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센터들이 많이 생겨나고 추세입니다.

이 모두가 고타마 싯다르타가 삶에 문제의식을 갖고 깨달음을 얻고 난 후 사람들을 교화한 내용이 인간이 고뇌에서 벗어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미래의 불교가 가진 가장 큰 비전이 아닐까 싶어요. 그런데 이것을 알고 전파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이 직접 경험하고 체험해야 합니다. 도저히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 그것마저도 내 마음의 문제라는 것을 자각해야 어떤 경계에서도 자유로운 경지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을 조금이나마 스스로 경험해야 다른 사람들에게 안내할 수 있지, 교리만 가지고는 이 길을 안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점에서 여러분이 이곳에서 4년 동안 겪는 어려움을 그저 참고 견디기만 하면 세속적인 생활과 별 차이가 없을 거예요. 참고 견디거나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상황을 수용하고, 내가 여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경험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상대에 대한 미움이나 비난도 아닌, 그렇다고 전통을 그저 따라가는 것만도 아닌, 어떤 상황도 수행으로 받아들이되 미움과 분노 없이 개선할 수 있는 방향을 잡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그런 경험을 직접 해야 훗날 전법을 할 때 그 전법에 힘이 실리게 됩니다.

과거에 기복이 중요할 때에는 승복만 입고도 위의로 무언가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저 염불하고 복만 빌어줘도 사람들이 좋아하곤 했어요. 그런데 요즘 사람들이 겪는 고뇌는 그렇게 도움을 줄 수가 없습니다. 부부간에 겪는 문제, 아이들로 인해서 겪는 고민들 앞에서 목탁 치고 염불하면 좋아질 거라고 말할 순 없잖아요. 그저 기도하면 바람피우는 남편이 돌아올 거라고 말할 순 없잖아요.

이제 중요한 것은 권위나 이론이 아니라 현실적인 문제 앞에서의 해결 능력입니다. 이것이 사회 전체의 흐름이자 추세예요. 대학 학벌이 중요한 게 아니라 현실에서 마주하는 문제 앞에서의 구체적인 해결 능력과 창의력입니다.

여러분의 경우 4년 후 승가대학을 졸업한 후, 만약 머리를 기르고 속세로 돌아간다면 다른 사람들이 일반대학 4년 다닌 것보다 승가대학을 다닌 것이 훨씬 낫다는 생각을 할까 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일반대학은 졸업을 하면 졸업장도 남고 전공도 남는데, 승가대학은 졸업하고 승복을 벗어던지는 순간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면 승가대학의 교육 방식이 세속에 있는 대학의 교육 방식보다 뒤떨어지고 있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이것은 현재의 교육 형식을 바꾸거나 제도를 근대적으로 바꾼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스스로 경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경험을 하는 것이 미래의 최고의 자산입니다. 앞으로 4년 동안 그걸 해내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자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것을 할 수 있으면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바뀌든, 어디에서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살 수 있고, 인도에서도 살 수 있고, 농사를 지으면서도 살 수 있습니다.

앞으로 미래에 도래할 사회는 어떠한 모습일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어떠한 사회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기본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 미래를 위한 최고의 준비입니다.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무언가를 대비한다는 것은 불가능해요. 그러니 어떤 환경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가장 좋은 준비예요.

그러니 앞으로 수행이 인류사회의 최대 요구로 다가올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수행이라는 것은 앉아서 참선하거나 염불을 하는 형식적인 부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경계로부터 진정한 자유를 유지하는 그리고 그 경지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님의 답변 후에 경계에 끄달리는 것과 내려놓는 것의 차이에 대해 문답이 더 오갔습니다. 차를 마시며 들려준 소중한 가르침에 비구니 스님들은 무척 기뻐했습니다. 이어서 동남아 스님들이 운문사 비구니 스님들에게 질문을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동남아에서 온 스님들은 한국의 비구니 제도에 대해 높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미얀마와 태국에 없는 비구니 제도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을 쏟아 내었습니다. 비구니 스님이 계를 받을 때는 비구니 스님으로부터 받는지 비구 스님으로부터 받는지, 비구니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교육과정을 거치게 되는지 등 다양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대화 중에 스님은 테라밧다는 원칙적이니 부처님 당시 여성이 출가한 바이샬리에 비구니 절을 지어서 계를 받아 비구니가 될 수 있도록 하는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미얀마 스님에게도 “남방 불교에서도 비구니 제도가 인정될 수 있는 방법을 한 번 연구해 보시라”고 제안하자 비구니가 없는 곳에서 어떻게 최초의 비구니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해 미얀마 스님은 “성전환(트렌스젠더)을 해서 비구스님이 비구니가 되면 된다” 라고 답해 운문사 비구니 스님들은 모두 당황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스님은 처음에 성전환 수술을 하면 된다는 뜻으로 이해하셔서 ‘나라도 먼저 하든지 해야겠다.’고 하시자 대중들은 박수를 치며 웃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다시 확인해 보니 “남자가 비구계를 이미 받았는데 자연적으로 성전환이 되어 여자가 되어 비구니가 되는 것이다” 라고 해서 다들 더 크게 놀랐습니다. 그렇게 될 수 있는 확률은 너무나 낮기 때문입니다. 동남아에서는 여성은 출가할 수 없다는 관념이 아직 얼마나 강하게 남아 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비구니 스님들은 운문사를 방문해준 스님과 INEB 동남아 승가방문단 일행에게 몇 가지 기념품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대화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나한전에서 스님은 ‘십대 제자가 모셔져 있는 나한전만 보고 오백 명의 아라한이 모셔져 있는 건 말로 설명만 했는데, 이 곳에 오백나한전이 있으니 보라’고 하시며 ‘과거 부처님의 제자였는지 확인하려면 이곳에 자신의 얼굴이 있는지 살펴보라’고 하시며 웃으셨습니다.

스님들은 서로의 얼굴을 찾아주며 재미있어 하였습니다. 가사의 색깔도 다 다르고, 사용하는 말도 다 다르지만 이제 서로 농담도 주고받습니다. 미얀마에서 오신 스님은 오늘 너무 많은 것을 배웠다며 뇌 용량이 다 차서 유에스비가 필요하다며 방전된 소리를 내며 웃으셨습니다.

운문사 주지스님은 주차장까지 배웅을 하시며 스님과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스님의 가사가 여기저기 다 떨어진 것을 보며 걱정하시자 스님은 바람이 들어와서 시원해서 좋다고 하시며, 동남아 스님들은 계속 가사를 수하고 있기 때문에 스님도 가사를 계속 수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차담이 길어져서 출발하기로 예정된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습니다. 급하게 문경정토수련원으로 출발했습니다. 가는 길에 휴게소에 들러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동남아 스님들은 오후에 불식을 하기 때문에 저녁식사 대신 차를 마셨습니다. 스님은 구글 지도를 꺼내 스님들이 어디 사는지 함께 보았습니다. 아홉시가 넘어 도착하자 스님은 동남아 스님들이 피곤하실 것을 고려하여, 일찍 쉴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내일은 청년들과 문경새재 산책과 즉문즉설이 있습니다. 내일 또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

함께 만든 사람들
조태준, 콘사국 SNS팀

전체댓글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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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선주

자기로부터의 자유
경계로부터 진정한 자유 그 경지로 나아감
잘 새기고 오늘 하루도 여여히 시작합니다

2018-06-18 09:18:57

이기사

이 글을 읽기까지 너무나 많은 직간접 인연들을 생각하여 봅니다.
모든 인연들, 고맙고 고맙습니다_()_

2018-06-12 22:56:58

임무진

종교가 아닌 진리로서의 불교를 가르쳐주신 스님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2018-06-12 08:5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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