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8.10.25. 평화재단 원로 나들이 1일째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은 지금 이 버스 안입니다.”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평화재단 원로님들을 모시고 경주로 1박 2일 간 나들이를 다녀왔습니다. 1997년 굶어 죽어가는 북한 동포를 살리기 위해 스님은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만나 도움을 호소했는데요. 그 과정에서 다양한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시작된 인연이 20여 년이 흘렀습니다. 이번 나들이는 그동안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함께해 온 원로님들에 대한 감사함의 표시로 마련되었습니다.

매달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종교인 모임을 함께 해오고 있는 개신교 목사님, 천주교 신부님, 천도교 교령님, 원불교 교무님, 성공회 주교님과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애써온 교수님, 작가님, 전직 장관, 차관을 지낸 분들이 대부분 부부동반으로 함께 하였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평화재단 자원활동가들은 원로님들이 아침 식사를 하고 가실 수 있도록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스님과 평화재단 원로님들은 매달 모임을 갖는 평화재단 세미나실에서 함께 식사를 한 후 경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스님은 마이크를 잡고 1박 2일간의 일정을 간단히 설명했습니다.

“동북아 역사기행 가듯이 일정을 빡빡하게 안 짰습니다.(모두 웃음) 다리 아프면 쉬고, 중간에 놀고,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저는 82세이신 김명혁 목사님의 건강을 생각해서 천천히 둘러보도록 계획을 잡았는데, 오늘 목사님께 ‘지팡이 드릴까요?’ 했더니 ‘내가 제일 먼저 뛰어간다!’고 하셨어요. (모두 웃음)

오늘은 산책도 하고, 맛있는 음식도 드시고, 오고 가면서 함께 얘기도 나누고 편안한 하루가 되시면 좋겠습니다.”

스님은 일찍부터 나오신 원로님들이 고단하실 것을 고려하여 첫 번째 휴게소까지 쉬실 수 있도록 했습니다. 첫 번째 휴게소를 지나고 마이크를 잡고 버스 안에서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스님은 재치 있는 사회자가 되어 가장 먼저 찬송가를 불러 분위기를 즐겁게 만들었습니다. 이후 한 사람씩 마이크를 넘겨가며 소감도 나누고, 노래도 부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박남수 천도교 전 교령님은 마이크를 잡고 이렇게 기쁜 소감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차창 밖으로 단풍이 예쁘게 물들었어요. 무더운 여름 더위와 태풍을 다 견뎌내고 저 잎이 왜 저렇게 붉게 물들었을까요? 단풍이 드는 이유는 내년에 잎이 돋아날 수 있도록 떨어지기 위해 서라고 합니다. 자연의 이치와 사람의 이치가 다르지 않지요.

저와 스님은 종교가 다릅니다. 저와 주교님, 목사님, 교무님과 종교가 다릅니다. 또 저희 종교인이 노란 단풍이라면, 교수님, 작가님, 정부 장관님들은 붉은 단풍이라고 할 수 있겠죠.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은 종교와 문화가 다른 우리들이 모여 있는 이 버스 안이 아닌가 싶어요. 다 다른 빛깔이 어울려 아름다운 저 산처럼 말입니다.

제가 이 나이가 될 때까지 제일 행복할 때가 바로 오늘 지금입니다. 이런 시간이 아니면 어떻게 오늘 모인 이 분들을 가까이서 마음 편히 보고 친밀하게 지낼 수 있겠습니까. 잊혀지지 않을 여행이 될 것 같습니다.”

붉게 물든 단풍 속으로 버스가 달리고 있었습니다. 단풍보다 아름다운 건 평화와 통일을 위해 물들여온 스님과 원로님들의 세월이 아닌가 싶습니다.

경주 안강에 도착하여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한 뒤 5분 거리에 있는 옥산서원으로 갔습니다. 조선시대에 향교가 공립학교라면 서원은 사립학교와 같은 기관입니다. 옥산 서원은 조선시대 성리학자 회재 이언적을 기리기 위해 지은 서원으로 뒷산이 옥산이라 옥산서원이라 이름 붙였다고 합니다.

옥산서원을 둘러보고 마음을 씻는 곳이라는 세심대와 아름다운 계곡을 지나 회재 이언적의 집이었던 독락당까지 걸어가 보았습니다. 독락당에 제일 먼저 도착한 스님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합니다.

“경치 좋죠? 유교의 풍모를 느껴보려고 여기 왔습니다.”

마음이 저절로 맑아지는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가을 단풍까지 더해 한 폭의 산수화 속에 거니는 것 같았습니다.

스님과 원로님들은 이황, 이이에 버금가는 성리학자였으나 덜 알려진 이언적의 삶과 그처럼 역사 속에 잊혀진 인물들에 대해 이야기 나누며 정혜사지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스님의 설명이 계속됩니다.

“국보 40호인 정혜사지 13층 석탑은 우리나라에 둘도 없는 유일한 탑입니다. 보통 탑은 3,5,7,9층 석탑으로 조성됩니다. 13이라는 숫자는 티벳 불교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숫자인데 정혜사지 13층 석탑은 티벳 불교가 아직 전래되지 않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되었다는 것이 특이한 점입니다.”

스님의 설명을 듣던 목사님은 “13을 신성하게 여기는 것이 기독교와는 반대네!”라고 하였고, 천도교 교령님은 “천도교에서도 13을 중요시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다양한 종교인들이 모여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서로 다르고 같은 점을 이야기 나눌 수 있었습니다.

다음은 황룡사 박물관으로 이동했습니다. 먼저 3D 입체 영상으로 황룡사 창건과 소실되기까지의 역사와 과정을 생생하게 보았습니다. 영상이 끝나고 스님은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제가 고등학교를 이곳에서 다녔는데요. 그때는 이 황룡사 터에 기와 조각이 지천에 널려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예쁜 기와를 주워서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입니까? 금은보화입니까? 아닙니다. 조상의 얼입니다. 조상의 얼이 담긴 이 기와를 보관하십시오’ 하고 쌓아서 집집마다 기와 보내기 운동을 했습니다. 요새 같으면 문화재 관리법 위반일 거예요. (모두 웃음) 그리고 황룡사를 복원하겠다고 발원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손도 못 댔습니다.

이 황룡사를 짓고 70여 년이 지나서 9층 목탑을 지었는데요. 이 9층 목탑은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세운 탑이 아니라, 나라를 지키기 위해 세운 탑입니다. 그래서 황룡사는 호국 사찰이에요. 9층인 이유는 아홉 나라의 침공을 막는다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요즘 말로 평화를 위해 탑을 쌓은 거죠. 그리고 진정한 평화는 삼한의 통일이라고 보아 통일을 발원했습니다. 탑을 완공하고 30년이 지나지 않아 삼국이 통일됐습니다. 그것처럼 오늘날에도 종교를 떠나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발원하기 위해서 이 탑을 복원하는 게 필요합니다.”

그러자 한 분이 목사님께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나중에 황룡사 복원을 위해 국민 성금을 모으면 개신교에서 반대하지 않도록 책임져주십시오.” (모두 웃음)

웃음이 터지자 옆에 있던 분이 곧바로 이 말을 받습니다.

“목사님은 부정이 아니라 헌정할 분이에요.” (모두 웃음)

웃음이 넘쳐나는 가운데 영상관을 나와 9층 목탑 모형과 각종 유물을 살펴보았습니다. 박물관 2층에서는 전체 황룡사지 터도 조감해 보았습니다.

박물관을 나오는데 따끈한 황남빵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황남빵에 얽힌 어릴 적 추억을 이야기해 줍니다.

“자, 황남빵 드세요. 맛있고 따뜻합니다. 제가 어릴 때 친구들과 ‘몇 개 먹을 수 있노? 50개 먹을 수 있다!’ 하면서 내기를 할 정도로 맛나게 먹은 빵입니다.”

“참, 스님은 북한 동포 돕기를 오래 해서 배고픈 사람만 보면 그렇게 먹여요.”

마음도 금세 따끈해졌습니다. 황남빵을 먹으며 황룡사 터를 둘러보고, 스님이 출가한 분황사도 가보았습니다. 82세 목사님은 누구보다 앞서 걷고, 새로 알게 된 내용을 복습하고, 질문도 많이 하였습니다.

완전히 물든 가을 단풍 속 분황사는 아름다웠습니다. 돌을 벽돌처럼 다듬어 쌓은 모전석탑과 신라시대 우물인 삼룡변어정, 원효대사의 화쟁국사비도 둘러보았습니다. 스님이 ‘삼룡변어정’이라는 이름에 담긴 재밌는 전설을 얘기해 주었습니다.

“이 분황사 우물에는 통일신라를 지키는 용이 살고 있었다고 해요. 신라 원성왕 때, 당나라 황제의 비밀 지령을 받은 사신이 신라에 들어와 나라를 지키는 호국 용을 물고기로 변신시킨 후에 대나무통에 숨겨 잡아갔대요.

당나라 사신이 용을 잡아 떠난 그날 밤, 원성왕의 꿈에 두 여인이 왕 앞에 나타나 ‘우리는 용의 부인인데 당나라 사신이 우리 남편을 잡아가고 있으니 다시 데려다주소서’라고 아뢰었답니다. 그래서 원성왕이 귀국하던 당나라 사신을 붙잡아보니 세 마리 물고기를 가지고 있어요. 그 물고기를 여기 우물에 풀었다고 합니다. 다시 우물로 돌아온 용은 신라를 지키는 호국용으로 살게 되었다고 해요.

제가 고등학생 때 이 우물 물 좀 마셨다가 평생 코가 끼어서 이렇게 스님으로 살고 있어요. 그래서 학생들에게 가끔 우스갯소리로 ‘너희들은 절 옆에 있는 학교 다니지 마라’라고 해요.” (모두 웃음)

황룡사와 분황사를 둘러보니 여기서 청소년 시절을 보낸 것이 스님의 행보에 미친 영향을 가늠해볼 수 있었습니다.

분황사까지 살펴보고 교리 최부자 집을 향했습니다. 교리 최부자 집에서는 그 후손인 경주 최씨 최상용 교수님이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교수님의 생생한 설명을 들으며 최부자 집을 둘러보고, 원효 대사와 요석 공주의 스캔들이 일어난 아름다운 월정교를 지났습니다.

어느덧 노을이 지고 있었습니다. 이제 두북 정토수련원으로 들어갈 시간입니다. 지난번 연화회 나들이를 정성스레 준비해주었던 최말순 보살님과 법사님들이 이번에도 멋진 식사를 준비해 주었습니다. 두북 정토수련원에 도착하니 정성스러운 저녁식사가 차려져 있었습니다.

종교인 모임 때도 늘 그래 왔지만 오늘도 목사님께서 식사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죄밖에 없는 죄인들을 하나님이 버리지 않고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특별히 서로 싸우고 분쟁하는 남북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서 저희가 부족하지만 뜻을 모으고 마음을 모으고 정성을 모으며 살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너무 좋은 날씨를 주셔서, 아름다운 자연을 즐기며 교제하며 역사적인 유적지를 방문하며 우리 선배들을 생각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비록 저희는 문화가 다르고 종교가 달라서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지만, 불쌍한 우리 북한 동포들과 일본, 중국, 무슬림 사람까지 모두 끌어안고 울 수 있는 우리들이 되도록 하옵소서.

오늘 이 자리에 법륜 스님을 비롯한 종교인들, 교수님들, 정부에서 장관으로, 여러 직책으로 일한 귀한 분들이 모였습니다. 저희들이 더욱 겸손해지고 온유해져서 우리가 우리의 배경을 다 포기하고 서로 사랑하여 이 나라에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가져올 수 있는 제물들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또 법륜 스님과 정토회에 하나님 은혜와 자비와 사랑을 베풀어주십시오. 오늘 수고하신 모든 분들과 여기서 일하는 모든 분들에게 은혜와 자비와 사랑을 한없이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다 함께) “아멘.”

다 같이 아멘을 외우고 식사를 시작했습니다.

“천천히 많이 드십시오.”

스님은 목사님의 기도에 한마디 덧붙였습니다.

“목사님, 차린 음식에 비해 기도가 좀 짧은 거 같아요.” (모두 웃음)

담소를 나누며 즐겁게 식사를 어느 정도 마치고 한 분이 “신라에 왔으니 이 노래를 부르고 싶네요” 하며 신라의 달밤 노래를 멋지게 한 곡조 불렀습니다. 또 다른 분은 “저는 백제의 후손이니까 이 노래를 부를게요” 라며 꿈꾸는 백마강 노래를 답가로 불렀습니다. 이야기도 실컷 나누고 노래도 즐기다 보니 어둑한 밤이 되고 보름달이 떴습니다.

오늘의 마지막 일정인 경주 남산 소개를 듣기 위해 호텔로 이동했습니다. 호텔 세미나실에 도착한 원로 분들에게 스님은 _“피곤하시죠? 또 이런 시간을 만들어서 죄송합니다”_라고 한 후 오늘 강연을 해 줄 분을 소개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남산 돌이면 다 옥돌인가’라는 말인데요. 오늘 저녁에는 경주 남산의 문화재에 대한 설명을 듣고자 합니다. 설명해주실 분은 경주남산연구소 소장님이신데, 저와 고등학교 동창입니다. 저와 불교학생회를 함께 하면서 경주를 사랑하는 모임 활동도 함께 했었는데요. 지금은 경주에서 제일가는 남산 안내자가 되신 분입니다.”

경주남산연구소 소장님은 “불교학생회 회장이었던 스님은 넓은 세계로 나가 큰 일을 하고 있고, 불교학생회 총무였던 저는 좁은 세계에서 이렇게 평생 지내고 있다” 면서 겸손하게 자신을 소개하며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노천 박물관이라고 불리는 남산답게 곳곳에 있는 불상이며 탑이며 절터와 그에 얽힌 설화를 설명하다 보니 금세 1시간이 지났습니다. 강의 후에는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습니다. 원로분들은 남산 전체가 불상과 탑으로 가득한 것에 대해 놀라워하며 여러 질문을 하였습니다.

“방금 설명 가운데 문수보살의 현신에 대한 말씀이 있었습니다. 현신하시는 모습을 보면 꼭 남루한 행색에 죽은 생명을 짊어지고 나타납니다. 남루한 행색인 이유가 있는지요?”

문수보살의 현신에 대해서는 스님이 답하였습니다.

“부처님이 원래 거지 아닙니까.”

그러자 어떤 원로 분이 되물었습니다.

“부처님은 원래 왕자 아니에요?” (모두 웃음)

스님의 설명이 이어집니다.

“왕자로 태어났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거지 행세로 다니셨어요. 불교의 가르침에서는 모양과 형상에 집착하지 말고 본질을 꿰뚫어 보라는 것이 아주 중요해요.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보고 부자와 가난한 이를 차별하지 말라는 것이죠. 그래서 부처님은 당시 신분제도였던 카스트 제도를 부정하셨습니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의 불교는 이런 가르침과는 사뭇 달랐어요. 왕족이 출가하면 스님이 된 후에 대우가 다르고, 천민은 출가를 해도 여전히 거지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불교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수보살님이 현신하는 모습을 보면 남루한 모습에 머리를 기른 채 나타납니다. 이것은 승려와 속인이라는 상을 넘어서서 그 본질을 봐야 한다는 가르침을 반영합니다. 상에 집착하는 것은 이미 불교가 붓다의 가르침을 떠나 세속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당시 가장 존경받던 스님인 자장율사나 경흥 대사의 모습을 통해 빗대어 표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이러한 뛰어난 스승들도 순간 상에 집착하면 진실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말해줍니다. 이는 소위 관념화, 기득권화, 권력화 된 불교에 대한 강력한 비판적 의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황룡사에 터를 둘러보았지만 황룡사는 국가사찰입니다. 즉, 왕의 사찰이에요. 반면 불국사는 귀족이 지은 사찰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남산의 불상들은 몇 개만 제외하면 대부분 서민들의 민중 신앙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어요. 그리고 삼국유사를 봐도 원효대사를 비롯해서 원효대사의 스승이었던 대안 대사의 거주처는 주로 남산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남산이 상징하는 바는 불교 이전에 있었던 전통적인 신앙을 이은 민중 신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불교가 들어온 이후에 불국사, 황룡사, 석굴암 등이 만들어졌는데 이런 사찰들은 당시 지배계급의 신앙지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남루한 행색으로 현신하는 모습의 이야기는 민중 신앙이 지배 계급의 신앙을 강하게 비판하는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에서 현신한 보살이 마지막에 돌아가는 곳은 결국 남산이에요. 대개 이야기 끝에 보면 처음엔 몰라보다가 뒤늦게 깨닫고 따라갔더니 남산으로 사라졌다거나 남산에서 본 바위의 불상이 조금 전 본 현신한 불보살의 모습과 똑같았다는 식으로 묘사됩니다. 그런 점에서 경주 남산은 민중 신앙의 산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불국사에 있는 불상들은 높은 곳에 앉아 있어서 쳐다보기만 하지만, 남산에 있는 불상들은 직접 손으로 만질 수 있습니다. 당시 민중들은 남산에 가면 부처님을 만날 수 있었지만, 불국사와 황룡사에 가면 출입조차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전문가들은 남산에서 조각들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를 보겠지만, 저는 신앙적 측면에서 민간신앙의 산실이라고 보기 때문에 남산을 중요시합니다.

저는 어릴 때 남산에서 머리와 팔다리 없이 몸통만 남은 불상을 보고, 그 머리와 팔다리를 찾아서 불상을 복원시키려고 골짜기를 찾아다니기도 했었습니다. 어느 날 이런 불상의 모습이 한국 불교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머리가 없다는 것은 불교의 핵심인 깨달음과 지혜가 없다는 것을 뜻하고, 손과 발이 없다는 것은 자비행과 실천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봤어요. 즉, 불교라는 이름만 몸뚱이처럼 남아있을 뿐 불교의 핵심 사상인 머리도 없어져버리고 실천행인 손과 발도 없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찌 보면 그 불상이 몸소 한국 불교의 모습을 보여주신 거죠. 그래서 골짜기를 다니며 머리와 팔다리를 찾아서 그 불상을 복원을 할 게 아니라 불교의 가르침인 지혜를 회복하는 것이 곧 머리를 복원하는 것이고, 실천을 행하는 것이 손과 발을 복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문제의식이 정토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하는데 큰 지침이 되었어요. 머리가 곧 지혜를 상징하고 손발이 자비를 상징하는 만큼 형상화된 복원이 아닌 본질로 돌아가는 운동을 하는 데에 그 불상이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또 스님은 분황사는 지금까지 유지되는데 분황사보다 열 배도 더 큰 황룡사는 아직 복원을 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 “지을 때는 국가가 주도하여지었지만 파괴가 되었을 때는 수도가 개성이었다”라고 하면서 “너무 큰 회사는 경기가 침체되면 하루아침에 망해버리는 것과 같은 현상인데, 황룡사는 너무 크다 보니까 복원이 더 어려운 것 같다” 고 설명했습니다. 스님의 설명을 들으니 규모가 큰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닐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스님은 강연을 해 준 소장님께 선물을 전하면서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뒤늦게 박종화 목사님 부부가 도착했습니다. 한 원로 분이 “우리가 얼마나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었는지 아십니까”라고 하자 스님은 “목사님 못 모셔서 죄송합니다”라고 인사했고, 목사님은 “마음으로 먹었습니다”라고 웃음을 보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이 오늘 일정을 마치며 공지를 해주었습니다.

“오늘 하루 좋으셨어요? 산책도 하고, 산도 가고, 유적지를 많이 다녔어요. 건강 상태도 다르고 하니까 공식적으로 오늘 일정은 폐회하고, 더 이야기 나누실 분은 나누시기 바랍니다.”

원로 분들은 각자 방으로 이동하였고 스님은 두북 수련원으로 향했습니다.

목사님, 주교님, 교령님, 신부님, 전 장관님, 차관님, 교수님, 작가님, 박사님 등 각자가 처한 위치는 서로 다르지만 여러 가지 꽃들이 모여 하나의 화단을 이루듯이 다양한 종교와 문화가 모여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날이었습니다.

내일은 평화재단 원로 나들이 2일째를 맞이하여 불국사, 석굴암, 수운 최제우 선생 유적지 등을 함께 둘러볼 예정입니다.

함께 만든 사람들
김미정 이준길

전체댓글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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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나

다양한 꽃들이 풍성하고,화사한
화단을 이루듯...지금 이곳 버스안과 같이
감사합니다 꾸벅^^

2018-11-05 09:34:21

오진수

정말로 아름다운 조화입니다 큰 가르침 받아 이세상에 잘 쓰이도록 하겠습니다

2018-11-05 05:08:07

양무문

스님의 가르침은 이시대의 스승이십니다.승과속.종교의.막힘.이념의 갈등도 스님의 가르침엔 소용없습니다

2018-11-04 10: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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