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8.11.5 토론토 세계종교의회 참석 4일째 & 영어 통역 즉문즉설 강연
“행동하지 않는 정의는 공허한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어제는 화창한 하루였지만 오늘은 새벽부터 비가 또 내리고 있습니다. 예불과 천일결사 기도를 하고 일찌감치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오늘도 정성스레 준비해준 공양으로 맛있게 아침식사를 하고 7시에 숙소를 나섰습니다.

월요일 아침 출근시간과 겹치면 길이 많이 막힐 수 있어 조금 서둘렀더니 다행히 교통체증이 심하지 않아 약속된 시간보다 1시간이나 일찍 도착했습니다. 스님은 자투리 시간에도 틈틈이 한국과 전화 통화를 하며 업무를 보았습니다.

오늘 세계종교의회 전체 주제는 “정의 (Justice)”입니다. 스님은 오전 9시부터 3시간 동안 진행되는 “정의” 총회에 초청되어 “화해(Reconciliation)”를 주제로 발표할 예정입니다. “정의” 총회에서 발언하는 모든 사람들이 우선 대기실에 모여 오늘 프로그램에 대해 안내를 받았습니다.

시작 시간이 다 되어 행사장으로 올라갔습니다. 무대에서는 리허설이 한창이었습니다. 대형 스크린, 방송용 카메라 등 3시간짜리 생방송 행사를 진행하기 위해 많은 장비와 인력이 투입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행사는 3시간 동안 페이스북으로 생중계되었습니다. 스님은 맨 앞줄에 마련된 강연자 좌석에서 사회자와 다른 강연자들과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는 “이해”라는 주제로 세계 여러 나라에서 활동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영상, 공연, 강연으로 만날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시간의 주제가 “화해”이었는데요. 3명의 패널이 “정의와 법”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난 뒤 스님이 마무리 발언을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세 분 얘기 잘 들었습니다. 제가 세 분 이야기를 종합하는 것은 능력상 어려운 일이고 제 경험을 토대로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사람 사이의 갈등이나 인생살이에서 괴로운 것이 있으면 대화를 통해서 해소해주는 그런 역할을 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사회참여를 하게 된 것은 한 계기가 있었습니다.

제가 중국에 가서 북한 국경 지역을 여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안내자가 ‘북한 주민들이 많이 굶어 죽고 있다’고 얘기를 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랬더니 그가 저를 배에 태워 강으로 가서 북한 가까이에 데리고 갔습니다. 저는 거기서 굶주리는 아이들을 보았습니다. 정말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걸 몰랐습니다. 독재, 미사일, 핵, 이런 것 때문에 그곳에 2천5백만 명의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 아이들에게 빵을 주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안내자가 막았습니다. 그곳은 국경이라서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때 저는 큰 의문이 들었습니다.

‘아니, 왜 굶주리는 사람을 돕는데 국가와 국경이 장애가 되는걸까.’ (관중 박수)

저는 한국에 돌아와서 북한 인도적 지원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쳤습니다. 북한은 우리의 적인데 적을 왜 돕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우리가 준 쌀이 총알이 되어 돌아온다고 반론을 제기하기까지 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북한 주민들에 대해서 그들의 고통을 알지 못했고, 그들을 이해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지원을 행할 수 없었습니다.

그 당시 중국 쪽으로 많은 북한 난민들이 발생했습니다. 저는 그들을 도왔습니다. 이번에는 북한 정부와 중국 정부가 반대를 했습니다. 북한 정부는 그들이 조국을 배신한 자들이라는 이유로, 중국 정부는 그들이 불법체류자라는 이유로 제가 그들을 돕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그들 또한 북한 주민들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후에 저는 세계 곳곳에 있는 어려운 곳을 가봤는데 모든 곳에는 다 적대 관계가 있었습니다. 이 적대 관계가 해소되지 않는 한 인도적 지원도 인권 개선도 평화도 오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적대관계 해소를 위한 평화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굶주리는 아이들에게는 빵이 정의였습니다.
병든 사람에게는 약이 정의였습니다.
난민들에게는 피난처가 정의였습니다.
차별받는 사람들에게는 차별 철폐가 정의였습니다.

이런 고통은 먼 미래에 해결될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해결되어야 할 문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동하지 않는 정의는 공허한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화해가 없는 평화는 위선이며, 이해가 없는 사랑은 폭력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 얘기를 할 수 있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 세계종교의회 발표 영상 보기 (6분)

▼ 정의 총회 전체 영상 보기 (180분)

https://www.facebook.com/parliamentofreligions/videos/2141207965931594

스님에게 주어진 시간은 통역을 포함하여 5분이었습니다. 스님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길게 풀어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지만 국경 변에서 굶주리는 북한 어린이를 마주한 스님의 경험을 바탕으로 짧지만 여운이 길게 남는 발표를 했습니다. 스님이 마무리 발언을 마치자 큰 박수가 쏟아졌고 기립박수를 보내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한 예술가가 행사를 시작할 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행사 마무리 즈음에 작품을 거의 완성해 왔는데요. 오늘 발표한 모든 분들이 나와 그림에 꽃을 달아주기를 제안했습니다. 이 사회를 좀 더 정의로운 곳으로 만드는 것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니 함께 하자는 의미라고 설명했습니다. 청중들은 큰 박수로 호응했습니다. 스님도 다른 발표자들과 함께 흑백으로 그려진 어두운 그림에 색깔이 입혀진 꽃을 달았습니다.

오늘 오전 행사는 어제와 그제 참석했던 메인 행사들보다 내용이 더 짜임새가 있고, 일방적인 강연 위주보다는 다양한 영상과 강연자들 간의 토론과 청중들 간의 토론을 넣어 완성도가 높았습니다. 스님도 제이슨 님의 통역을 통해 모든 발표와 공연을 경청했습니다.

아마존 강에서 오신 밴키 피얀코(Benki Piyanko) 추장님은 반주 없이 노래를 하는 공연을 보여주었는데 왠지 한국의 정서가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추장님이 “브라질과 페루의 국경 변에 교육센터를 짓고 있다”라고 하니 스님은 “어떻게든 스님도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할 테니 연락하라”라고 하면서 많은 격려를 하였습니다. 추장님은 스님과 만난 것을 기뻐하며 함께 사진을 찍었습니다. 스님께 이렇게 찍자고 하면서 스님과 포옹을 했습니다.

오전 행사 중에 즉석에서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오전 행사를 마치고 인터뷰 장소로 이동해 미국 북서부 지역 불교 언론매체 <노스웨스트 달마 뉴스>의 편집장 스티브 윌헬름 님과 약 30분 간 스님의 활동에 대하여 대화를 나눴습니다.

북쪽관에서 남쪽관으로 이동하는 중, 그리고 인터뷰 장소인 박람회장에 오니 많은 분들이 스님에게 와서 오늘 오전 스님의 말씀이 아주 인상적이었다고 하며 인사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인터뷰를 마친 뒤 도시락으로 점심공양을 했습니다. 외국인 즉문즉설 강연을 하기 전에 2시간 정도 시간이 남았는데 스님은 짬을 내어 다른 세션에 들어갔습니다.

편견과 고정관념을 가지는 것은 인간의 특성상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뇌과학을 통해 “우리” 와 “그들”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편견과 고정관념을 극복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우리의 많은 행동은 의식보다는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다, 화가 나는 것은 자연스럽고 자동으로 일어나는 현상이지만 알아차림을 통해 변화를 경험할 수 있다, 등 스님의 법문을 통해 많이 들어왔던 내용과 연관되는 것도 많았습니다.

이제 영어 즉문즉설 강연 시간이 되었습니다. 우리 강연 전에 다른 세션이 이루어지고 있어 준비시간이 촉박하였지만 스님은 정시에 앞으로 나가 인사하면서 즉문즉설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오늘은 여러분과 대화하는 시간입니다. 주제는 어떤 주제이든 관계없습니다. 다만 지식적인 것은 구글에 찾으면 있으니까 굳이 이곳에서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여러 가지 견해에 대해서 잘 분간이 안 된다던지 주로 마음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다면 질문해도 좋습니다. 종교나 과학에 대해서도 괜찮고요. 사회활동에 대해서도 괜찮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에 관계되는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좋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에 있어서 정답은 없습니다. 우리는 대화를 하려고 합니다. 시작하겠습니다. “

오늘 강연에는 60여 명 이상이 참석했고 총 15명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질문내용]

Q1: I have a friend, and he is quite depressed. He is holding on to a lot of resentment and anger. Is there a way to help or convince someone let go of these things?
(친구가 있는데 우울증에 빠져 있습니다. 원망을 많이 하고 화도 많이 냅니다. 원망과 화를 내려놓도록 친구를 설득하거나 도울 방법이 있나요?)

Q2: I am a Ph.D. student, and I study Buddhism and film. I am very interested in how Buddhist ideas and the Dharma are communicated in movies. I wonder if you watch movies. Do you have a favorite movie? Are there other ways that are very effective, beautiful, profound representations of the Buddha Dharma?
(불교와 영화를 전공하고 있는 박사과정 학생입니다. 불교사상과 불법이 영화를 통해 어떻게 전달이 되는지에 관해 관심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스님께서는 영화를 보시나요? 좋아하는 영화가 있으신가요? 부처님 법을 매우 효과적이고, 아름답고, 깊이 있게 표현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다른 방법들이 있을까요?)

Q3: I am a doctor and practice medicine. I am always trying to find the connection between the welfare of the patients and the Dharma. I think that the Dharma has a role in keeping my patients healthier and live longer. Do you have anything to offer in that respect?
(저는 의사입니다. 저는 항상 환자들의 건강과 불법의 연관성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는 불법이 제 환자들이 편안하고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이다. 이에 대해 스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알고 싶습니다.)

Q4: 본문 아래에서 읽어보세요.

Q5: According to the Buddhist philosophy, when people are suffering from terminal illness, should medical practice help them die?
(불교사상에서는 사람들이 불치병을 앓고 있는 경우 안락사를 해도 된다고 하나요?)

Q6: Today, you spoke about the North Korean children who were starving and because of politics they couldn’t be fed. You said that justice can be defined as food for the hungry and shelter for people who don’t have home. I wonder if you could speak some more about the ways that you think Dharma may be helpful in bringing about reconciliation. I am speaking specifically about the division of North and South Korea, about the politics there that prevents much good things from happening.
(오늘 다른 시간에 스님께서 정치 때문에 굶어 죽는 북한 아이들에게 음식을 줄 수 없다고 하셨고 배고픈 이에게는 음식이 정의이고 집이 없는 이들에게는 거주할 곳이 정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법이 갈등하는 정치세력 간에 화해를 도모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을 좀 해주시기 바랍니다. 구체적으로 남북 간의 분단 문제 그리고 올바른 일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정치적 갈등을 해결할 방법에 대해 말씀 부탁합니다.)

Q7: 본문 아래에서 읽어보세요.

Q8: Recently there have been a lot of scandals with religious leaders, in the Catholic Church, in some Tibetan lineages, in Buddhism, even in Korea. So how should regular everyday religious people respond to these kinds of scandals?
(최근에 천주교, 티베트 불교, 그리고 한국 불교 등의 종교 지도자 관련 스캔들이 많이 발생했습니다. 일반 종교인들은 이런 스캔들에 대해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하나요?)

Q9: My friend here asked how he can help or provide advice to his friend who is resentful and angry. When one’s own son has a problem, should not the parent have a greater obligation to help him and give him advice?
(이 친구가 조금 전에 원망과 분노에 찬 친구를 위해 어떤 도움이나 조언을 줄 수 있을지 물어봤는데요, 아들이 문제가 있을 때는 부모가 그에게 조언을 하고 도움을 주어야 할 의무가 있지 않을까요?)

Q10: Can you describe how you experience meditation?
(스님께서 명상을 할 때 어떤 느낌이 드는지 말씀해주세요.)

Q11: Oftentimes, people in our lives can do things that are hurtful to us or other people. And sometime, they just keep doing it and are not willing to change. How do you forgive people even when they don’t change? How do you find inner peace despite the actions of others? Let’s say my father did something that hurt my mother and it hurt me. How do I forgive my father?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까운 사람들이 우리나 다른 이들에게 상처 주는 행동을 할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상처 받는다는 것을 알더라도 그들은 그 행동을 계속합니다. 별로 바뀔 의향이 없는 것 같아요. 그들이 바뀌지 않더라도 용서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다른 이들의 행동과 상관없이 마음이 편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예를 들어 아버지가 엄마와 저에게 상처가 되는 행동을 했는데 어떻게 하면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을까요?)

Q12: You have been working tirelessly for many years to alleviate the suffering in your country, how do you deal with, or you never experience, frustration of feeling that the suffering is far greater than what you can resolve? What is your motivation to alleviate suffering? How do you differentiate that with the attachment that you see in many social activists?
(스님께서는 한국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쉼 없이 활동을 하고 계신데 세상의 고통이 너무 커서 해결할 수 없다고 느껴서 좌절할 때 어떻게 하시나요? 아니면 그런 적이 없으신가요? 스님께서 세상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활동할 수 있도록 동기 부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런 동기부여와 많은 사회활동가들이 보이는 집착과 어떤 차이점이 있습니까?)

Q13: I was wondering what advice you might have for mothers. Sometimes mothers feeling guilty no matter what decisions they make for their children. In my case I have a two-an-a-half-year-old, and I have to leave her to come to a conference like today, I feel guilty. What is the Dharma for mothers? Where do you find a peaceful place between taking care of a child and not being able to be with them every single moment. Is it ok to sometimes to go back and forth between feeling peaceful and guilty?
(엄마들을 위해 어떤 조언을 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엄마들은 아이들을 위해 어떤 결정을 하든 간에 죄책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 경우에는 두 살 반짜리 아이가 있는데 오늘처럼 아이를 집에 두고 이 행사에 참석하러 와야 할 때 죄책감을 느낍니다. 엄마들에게 해주실 법문이 있나요? 아이를 돌보는 것과 아이와 항상 함께 있지 못하는 것 사이에서 어떻게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을까요? 편안함과 죄책감 사이에 왔다 갔다 해도 괜찮은가요?)

Q14: I am wondering what training is involved in a monastic community to take the 10,000-day practice, and how does that prepare you to change society?
(수행공동체에서 만일결사에 참여하기 위해 어떤 훈련을 하는지 궁금합니다. 사회변화를 가져오는 일에 만일결사가 수행자에게 어떤 준비를 시켜주는지 알고 싶습니다.)

Q15: My question is what would the Dharma say about my belief that putting my intention out there can bring you the things you need to be of service in the world. I feel guilty about having material goods that bring me some joy. I feel like I am straddling a fence between the Buddhist principles that I admire so much, and yet I do live in this world and I am able to get myself things.
(마음속에 어떤 의도가 생기면 세상에 봉사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얻을 수 있다고 믿고 있는데 이것을 불법으로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저는 저에게 기쁨을 가져다주는 물질을 누리는 것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어쩌면 저는 제가 매우 존경하는 불교 원칙과 세속에서 원하는 물질을 갖는 것 사이 울타리에 걸터앉아 있는 느낌입니다.)

이 중에서 먼저 옳은 일을 하는데 극도로 피곤하고(Burn out) 지친다는 질문자와 스님의 대화를 소개합니다.

“I am involved in social activism and trying to help people who are suffering, but sometime, I just can’t help but get overwhelmed, feel burned out, and feel like I am unable to make a change and do anything that actually helps people. What advice do you have to stop oneself from getting that way? How do I keep myself from being bogged down and fall into suffering from of all the negativity that is happening in the world?”
(고통에 빠진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 사회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끔 너무 힘들어서 주체를 못 하겠고, 번 아웃된 느낌이고, 변화를 가져오거나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전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어떻게 하면 그런 상태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지 조언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세상에 일어나고 있는 부정적인 것들로 인해 수렁에 빠지거나 괴로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좋은 일을 하시는데 좋은 일을 너무 욕심내서 하시는 것 같습니다. (관중 웃음) 욕심을 내서 하기 때문에 지금 이런 번뇌가 일어납니다. 아무리 좋은 일도 욕심을 내서 하면 괴롭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면 됩니다. 나쁜 일은 멈춰야 합니다. 그러나 좋은 일은 선택사항입니다. 그것은 의무가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면 됩니다. 제가 볼 때 질문자가 조금 욕심내는 것처럼 보입니다. 욕심을 좀 내려놓으시죠.”

“I never thought about it that way. Thanks.”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네요. 감사합니다.)

이 분은 욕심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에 조금은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습니다.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스님과 질문자 사이에 대화가 이어지자 많은 분들이 손을 들고 질문하고자 했습니다. 질문자 중에는 의사도 있었습니다.

“I am a doctor and practice medicine. I am always trying to find the connection between the welfare of the patients and the Dharma. I think that the Dharma has a role in keeping my patients healthier and live longer. Do you have anything to offer in that respect?”
(저는 의사입니다. 저는 항상 환자들의 건강과 불법의 연관성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는 불법이 제 환자들이 편안하고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 스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알고 싶습니다.)

“네. 부분적이지만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왜 사람이 오래 살아야 합니까?”

“Because nobody wants to die. I have patients in their nineties and over one hundred, but they want to keep on living for a long time.”
(왜냐하면 아무도 죽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제 환자 중에 90세, 100세를 넘은 분들도 오래 살고 싶어 합니다.)

“오래 살고 싶은 것은 사람의 마음이지만 오래 살고 싶다고 오래 살도록 하는 것은 불교와 관계가 없습니다. 돈을 많이 벌고 싶다고 불교가 돈을 많이 벌게 해주지 않습니다. 지위가 높고 싶다고 지위를 높여주는 것이 불교가 아니듯이 오래 살고 싶다고 오래 사는 것은 담마와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So, do you mean that people’s lifespans are fixed?”
(그렇다면 사람의 수명이 정해져 있다는 말씀입니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것이 불교이지 오래 사는 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아픈 것보다는 건강한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아파도 두렵지 않고 괴롭지 않은 것이 불교입니다. 다치지 않으면 좋지만 다치더라도 괴롭지 않은 것이 불교입니다. 부자가 되고 싶다, 높은 사람이 되고 싶다, 건강하고 싶다, 오래 살고 싶다는 것은 그냥 세속적인 욕망일 뿐이에요. 건강이 좋지 않을 때 건강하게 하는 것이 의사이지 않습니까? 첫째 고장이 난 것을 고치는 것은 양의가 제일 낫습니다. 그러니까 검사를 해서 어느 부분이 고장이 났을 때 고치는 것이 서양 의학의 방법입니다. 그런데 고장이 나지 않았는데도 우리 몸이 아플 때가 있습니다. 검사를 해도 아무 이상이 없습니다. 우리 몸의 여러 기능이 고장이 난 것은 아니지만 균형이 맞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침술 같은 한의학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그런데 몸의 균형도 특별히 이상이 없는데 몸이 아플 때는 명상이나 수행이 필요합니다. 우리들의 내분비 기관은 우리들의 무의식 세계의 지배를 받습니다. 심리가 위축되어 있거나 긴장되어 있으면 건강이 좋지 않습니다. 이럴 때는 무의식의 긴장을 풀어주면 건강이 금방 회복됩니다. 그럴 때는 명상이 큰 도움이 됩니다. 아프다고 무조건 명상이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건강하지 못한 상태이냐에 따라서 도움이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병원을 운영한다면 이 세 가지 전문가를 동시에 두고 건강을 체크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담마는 마음의 긴장을 풀어주는 측면에서 도움이 됩니다. 요즈음에는 스트레스 때문에 건강이 안 좋을 때가 많지 않습니까? 이런 면에서는 수행이 많은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오래 사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즈음에 연명치료 같은 것은 생명의 원칙에 맞지 않습니다. 만약에 죽음이 가까이 온다면 그것을 두려움 없이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 담마입니다. 우리는 건강하게 살 권리도 있지만 아름답게 죽을 권리도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안락사에 대한 질문도 이어졌습니다.

“In Ontario, Canada, we are allowed to have assisted death if the doctor says we have a terminal illness. I am a Buddhist. If I know I have a terminal illness, I would not want to go through suffering to the end. What is the Buddhist view on assisted death?”
(캐나다 온타리오주에서는 의사가 불치병이라고 진단을 할 경우 안락사가 법적으로 허용됩니다. 저는 불자인데 제가 불치병이 있을 경우 고통에 시달리다 죽고 싶지 않습니다. 불교에서는 안락사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갖고 있나요?)

“원칙적으로는 허용이 되지 않습니다. 불교에서 그것은 안 된다, 된다 라고 뚜렷이 말한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 당시에 그런 경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자연스럽게 마치도록 한 이야기만 있습니다.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도 반생명적이지만 죽어가는 생명을 억지로 살리는 것도 반생명적입니다. 그러나 불치병이고 회복이 불가능하고 통증이 너무 지나치게 심하고 본인이 원하고 가족들도 동의한다면 저는 스스로 생명을 마치는 것도 허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뒤이어 다른 발표가 바로 있어 더 많은 분들의 질문을 받지 못하고 서둘러 정리하고 나왔습니다. 강연에 참가하신 분들은 복도로 나와 줄을 서서 차례로 이런 자리를 마련해주어 고맙다고 인사하였습니다. 한 분은 명상에 대해 질문을 해서 선 상태로 즉문즉설을 이어가기도 했습니다. 책을 구입하여 스님에게 사인을 받아가는 분들을 보니 외국인에 대한 전법의 길이 멀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젊은 백인 남성분은 “스님은 정말 기발하고 총명하신(brilliant) 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Dharma(담마, 법)가 이렇게 명확하고(clear) 완전한(perfect) 것인지 몰랐다”라고 하면서 “담마는 정말 완벽한 단어인 것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스님의 강연을 통해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길잡이를 얻은 것 같아 아주 좋다”라고 하였습니다.

싱가포르에서 오신 여성분들은 스님의 영문 번역 책을 구입하여 사인을 받고 감사인사를 하며 “정말 이런 자리를 마련해주어서 감사하다”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사람들이 다 가고 스님 혼자 남게 되자 신발을 벗고 바닥에 엎드려 스님에게 삼배를 올렸습니다.

한 여성 분은 저희에게 와서 “딸이 헤로인 중독자인데 스님께 차마 질문은 드리지 못했지만 질문을 했다면 아마도 스님께서는 딸이 이제 성인이니 더 이상 집착하지 말라고 답변하셨을 거예요” 라면서 그렇게 해보겠다고 했습니다. 또 다른 여성분도 “스님의 답변이 모두 너무 좋았다”라고 하면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감사인사를 하니 최소인원으로 강연을 준비하고 촬영까지 하느라 힘들었지만 뿌듯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해외지부 북미 동부 임금이 지구장과 워털루 정토법회 김재명 부총무가 오늘 오전 정의 총회부터 참석해 입구에서 즉문즉설 강연 포스터를 홍보하고 강연 물품도 옮기고 강연 진행과 마무리까지 함께 해주었습니다. 이번 행사장에서 우연히 알게 된 한국 여성분도 흔쾌히 오셔서 강연 진행을 도와주셨습니다.

저녁 7시부터는 오전 정의 총회에서 발표한 분들이 모여 교류하고 오늘 서로에게서 배운 것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전 총회에서 기조 연설자들이 대화를 하는 동안 무대 한쪽에서 그림을 그리는 퍼포먼스를 한 여성 화가 분은 베트남 하노이 출신으로 미국 워싱턴 디씨에서 활동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종류의 행사에 많이 참가하는 편인데 무대 위에 불교 승려가 올라가서 이런 연설을 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라고 하면서 “스님 말씀이 아주 인상 깊었고 감사하다”라고 얘기했습니다.

발표자였던 세네갈 출신 청년은 감옥에도 갔다 오고 어려움이 많았다고 해서 스님도 30대에 감옥에 갔다 왔다고 하면서 격려를 해주었습니다. 스님은 “나무 심기 프로젝트를 하거나 필요한 일이 있으면 연락하라”라고 하면서 젊은 청년활동가를 격려해주었습니다.

사회를 본 에코문명연구소의 필립 클레이톤(Philp Clayton) 소장님이 한 달 전에 한국을 방문하여 박원순 시장님과 앞으로 협력할 계획이 있다고 해서 스님은 다음에 한국을 방문하면 연락하라고 했습니다.

또한 서로 배운 것을 얘기하는 시간에 한 백인 남성은 “스님의 북한과 중국 국경 변에서의 활동 얘기가 아주 인상적이었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미국과 멕시코 국경에서도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많은 곳에 적용되는 아주 좋은 활동 사례라서 많이 배웠다”라고 했고 특히 스님의 경험을 나눠주신 것에 대해 감사인사를 하였습니다. 스님은 준비해 간 신간 영어 번역책을 모두 선물로 드리고 왔습니다.

오늘 저녁 행사로는 저녁 8시 30분부터 10시까지 “화해”를 주제로 메인 행사가 있었습니다. 정의 세션 참석자들과의 시간을 마치고 늦은 시간이었지만 스님은 어떤 내용인지 한 번 가보자고 하며 1시간 동안 발표 내용을 들었습니다. “화해”라는 단어가 일상적인 의미가 아니라 캐나다 원주민들과 유럽에서 온 정착민들 사이에 관계를 회복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주로 캐나다 원주민 배경을 가진 분들이 나와서 공연도 하고 토론도 했습니다.

행사장을 떠나 숙소로 돌아오니 밤 10시가 넘었습니다. 아침 7시부터 13시간이 넘게 행사장에 있었습니다. 한국 캐나다 사이 14시간 시차도 있고 일정도 매우 빡빡했지만 허투루 보내는 시간 없이 자리를 지킬 때는 바위처럼 자리를 지키고, 움직여야 할 때는 바람처럼 움직이는 스님을 뵈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격려의 시간을 마치고 스님은 내일 일정을 공유한 뒤 방으로 돌아가서 업무를 더 보았습니다.

내일은 토론토 세계종교의회 5일째 날입니다. 주제는 ‘전쟁, 증오, 폭력에 맞서기’입니다. 이번 행사기간 중 매일 오전 3시간이 배정된 총회는 전체 참가자가 함께 하는 시간입니다. 원주민, 여성, 차별받는 사람들 등 소수자의 입장을 다루려는 노력이 보여 주최 측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내일 또 소식 전하겠습니다.

함께 만든 사람들
김순영, 김지현, 김길님, 유주영

전체댓글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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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광(한인구)

잘 알았습니다.
잘 알았습니다.
잘 알았습니다.

2024-02-09 19:22:23

정종석

깜짝 놀랐습니다. 말씀하신 여러 주제를 언급하기엔 외람스럽고 ~ 다만 실천하지 않는 정의는 위선이다라는 말씀이 가슴 깊이 각인됐습니다. 아울러 내 수준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헤아려 봅니다. 감사합니다.

2024-01-16 08:28:47

유지연

법륜스님의 말씀을 들으면 너무나 편안하고, 어려울 것 없는 세상살이에 안달복달 한다는 느낌이 듭니다.
땡큐평화

2023-07-03 09: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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