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9.1.10. 인도성지순례 6일째(라즈기르)
“이 곳이 바로 오백 아라한이 모여 경전을 만든 곳이에요.”

불교 최초의 사원 죽림정사가 생긴 라즈기르(왕사성), Rajgir

오늘은 부처님의 전법무대였던 라즈기르로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 봅니다. 법화경이 설해진 영축산이 있고, 부처님 당시 인도대륙의 최강국가인 마가다국의 수도로, 불교 최초의 사원인 죽림정사, 불멸 직후 제 1결집이 이루어진 칠엽굴, 나란다 대학이 있는 곳입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인도성지순례를 출발한지 6일째 되는 날입니다.

아직도 깜깜한 새벽을 뚫고 전정각산을 뒤로 한 채 분주히 라즈기르로 출발한 시각은 새벽 5시였습니다. 떠나는 버스 앞에서 한국인 활동가들과 인도인 활동가들이 배웅을 해주었습니다.

오늘 순례하는 라즈기르(Rajgir)는 왕사성이라고 우리에게 더 익숙하게 알려져 있는 곳으로 원래 이름은 라자그라하로 ‘왕의 집’이란 뜻입니다. 왕사성은 부처님 당시 북 인도에서 가장 큰 나라인 마가다국의 수도로서 당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또한 왕사성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천년의 요새였습니다.

이 곳은 부처님이 성도하시기 전에 두 분의 스승을 만나 수행한 곳이었고, 수행하시는 부처님의 청정한 모습을 보고 빔비사라 왕이 부처님께서 성도하시면 자기를 깨우쳐 달라고 부탁한 곳이기도 합니다.

제띠안, Jethian

버스에 타자마자 흔들리는 차 안에서 아침예불을 한 후 한 시간 반 쯤 달려 제띠안에 도착했습니다. 제띠안은 마가다국 빔비사라 왕이 부처님께 귀의한 곳입니다.

넓은 공터에 자리를 잡고 스님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스님은 빔비사라 왕이 부처님께 귀의하던 날 뿐만 아니라 빔비사라 왕과 부처님 사이에 있었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빔비사라 왕이 부처님의 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부처님께서는 빔비사라 왕에게 무언가를 요청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경전을 보면 늘 빔비사라 왕이 답답해서 부처님을 찾아와서 하소연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빔비사라 왕은 젊은 왕자 시절에 다섯 가지 소원이 있었다고 합니다. 첫째, 왕이 되는 것입니다. 왕자라고 모두 다 왕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빔비사라 왕의 경우 다른 왕자 100명을 죽이고 왕이 되었다고 합니다. 왕은 한 사람이지만 왕비나 후궁은 많으니까 수많은 왕자들이 있고 그 왕자들 중에 한 사람이 왕이 되는 거예요. 둘째, 자기 나라에서 붓다가 출현하는 것입니다. 셋째, 자기가 붓다를 친견하는 것입니다. 넷째, 붓다의 법을 듣고, 다섯째, 그 법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소원을 다 이루었으니 자기가 올리는 공양을 받아달라는 청을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왕궁의 초대를 거절합니다. 그러자 왕은 성 밖에 있는 대나무 숲을 수행자들이 머무는 곳으로 제안했고, 부처님께서는 이 청은 받아들이십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불교 최초의 절인 ‘죽림정사(竹林精舍)’예요. 절이라고 해서 무슨 건물을 지은 것이 아니라 수행자들이 머물 수 있는 숲을 제공받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빔비사라 왕이 이때 부처님을 처음 뵌 것은 아니었어요. 부처님께서 성도하기 전 고타마 싯다르타 태자로 수행을 하면서 스승을 모시고 공부할 때였는데, 왕사성에서 걸식을 하러 걸어가는데 싯다르타 태자의 자세가 늠름하고 여법하니까 왕이 ‘저 수행자가 누구냐’ 하고 가서 인사를 나눕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저는 북쪽 석가족 출신입니다.’
‘왕족이 출가했다는 분이 당신이군요.’

그리고는 빔비사라 왕이 고타마 싯다르타에게 ‘당신같이 훌륭한 사람이 출가사문이 되는 것은 낭비입니다. 당신의 재능을 나와 함께 사용하는 것은 어떻겠소?’ 하고 제안합니다. 당시 마가다국은 지금의 미국 같이 큰 나라였고, 카필라바스투는 싱가포르 같이 작은 도시국가였습니다. 마가다국과 같이 큰 나라를 같이 다스리자는 제안이었는데, 부처님께서는 거절하십니다.

왕은 혹시 같이 다스리자고 해서 거절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군대를 줄 테니 이웃 나라를 공격해서 자기만의 나라를 만들어서 다스리는 것을 제안합니다. 부처님은 그것 역시도 거절하십니다. 그래서 세 번째 제안으로 자기가 왕위에서 물러날 테니 자기를 대신해서 마가다국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합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대왕이시여, 어떤 이가 가래를 뱉었는데 옆 사람이 더 큰 가래를 뱉는다하여 그 가래를 주워 먹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부처님은 자기 나라의 왕위도 싫다고 버렸는데, 무엇 때문에 다른 나라의 왕위를 탐하겠으며, 또 무엇을 위해 그 이웃 나라를 침공해서 빼앗으려 하겠느냐는 이야기를 하신 거예요. 즉 왕위를 가래에 비유해서 표현하셨는데, 이건 이미 부처님의 수행에 대한 관점이 단호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때 빔비사라 왕은 ‘저 수행자는 분명 위대한 도를 이룰 것이다’ 하는 생각이 들어 ‘나중에 당신이 도를 이루면 반드시 나에게 설해 달라.’ 라고 청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7년 후에 이곳에서 현실이 되었습니다.”

다음 순례 장소는 영축산입니다. 영축산으로 가는 길에 부처님 당시 마차바퀴 자국이 돌에 선명히 남은 장소를 둘러보았습니다.

영축산, Gridhrakuta

영축산은 부처님이 오랫동안 머물렀던 곳으로 법화경, 반야심경, 열반경이 설해진 곳이고 염화시중의 미소가 행해진 뜻 깊은 곳이기도 합니다.

영축산을 오르는 길은 빔비사라 왕이 부처님을 만나러 다닌 길이라고 하여 빔비사라 왕의 길이라고 불립니다. 왕이 마차로 산 아래까지 와서는 마차에서 내려 가마로 500미터 정도 산으로 오르다가 다시 100m 정도 걸어갔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오르는 길에 구걸하는 사람들이 손을 내밀고 있었습니다.

영축산 가는 길 초입에는 부처님의 주치의인 지바카의 망고원이 있었습니다. 빔비사라 왕이 마차에서 내려 가마로 가기 시작한 곳은 데바닷타가 부처님을 헤치려고 던진 돌 파편에 부처님이 발을 다쳐 제자 아난다에게 업혀 내려와 지바카의 응급치료를 받았던 곳이기도 하고, 육방예경이 설해진 곳이기도 하다고 합니다. 육방예경은 부처님 당시 어리석은 젊은이를 깨우치기 위하여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 부부, 친구, 주인과 하인 관계에서 각각 가져야할 마음자세를 가르친 이야기라고 합니다. 스님의 인기 저서 ‘스님의 주례사’도 이 육방예경을 바탕으로 주례를 본 것이라고 합니다.

영축산 정상에는 신기하게도 여러 크고 작은 굴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 곳에는 부처님의 제자들이 수행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굴 이름도 제자들의 이름을 따서 아난다굴, 사리불굴, 목련굴, 마하가섭굴 등으로 불렸고 참배도 했습니다.

또한 산의 정상부근에는 데바닷타가 부처님을 해치기 위해 돌을 던졌다고 전해지는 곳도 있었습니다.

영축산 정상에는 독수리를 닮은 바위가 있었고 그래서 이름이 인도말로 ‘Gridhrakuta 그리드라쿠타’ 즉 독수리봉이라고 불리우는데, 한문으로는 ‘영축산’이라고 부르는 곳입니다.

영축산의 정상이 좁고 먼저 도착한 다른 팀이 기도를 하고 있어서 정토회 순례단은 모두 정상 바로 밑으로 차례대로 앉아 영축산 정상을 향하여 자리 잡았습니다.

“여기서 읽을 경전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법화경(法華經)’ 서분(序分)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열반경(涅槃經)’의 시작 부분입니다. 열반경의 시작 부분은 이렇습니다. 부처님이 이곳에 계실 때, 아자타삿투 왕이 대신을 보내서 지금 밧지국을 침공하려고 하는데 승리할 수 있겠는지를 문의하는 장면입니다. 아자타삿투 왕은 쿠데타를 일으켜서 아버지인 빔비사라 왕을 죽이고 왕이 된 사람이죠. 빔비사라 왕이 부처님의 제자다 보니까 아들인 아자타삿투는 부처님에게 굉장히 적대적이었어요. 그래서 부처님을 살해하려는 데바닷타와 공모를 해서, 아들인 자기는 아버지인 왕을 죽이고 왕이 되고, 데바닷타는 부처님을 해치고 자기가 부처님이 되려는 흉계를 꾸몄습니다.

그런데 아자타삿투는 쿠데타에 성공했지만 데바닷타는 성공을 못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아자타삿투가 부처님한테 크게 참회를 하고, 열성적으로 불법을 옹호하는 왕이 됐습니다. 그래서 뒤에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제1결집을 할 때 그 후원을 전부 아자타삿투 왕이 하게 됩니다. 그런 역사적인 배경이 있는 곳입니다.”

스님의 설명을 듣고 부처님 당시에 설한 경전을 독송했습니다. 독송 후에는 예불을 올렸습니다. 400여명이 읊는 예불은 장엄하기까지 했습니다. 여러 나라에서 온 순례객들도 400여명의 대중이 가사를 수하고 예불 올리는 모습에 발길을 멈춰서고 구경하거나, 사진을 찍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천이백대중이 함께 하였다고 하니 굉장했을 것 같습니다.

예불문에 나오는 ‘영산당시 수불부촉...’ 에서 바로 그 영산이 이곳입니다. 부처님이 2,600년 전에 설법을 하신 바로 그 자리에서 예불을 하면서 “영산당시” 라고 읊으면서 무언가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영축산을 내려오는 길에 영축산 정상이 잘 보이는 곳에서 차량별로 스님과 함께 기념사진도 찍었습니다.

빔비사라 왕의 감옥터

버스로 5분쯤 걸리는 곳인 빔비사라 왕의 감옥터로 갔습니다. 감옥터는 왕사성의 내성 맨 끝에 위치한 곳으로 감옥터만 남아 여기가 감옥이었구나 짐작하게 할 뿐이었습니다. 해가 쨍쨍해 살짝 덥기도 했습니다. 순례단은 조별로 정렬하여 앉아 스님의 설명을 듣고 경전을 독송하였습니다.

스님은 빔비사라 왕이 아들에 의해 감옥에 갇히게 된 사연과 감옥에 갇혀 굶고 있는 왕에게 음식을 몰래 전하려던 왕비 위제희 부인이 아들에게 이 사실을 들켜 골방에 갇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부처님의 위로를 청하고, 부처님은 그런 왕비를 위로하기 위해 관무량수경을 설하신 이야기 등을 재미있게 들려주었습니다.

“부처님 당시 마가다국의 왕이 빔비사라(Bimbisāra) 왕입니다. 빔비사라 왕의 부인은 위제희 부인입니다. 당시 인도 대륙에서 가장 큰 나라의 왕이니까 권위가 굉장했겠죠. 그런데 이 왕은 제띠안(Jethian, 제티안)에서 부처님께 귀의해서 왕 중에서는 부처님께 가장 먼저 귀의한 왕이에요. 부처님 성도 후 1년 안에 귀의한 사례니까 초기 신자라고 볼 수 있어요.

이 왕은 모든 걸 다 갖췄는데 아들이 없었어요. 그래서 그게 늘 고뇌였습니다. 아들을 낳기 위해서 온갖 기도를 하고 노력해도 효험을 보지 못하다가, 나이가 마흔이 넘어갔을 때 어떤 선인을 불러서 물어보니까 3년 후에 아들이 있다는 거예요. 옛날에 여자들은 나이가 마흔이 넘으면 아기 낳기가 어렵잖아요. 그래서 왜 3년이냐고 물어보니 왕자로 태어날 사람이 히말라야 산에서 수행하는 선인인데 그 수행자의 수명이 아직 3년 남았대요. 그래서 그 사람이 수명을 마치면 왕자로 태어날 거라고 했어요.

왕이 진짜인가 싶어서 사람을 보내서 그 선인에게 가서 확인을 해봤어요. 그 사람도 ‘내가 죽은 다음에 빔비사라 왕의 아들로 태어난다’ 하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걸 확인하니까 왕이 빨리 아기를 갖고 싶어서, 다시 사람을 보내서 그 선인에게 ‘빨리 죽어라’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거부를 했어요. 옛날에는 왕명을 거부하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왕명을 거역했다고 죽여 버렸어요. 죽을 때 이 선인이 ‘내 반드시 원수를 갚으리라’ 이렇게 말하고 죽었어요.

왕이 그 얘기를 듣자 불안해졌어요. 그런데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부인이 아기를 딱 갖게 됐어요. 왕은 하루는 불안하고, 하루는 아들을 갖게 돼서 기뻐하고, 하루는 불안하고, 하루는 기뻐하며 지냈어요. 이렇게 해서 아기가 태어났는데, 왕은 이 아기를 원수라고 생각하고 아기를 2층에서 밑으로 집어던졌어요. 그런데 애가 안 죽고 손가락만 하나 딱 부러진 채 살았어요. 그러자 또 생각이 바뀌어서 아기를 끔찍이 위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키운 아이가 아자타삿투(Aātaśatru)예요. 이 아들이 커서 19세 때 쿠데타를 일으켰어요. 아버지를 이 감옥에다가 가두고 권력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를 직접 칼로 죽이지는 못하니까 감옥에 가둔 채 굶겨 죽였어요. 일체 음식을 못 주게 엄명을 내린 거예요.

그 당시에는 형제를 죽이고 왕이 되는 건 다반사였고, 아버지를 죽이고 왕 되는 경우도 허다했나 봐요. 부처님이 출가할 때 빔비사라 왕이 ‘부왕을 위해서 출가했습니까?’라고 묻는 장면이 경전에 나옵니다. ‘차마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못 되니까 아버지더러 오랫동안 왕을 하시라고 아들이 출가를 한 거 아닌가’ 이런 뜻으로 질문한 거예요. 당시는 아들이 못 기다려서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되는 경우가 많았으니까요.

이렇게 되니까 위제희 부인은 엄청난 고통을 겪었습니다. 자기 남편이 왕이고, 자기 아들이 왕이 될 사람이었는데, 아들이 이런 쿠데타를 일으키니까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었던 위제희 부인이 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이 된 거예요. 여러분들은 남편이 왕이고 자기 아들이 앞으로 왕이 될 그런 복도 못 누리지만, 그 대신 둘 중 하나가 죽어야 하는 불행도 안 겪습니다. 이게 얼마나 좋은지 알아야 해요. (모두 웃음)

이렇게 딱 뒤집어지니까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여자에서 제일 불행한 여자가 됐어요. 왕권을 두고 부자가 싸우면 하나는 죽어야 하잖아요. 남편이 승리하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죽고, 아들이 승리하면 자기 남편이 죽는 곤경에 처한 겁니다. 그래서 아들 몰래 몸을 깨끗이 씻고, 몸에다가 꿀을 바른 뒤 거기다가 밀가루 반죽을 바르고서는 남편 면회를 갔어요. 왕이 엄명을 내렸다 하더라도 위제희 부인은 현왕의 어머니니까 간수가 제제를 못해요. 그렇게 가서는 몸에 발라온 꿀 반죽을 떼서 남편을 먹이고, 장신구에 포도주를 담아가서 준 거예요.

일주일이 지나고 열흘이 지나서 아자타삿투가 ‘이제 아버지가 죽었나?’ 싶어서 와보니까 안 죽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된 거냐고 물으니까 감옥지기가 말하길, 위제희 부인이 와서 먹인다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 화가 난 나머지 칼을 빼들고 어머니를 죽이려고 들었어요. 역적의 편을 들었으니 역적이라는 거죠. 그때 지바카(Jivaka, 지와카)라는 대신과 월광이라는 신하가 막아서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도 전 역사를 보면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되는 케이스는 수천, 수만 건이 있지만, 제 어미를 죽인 케이스는 하나도 없습니다. 당신이 어머니를 죽인다면 이것은 왕족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왕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서 손으로 칼을 잡고 말렸어요. 그 말은 이런 짓을 하면 왕으로 인정 못 하겠다는 뜻이죠. 왕은 그때서야 정신을 차리고 어머니를 골방에 가두었어요. 요즘 말로 하면 가택연금을 시킨 거예요.

갇힌 신세가 된 위제희 부인은 자신의 신세타령을 합니다. 아자타삿투가 데바닷타(Devadatta)와 결탁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데, 데바닷타는 부처님의 친족입니다. 부처님의 사촌동생이에요. 위제희 부인은 ‘나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저런 아들을 낳고 부처님은 어떻게 해서 저런 친족을 두게 됐느냐’ 이렇게 원망과 하소연을 하면서 이런 고통이 없는 세상을 원합니다. 다시 옛날처럼 돌아가게 해달라는 게 아니에요. 즐거움이 얼마나 큰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지를 알았기 때문에 ‘이제 고(苦)든 락(樂)이든 이런 세상은 싫다’ 라고 하면서 괴로움이 없는 즐거움, 즉 열반의 세계를 바라게 됐어요. 거기에 응답하셔서 부처님이 설하신 경전이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입니다.

그런데 경전을 읽다 보면 위제희 부인이 ‘그런 세계를 설해주십시오’ 라고 하기 전에 막 원망을 합니다. 부처님한테 그렇게 신세타령이며 원망을 하다가 갑자기 ‘이런 세상은 싫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보여 주십시오’ 하고 장면이 넘어가는데, 그 장면 전환에 아무런 설명이 없습니다. 왜 그렇게 갑작스럽게 장면 전환이 일어났을까요? 위제희 부인은 왜 이런 아들을 두게 됐는지를 생각 안 한 거예요. 빔비사라 왕은 아들을 얻기 위해서 남을 죽였잖아요. 위제희 부인도 아들을 얻기 위해서 거기에 동조를 한 거죠. 또 아들은 전생의 자기 원수를 갚기 위해서 아버지를 죽이죠. 이게 이 세상이라는 거예요. 그걸 깨닫고 ‘이런 세상은 싫습니다. 이런 고통이 없는 보여주십시오’ 이렇게 청해서 ‘관무량수경’이 설해졌습니다.

이런 고통이 없는 세상이 극락세계인데, 그렇다고 ‘관무량수경’은 염불하면 극락세계에 간다는 식의 내용은 아니에요. 앉아서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명상에 들어가 극락에 이르는 16관법이 설해져 있는 경입니다. 그래서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이라고 합니다.”

스님의 이야기를 다 듣고 위제희 부인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있는 경전을 독송하고 잠시 명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부처님의 설법이 아니었다면 위제희 부인이 얼마나 더 고통스러웠을까 헤아려 봅니다.

명상을 마치고 앉은 그 자리에서 미리 준비한 도시락을 맛있게 먹은 후 다음 장소인 죽림정사로 떠났습니다.

초기 사찰의 원형, 죽림정사 Venuvana Vihara

5분쯤 달려 죽림정사에 도착하여 버스에서 내리니 콧물이 흐르는 꼬질꼬질한 아이들이 손을 내밀며 우리를 먼저 반겼습니다.

죽림정사는 빔비사라 왕이 부처님의 법을 듣고 감명을 받아 부처님과 1,000명의 제자가 머물 곳을 보시한 곳으로 초기 사찰의 원형이 된 곳이라고 합니다.

죽림정사로 들어서자 과연 그 이름에 걸맞게 대나무 숲(죽림)이 우거져있습니다. 땅에서 하나, 하나 솟아 있는 한국 대나무 달리, 인도의 대나무는 다발로 우거져 커다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예불과 공양을 올리고 난 후 스님께서는 이 곳에서 ‘부처님의 상수 제자인 사리불 존자와 목건련 존자가 부처님께 귀의한 이야기며, 마하가섭이 부처님께 귀의한 이야기’ 등을 해주셨습니다.

“이곳이 죽림정사입니다. 빔비사라 왕은 제띠안에서 부처님을 만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빔비사라 왕이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기를 청했지만 부처님께서는 왕궁에서 공양하는 것을 승낙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우리가 지나왔던 북문 밖의 여기에 있는 자기 소유의 대나무 숲을 수행자들이 머무를 수 있도록 기증을 했습니다. 북문 밖이니까 성 밖이죠.

한국식으로 생각하면 대나무 숲에서 어떻게 정진을 하나 싶지만 그렇지 않아요. 여기는 대나무가 밀집돼서 휘어지기 때문에 느티나무 밑처럼 큰 그늘이 지고, 햇볕이 들지 않아 굉장히 그늘이 짙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마을 가까이에서 머무셨을 때는 주로 망고나무 숲 아니면 대나무 숲에서 머무셨어요. 그래서 경전에 ‘베누반 바나’ 혹은 ‘벨루 바나’라고 많이 나옵니다. 망고나무 숲은 ‘암나 바나’예요. ‘암나’는 망고를 가리키는 인도 말입니다. 부처님이 동네 어귀에 머무르실 때는 주로 암나 바나에 많이 머무셨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과 천 명의 대중이 이곳 죽림정사에서 머무르면서 때가 되면 왕사성에 들어가서 탁발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부처님의 5비구 가운데 맨 마지막에 깨달은 사람이 앗사지(Asvasit 아슈바지트)인데, 앗사지 비구가 걸식을 하면서 걸어갈 때 그 걸음걸이가 두리번거리지도 않고, 고개를 숙이지도 않고, 고개를 뻣뻣하게 들지도 않고, 딱 한 발 앞을 보면서 천천히 걷는 모습이 너무나 여법했어요. 그 모습을 사리푸트라(Śāriputra)가 봤습니다.

사리푸트라는 육사외도, 즉 당시 여섯 명의 대스승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는 산자야(Sanjaya)의 제자였고 목갈라나(Moggallāna)와 친구예요. 여기 나란다(Nālandā, 나란타) 대학이 있는 곳이 고향입니다. 그러니까 목갈라나와는 고향 동문이에요. 둘 다 브라만 출신이어서 아주 계급이 높은 사람이었고요. 산자야의 제자인 동시에 자기 제자도 각각 100명씩 거느릴 정도로 당시에 꽤 유명한 수행자였습니다. 또 부처님보다 연세가 많으십니다. 훨씬 선배 되시는 분이에요.

이런 분이 앗사지가 지나가는 모습을 보고 너무 여법해서 ‘당신은 어떤 분입니까? 어떤 가르침을 폅니까?’ 라고 물었어요. 스승으로서 존경해서 물었던 거죠. 그러자 앗사지가 ‘저는 타타가타(Tathāgata), 여래(如來)의 제자입니다’ 라고 답했어요. 붓다의 제자라는 뜻이죠. 이 분이 위대한 스승인 줄 알고 인사하려고 했는데 자기는 붓다의 제자라고 밝힌 거예요. 그래서 ‘그러면 당신의 스승은 무엇을 가르치십니까?’ 이렇게 물으니까 ‘저한테 묻지 말고 스승에게 찾아가서 물어보십시오. 이 북문 밖의 죽림정사에 계십니다’ 라고 했어요.

사리푸트라가 ‘그 스승이 가르친 말씀 중 한마디만 일러주십시오’ 라고 청하니까 앗사지가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하는 연기법(緣起法)을 일러줬습니다. 볏단을 세울 때 묶어서 아래를 벌리고 두 단이 서로 의지하도록 해서 세우잖아요. 이 볏단에 비유해서 ‘마치 볏단이 서로 의지해서 서 있듯이 이 모든 존재가 서로 연관해서 존재한다’ 하는 것을 설명했어요. 다른 건 다 있던 용어지만 연기법은 부처님이 처음 설하신 설법입니다. 그 전에는 아무도 모르던 얘기예요. 그걸 듣자 사리푸트라는 굉장한 의문이 풀렸습니다. 자기가 평소에 갖고 있던 존재에 대한 의문이 확 풀어진 거예요. 그래서 스승이 어디에 계신지를 확인하고, 찾아뵙겠다고 약속하고서는 자기의 수행처소로 돌아갔습니다.

왜 돌아갔을까요? 목갈라나와 평소에 약속하기를 ‘좋은 일이 있으면 반드시 서로 나누자’ 이렇게 약속했기 때문이에요. 밝은 얼굴로 수행처소로 돌아가니까 목갈라나가 사리푸트라의 얼굴 표정을 보더니 ‘무슨 좋은 일이 있냐?’ 하고 물었어요. ‘그렇다, 좋은 일이 있지’ 라고 하면서 자기가 들은 얘기를 해줍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우리 같이 그 대스승을 한번 찾아가보자’ 이렇게 의기투합을 했는데, 그때 ‘야, 우리만 갈 게 아니라 우리 스승님도 모시고 가자’ 이렇게 됐어요. 산자야를 생각해서 모시고 가자고 한 거죠. 스승에게 인사하면서 ‘이런 훌륭한 큰 사문이 나타났는데 스승님도 저희와 함께 그분에게 가서 법을 청해 들읍시다’ 이렇게 말씀드렸더니 산자야의 반응이 시큰둥했어요. 이 사람은 회의론자거든요. 그래서 ‘이것도 믿을 수 없고 저것도 믿을 수 없다’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스승이 가지 않겠다고 하니까 두 분이 스승을 포기하고 그냥 갔어요. 자기의 두 제자가 떠나는 모습을 보고 산자야가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는 얘기가 있어요.

그렇게 해서 두 분은 각자 자기 제자 100명씩을 데리고 부처님을 찾아뵙고,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각자 100명씩 데려왔으니까 1,000명의 비구에다가 또 200명이 더해진 셈이에요. 결국은 1,200명이 된 거예요.

이 일이 불교 교단의 교화 첫 해에 있었던 일이기 때문에 이 사람들이 교단의 최장로, 즉 선배들이에요. 그래서 ‘장로 1250인’이라고 부릅니다. 앞에 60명이 또 있었잖아요. 우리가 예불할 때 부르는 ‘천이백 제대아라한(千二百 諸大阿羅漢)’이라는 말도 여기서 생겼습니다.

사리푸트라는 지혜제일(智慧第一), 목갈라나는 신통제일(神通第一)이라고 해요. 이 두 분이 차례로 1대 제자, 2대 제자입니다. 세 번째 제자가 마하카시아파(Mahā Kāsyapa, 마하가섭)입니다. 그 분도 역시 부처님이 죽림정사에 있을 때 귀의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죽림정사에서의 부처님의 행적이 담긴 경전을 함께 독송하고 잠시 명상하는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 명상을 하며 바로 여기에서 부처님과 제자들도 명상을 했다고 생각하니 부처님이 더욱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죽림정사 연못 한 켠에서 공사가 이루어지고 있어 바로 나란다 대학으로 이동했습니다. 대중들은 더 있고 싶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도반들과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죽림정사를 나왔습니다.

나란다 대학, 박물관

나란다 대학은 불교를 가르치던 학교로 당시에 세계에서 가장 큰 대학이었는데 교사만 천오백명이였고 학생은 만 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현재 발굴된 것은 10분의 1도 안된다고 하니 당시에 얼마나 규모가 컸는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곳에서는 팀을 나누어 현지 가이드의 설명을 들어보았습니다. 스님을 오래전부터 뵈었던 인도인 가이드는 매우 반가워하며 한국말을 섞어서 재미있게 설명해주었습니다. 우리나라의 혜초 스님도 이곳에서 공부했다고 합니다. 그런 역사적이고 온갖 지혜가 넘쳐났을 곳을 무슬림이 침공해서 모두 불 태워버렸고, 도서관은 6개월이나 불탔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또 나란다 대학에서 공부하던 스님들이 대중과 멀어지면서 내부적 멸망이 먼저 있었다는 설명도 인상 깊었습니다.

제 1결집이 이루어진 칠엽굴

오늘의 마지막 순례 장소는 칠엽굴입니다. 칠엽굴로 가는 길은 ‘온천정사’라는 목욕을 하는 곳이 있습니다. 온천정사의 맨 위쪽은 높은 카스트가 목욕하지만 맨 아래쪽의 더러운 물에서는 낮은 카스트가 목욕을 한다는 스님의 설명을 들으니 21세기인 지금까지도 남아있는 인도의 카스트 제도를 다시 한 번 제대로 느끼게 됩니다.

산을 조금 오르다 뒤 돌아보니 산으로 둘러싸인 라즈기르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스님은 구 왕사성과 신 왕사성의 위치를 알려주었습니다. 생각보다 멀고 가파른 길을 한참 올라 칠엽굴에 도착하니 동굴과 함께 탁 트인 풍경이 시원합니다.

경전에는 칠엽굴에 아라한 500명이 모여 앉아서 경전을 결집했다고 하는데, 400명 순례객이 다 앉고도 자리가 좀 남습니다. 정말 오백 아라한이 앉았을 법 합니다.

칠엽굴은 부처님 사후 부처님 말씀을 최초로 결집한 제1결집이 행하진 터로 아난다와 우파리가 초안을 내고, 마하가섭 존자가 사회를 보고, 500명의 아라한이 초안을 검증하는 형식으로 결집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스님께서는 칠엽굴에서의 경전을 결집할 당시의 상황과 부처님 입멸 후에 불교 역사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세상 나이로 여든세, 성도 후 45년째 되던 해에 열반에 드십니다. 깨달음을 얻고 번뇌가 소멸된 것도 열반(니르바나, nirvana)이라고 하고, 돌아가신 것도 열반이라고 말합니다. 대신 돌아가신 것을 의미할 때는 ‘완전한 열반’이라고 하여 ‘반열반(般涅槃)’에 드셨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니 모두가 스승을 잃은 슬픔에 빠져 있었는데, 그중 비교적 최근에 출가한 젊은 수행자들 중에는 ‘이제 스승님이 돌아가셨으니 엄격한 계율을 다 지킬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 이야기를 들은 마하가섭 존자가 우려를 했다고 합니다. 사리불 존자와 목련 존자는 부처님보다 먼저 돌아가셨고, 이제 남은 수행자들이 이 집단을 잘 이끌고 가야하니 마하가섭 존자는 더 늦기 전에 부처님의 말씀을 잘 모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시간이 흐르면 그중에는 올바르지 않은 계율이나 법에 대해 ‘이건 내가 스승님께 직접 들었다’ 라고 주장하고 나오는 사람이 생길 수 있잖아요. 그래서 부처님의 말씀을 결집하기로 합니다.

스승님의 말씀을 결집한다고 하니 모두가 참여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제자가 다 참여할 수는 없으니 결집 참여에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자, 즉 부처님으로부터 아라한과를 증득했다고 인정받은 자로 결집 참여에 제한을 둡니다. 이러한 제자가 500명이었다고 합니다. 절에 가면 ‘500나한전’을 볼 수 있는데, 바로 경전 결집에 참여한 500명의 아라한을 뜻합니다.

여기에 연관된 에피소드 중 하나는 부처님을 오랫동안 모신 아난다 존자가 이 500명의 아라한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이에요. 아난다 존자는 부처님을 시봉하면서 법문을 가장 많이 들었지만 본인이 완전한 깨달음에는 이르지 못해서 참여 원칙에 의해 경전 결집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그제서야 아난다 존자가 큰 발심을 해서 결집이 시작되기 전날 밤에 깨달음을 얻어서 참여를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모두 웃음)

아마도 이 이야기는 그만큼 결집에 참여한 500명의 아라한이 엄격한 기준에 의해 선발된 것임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모두 결집에 참여하고 싶으니까 장소를 이 칠엽굴처럼 외진 곳에 정하지 않았나 싶어요.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기가 어려우니까요. 그리고 이곳에 직접 와서 보면 왜 공양을 하루에 한 번만 먹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으니 하루에 두 번 걸식을 나가기는 어려웠을 것 같아요. (모두 웃음)

500명이 경전을 결집하는데 매일 멀리까지 걸식하러 다녀오면 시간이 부족할 테니 경전을 결집하는 석 달 동안은 아자타삿투 왕이 공양을 지원했다고 합니다. 아자타삿투 왕은 젊을 때는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에 오르기도 했는데, 경전 결집에는 정성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45년 동안 하신 수많은 설법을 어떻게 결집을 했을까요? 바로 여기에 아난다가 큰 공헌을 합니다. 아난다는 설법을 한 번 들으면 잊지 않는 기억력의 소유자였다고 해요.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고 제자들이 늘어나니까 주변에서 부처님을 해치려고 하는 이교도들이 많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제자들이 부처님 곁에서 시봉을 드는 제자 한 사람을 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부처님께 제안을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처음 두 번의 제안은 모두 거절하셨다고 해요. 세 번째 제안을 했을 때 부처님께서 승락을 하셨다고 하는데, 그때가 성도 후 20년째 되는 해였다고 합니다. 세속 55세의 나이로 대중들이 원하는 바를 승락하십니다.

이제 시봉하는 제자를 선택해야 하는데, 많은 제자들이 서로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사리불 존자도 자기가 하겠다고 하고 목련 존자도 자기가 하겠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부처님보다 나이가 많은 제자가 시봉을 하는 건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았고, 대중들이 생각하기에는 아난다 존자가 가장 적합하다는 판단을 합니다. 부처님보다 나이도 20살 가까이 적고, 같은 석가족 출신으로 문화도 잘 이해하고, 또 사람이 억세지 않고 부드러웠다고 합니다. 그렇게 모든 조건에서 아난다 존자가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을 내렸다고 해요.

그래서 아난다 존자를 추천했는데, 아난다 존자가 처음에는 거절을 합니다. 그래서 두 번째 회의를 했는데 이번에도 가장 적합한 제자로 아난다 존자가 결정이 되었지만, 이번에도 아난다 존자가 거절을 합니다. 세 번째 회의가 열렸는데 이번에도 아난다 존자가 가장 적합하다는 결정이 나서, 아난다 존자는 조건부 동의를 하게 됩니다. 이때 아난다 존자가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합니다.

첫째, 부처님께서 드시는 음식을 나에게도 먹으라고 하면 안 된다. 둘째, 부처님께서 입는 옷을 나에게도 입으라고 해선 안 된다. 셋째, 부처님께서 성도 후 지난 20년 동안 하신 설법과 정황을 다시 한 번 알려주셔야 한다.

이 세 가지 조건을 대중이 수용하고, 그날 이후로 부처님께서 돌아가시는 날까지 아난나 존자가 부처님을 모시게 됩니다. 아난다 존자는 25년 동안 마치 입 안의 혀처럼 시봉을 잘했다고 해요.

아난다 존자가 제시한 세 가지 조건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부처님은 잘 알려져 계시니까 대중들이 음식도 좋은 음식을 대접하고 옷도 좋은 옷을 드립니다. 그러다보면 부처님 옆에서 시봉을 하는 아난다도 같은 음식을 대접받게 되고, 좋은 옷을 받는 일이 생기겠죠.

부처님께서는 검소한 생활을 하시고, 또 무슨 음식을 먹고 무슨 옷을 입든 거기에 아무런 집착이 없으신데, 아난다 존자는 아직 번뇌를 다한 단계가 아니기에 아무래도 부드러운 음식과 좋은 옷을 접하게 되면 수행에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난다 존자가 부처님 옆에서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게 되면, 대중들의 질투심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마지막이 가장 심각한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그만큼 아난다 존자는 영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미리 시비 거리에 휘말릴 소지를 없애버리는 조건을 제시한 거예요.

또한 세 번째 조건 때문에 경전의 결집도 가능해졌습니다. 시봉 후 25년 동안은 부처님 옆에서 부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봤다고 하더라도, 그 전 20년 동안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잖아요. 그때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들려달라는 것은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난다 존자가 알아야 앞으로 어떤 일이 생겼을 때 부처님께 일일이 여쭤보지 않고 일을 처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20년 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서도 듣고, 그 후 25년 동안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는 날까지 아난다 존자가 부처님을 모시게 됩니다. 그러니 경전의 결집에 있어서도 아난다 존자가 초안을 내는 것이 가장 적합했습니다. 그렇게 부처님의 법문에 대한 초안은 아난다 존자가 내기로 하고, 계율에 대한 초안은 우파리 존자가 내기로 정해졌습니다.

우파리 존자는 석가족의 이발사로 천민 출신의 수행자였습니다. 부처님께서 석가족을 방문하셨을 때, 석가족 청년들 중 출가수행자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당시에는 출가하면 수행자들의 머리를 누가 깎아주는 것이 아니라 출가하기 전에 알아서 머리를 깎고 와야 했어요. 당시 석가족 청년들이 이발사에게 가서 머리를 깎고 출가를 했는데, 우파리가 머리를 깎다 보니까 재물도 많고 지위도 높은 왕자들이 그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출가를 한다는데 자기는 버릴 것도 별로 없는 거예요. 그렇게 다른 사람 머리를 깎아주다가 우파리도 출가를 하게 되었어요. (모두 웃음)

우파리 존자는 10대 제자에 들어가는데, 이 분은 아는 게 없으니까 부처님께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곧이곧대로 행하여서 소소한 계율까지 모두 다 지켰다고 합니다. 그러니 사람은 무엇이든 한 가지를 잘하면 됩니다. (모두 웃음)

그렇게 지계제일 우파리, 다문제일 아난다 이렇게 두 분이 부처님의 십대제자에 들어갑니다.

법문의 초안은 아난다 존자가 냈는데 ‘저는 이렇게 들었습니다’ 하고 시작을 합니다. 그리고 언제 어느 때 어떤 사람들이 모였을 때 부처님께서 어떠한 내용으로 설법을 하셨다고 배경설명을 합니다. 그래서 모든 경전은 ‘저는 이렇게 들었습니다.’는 뜻의 ‘여시아문(如是我聞)’으로 시작합니다. 금강경이 설해지는 배경은 이렇게 시작해요.

‘저는 이렇게 들었습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실 때 1,200 대중들과 함께 계셨는데 공양 후 자리를 펴고 앉으니 수보리가 다가와 무릎을 꿇고...’

성경은 조금 다릅니다. 성경의 경우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100년이 지난 후 제자들이 들은 이야기를 모아놓았습니다. 요한이 들은 이야기는 요한복음이 되고, 마태가 들은 이야기는 마태복음이 되고, 마가가 들은 이야기는 마가복음이 되고, 누가가 들은 이야기는 누가복음이 됩니다.

불경은 부처님 당시 그 이야기를 직접 들은 제자들이, 한 두 명도 아니고 500명이, 그것도 모두 깨달았다고 인정받은 아라한들이 모여서 결집을 하였습니다. 25년 동안 부처님 옆에서 시봉한 아난다 존자가 초안을 내면 나머지 500명이 아난다가 말한 내용이 맞는지, 다른 곳에서 한 설법과 혼동은 없는지, 내용이 빠지거나 추가된 내용은 없는지 500명이 하나하나 다 검증을 했습니다.

부처님의 법문은 아난다 존자 한 사람만 들은 게 아니라 그 자리에 있었던 다른 제자들과 함께 들었으니까 같이 있었던 사람들이 서로 검증해가는 거예요. 이렇게 한 설법의 초안이 나오면 서로 검증하고, 다음 설법의 초안이 나오면 또 검증하고, 이렇게 하나하나씩 검증해서 결집된 것이 불경입니다. 그래서 불경은 정확도가 아주 높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경전의 결집이 끝나면 그것을 글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암송하였습니다. 암송을 했기 때문에 암송하기 쉽게 순서가 있었습니다. 여시아문으로 시작해서 때와 장소를 이야기한 후 모인 대중을 이야기하고, 마치 신문 기사를 육하원칙에 맞춰서 작성하듯이 경전도 그렇게 정리했습니다.

한 경전이 마무리되면 모두가 그것을 함께 외워 암송하는 식으로 기록을 하였는데, 이것이 글로 옮겨진 것은 그로부터 500여 년이 지나서입니다. 처음에는 나무 잎사귀에 옮겨 적었어요. 경전을 암송할 때 오류가 많을까요, 기록으로 남길 때 오류가 많을까요?”

“기록으로 남길 때요.”

“네, 기록으로 남겨서 전해질 때 오히려 오류가 많습니다. 외울 때는 오류가 거의 없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초안으로 낼 때 아난다 존자가 부처님의 음성과 억양까지도 비슷했다고 합니다. 그때 세 가지 오해가 생겼다고 해요.

첫째, 혹시 부처님께서 살아 돌아오셨는지 의심하는 제자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도 큰스님이 돌아가실 때 법당에 큰스님 육성을 들을 수 있게 녹음을 틀어놓곤 하는데, 그때 마치 큰스님께서 법당에서 법문을 하시는 것 같은 착각을 할 때가 있잖아요. 둘째, ‘타방의 부처님이 오셨나’ 하고 생각한 대중이 있었다고 해요. 셋째, ‘아난다가 성불을 했나’ 하고 의심하는 대중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의심이 들 정도로 아난다가 억양까지 잘 흉내 내서 초안을 작성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남방의 경전은 읽을 때 억양이 있습니다. 이건 부처님께서 하신 톤이 계속 전해 내려오는 것입니다.

지금 전해오는 불경이 모두 100% 정확하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이렇게 하나하나 검증하면서 결집한 경전이니 비교적 정확하다고는 말할 수 있습니다.”

오백 대중이 모여 경전을 읊는 모습을 상상하며 명상도 하고 경전 독송도 함께 했습니다. 칠엽굴을 끝으로 오늘의 순례를 모두 마쳤습니다.

순례단은 모두 라즈기르에 예약된 숙소 곳곳으로 흩어져서 하루 종일 걷고 걸었던 여독을 풀었습니다.

내일은 새벽 4시30분에 기상해서 5시에 출발하는 일정입니다. 바이샬리로 가서 원숭이가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다는 원후봉밀터를 참배하고 8개 중 아직 3개 밖에 발견되지 않았다는 원형 진신사리탑을 참배할 예정입니다. 내일 또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

전체댓글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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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

더 이상에 욕망이 없음을 뱉은 가래에 비유로 설명하신 법문 들으며 난 그 뱉은 가래를 먹으러 껄떡대진 않았나 돌아보게 됩니다

2019-01-20 23:39:58

윤주훈

부처님을 찬탄하고 공경합니다~!!!
법륜스님의 환한웃음과 순례단분들의 모습들을 뵐수있어서 좋았습니다 불대에서 법문으로 배운것을 성지순례를 통해 다시한번 들으니 더 다가옵니다 저도 가보고싶습니다
술술 읽히는 좋은글과 사진들 올려주신 담당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2019-01-15 11:50:02

산나무

적힌 글 만큼이나 긴 하루였네요.

2019-01-14 09:3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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