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9.1.12. 인도성지순례 8일째 (쿠시나가르)
“부처님, 이제 세상에 남은 일들은 저희들이 하겠습니다.”

쿠시나가르 Kushinagara

오늘은 부처님의 마지막 발자취를 따라가 봅니다. 바이샬리에서 릿챠비족과 마지막 인사를 한 부처님은 쿠시나가르로 향하셨습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인도 성지순례를 떠난 지 8일째 되는 날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바이샬리를 출발해서 오시다가 춘다의 공양을 받으시고 큰 병을 얻으셨습니다. 그리고 카쿳타 강에서 마지막으로 목욕을 하시고 이곳 쿠시나가르 사라나무 숲에 이르러서 그날 밤에 열반에 드셨습니다. 오늘은 그 여정을 따라 바이샬리 사람들의 마지막 배웅을 받은 케사리아 탑, 춘다의 공양터, 부처님께서 마지막 목욕을 하셨다는 카쿳타 강, 쿠시나가르의 열반당을 참배하는 일정입니다.

4시 50분이 되자, 차량별로 인원 점검이 시작되었습니다. 순례객들이 하루하루 일과에 적응이 되어가는 것이 눈에 띄게 달라졌습니다. 차가 출발하자 예불과 천일결사 기도를 먼저 하였습니다. 특유의 경적 소리를 내며 달리던 차가 한 시간 반 가량 지나 멈춰 선 곳은 오늘의 첫 순례지 ‘케사리아 탑’입니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케사리아 탑

세상에서 가장 큰 탑인 케사리아 탑은 어둠 속에서 안개에 가려 그 위용을 감추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먼저 도착한 차량의 순례객들과 함께 한 줄로 서서 정근을 하고 조용히 탑돌이를 하였습니다. 뒤 이어 도착한 순례객들이 먼저 돌고 있는 탑돌이 행렬을 이어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였습니다.

400여 명의 순례객이 한 줄, 한 팔 간격쯤으로 돌고 돌고 돌아도 그 둘레를 다 채우지 못하였습니다. 둘레가 424미터, 원래 돔의 높이를 51미터 정도라고 추정한다고 하니 가히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습니다. 뒤편에서는 아직도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땅 밑에 아직도 9미터가 묻혀있다고 합니다.

랜턴으로 발밑을 밝히며 탑돌이를 하는 사이, 서서히 날이 밝았습니다. 스님은 케사리아 탑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주었습니다.

“이 탑이 세워진 이유에 대해서 두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 첫째, 부처님께서 카필라성을 나와서 몇 개의 나라를 건너 이 곳 바이샬리 가까이 오셔서 출가를 하신 것을 기념하여 탑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러기에는 카필라성에서 여기까지 거리가 너무 멀어요.

둘째, 부처님께서 열반하기 전 바이샬리 사람들과 이별할 때 띄워준 발우를 기념하여 세웠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을 선언하시고 바이샬리를 떠날 때, 바이샬리 사람들이 부처님과 헤어지지 못하고 계속 배웅을 나왔다고 해요. 부처님이 돌아가라고 해도 또 따라오고, 또 따라왔대요. 부처님께서 칸타키 강을 건너간 후에도 그들은 강 언덕에 서서 부처님을 배웅하자 부처님은 이별의 징표로 발우를 강물에 띄워 강 저편으로 보내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발우를 받아서 여기다가 탑을 쌓았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이 탑이 바로 강 옆이 아니라 좀 떨어져 있어요. 그러나 강변에 쌓을 수가 없어서 바이샬리 땅에서 마지막 머무른 곳에 탑을 쌓았다고 해요. 제가 볼 때도 이 학설이 더 일리가 있어요.”

순례객 전체는 탑을 바라보며 예불을 올렸습니다.

“자, 사진 찍는 시간 10분 정도 드릴게요.”

케사리아 탑은 항상 아침 일찍 와서 안개에 가려 제대로 볼 수 없는 곳인데, 오늘은 운 좋게 케사리아 탑의 모습을 완전히 볼 수 있었습니다. 스님은 순례객들이 사진을 남길 수 있도록 잠깐 시간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순례지인 파바마을의 ‘춘다의 공양터’로 향했습니다. 케사리아 탑을 지난 지 20여분 쯤 뒤, 바이샬리 사람들이 배웅을 했다는 칸타키 강을 지나갔습니다.

‘춘다의 공양터’는 부처님께서 열반 전 마지막으로 공양을 드신 곳입니다. 버스를 길가에 세우고 파바 마을을 걸어 들어가 춘다의 공양터에 도착했습니다.

춘다의 공양터에는 탑이었던 듯한 벽돌 무더기와 쓰레기가 너저분하게 널려있었습니다. 다만, 힌두교 제단 주변만은 말끔하게 청소가 되어 있었습니다. 대중은 힌두교 제단을 피하여 자리에 앉았습니다. 스님은 춘다의 공양이 갖는 의미를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공덕이 있는 공양

“부처님께서 바이샬리에서 3개월 후에 열반에 들겠다고 선언을 하시고 길을 떠나십니다. 아난다와 함께 바이샬리 외곽에 도착하신 부처님은 경전의 표현에 의하면 ‘마치 늙은 코끼리가 고개를 돌리듯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바이샬리를 쳐다보면서 ‘내가 바이샬리를 보는 것도 이게 마지막이구나’라고 하시며 길을 떠나셨다고 합니다.

경전을 보면 부처님께서 마지막 여정으로 어느 어느 마을을 지났는지 자세한 이야기가 다 나옵니다. 소가 짐을 가득 실은 수레를 끌고 하루 종일 걸어갈 수 있는 거리를 1 유순이라고 하는데, 지금 기준으로는 약 15km 정도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하루 평균 1 유순을 걸어서 한 마을에 들렀다가 다음 마을로 이동하셨다고 해요.

파바 마을에 이르러서 망고나무 아래에 앉아계셨습니다. 그 망고나무의 주인은 ‘춘다’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춘다는 대장장이였습니다. 신분으로 보면 천민이죠. 부처님께서 자신의 망고나무 아래에 머물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춘다가 부처님께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인사를 드리고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나서 춘다는 감동을 하여 다음 날 아침에 부처님께 공양을 올릴 것을 청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를 침묵으로 승낙하셨습니다. 이에 춘다는 기쁜 마음으로 돌아갑니다.

반면 아난다는 근심이 가득해졌습니다. 그해 가뭄이 아주 심했는데, 경전을 봐도 암나빨리의 공양 이후로는 초대 공양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해는 가뭄이 심해서 안거 때도 대중들이 다 흩어져서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부처님이 걸식을 나갔는데 사람이 먹는 음식이 아니라 말이 먹는 밀기울을 받아오신 적도 있습니다. 그 정도로 당시 상황이 열악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춘다가 부처님과 일행 모두를 초청한 거예요. 부처님만을 초청하면 그 초청에 응하지 않으시니까 일행까지 모두 초대되었습니다. 아난다가 생각하기에 가뭄이 아주 심한 데다가 천민인 춘다가 이 사람들의 공양을 다 준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 거예요.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승낙을 하신 후 근심하는 아난다에게 ‘아난다여, 걱정하지 말라. 춘다는 능히 공양을 준비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아난다의 생각에는 이해가 안 되었지만 아침이 되니까 춘다가 ‘공양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때를 아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대중이 춘다의 집으로 갔는데 정말로 춘다가 음식을 다 준비해놓은 거예요. 그걸 본 아난다는 놀랐습니다.

인도의 문화는 발우를 들고 앉아있으면 초대한 사람이 앞에 가서 음식을 직접 퍼줍니다. 처음에는 한 사람씩 밥을 퍼주고, 그리고는 그다음 음식을 한 사람씩 퍼주고, 이렇게 공양이 진행됩니다. 우리가 하는 발우공양 방식도 여기에서 비롯된 거예요. 그리고 인도에는 아직도 시골에 가면 이런 식으로 공양을 접대합니다. 한 사람씩 음식을 떠주는데, 부처님 발우에 어떤 음식이 나왔습니다. 그 음식을 보시고 부처님께서 춘다에게 말씀하십니다.

‘춘다여, 이 음식은 다른 대중에게는 주지 말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 음식은 누구도 소화하기가 어려우니 땅에 파묻어라.’
‘네, 알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공양을 받으시면, 대중이 한 공양 보시에 대해 반드시 법보시를 하십니다. 식사 후에 식사를 올린 대중을 위한 법문을 해주시는 거예요.

춘다의 공양을 마친 뒤 어김없이 부처님께서 춘다를 위한 법문을 하십니다. 전날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기쁜 마음에 발심을 해서 공양을 올리기로 하고, 오늘 공양 후에 또 법문을 들으니 춘다는 너무 기분이 좋았습니다.

법문까지 마치시고 부처님은 아난다는 불러 ‘아난다여, 이제 길을 떠나자. 내가 배가 조금 아프구나’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길을 떠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난다여, 내가 배가 몹시 아프구나. 조금 쉬었다 가자’라고 하십니다. 그때 설사를 하셨는데 피가 섞인 설사를 하셨다고 합니다. 조금 걷고 다시 쉬고 이렇게 길을 가셨다고 합니다. 아마도 춘다의 음식으로 인해 식중독 증상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인도말로 그 음식은 ‘스카라 맛다바’라고 합니다. ‘스카라’는 돼지라는 뜻인데, ‘맛다바’의 의미는 조금 불분명합니다. 언젠가 우연히 벵갈 사람에게 맛다바의 뜻을 물어보니 벵갈어로는 ‘토란’이라고 해요. ‘돼지 토란’이라는 말을 우리 기준으로 해석하면 야생 토란이라는 뜻이 됩니다. 가령 개살구처럼 이름 앞에 동물을 붙이는 건 ‘야생’을 의미할 때입니다. 게다가 인도 전역에는 야생 토란이 아주 많습니다. 그리고 토란에는 약간의 독성이 들어있습니다. 그 독성 때문에 토란으로 반찬을 해먹을 때도 물에 하루나 이틀 정도 담가두었다가 먹어야 합니다.

춘다는 천민이니까 아마 야생 토란을 그대로 요리해서 공양을 올리지 않았나 싶어요. 우리도 시골에서 가뭄이 들어서 음식이 부족하면 야생에서 풀뿌리나 식물을 바로 채취해서 먹잖아요. 춘다도 법문을 들은 날 감동해서 그날 밤 야생에서 이것저것 채취해서 공양을 올린 게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런데 아난다는 왕족 출신이니까 야생에서 음식을 구한다는 생각은 못하고 그저 ‘가뭄이 심한데 어떻게 이 대중들에게 줄 음식을 장만한단 말인가’ 하고만 생각한 거예요. 춘다는 야생에서 무언가를 채취해서 공양을 올린 겁니다. 늘 먹는 사람에게야 부작용이 없겠지만 처음 먹는 사람에게는 독성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여하튼 야생에서 채취한 식물에 있는 독성이 식중독 증상을 일으킨 것 같아요.

그 일이 있자 대중들은 수근거리기 시작합니다. 부처님께서 춘다가 올린 음식을 먹고 피가 섞인 설사를 하시니까 대중들이 ‘춘다는 아무런 공덕이 없다’라고 수군거립니다. 경전에는 이렇게 점잖게 표현되어 있지만 어쩌면 더 심하게 표현했을지도 몰라요.

문제가 되는 음식을 공양했으니 대중들은 춘다에게 공덕이 없다고 수군거리고, 자기가 올린 음식을 드시고 부처님께서 식중독 증세를 겪고 있다고 하니 춘다도 괴로워합니다. 부처님 일행은 쿳 강에 이르러서 목욕을 하고 조금 쉬어가기로 합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아난다에게 묻습니다.

‘춘다는 어떠한가?’
‘지금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대중들은 어떠한가?’
‘대중들은 지금 춘다에게 공덕이 없다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부처님께서 춘다를 부르라고 합니다. 그렇게 춘다를 옆에 앉히시고, 대중들에게 묻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공덕이 큰 공양이 무엇인가?’
‘수자타의 공양입니다.’

수자타의 공양은 여래가 깨닫기 직전에 먹은 공양으로 누구나 다 아는 공양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수자타의 공양과 버금가는 공양이 있는데, 바로 여래가 열반에 들기 전에 먹은 마지막 공양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수자타의 공양은 여래가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이루기 전 마지막으로 드신 공양이고, 춘다의 공양은 여래가 열반에 드시기 전 마지막으로 드신 공양입니다. 이 두 가지 공양이 부처님께 올린 공양 중 공덕이 가장 큰 공양입니다.

독성이 있는 음식을 먹고도 아무렇지 않았다거나, 그 음식을 바로 토해서 괜찮았다거나 하는 사람은 인류 역사상 많았을 거예요. 그런데 그 음식을 먹고 죽으면서 ‘열반에 들기 전 마지막으로 올린 공양의 공덕이 한없이 크다’라고 말한 사람은 부처님밖에 없을 거예요.

부처님의 말씀으로 춘다의 마음속 괴로움이 싹 사라지고, 대중의 마음속에 있던 춘다에 대한 의심과 비난도 모두 사라지게 됩니다. 자칫 춘다는 부처님을 돌아가시게 한 장본인으로 비추어질 수도 있지만, 부처님의 말 한마디로 춘다는 공덕이 가장 큰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 춘다를 기리기 위해 여기에 탑을 세웠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춘다의 공양이 부처님의 건강을 해치긴 했지만, 부처님의 법문에 감동을 받은 춘다는 자신이 가진 재능을 모두 동원해서 부처님과 대중을 위한 음식을 마련했기에, 그 정성은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춘다의 공양은 부처님을 위대하게 만들었습니다. 수자타의 공양은 수자타를 위대하게 만들었다면, 춘다의 공양은 부처님을 위대하게 만들었습니다. 죽음의 길에 이르러서도 부처님께서는 춘다를 걱정하고 춘다의 공양을 찬탄한 겁니다.

이건 예수님이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두 사람에게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 지은 죄를 모르옵니다’라고 함으로 해서 예수님이 위대해진 일화와 비슷합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에게 용서를 구해줌으로써 우리가 예수님을 신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붓다의 위대함은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춘다를 더 위로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붓다의 인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후 부처님과 일행은 카쿳타 강에 이르러 목욕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그날 밤 열반에 드시게 됩니다.”

스님의 설명을 듣고 그 당시를 떠올리며 명상하는 시간을 가진 뒤 춘다의 공양과 관련한 경전 독송을 했습니다.

“한 줄로 질서 있게 나가주세요. 이 곳 아이들에게 본보기가 될 수 있게요.”

원래 이 곳 아이들에게도 사탕을 나누어주곤 했으나 아이들이 사나워서 제대로 나눠줄 수가 없었습니다. 지난해에는 이 마을의 힌두교 바라문에게 사탕을 주어 공평히 나눠주라고 했으나 이 마저도 잘 되지 않았습니다. 올해는 사탕을 나눠주는 대신 질서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순례객들은 버스가 있는 곳까지 한 줄로 차분히 걸어 나갔습니다.

카쿳타 강 Kakuta River

다시 버스를 타고 이동한 곳은 부처님께서 마지막으로 목욕을 하신 카쿳타 강이었습니다.

“카쿳타 강에서 손 한 번 씻고, 물 한 모금 마시고, 설사하고 오세요. 그러면 열반당에 가서 열반하실지도 모릅니다.” (모두 웃음)

부처님께서는 카쿳타 강에서 마지막으로 목욕을 하시고, 물을 마신 뒤 쿠시나가르에 가서 열반하셨습니다. 스님의 농담에 모두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스님의 건강을 걱정하는 순례객들과는 달리, 스님은 지친 순례객들을 웃음으로 어루만져 주고 강행군의 피로를 덜어주었습니다. 한결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는 듯했습니다.

카쿳타 강에 손을 담가보니 물이 그리 차지 않았습니다. 스님은 세수를 하고 물을 한 모금 드셨습니다.

“자, 이제 열반당으로 갑니다. 열반당에 가기 전에 근처 한국 절에 가서 아침 공양을 할게요. 열반당에 가서 먹어도 되는데, 가서 예불도 안 드리고 밥부터 먹을 순 없잖아요.”

쿠시나가르에는 한국에서 운영하는 대한사가 있었습니다. 탑에 참배를 드린 후 각자 싸온 도시락으로 대한사 잔디밭에서 아침 공양을 했습니다.

장소만 빌려달라고 했는데 대한사에서 미역국과 직접 키운 열무로 담근 김치를 내어주었습니다. 순례객들은 감사해하며 도시락과 곁들여 먹고 바로 열반당으로 이동했습니다.

슬퍼하지 마라, 여래는 육신이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다. 열반당

열반당에 도착하자 순례단은 가사를 수하고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열반당을 한 바퀴 돌았습니다.

모두 자리에 앉자 스님은 부처님의 마지막 열반의 모습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도착한 이곳이 부처님께서 마지막 열반에 드신 곳입니다. 이 도시 이름은 쿠시나가르(Kusinagara, 쿠시나가라)입니다. 이곳은 부처님이 열반하신 곳이라고 해서 열반당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파바 마을에서 춘다의 공양을 받으신 게 아침 9시나 10시쯤이라고 생각하면 거기서 출발한 게 11시나 12시쯤일 거예요. 오다가 몸이 너무 아파서 나무 밑에서 좀 쉬시다가, 물을 달라고 해서 드시고, 다시 오다가 카쿳타 강에서 목욕하신 뒤 거기서 춘다를 위해서 설법을 하시고, 해질 무렵이 돼서 이곳에 도착하셨습니다.

이 지역의 나무 가운데 특산품이 ‘사라수’입니다. 라자그리하를 오늘날엔 ‘라즈길’이라고 하듯, 원래는 ‘사라(śāla)’였는데 지금은 ‘살(śāl)’ 나무라고 불러요. 우리 경전에는 ‘사라(沙羅)’라고 나오고, 여기서는 현재 ‘살(śāl)’이라고 부르는 나무입니다. 열반당 앞에 잎사귀 조금 넓은 나무가 두 그루 있죠? 저것이 살 나무입니다. 살 나무는 망고나 보리수나 느티나무처럼 옆으로 퍼지는 성질이 아니라 위로 쫙 올라가는 미루나무 같은 성질입니다. 대부분의 살 나무 숲은 우리나라의 미루나무 혹은 버드나무 밀식하듯이 무리 지어 빽빽한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그 사라수 숲 속으로 들어가셔서 자리를 깔고 쉬셨다고 해요. 보리수였다면 한 나무 밑의 그늘에 자리를 깔았겠지만 살 나무는 미루나무처럼 위로 쭉쭉 뻗어있으니까 그늘이 있는 곳에 자리를 깔려니 자연적으로 두 그루 사이에 깔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사라쌍수(沙羅雙樹)’라고 표현하는데, 두 그루 사라나무 사이에 자리를 깔았다는 게 나무가 두 그루밖에 없어서 그 사이에 자리를 깔았다는 뜻이 아니에요. 사라수가 숲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서 두 그루 사이에 자리를 깔았다는 뜻입니다. 그 숲 안에서는 어디에 터를 잡아도 두 그루 사이가 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거기에 부처님께서 가사를 깔고 누우셨다고 해요.

인도 사람이 입고 있는 가사는 큰 천 한 장으로 된 통 가사예요. 천 한 장으로 되어 있는 건 시신을 덮을 때 썼던 것을 입었기 때문이에요. 이걸 네 번 접어 가사를 길쭉하게 깔고, 거기에 오른쪽 옆구리를 땅에 붙이고 머리는 북쪽으로, 다리는 남쪽으로, 얼굴은 서쪽으로 하고 누우셨다고 해요. 오른쪽 무릎을 땅에 붙이고 북쪽으로 누우면 얼굴은 자연적으로 서쪽이 되잖아요. 그렇게 누우셨다고 해요. 이걸 보면 너무너무 고단하시고 피곤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 이유로는 첫째, 나이가 많이 드셨고, 둘째, 급성 설사까지 하시게 됐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곳에 자리에 누우시고, 아난다를 부르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난다여, 오늘 저녁에 열반에 들겠노라.’

오늘 저녁에 생을 마치겠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아난다가 너무나 황망했어요. 돌아가실 때가 다 되어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오늘 저녁이라고 하니까요. 그래서 이렇게 여쭈었습니다.

‘부처님, 많은 제자들과 재가 신자들이 있는 라자그리하나 바이샬리를 두고 왜 이 외진 쿠시나가르 숲에서 열반에 드시려 합니까?’

붓다의 제자들, 즉 출가한 승려나 재가 신도가 많은 곳이 많잖아요. 왕사성(라즈기르), 바라나시(카시), 사위성(쉬라바스티), 아니면 밧지(Vajji)족이 있는 바이샬리처럼 부처님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참 많은 곳에서 열반에 드셔야지, 왜 이렇게 외진 곳에서 열반에 드시려고 하시냐는 겁니다. 그랬더니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아난다여, 그런 얘기를 하지 마라. 지금은 비록 이곳이 외진 곳이지만 먼 미래에 이곳은 성스러운 곳이 되리라. 과거에도 이곳은 성스러운 곳이었고, 미래에도 성스러운 곳이 되리라.’

부처님이 열반하신 곳이니까 자연히 불자에게는 성스러운 곳이 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순례하게 되겠죠. 그랬더니 아난다가 또 물었어요.

‘이곳에서 열반에 드시는 것까지는 좋다고 해도 말라족의 왕궁을 두고 왜 여기 숲입니까?’

이곳의 왕족이 말라(Mallā)족이에요. 이왕이면 쿠시나가르에 있는 말라족의 왕궁에서 열반에 드시지, 왜 이 숲 속에서 열반에 드시냐는 거죠. 그러자 부처님께서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아난다여, 그런 얘기를 하지 마라. 이 숲 속에서 열반에 듦으로 해서 누구든지 나를 만나고 싶은 사람은 아무런 제한 없이 다 만날 수 있지 않느냐.’

부처님이 왕궁에서 열반에 드시면 부처님을 친견하고 싶은 사람 중에 천민은 들어올 수가 없어요. 아예 출입이 안 되니까요. 그러나 숲에서 열반에 드시니까 누구든 자기 마음만 있다면 아무런 차별 없이 올 수 있고, 왕이라 하더라도 이런 숲 속에 자기가 오기 싫다면 친견하지 못합니다. 숲 속은 사람뿐 아니라 짐승에게도, 또 그 당시에 추상적으로 생각했던 하늘의 신들에게까지 다 열린 공간이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열린 공간에서 생을 마감하신 거예요.

그럴 때 갑자기 하늘에서 음악소리가 꽃비가 내렸어요. 그 현상을 귀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살 나무에서 하얀 꽃이 갑자기 피었습니다. 다들 보고 신기해할 때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이것은 저 하늘의 신들이 부처님께 마지막으로 공양을 올리는 것이다. 그러나 아난다여, 이것은 제일의 공양이 아니다. 여래에게 올리는 제일의 공양은 여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 정진하는 것이다.’

어떤 기적과 신통도 수행하고는 비교가 될 수 없다는 거예요. 부처님께 올리는 최고의 공양은 그 어떤 화려한 음식도, 화려한 옷도, 어떤 신기한 현상도 아니고, 여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 정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불을 할 때 ‘계향(戒香) 정향(定香) 혜향(慧香)’ 이렇게 시작하죠? 그 어떤 향으로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것보다 계율을 청정히 지키고 선정을 닦고 지혜를 증득하는 것이 부처님께 올리는 최고의 공양이라는 뜻입니다.

이어서 부처님께서 아난다에게 말씀하기를, 마을에 가서 ‘여래가 오늘 저녁에 열반에 들 것이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친견하고 싶은 사람은 다 친견을 하라’ 이렇게 알리라고 하셨어요. 이건 아마도 인도의 문화 같아요. 인도는 임종하기 전에 찾아가서 인사를 하는 문화가 있거든요. 우리는 꼭 죽은 뒤에 와서 인사를 하니까 죽은 사람도 모르고 산 사람도 몰라요. 살아있을 때 마지막으로 서로 인사하는 게 좋겠죠.

아난다 존자가 마을에 가서 여래를 친견하라고 알리고 돌아왔는데, 아난다 존자가 너무나 슬퍼하고 있으니까 부처님께서 위로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난다여, 슬퍼하지 마라. 여래는 육신이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다. 육신은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 깨달음의 지혜는 영원히 너희 곁에 남아 있으리라.’

또 이렇게 위로하고, 인사도 하셨습니다.

‘너는 25년 동안 정말 입안의 혀처럼 나를 잘 시봉했다. 고맙다.’

그때 아난다 존자가 질문을 했습니다.

‘부처님, 우리는 늘 부처님을 생각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계시지 않으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그랬더니 이렇게 대답하셨어요.

‘4성지를 생각하라.’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순례를 하면서 이렇게 생각하라고 하셨어요.

‘여기가 부처님께서 태어나신 곳이다. 부처님 태어나실 때의 모습은 이러하다’

‘여기가 부처님께서 도를 이루신 곳이다. 그 도의 내용은 이러하다’

‘여기가 부처님께서 처음으로 설법하신 곳이다. 설법의 내용은 이러하다’

‘여기가 부처님께서 마지막 열반에 드신 곳이다. 열반의 모습은 이러했노라’

이 4성지를 잊지 않고 생각한다면 수행자는 어긋나려야 어긋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아난다가 또 물었어요.

‘우리는 늘 부처님을 의지하고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면 누구를 의지해야 합니까?’

그랬더니 부처님께서 이렇게 답하셨어요.

‘사념처(四念處)에 의지하라.’

사념처는 신념처(身念處), 수념처(受念處), 심념처(心念處), 법념처(法念處)입니다. 사념처를 관하는 수행법인 사념처관(四念處觀)은 ‘몸을 있는 그대로 관하라. 느낌을 있는 그대로 관하라. 마음을 있는 그대로 관하라. 법을 있는 그대로 관하라’라는 뜻입니다. 이 사념처 관법을 다른 말로 위빠사나 (Vipassanā)라고 불러요. 사념처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몸은 부정하다고 관하라. 성스러워할 만한 요소가 없다고 관하라는 거예요.

둘째, 느낌은 곧 괴로움이라고 관하라. 우리는 기분에 살고 기분에 죽잖아요. 그것이 곧 괴로움이라고 관하라는 겁니다.

셋째, 마음이라는 것은 항상(恒常) 하지 못하고 늘 허깨비처럼 바뀌는 것이니 무상(無常)하다고 관하라.

넷째, 법이라고 하는 것에는 실체가 없다. 무아(無我)라고 관하라.

이것을 각각 관신부정(觀身不淨), 관수시고(觀受是苦), 관심무상(觀心無常), 관법무아(觀法無我)라고 합니다. 이렇게 사념처를 관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거예요. 아난다가 또 물었어요.

‘우리는 늘 부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살았는데, 앞으로 누구를 스승으로 모셔야 합니까?’

그러자 부처님께서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나의 가르침인 계율을 스승으로 삼아라.’

너희들이 나하고 같이 산다 하더라도 계율을 안 지키면 나는 도무지 너희가 누군지를 모르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내가 없더라도 너희가 계율을 지키고 산다면 너희들은 늘 나와 함께 있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신 거예요.

많은 손님을 맞았는데, 밤이 깊어서야 겨우 친견이 끝이 났어요. 원래는 한 사람씩 인사를 시키려고 했는데 사람이 너무 많이 와서 가족 별로, 단체로, 이렇게 우리처럼 조별로 인사를 시켰어요. (모두 웃음)

이제 밤이 깊었고 손님도 끊어졌기에 ‘곧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다. 조용히 하라’라고 한 후 마지막 숨을 거두시도록 두고, 제자들이 밖에서 기다리는데, 기록에 따르면 80세라고도 하고 120세라고도 하는 한 노인이 찾아왔어요. 이름이 수바드라(Subhadra)인데, 지팡이를 짚고 찾아와서 고타마를 꼭 만나야겠다고 했습니다. 부처님의 제자들은 부처님을 ‘여래' 혹은 ‘붓다’라고 부르지만 그렇지 않은 이교도들이 볼 때는 그냥 수행자니까 ‘고타마’라고 불렀습니다. ‘사문 고타마를 내가 만나야 하겠습니다’라고 해서 ‘지금은 안 됩니다. 이제 곧 열반에 드시기 때문에 편히 쉬게 하셔야 합니다’라고 거절했는데, ‘안 된다, 꼭 만나야 한다’라고 언성을 높였어요. 물을 게 있는데 오늘 안 물어보면 돌아가신 뒤에는 못 물어보잖아요. 그러니 꼭 물어보고 싶다는 거예요. 사람이라는 게 참 재미있죠? 남이 죽는 것보다 자기가 물어보는 게 더 중요합니다. (모두 웃음)

아난다는 ‘그래도 안 된다’라고 하고, 이 사람은 ‘친견하겠다’ 하면서 옥신각신하니까 부처님께서 아난다를 부르셨어요.

‘아난다여, 그 사람을 들여보내라. 그는 나를 귀찮게 하려고 찾아온 게 아니라 정말 의문이 있어서 찾아온 것이다.’

그래서 아난다가 수바드라를 들여보냈습니다. 들어와서 수바드라가 한 말이 문안 인사가 아니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주장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이것이 진리라고 주장하면, 저 사람은 그것은 거짓이라고 하고, 또 그 사람이 이것을 진리라고 주장하면, 또 저 사람이 그것은 거짓이라고 하고, 이렇게 수십수백 가지 주장이 있는데 도대체 누구의 주장이 옳으며 누구의 주장이 틀립니까? 아니면 다 틀리는 겁니까?’

숨 넘어가는 사람한테 와서 누구 주장이 맞느냐는 거예요. 저 같으면 벌떡 일어나서 주장자로 머리를 한 대 때려줬을 거예요. (모두 웃음)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수바드라여, 당신이 말한 그 모든 사람은 내가 다 알고 있다. 나는 그들을 만났고, 그들과 대화도 해보고, 그들의 뜻도 다 알고 있다. 그러나 수바드라여, 어떤 주장의 옳고 그름을 보지 말고, 그들의 마음과 행을 봐야 한다.’

마음속에 삿된 생각을 가지고 삿된 행동을 하면서 이것이 옳으니 저것이 옳으니 주장하는 것은 중요치 않다는 겁니다. 그런 주장은 논할 가치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여덟 가지를 말씀하셨어요.

‘나는 50년 전에 출가한 이후로 지금까지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동하고 바르게 생활하며 이렇게 바르게 살아왔다.’

그런 후 중도(中道)와 사성제(四聖諦)와 팔정도(八正道)에 대해서 얘기하셨어요.

‘누가 옳으니 누가 그르니 하는 건 중요하지 않다. 다른 사람의 주장에 신경 쓸 것 없고, 어떻게 내가 바르게 살아갈 것인지가 중요하다.’

그 얘기를 듣고 이 노인이 깨달음을 얻었어요. 그래서 부처님께 제자 되기를 청했고, 부처님께서 아난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를 제자로 받아들여라. 그가 나의 마지막 제자이겠구나.’

이렇게 해서 부처님께서는 다시 조용해진 상태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 물을 것이 있으면 물어라. 내가 열반에 든 뒤에 '그때 물어볼걸’ 하고 후회해봐야 이미 늦었다. 그러니 지금 물을 게 있으면 물어라.’

그러나 아무도 질문을 안 했습니다. 또 말씀하셨어요.

‘물을 게 있으면 물어라. 친구가 친구에게 묻듯이 편안하게 물어라.’

또 아무 대답이 없었어요. 세 번째로 또 말씀하셨습니다.

‘의문이 있으면 물어라.’

그러자 아난다 존자가 대답했습니다.

‘아무런 의문이 없습니다.’

이미 여래는 법을 잘 설했고 우리는 다 이해했으니 더 이상 따로 물을 것이 없다는 뜻이죠. 그러자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열반에 드셨어요.

‘세상은 덧없다. 부지런히 수행 정진해라.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

이것이 맨 마지막 말씀이에요. 이렇게 말씀하시고 열반에 드셨습니다.”

이어서 부처님의 마지막 모습을 담은 경전을 독송하고 명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열반당으로 이동하여 예불을 드렸습니다.

400명의 대중은 열반당 안에 빼곡히 들어가 누워계신 부처님을 향해 예불을 올렸고, 열반당의 높은 돔 천장 안은 목탁소리와 정근 소리로 가득 울려 퍼져 마치 부처님의 열반하신 날처럼 장엄하게 느껴졌습니다.

부처님, 이제 편히 쉬소서. 남은 일들은 저희들이 하겠습니다.

그리고 다 함께 법륜 스님이 쓰신 발원문을 낭독했습니다.

발원문은 45년간을 쉼 없이 고통받는 중생과 함께 해오신 부처님의 행적을 상기시켜 주었고, 이제 부처님께서는 평온히 쉬시고 우리가 부처님 뜻을 이어받아 남은 일을 하겠다는 다짐이 담겨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늙고 병든 몸을 이끄시고
먼 길을 걸으셔서 이 곳에 이르셨습니다.

오늘 저희들은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이 열반당에서 이렇게 발원합니다.

거룩하신 부처님이시여!
이곳에 안온하게 머무소서.
이제 세상에 남은 일들은 저희들이 하겠습니다.

이제 다시는 부처님께 이 일을 해달라 저 일을 해달라 하지 않고
세상에 모든 일들을 저희가 앞장서 하겠습니다.

저희들은 오늘 부처님께서 걸으신 길들을
하나하나 따라 걸으며
부처님께서 이루고자 하신 일들을
저희들이 이룰 것을 발원합니다.”

다른 사람도 참배할 수 있도록 예불과 발원을 마치자마자 열반당을 나왔습니다. 다시 잔디밭으로 돌아와 명상을 한 뒤 스님은 다 모인 김에 질문을 받았습니다. 세 사람 정도 질문을 받고, 1시간 정도 자유시간을 가졌습니다. 부처님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절을 하거나 고요히 명상을 했습니다. 도반들과 사진을 찍어주거나 열반당을 다시 참배하기도 했습니다.

오늘의 마지막 순례 장소는 부처님의 다비식을 거행한 라마바르총입니다. 이곳은 쿠시나가라 왕족의 대관식을 하던 장소로 바쿠다 반다나 영지인데,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자 세상 풍속대로 장례를 치르라는 말씀대로, 왕족이신 부처님의 신분에 맞게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라마바르총에 도착한 순례객들은 가사를 수하고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한 줄로 탑돌이를 했습니다.

탑돌이 후 탑을 바라보고 예불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스님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다비식이 이루어졌던 라마바르총

“부처님께서 쿠시나가르 사라 숲에서 열반에 드신 후 지금 우리가 도착한 이 곳 라마바르총에서 부처님의 다비식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곳은 쿠시나가르 말라족의 성스러운 곳입니다. 말라족은 부처님을 화장할 수 있도록 장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바로 옆에 가면 히란나바티 강이라는 조그만 개울이 있는데, 부처님께서 거기서 마지막 물을 드셨고, 화장한 후 그 강변의 물로 불을 껐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상수제자인 마하가섭 존자 일행이 도착하지 않아서 일주일을 기다렸다가 마하가섭 존자가 도착하자 화장을 했습니다. 화장이 끝나고 부처님의 유골을 마가다국의 아자타삿투왕도, 바이샬리 릿챠비족도, 카필라바스투의 석가족도 각자 자기 나라에 모시겠다고 나섰어요. 도나 바라문이 부처님의 유골을 가지고 서로 싸우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지 않다고 해서 여덟 몫으로 나누어 가져가서 쌓도록 했습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는 8개의 사리탑이 생겼고, 또 한 종족이 늦게 와서 그 재를 가지고 가서 탑을 쌓아 한 개의 재탑이 생겼고, 도나 바라문은 나누어준 사리를 담은 항아리를 가지고 항아리 탑을 쌓았습니다. 즉 8개의 진신 사리탑과 1개의 재탑, 1개의 항아리탑, 총 10개의 탑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200년 후에 아쇼카왕이 이 세상에 출현해서 불법에 귀의하고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순례한 후 그 발자취마다 탑을 쌓았어요. 탑을 쌓을 때는 반드시 사리를 넣어야 해요. 8개 중 7개의 사리탑을 헐어서 그중에 일부는 남겨두고 일부는 꺼내서 새로 쌓는 유적지마다 탑 속에 다 사리를 넣었다고 해요. 한 개든 두 개든 세 개든 몇 개든 이렇게 해서 세상에 수 만개의 탑이 생겼다고 합니다. 이 사리라는 것은 부처님의 유골이라는 뜻입니다. 진신사리라는 것은 진짜 부처님의 유골이라는 뜻이고요.”

스님의 설명을 듣고 경전을 독송하면서 당시의 상황을 다시 구체적으로 만나본 후 명상을 했습니다.

순례단은 이틀 동안 부처님이 열반하시기 전 마지막 1년의 여정을 따라왔습니다. 왕사성 영축산에서 시작한 열반경은 이 곳 쿠시나가라 라마바르총에서 화장을 하고 8개의 탑이 쌓아지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내일부터 이틀간은 이런 위대한 붓다의 태어남과 성장을 둘러보러 갑니다. 시간을 거슬러 가면서, 공간도 조금씩 북쪽으로 올라오니 저녁 기온이 한층 쌀쌀해집니다. 내일 또 소식 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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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삼

거룩하시고 자비하신 부처님의 일생을 읽으니 눈과 마음이 정화됩니다. 수행하고 사회를 위해 실천하는 마음을 내겠습니다.

2019-01-31 14:42:55

김영란

타인에 잘 잘못은 신경쓰지말고 내가 어떻게 바르게 살아갈지만 신경쓰라는 법문이 다가옵니다 내가 어떻게 살지 보다는 상대를 바르게 살게하려 했습니다 참회합니다~^^

세상은 덧없다. 부지런히 수행정진해라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

2019-01-21 09:21:19

부처님의 일생을 되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019-01-19 08: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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