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9.1.14 인도성지순례 10일째 (탄센, 랑그람, 로히니)
“이야. 저기 설산을 보세요.”

오늘은 네팔 탄센에서 일출을 보고, 종족 간 분쟁을 막았던 로히니 강에 들러 부처님의 가르침을 되새겨 본 후, 부처님의 외가인 꼴리족이 세운 진신사리탑 랑그람을 참배했습니다. 저녁에는 룸비니 대성 석가사에서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인도성지순례를 떠난 지 11일째 되는 날입니다.

룸비니 대성 석가사의 정원에는 하늘의 별과 옅은 안개가 탄센으로 떠나는 순례객들을 배웅하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히말라야 설산인 안나푸르나와 다울라기리를 볼 수 있는 탄센의 언덕까지 오르는 산행으로 시작합니다.

이른 새벽 3시, 버스가 출발하자 순례객들은 낮으면서도 또렷한 음성으로 예불과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기도가 끝나자, 버스에 불이 꺼지고 순례객들은 앉은 채로 잠이 들었습니다. 버스가 절벽과도 같은 위험한 길을 따라 해발 2,000미터를 오르는 동안에도 깊은 잠에 빠져 있다가, 탄센 도착을 알리는 스님의 목소리에 깨어나 버스에서 내렸습니다.

탄센에서 맞이한 아침, Tansen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 6시, 순례객들은 조용히 스님을 따라 산으로 향하는 골목길을 걸었습니다. 탄센 마을의 집집마다 불이 켜지고 있었습니다. 마을의 거리는 깨끗하고, 나무에는 꽃이 피어있기도 했습니다. 스님은 송수신기를 통해 이곳 탄센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습니다.

“여기는 옛 팔파 왕국의 땅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교도이며 몽골리안입니다. 아무리 지형이 험해도 물만 있으면 어디든 사람들은 살 수 있어요.”

마을을 따라 꼬불꼬불 언덕길로 1km 정도를 가다보니 산으로 향하는 계단이 나왔습니다. 한 계단씩 오르는데 하늘 위로 붉은 바다가 펼쳐졌습니다.

순례객들은 산 위에서 일출을 맞이하기 위해 부지런히 산을 올랐습니다.

“이야. 저쪽을 보세요.”

뜨는 햇살을 받아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와 다울라기리의 설산도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탄센에서의 일출은 성지순례 내내 안개와 추위 속에서 떠는 순례단에게 탁 트인 설산과 해돋이를 보여주기 위해 마련된 일정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성지순례 내내 날이 맑아서 해돋이도 설산도 제대로 볼 수 있었습니다.

성지를 순례하는 것이 아니니, 몸이 힘든 사람은 탄센 일정은 쉬어도 된다고 했으나 대부분의 순례객이 참여하였습니다. 뜨는 해를 보며 순례객들은 ‘오길 잘했네!’하며 기뻐하였습니다.

순례객들은 햇살을 받으며 키가 커다란 소나무 숲속으로 계속 걸어갔습니다. 폭신한 흙길과 소나무 내음에 그간 먼지와 긴 이동거리에 피곤했던 순례객들의 심신이 치유되는 듯했습니다.

햇살 따뜻한 넓은 터가 있는 곳에 다다라 조금 쉬기로 했습니다. 휴식 후 다 함께 여흥을 즐기며 친해지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소풍 온 초등학생들처럼 꼬리잡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다 ‘몇 명이 모여라’ 하면 모이고, 탈락한 사람은 장기자랑을 했습니다. 수신기로 구성진 노래 가락이 들려오자 몇몇 분들은 추임새를 넣고 순례단 모두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습니다.

스님이 “이제 갑시다. 오늘 갈 길이 바빠요.” 하고 갈 채비를 하자 순례객들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다시 산을 내려왔습니다.

내려오는 길은 가벼웠습니다. 내려오는 발아래 굽이굽이 산이 펼쳐졌습니다. 이곳 사람들 사는 모습이 눈에 정겹게 들어왔습니다. 버스 주차한 곳에서 도시락으로 도란도란 아침 겸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아침 운동을 제대로 해서인지 밥맛이 꿀맛입니다.

다음 순례지는 로히니 강입니다.

물이 소중합니까, 피가 소중합니까?

로히니 강은 석가족의 카필라바스투와 부처님의 어머니 마야부인의 고향인 꼴리족의 데바다하 사이를 흐르는 강입니다. 어느 해 가뭄이 심해 석가족과 꼴리족이 서로 농사에 필요한 물을 얻기 위해 싸움이 시작되어 급기야는 로히니 강을 사이에 두고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갔다고 합니다. 로히니 강변에 자리를 잡고 스님은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카필라 성과 꼴리성, 두 나라가 로히니 강을 사이에 두고 분쟁이 일어났는데요. 처음에는 입씨름이 되었다가, 주먹싸움이 되었다가, 급기야는 돌멩이를 서로 집어던지는 집단 싸움으로 번졌다고 해요. 저는 이 대목에서 도대체 강이 얼마만 하길래 돌멩이를 갖고 싸웠을까 궁금했는데, 여기 와서 보니까 과연 양쪽에서 충분히 돌멩이를 던져서 싸울만하죠?”

“네!” (모두 웃음)

정말 강폭이 돌멩이를 던져 싸울 만했습니다. 경전을 보며 궁금증을 가지고 실제로 확인해보는 스님의 모습이 재미있기도 하고, 배움도 있었습니다.

“싸움이 벌어져서 사람이 다치게 되니까 이쪽 사람들도 자기네 관리들에게, 저쪽 사람도 자기네 관리들에게 ‘저놈들이 우리 물을 빼앗아간다. 사람을 폭행했다’ 이렇게 얘기를 한 거예요. 결국은 양쪽 모두 감정이 상해서 서로 ‘용서할 수가 없다.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 라고 하면서 군대를 동원하여 전쟁을 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부처님께서 이 소식을 듣고 ‘이 어리석은 사람들이 틀림없이 전쟁을 하겠구나. 그래서 피를 강물처럼 흘리겠구나’ 이렇게 생각하셔서 이곳을 방문하셨어요. 누가 초청한 것도 아니고, 부처님을 찾아와서 의논한 것도 아니에요. 부처님이 이 소식을 듣고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경전을 보면 부처님이 허공에 떠서 양쪽에 말씀을 하셨다고 묘사돼 있습니다. 이것은 중립적이었다는 뜻이에요. 이쪽에 서서 말한 것도 아니고, 저쪽에 서서 말한 것도 아니고, 강 가운데에서 양쪽에다가 말했다는 얘기예요. 그렇게 양쪽 군대의 장수를 불러서 자초지종을 물어보고 각자의 주장을 들으셨어요. 그런 뒤에 부처님께서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물이 귀하냐, 피가 귀하냐?’

당연히 양쪽 다 ‘어휴, 어떻게 물을 피하고 비교합니까? 물은 하찮은 것이고, 피는 정말 고귀한 겁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어요. 그러자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너희들은 그 하찮은 물을 위하여 피를 물처럼 흘리려고 하느냐?’

그때서야 감정에 북받쳐 있던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고 ‘저희들이 잘못 생각했습니다’라고 물러났어요. 이렇게 부처님이 양쪽의 싸움을 중재하자 양쪽 모두 전쟁할 힘을 합쳐서 관개 수로 공사를 해서 그해 가뭄을 잘 넘겼다고 합니다.

사실은 전쟁할 물자와 노력을 가지고 수로 공사를 하면 애초에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죠. 그런데 우리는 감정이 상하면 작은 일을 위해서 큰 희생도 감수하잖아요. 여러분들도 성질나면 어때요? 누가 칼을 갖다 대면 ‘아이고, 무서워라’ 하고 도망가야 할 텐데, 성질나면 오히려 배를 훌떡 내놓고 ‘그래, 찔러라, 찔러! 찔러!’ 이러잖아요. (모두 웃음)

부부 싸움하다가 상대가 때리려 들면 ‘아이고, 무서워’ 이래야 하는데 오히려 ‘때려, 때려! 죽여, 죽여라!’ 이래요. (모두 웃음) 원래 때리거나 찌르려고 그런 게 아니라 겁주려고 그랬다가 저질러버리게 됩니다. ‘못 찌르지? 네가 무슨 용기가 있어서 찌르겠냐?’ 이렇게 나오면 안 찌를 수가 없어요.

남북한 사이에서도 언쟁할 때 보면 꼭 그러잖아요. ‘한 대 때려봐! 너희가 한 대 때리면 우리는 열 대 때린다.’ 이명박 정부나 박근혜 정부 때는 저쪽에서 포 한 번 쏘면 우리는 세 배, 아니 열 배로 때린다고 맨날 그렇게 큰소리를 쳤죠. 이러다가 감정적으로 전쟁이 일어나게 되는 거예요.

아무튼 로히니 강은 그런 갈등을 해소시킨 대표적인 일화입니다. 부처님의 평화운동 가운데는 이것만 있는 게 아니에요. 마가다국이 밧지국 침공하려고 한 것도 막으셨죠.

막았는데 실패한 것도 있어요. 마가다국과 로히니 강은 싸우려던 사람들이 정신을 차려서 깨달았지만, 코살라국의 왕이 석가족을 침공할 때는 부처님이 3일을 가서 길을 막고 명상을 했지만 왕이 결국은 부처님의 말을 안 듣고 석가족을 전멸시켰거든요.

‘되고, 안 되고’로 따지는 결과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붓다는 이렇게 사람을 해치는 무익한 전쟁을 반대하시고 직접 행동을 하셨다는 게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손에 무기를 들고 맞서 싸웠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불자들이 ‘부처님은 세상일에 관심이 없다’ 이렇게 얘기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건 붓다의 인격이 없는 불교, 즉 복 비는 불교를 믿기 때문에 생긴 거예요. 내 복만 빌면 되니까요. 이런 불교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불교인의 인격이랄 게 없습니다. 붓다는 분명히 최후의 유언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의 공덕과 같은 것이 배고픈 사람에게 음식을 줘서 배불리는 것이고, 병든 이에게 약을 줘서 치료하는 것이고, 가난한 자를 돕고 외로운 자를 위로하는 것이고, 청정하게 수행하는 자를 잘 외호하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의 공덕과 같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는 불전에 온갖 음식을 올리거나 엄청난 돈을 보시해도 배고픈 사람을 외면하고 병든 사람을 외면하기가 쉽습니다. 인격이 없는 불교를 믿기 때문에 그래요.

똥밭이라고 앉지도 않고 있던 분들은 이제 반성 좀 하세요. 이런 소중한 자린데 거기 소똥 좀 있다고 해서 안 앉고 서 있으려고요? 이따가 혼을 좀 내야겠어요.” (모두 웃음)

로히니 강변에 소똥, 염소 똥, 사람 똥까지 여기저기 널려있었습니다. 자리를 잡을 때 머뭇거렸던 순례객들에게 스님은 유머러스하게 일침을 놓았습니다.

이어서 로히니 강과 관련한 경전을 읽었습니다. 경전을 읽고 스님은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우리가 흔히 복을 비는 대상으로서의 부처님은 추상적으로 신격화돼 있는 존재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이렇게 성지순례하면서 만나는 붓다는 인간 붓다, 즉 사람으로서의 붓다지만 동시에 사람의 욕망을 초월해 있는 붓다입니다.

그분의 말씀이나 경전에 나오는 얘기들을 들어보면 어때요? 이 로히니 강물을 두고 양쪽이 싸우는 것이 남북이 싸우는 것과 거의 비슷합니다. 우리도 한국 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죽었습니까? 280만 명이 죽었고, 천만 명이 이산가족이 됐고, 그 후유증이 아직도 남아서 이산가족 상봉행사 할 때마다 눈물이 나죠. 과거도 아직 치유가 안 됐는데 또 새로운 전쟁을 하려 드는 것은 어리석기 그지없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감정에 치우치니까 ‘까짓 거 한 판 하지 뭐. 3일이면, 일주일이면 이긴다’ 라고 해요. 물론 이런 문제로 감정이 상하는 건 사실이에요. 그러나 그 감정에 따라서 행동을 해서는 안 돼요. 그 행동의 결과가 엄청나거든요.

예를 들어 부부 싸움만 해도 아이들의 마음에 남는 상처는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 모두 어릴 때 엄마, 아빠가 싸워서 가슴에 상처 입은 게 많이 남아 있죠? 그런데 여러분들이 지금 똑같이 또 싸워가지고 애들이 상처를 입어요. 자기가 싸울 때는 애들이 얼마나 상처 입는 지를 생각을 못 합니다. 어릴 때 아빠가 술 사오라고 하고 엄마를 때리는 모습을 보면서 상처 입었던 사람이 막상 자기가 술 먹고 주정할 때는 아내나 아이들이 얼마나 상처를 입는 지 모른다는 얘기예요.

크게 뭘 깨닫고 뭘 하라는 게 아니에요. 그 순간적 감정만 조금 조절하면 됩니다. 많이 참으라는 것도 아니에요. 순간적 감정을 숨 한 번 돌이킬 정도만 조절해도 우리가 엄청난 불행을 미리 막을 수가 있습니다. 여기는 이런 것을 공부하는 자리에요. 로히니 강물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우리가 조금만 지혜롭게 사물을 보면 평화롭고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아나갈 수가 있습니다. 많은 불교인들이 사회적 실천 활동이 약한 것은 인격이 없는 불교를 공부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지순례를 할수록 인간 부처님의 모습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는 인간 부처님을 찾아 성지순례를 했던 법륜스님의 발자취이기도 하겠지요.

꼴리족이 세운 진신사리탑, 랑그람 Rangram

다음은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랑그람을 참배했습니다. 부처님이 열반하시자 진신사리는 8등분이 되어 각 나라에 모셔졌습니다. 그 중 부처님의 외가인 꼴리족이 세운 이 탑은 사리가 그대로 보존된 유일한 탑니다. 순례단은 부처님을 친견하듯 정성스레 예불 공양을 올렸습니다.

이어서 스님은 한반도의 평화와 더불어 동아시아의 평화를 발원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곳 성지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아쇼카 왕은 8개의 사리탑 중 7개의 사리탑에서 사리를 꺼내서 부처님의 발자취마다 탑을 세웠어요. 부처님이 성도하신 곳, 처음 설법하신 곳, 수행하신 곳 등 부처님의 발자취 흔적이 있는 곳마다 기념탑을 쌓으면서 거기다가 일일이 사리를 넣었습니다.

그런데 아쇼카 왕이 사리를 못 꺼낸 유일한 탑이 꼴리족이 쌓은 이 랑그람 사리탑이에요. 전해 내려오는 바에 따르면 용이 나타나서 ‘이 세상에 나보다 사리를 더 잘 보호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가져가도 좋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잘 보호하고 있으니까 손대지 마라’ 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쇼카 왕도 이 사리탑은 손을 대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 이 동네의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이걸 도굴하려고 누가 손을 댔다가는 다 병들어 죽거나 사고 나서 죽는다고 해요. 그래서 이 동네에서는 이 탑에 손을 대면 안 된다는 얘기가 전해 옵니다.

이 탑은 원래 벽돌로 쌓은 탑인데, 벽돌이 자연히 허물어져서 이런 모양이 됐어요. 벽돌이 흙이 되고, 그 흙에 나무가 자라서 이렇게 된 거예요.”

스님은 랑그람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사리 신앙에 대해서도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육신을 경배하라’ 이런 건 없어요. ‘법에 귀의하고 법을 경배하라’ 이랬죠. 그래도 불교가 종교화되면서 가장 소중하게 여겨지는 게 사리가 되었습니다. 부처님의 유골이 부처님의 흔적으로서 가장 소중하게 됐어요. 원래는 부처님의 말씀이 가장 소중했는데, 종교화되고 신앙화되면서 결국은 부처님의 육신의 흔적인 유골이 가장 소중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모든 사원에서는 사리를 모신 탑이 중심입니다.

그렇다고 한 사람의 유골이 한정 없이 있는 건 아니잖아요. 사리가 귀하다보니 사리가 마치 보석 같은 개념으로 인식되었어요. 이게 또 중국을 거쳐 한국까지 오고 또 동남아로 가면서, 사리는 그냥 유골이라는 개념보다는 화장을 했을 때 나오는 신앙의 결정체 같은 보석 개념으로 점점 바뀌게 됩니다.

그러면 화장을 해보면 그 안에 정말로 그냥 뼈 말고 어떤 결정체 같은 게 있을까요? 실제로 있습니다. 흑연에 열이 가해지면 다이아몬드가 되잖아요. 또 석회석에 열이 가해지면 대리석이 돼요. 학교 공부할 때 변성암이라고 해서 다 들어봤죠? (모두 웃음) 열이 가해져서 성질이 바뀐 거예요. 화학성분을 따지면 똑같은 탄소지만, 높은 압력과 열을 받으면 결정구조가 달라지거든요.

그러니까 우리 몸을 화장해서 태우면 우리 몸에 있는 일부 성분들이 응결되면서 그런 물질이 생기는데, 사리도 분석해보면 원인을 밝힐 수는 있겠죠. 그러나 그것이 신앙과 결합을 해서 마치 수행해서 깨달으면 그런 결정체가 나온다는 듯이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스님들이 아닌 일반인을 태워도 이런 물질이 나올까요? 나옵니다. 일반인은 그걸 일부러 골라내서 강조하지 않지요. 그런데 그런 사리가 수행적 관점에서는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러나 믿음의 관점에서는 그것을 믿는 신앙, 즉 사리 신앙이 있으니까 굉장히 소중하게 여기죠.

어쨌든 이런 사리는 부처님의 흔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을 무슨 추상적인 존재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 와서 이렇게 다녀보니까 어때요? 이런 분이 있었던 것 같아요, 없었던 것 같아요?”

“있었던 것 같아요.”

“있었던 것 같죠? 약간 신비주의적으로 묘사된 부분도 있지만, 이 세상의 종교 중에 그 종교의 교주를 이렇게 가능하면 사실적으로 묘사한 경우는 제가 볼 때는 많지가 않습니다. 성경을 비롯해 다른 경전을 봐도 그래요. 본인이 한 얘기가 가능하면 기록에 남아 있고 본인의 얘기가 이렇게 굉장히 합리적으로 서술되어 있는 경우는 사실 좀 드물어요.

자, 여기까지 이제 말씀을 드리고요. 어제 열반당도 갔고, 카필라바스투도 가서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의 얘기도 들었는데, 여기에 대해서 뭐 의문이 있으면 마침 그늘도 좋으니까 몇 가지만 질문을 받겠습니다. 질문 있으면 하세요.”

이어서 앉은 그 자리에서 야단법석이 열렸습니다. 한분이 바로 손을 들어 “왜 부처님 시대에 비해 요즘 시대에는 깨닫는 사람이 적습니까? 재가신자인 우리들 중에도 깨닫는 사람이 있을까요?” 라고 물었습니다.

스님은 40여 분간 자세히 설명해주었습니다. 그 중 한 대목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성지순례를 하는 것은 우선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는 것이고, 동시에 불편한 상황을 마주할 때 자기의 마음을 보는 기회를 갖는 거예요. 사람이 몸과 마음이 불편하면 화가 나고 짜증이 납니다. 배고픈데 밥 안 주면 짜증나고, 추운데 안에서 문을 안 열어주면 신경질이 나게 되죠.

사람의 원래 모습이 그래요. 환경이 열악할 때 자기 까르마가 잘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럴 때 자기 감정에 치우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10년 공부 도로아미타불’ 이라는 말을 하는 거예요. 오랫동안 열심히 수행을 해도 어느 경계에 탁 부딪히면 원래 있던 자기 업식대로 탁 반응을 합니다. 그래서 주변에서는 훌륭한 인격이라고 해도 시장터에 앉아서 생선 장사 오래 시켜보면 대부분 신경질을 냅니다.

그래서 스님들보다 오히려 여러분처럼 일상생활을 하는 와중에 수행을 하는 게 참 어려운 일이에요. 다른 사람과 같이 살면서 신경질 안 낸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차라리 스님처럼 혼자 살면 부딪힐 일이 적어서 수월해요. 남편이나 아내, 아이들이 내 말을 안 듣는 모습을 보면서 짜증 안 내고 사는 게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연습을 하는 게 실천적으로 더 깊은 공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수행에 있어서도 형식과 모양에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질문자가 재가신자 중에도 아라한과를 증득할 수 있냐고 물었는데, 물론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이미 이러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사회적 인식 때문에 비구니 제도를 승낙하시기까지 시간이 걸렸는데, 출가한 비구니들 중에도 아라한과를 얻었다는 게 경전에도 나옵니다. 그 수로 말하면 비구 못지않아요. 재가자 중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 제자 중 재가수행자 중에도 아라한과를 증득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만 경전이 출가수행자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고, 그 중에서도 비구 중심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주로 비구 출가수행자들이 아라한과를 많이 증득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여러분이 재가수행자여도, 또 여성수행자여도 얼마든지 아라한과를 증득할 수 있습니다. 저는 수행을 통해서 그 길을 여러분들에게 열어주려고 하는데, 오히려 여러분들이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아요. (모두 웃음)

지금 처한 상황이 어떠하든 누구나 다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아주 큰 혜택이에요. 이 길을 여는 과정에서 마주하는 기존 불교계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정토회는 이 길을 계속 가고 있는데, 여러분들은 오히려 신자 되기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모두 웃음)

믿고 복 받는 게 수월한 길이긴 합니다. 그렇지만 자기의 까르마는 자기가 이겨내야 합니다. 돈은 누가 대신 벌어줄 수 있고, 병도 누가 대신 치료해 줄 수 있지만, 자기 마음 작용에 대해서는 누가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자기 까르마를 이겨내는 일도 누가 대신해 줄 수가 없습니다. 이건 머리를 깎고 출가한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출가할 때는 경건한 마음과 의식이 있으니 잠시 바뀐 것처럼 느껴질 수는 있어요. 그렇지만 까르마를 이겨내는 게 머리를 깎는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만약 그렇다면 누구나 이발소에만 가면 다 이겨낼 수 있겠지요. (모두 웃음)

평복이 아니라 승복을 입어서 깨닫는 것이라면 누구나 이 옷 한 벌만 맞춰 입으면 되겠지요. 그런데 이 마음 작용이라는 것은 머리를 어떻게 하든, 어떠한 옷을 입든, 그런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자꾸 누구를 추앙하거나 부러워할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자유와 해탈, 자기 자신의 행복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추울 때 짜증이 올라오는 마음을 보고 ‘그래, 이럴 때 추위를 조금 느껴보는 것도 괜찮아’ 이렇게 마음을 내고, 배고플 때 ‘그래, 이럴 때 한 끼 굶는 것도 괜찮아’ 이렇게 마음을 내서, 자기 까르마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바깥의 백만 대군을 이기는 것보다 내 자신을 이겨내는 것이 진정한 영웅이고, 그래서 우리는 부처님을 자신을 이겨낸 큰 영웅, 대웅(大雄)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부처님을 모시는 곳을 대웅전(大雄殿)이라고 합니다.

성지순례를 시작할 때 우리가 마주할 열악한 환경이 결코 나쁜 조건이 아니라는 말씀을 드린 거예요. 경계에 부딪히는 내 마음을 보려는 사람에게는 열악한 환경이 결코 나쁜 게 아닙니다. 이상한 남편, 말 안 듣는 자식을 가진 것도 수행적 관점을 가진 사람에게는 결코 나쁜 환경이 아닙니다. 수행적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힘든 환경이지만, 수행적 관점을 가진 사람에게는 그 환경들이 내 까르마를 계속 드러나게 해줍니다. 까르마가 묻혀 있으면 내가 어떤 까르마를 가졌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주변에서 계속 건드려줘야 내가 가진 업식을 알 수 있어요. 그런 환경에 처해야 내가 나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적 관점을 가지면 똥이 바로 거름이 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똥이나 거름이나 같은 거예요. 같은 물건을 두고 이렇게 보면 똥이고, 저렇게 보면 거름이 됩니다. 여러분들은 똥으로 보는 것을 인도 사람들은 불쏘시개로 보잖아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똥이라며 버릴 때 인도 사람들은 그걸 얼른 주워가는 거예요. (모두 웃음)

우리는 인도에 오니 춥다, 덥다 하지만 인도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 어떨까요? 우리는 버스를 오래 타니까 엉덩이가 아프다고 하지만, 이곳 현지 버스를 타는 사람들이 우리 버스를 보면 좋아 보입니다. 우리는 대충 차려서 먹는다고 하지만 인도 사람들이 우리가 먹는 음식을 보면 좋은 편이에요. 잠자리가 불편하다고 하지만 처마 밑에서 자는 사람들이 우리 잠자리를 보면 아주 좋은 편이에요. 우리는 며칠 옷을 제대로 못 갈아입어서 불편하다고 하지만 이곳 사람들이 볼 때는 어떨까요?

그런 것들은 다 자기 기준에서 문제가 되는 겁니다. 객관적인 기준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없어요.”

어느덧 햇살이 지고 날이 쌀쌀해지고 있었습니다. 다른 질문은 저녁법회에 또 이어서 받기로 했습니다.

나오는 길에 이 지역 아이들에게 사탕을 주었습니다. 이 지역 아이들도 사납기로 유명해서 줄 서는 연습부터 한 후 사탕을 차례차례 나누어주었습니다.

이렇게 오늘 순례 일정을 마치고 다시 대성 석가사로 돌아왔습니다. 석가사에서 준비한 맛있는 공양을 도반들과 함께 먹은 후 대웅전에 모여 가사를 수하고 저녁예불을 드렸습니다.

즉문즉설

예불 후에는 바로 이어서 스님의 즉문즉설 시간이 진행되었습니다. 스님은 먼저 전통적으로 지어진 대성 석가사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전통사찰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순례한 성지와 부처님의 일생, 앞으로의 일정을 설명해주며 불교의 핵심에 대해 설법해주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요지가 무엇일까요? 부처님께서는 왜 왕궁에 좋은 음식을 놔두고 굳이 걸식을 하고, 좋은 옷을 두고 굳이 시체를 둘러싼 천을 입고, 좋은 집을 두고 굳이 나무 밑에서 지내셨을까요? 어떻게 보면 조금 이상한데, 왕자로서 호위병을 거느릴 때는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하고 괴로웠는데, 성도 후에는 마음이 편안해지셨다는 것을 아셔야 해요.

왕은 온갖 것을 다 갖긴 했지만 그것을 주로 남을 괴롭히는데 사용합니다. 좋은 물건이 있으면 빼앗고, 좋은 음식이 있으면 빼앗잖아요. 그런데 부처님은 아무 것도 갖지 않았지만 남의 것을 빼앗지 않고, 세상 그 누구보다 사람들에게 많이 베풀었습니다. 늘 괴롭고 힘든 사람들에게 베푸는 삶을 사셨어요. 왕은 모든 것을 가졌지만 주로 남을 괴롭히는 삶을 살고, 부처님은 아무 것도 갖지 않으셨지만 숨넘어가는 순간까지 타인에게 베푸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왕은 늘 괴롭다고 아우성을 치고, 부처님은 늘 안온하셨습니다.

이건 누가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삶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점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도대체 이 삶이 무엇일까?’ 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출가는 복을 구하기 위해서 또는 죽어서 천상에 태어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세상 모두를 위한 길이기 때문에 떠나는 것입니다.

불교의 요지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현실을 잘 진단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살이는 고달프고 괴롭습니다. 여기에 동의하십니까? 안 하죠. 인생이 재미있다고 느끼잖아요. (모두 웃음)

여기서 말하는 괴로움 속에는 슬픔, 외로움, 허전함, 미움이 다 포함됩니다. 이 괴로움은 우리의 정신작용 중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모든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정신작용에는 기쁨, 즐거움, 재미도 있는데 이러한 작용들도 아주 깊이 관찰해보면, 마치 많이 올라간 파도가 많이 내려가듯이 즐거움에는 반드시 괴로움이 한 쌍으로 따라다니고, 큰 즐거움에는 그만큼 큰 괴로움이 한 쌍으로 따라다닙니다. 이 즐거움과 괴로움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인데, 우리는 주로 괴로운 면은 없애고 즐거운 면만 가지려고 합니다.

이것을 자기 삶에 잘 적용해서 보면 즐거움과 괴로움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즐거움이 큰 만큼 괴로움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 괴로움을 고(苦)라고 하고 즐거움을 락(樂)이라 하여, 고(苦)와 락(樂)이 윤회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즐거움이라는 것도 그 본질은 괴로움입니다. 이것을 꿰뚫어야 ‘인생은 괴로움이다’ 하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자꾸 ‘인생이 왜 괴롭습니까? 인생에는 즐거움도 있지 않습니까?’ 하는 질문을 자주 하는데요. 즐거움은 반드시 괴로움을 수반하기 때문에 그 본질은 괴로움입니다. 그러니 즐거움의 본질이 괴로움임을 꿰뚫어야 고집멸도(苦集滅道) 중 인생은 괴로움이라고 하는 첫 번째 관문 고성제(苦聖諦)를 제대로 이해하는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절에 오래 다녀도 즐거움과 괴로움으로 나뉘어진 것 중에 즐거움이 곧 괴로움이라는 것을 체감하지는 못합니다. 즐거움이 곧 괴로움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성도 전 마왕의 유혹 중 아름다운 여인들을 마주했을 때 부처님께서 ‘잘 채색된 가죽 포대에 똥만 가득찬 것들아!’ 라고 외치신 겁니다. 여기서 잘 채색된 가죽 포대가 즐거움을 뜻하고, 똥이 곧 괴로움을 뜻합니다. 즐거움과 괴로움이 둘이 아니라는 의미예요.

그리고 야사 비구가 저녁에는 즐겁게 놀았지만 새벽에 눈을 떠보니 사람들이 잠에 취해 뒹구는 모습이 마치 시체더미 같이 느껴진 것도 즐거움이 곧 괴로움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부처님의 일생에서 배우는 일화 중 부처님이 출가하시기 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생깁니다. 무도회장에서 즐겁게 놀았는데 새벽에 사람들이 엎어져서 자는 모습이 마치 시타림과 같았다고 나옵니다.

이런 일화들은 모두 다 즐거움이 곧 괴로움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이걸 꿰뚫지 않으면 해탈의 길이 열리지 않습니다. 이걸 꿰뚫어 보지 못하면 아무리 굶으며 단식하고, 명상을 하고, 절을 많이 해도 진척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첫 단계를 넘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즐거움의 본질이 괴로움이라는 것을 체험적으로 꿰뚫어야 해요.”

인도에서 겪는 새로운 경험과 빡빡한 일정이 익숙해질 즈음, 스님의 말씀에 성지 순례하는 목적을 다시 되돌아보게 됩니다. 이어서 순례하면서 궁금했던 점에 대해 즉문즉설하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 부처님께서 적극적으로 사회활동을 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 성지순례를 하며 플라스틱 물병, 비닐에 든 핫팩을 사용하니 불편한 마음이 듭니다.
  • 부처님 생전에는 아라한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현재는 왜 그렇지 않을까요?

즉문즉설까지 모두 마치고 나니 밤 9시가 넘었습니다. 오늘 하루도 길었습니다. 순례객들은 조별로 나누기를 하고 내일 도시락을 준비한 뒤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내일은 다시 국경을 넘어 인도로 와서 삐쁘라하와 진신사리탑을 참배하고 부처님께서 가장 많은 안거를 지내셨던 쉬라바스티로 갑니다. 내일 또 소식 전하겠습니다.

전체댓글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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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

즐거움 뒤에는 그림자처럼 괴로움이 반드시 따른다는 말씀 깊이 새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9-01-28 09:26:08

김혜경

감사드립니다. 부디 건강하소서.^^

2019-01-22 07:09:51

큰바다

즐거움이 곧 괴로움임을 꿰뚫어보는 것이 수행의, 행복으로 가는 출발점이다. 귀한 가르침 감사합니다.

2019-01-20 15: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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