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9.1.18 인도 성지순례 14일째 (아그라)
“인도 시장에서도 불법을 경험할 수 있어요.”

안녕하세요. 오늘은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인도 성지순례를 떠난 지 14일째 되는 날입니다.

어제 가사를 반납하고 회향을 한 순례객들은 오늘은 아그라성을 관람하고 성지순례 전체를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새벽 5시, 상카시아에서 아그라로 출발했습니다. 기도를 하고 한숨 자고 나니 아그라 외곽에 다 달았습니다.

한 순례객이 순례가 끝나가는 것을 아쉬워하며 “돌아보니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네요.”라고 하니 스님은 “힘든 거 없어요. 여기 13억 사람이 사는데요.”라며 웃었습니다.

야무나 강을 건너자 곧바로 높게 솟은 붉은 성벽으로 이루어진 아그라성이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아그라성 앞에 버스를 정차시키고 모두 내려서 도시락으로 아침 식사를 했습니다. 대중들이 어느 정도 식사를 마치자, 아그라성을 배경으로 스님은 공터 한가운데 서서 아그라, 아그라 성, 타지마할, 인도의 역사 전반에 대해 개괄적인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아그라 Agra

“무굴제국의 3대 왕이 악바르 대제입니다. 그는 인도 역사에서 아쇼카왕 다음으로 위대한 왕으로 추앙받는 인물인데, 악바르 대제 때 무굴제국의 영토가 전 인도를 통치하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이 아그라성은 악바르 대제가 8년 여에 걸쳐 쌓은 성인데, 처음에는 궁궐이라기보다는 군사적 요새 목적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후 군사 요새 안에 궁궐을 짓고, 이곳으로 수도를 옮겨오면서 왕이 머무르는 정식 궁궐이 되었습니다.

무굴제국은 330년 정도 유지된, 인도 역사에서는 보기 드문 제국이었습니다. 초반 30년은 건설기, 그 후 100년은 융성기, 그 후 100년은 우여곡절기, 그리고 마지막 100년은 이름만 유지되었다고 볼 수 있어요. 무굴제국은 무슬림에 기반을 둔 사람들이 건설한 나라이기 때문에 인도 문화에 무슬림 문화가 스며드는 문화적 특징을 만들기도 한 제국입니다. 그 정도의 역사적인 배경을 염두에 두고 성 안에 들어가서 둘러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방어적 성격의 성을 떠올리면서 흔히 우리나라에서 접하는 성과 어떻게 비슷하고 또 어떻게 다른지를 눈여겨보시기 바라고요. 궁궐로서 이곳은 얼마나 크고 화려하게 지어졌는지도 한 번 보시면 좋겠습니다.”

대중들은 아그라성을 관람한 후 처음으로 쇼핑센터도 자유롭게 돌아보았습니다. 그 사이 스님은 먼저 숙소로 돌아와 숙소를 점검하고 저녁 프로그램을 준비하였습니다.

성지순례를 정리하며

3시부터 성지순례를 총 정리하는 법회가 열렸습니다. 호텔에 결혼식이 잡혀 강당을 쓸 수 없어 야외 잔디밭에 자리를 깔고 가설무대를 설치했습니다.

“16박 17일 인도 성지순례에서 오늘이 15일째입니다. 2주가 후딱 지나갔는데, 날짜가 참 빨리 지나가죠? 한국에서 출발할 때는 ‘2주나!’ 이랬는데 인도에 와서 지내보면 이것도 부족해요. 한 달 다녀도 부족합니다. 빨리 한국으로 가고 싶은 사람 손들어 봐요. 솔직하게 들어봐요. 내리세요. 좀 더 있다 가고 싶은 사람 손들어 봐요. 내리세요.” (모두 웃음)

여행이라면 여행이지만 우리는 여행이 아닌 순례를 했어요. 수행자들이 성지를 찾아서 떠나는 순례를 한 겁니다.

그렇게 원하고 원하던 출가를 했지만 막상 야외에서 살아보고 밥을 얻어먹어보니까 생각하고 실제 하고는 다르다는 것을 경험했다고 부처님도 표현을 하셨잖습니까? 생각은 우리가 뭐든지 할 수 있지만 몸은 집착이 강합니다. 여러분들도 보름간 열악한 환경에서 수행을 한 것 같지만 여기 호텔에 와서 따뜻한 물에 샤워하니까 ‘이게 내 스타일이야!’ 이러면서 바로 탁 돌아오죠?” (모두 웃음)

“네!”

“그것처럼 싯다르타도 아무리 수행이 좋아 보이고 원을 크게 세웠어도 막상 성 밖을 나가 있어 보니 추운 것, 배고픈 것, 독충이 무는 것, 냄새나는 돼지죽 같은 음식을 먹어 보니 구역질이 나는 것을 견디기가 어려웠던 거예요.

그러다 보니 자꾸 마음의 다짐이 흐트러지잖아요. 여러분들도 여기 와서 성지 순례한다고 원을 세웠지만, 똥오줌 누기가 불편하고, 먼지를 덮어쓰고, 저녁에 씻으려는데 물이 안 나오고, 전기 불이 안 들어오니까 짜증이 확 나잖아요. 그러니 우리들의 마음이라는 것은 사실은 믿을 게 못 돼요. 조금만 자극을 주면 각오니 결심이 온데간데 없어져버립니다. 싯다르타도 우리보다 결심이 더 강했는지 모르지만 그 과정이 쉽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해서 그분의 인격이 떨어진다는 게 아니에요. 바로 그런 모습이 우리들에게는 오히려 사실적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스승을 찾아서 길을 떠났는데, 그때 이런 삶의 습관 때문에 오는 힘듦과 거기에 자기가 집착돼 있는 것을 보면서 크게 발심을 하죠.

‘이러려고 네가 지난 10여 년간 그렇게 출가하기를 원했느냐?’

이렇게 자기를 다잡고, 또 중생의 고통을 생각하면서 ‘내가 지금 안일에 빠져 있다’ 이렇게 발심을 하게 된 거예요. 나중에 제자들 중에도 이런 사례가 많았습니다. 부처님은 자기가 그런 경험을 했기 때문에 그들을 이해했고, 또 그걸 극복했기 때문에 그들을 깨우쳐줄 수 있었습니다."

스님은 먼저 부처님의 출생에서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의 일생과 불교의 역사에 대해 정리해주었습니다. 법문 중간중간 자상한 선생님처럼 “이건 기억하시죠? 까먹으면 안 돼요. 다 기억해야 돼요.”하며 중요한 지점도 꼼꼼히 짚어주었습니다.

“아쇼카 왕 때에 이르러서 인도에서 인도 대륙 밖으로 많은 전법사들이 전법의 길을 떠났습니다. 남쪽으로는 스리랑카, 동쪽으로 미얀마까지 이 법이 퍼져나갔습니다. A.D 1세기경에는 중국에까지 법이 전해졌고, 한국에도 오게 됐어요. 한국에는 중부 인도에 있는 아유타국에서 파견된 장유화상과 아유타 공주가 가야로 들어와서 김수로왕의 부인이 되고 전법이 이루어졌는데 이때가 AD 48년입니다. 중국은 서역을 거쳐서 후한으로 들어왔어요. 한나라가 전한과 후한으로 나뉘는데, 후한 명제 때인 AD 67년에 불교가 처음 전래됐습니다.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300년이 지난 뒤인데, 전진왕 부견이 순도 화상을 파견해서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됐어요. 그다음에 남조인 동진에 와 있던 마라난타 대사가 384년에 백제에 불교를 처음 전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고구려, 백제, 중국을 거쳐서 온 불교로 치면 불교 역사가 1650년 정도 되고, 가야를 통해 우리에게 바로 들어온 것으로 치면 2000년의 역사가 됩니다. 왜 우리 역사에서는 가야 것은 빼버리고 고구려와 백제 것만 강조했냐 하면 우리가 중국보다 불교가 먼저 들어왔다고 하면 좀 잘못된 것처럼 생각하는 사대주의 유생들 때문이에요. 이렇게 우리의 불교사가 1600년이라고 말하는 것은 앞으로 2000년으로 시정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고구려에 와 있던 아도화상이 신라에 불교를 전했는데, 당시 신라에서는 불교를 금지했기 때문에 몰래 전했어요. 그러다가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가 공인되면서 한국이 불교국가가 됐습니다. 그러나 고려 말에 와서 불교가 너무 부패해서 결국은 유생들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정권을 잡고, 권력만 탈취한 게 아니라 불교도 탄압을 했어요. 그래서 조선왕조 500년 동안 극심한 탄압을 받은 끝에 불교가 거의 훼손됐는데, 용성 진종조사님이 출현하셔서 이 훼손된 불법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그래서 근대 한국 불교의 중흥조라고 말하죠. 이렇게 해서 오늘날 불교의 모습은 과거의 그런 잘못된 유산과 새로운 불교 운동의 기운이 뒤섞여 있는 가운데 현재 우리가 불교를 만나고 있습니다.

정토회는 용성진종조사의 새로운 불교 쪽을 계승했습니다. 불교를 새롭게 하시고 3.1 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불교계 대표로 서명하셔서 독립운동을 하신 용성 조사의 법을 계승해서, 동헌 완규 대사와 불심 도문 대사를 거쳐서 지금 지광 법륜에 이르러서 오늘의 정토회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불교의 긴 역사인데요.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한국에서부터 정법을 다시 일으킬 수 있을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사람들의 고뇌를 부처님의 법으로 어떻게 행복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안내하느냐는 거예요. 그것이 불교 중흥이지, 절 짓고 세력을 키우는 게 불교 중흥은 아닙니다.

동시에 오늘날 전 세계의 고뇌하는 사람들이 이 법을 만나서 좀 더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가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도 고민하고 모색해야 합니다. 이것이 정토행자의 서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순례를 하는 것이지, 인도 여행하려고 여행사에서 사람 모으듯 해서 오는 것은 아닙니다. 불교가 처음에 시작됐던 부분을 보면서 ‘지금의 우리가 어떤 길을 갈 거냐’라는 질문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답을 찾고자 우리가 이렇게 순례를 하고 있어요.”

그리고 순례 일정에 따라 순례지를 중심으로 다시 한번 쭉 되짚어보았습니다. 바라나시에서 시작해서 둥게스와리, 보드가야, 라즈기르, 바이샬리, 쿠시나가르, 룸비니, 카빌라바스투, 쉬라바스티, 상카시아까지 순례했던 지난날이 새록새록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스님은 여정 중에 석가족 멸망에 대한 설명이 빠졌다며 상세히 이야기해주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부처님이 속한 석가족의 멸망 얘기를 안 해드렸네요. 석가족 멸망 얘기는 스토리가 이래요. 코살라국 왕인 빠세나디(프라세나짓) 왕이 부처님의 제자가 된 뒤에 석가족을 굉장히 좋게 생각했어요. 당시 카필라 국은 코살라국의 속국이에요. 우리가 옛날에 청나라 속국으로 있었듯이 속국이라 해도 완전히 통합된 건 아니고 독립돼 있는 관계였어요. 빠세나디 왕은 석가족을 좋게 생각했기에, 석가족에게 자기 후비로 삼을테니 공주를 하나 보내라고 했어요.

그런데 석가족은 자존심이 엄청나게 세서 코살라국의 왕인 빠세나디 같은 사람들을 오히려 좀 천하게 봤어요. 자기 종족이 이 세상에서 제일 고귀하다고 생각했거든요. 한국 사람들이 중국 사람들을 ‘되놈’이라고 하면서 좀 우습게 보는 것과 좀 비슷해요. 그래서 공주를 안 보내고 시녀, 즉 궁녀 중에 예쁜 사람을 뽑아서 훈련시켜서는 공주라며 시집을 보낸 거예요.

그런 줄 모르는 코살라국 왕은 이 궁녀를 석가족 공주라고 엄청나게 예뻐하고 사랑했어요. 그래서 그 사이에 난 아들이 비두다바(Vidūdabha, 비유리)입니다. 부인이 많으니까 왕자도 많았겠죠. 당시에는 결혼 동맹을 맺었으니까 빔비사라 왕의 딸도 있고 카시국의 공주도 있었어요. 다른 왕자들은 다 엄마 따라 외가에 갔다 오는데, 비두다바의 어머니는 자기가 궁녀 출신이니까 친정에 안 간단 말이에요. 그러다가 애가 계속 조르니까 할 수 없이 카필라성에 갔어요. 우리로 말하면 원나라나 청나라로 시집갔던 왕비가 온 셈이에요.

그래서 카필라국은 공식적으로는 행사를 열어 접대를 하지만 속으로는 ‘에이그, 저건 천한 놈이다’ 이렇게 비웃었단 말이에요. 어쨌든 공식 행사를 모두 마치고 돌려보냈는데, 왕자가 가다 보니까 뭘 잊어버리고 왔어요. 말을 타고 다시 가지러 와보니, 하녀들이 자기가 머물렀던 방을 청소하면서 ‘에이, 더러워’ 하고 소금을 뿌리는 거예요. 그래서 큰 충격을 받고 돌아와서 어머니한테 도대체 무슨 일이냐며 따지고 물었습니다. 어머니가 말을 안 할 수가 없어서 전후 사정을 얘기했어요. 그래서 이 왕자가 석가족에 대해서 엄청난 원한을 갖게 된 겁니다.

그런데 비두다바가 자라서 열여덟 살에 쿠데타를 일으켜서 왕이 됐습니다. 빠세나디 왕이 빔비사라 왕의 마가다국에 친선 방문을 간 사이에 쿠데타를 일으켜서 왕이 되고는 성문을 닫아서 아버지가 못 들어오게 했어요. 그렇게 왕이 되어 권력을 잡고는 제일 먼저 한 게 석가족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었습니다.

‘남자는 한 사람도 남김없이 다 죽여버려라.’

석가족을 공격한다는 소식을 부처님이 듣고, 대낮에 햇빛이 쨍쨍한 가운데 그 군대가 지나가는 길에 앉아서 딱 명상을 하고 계셨어요. 군대를 이끄는 장군이 지나가다가 물었어요.

‘부처님이시여, 왜 여기 계십니까? 나무 그늘이 좋은 저쪽에 계시지 않고요.’

그러자 부처님이 이렇게 답하셨어요.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그늘은 친족의 그늘입니다.’

그랬더니 이 장군이 그냥 돌아갔어요. 인도의 풍습은 길을 가다가 출가사문이 길을 막고 있으면 밀치고 가지 못하도록 돼 있습니다. 예법이 그래요. 그래도 왕의 명령이 떨어졌으니까 안 갈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이튿날 또 갔는데 부처님이 또 앉아 있어요. 똑같은 일이 반복된 거예요.

세 번째 돌아와서는 왕한테 엄청나게 혼이 났어요. 이제 부처님이 계셔도 자기는 갈 수밖에 없게 된 거예요. ‘이제 부처님이 계셔도 그냥 지나가겠다’라고 결심을 딱 하고 왔는데, 와보니까 부처님이 안 계세요. 그래서 카필라성을 침공해서 보이는 족족 다 죽였습니다.

이때 카필라성의 왕이 부처님의 사촌동생이에요. 부처님 쪽은 다 출가를 해버렸어요. 부처님이 출가하고 부처님의 이복동생인 난다가 출가해버리고 부처님의 아들인 라훌라도 출가해버리면서 여기는 대가 끊어져서 정반왕 동생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한 거예요. 그런데 이 왕이 장군에게 사정을 했어요.

‘내가 연못에 뛰어들어서 나올 때까지만 죽이는 걸 멈춰 주시오.’

내가 나오면 다시 죽여도 좋다 이거예요. 장군이 생각해보니 연못에 들어가서 숨 참다가 나와본들 기껏해야 1분, 2분, 길어야 5분이잖아요. 도망가도 말을 타고 쫓아가면 눈깜짝할 사이에 다 따라가서 죽일 수가 있고요. 그래서 약속을 했어요.

그렇게 사람들을 도망가게 하고 왕은 물에 뛰어들었는데, 1분이나 2분, 기껏해야 5분이면 나오겠지 했던 사람이 10분이 지나도 안 나와요. 그래서 군대를 동원해 양동이로 물을 막 퍼냈어요. 퍼내고 봤더니 이 사람이 물에 뛰어들어서는 머리를 풀어가지고 나무뿌리에다 묶어놓고 죽어버린 거예요. 그래서 물에 떠오르지 않았던 거죠. 그러다 보니 몇 시간이 걸렸을 거잖아요. 이때 도망친 일부가 살아남아서 석가족이 지금까지 존속될 수 있었던 거예요.

도망친 사람들은 성씨를 바꿨겠죠. 그래서 현재 인도에서 샤카족(석가족)의 후예라고 보는 성이 다섯 개입니다. ‘샤카’라고 그대로 쓰는 사람도 있고, ‘모레아’라고 쓰는 사람도 있고, ‘꼴리’라고 쓰는 사람도 있고, 다섯 종류가 있는데 이게 다 샤카족의 후예입니다. 우리나라도 왕씨들을 죽일 때 왕씨가 도망가서 유씨가 됐기 때문에 왕씨와 유씨는 결혼을 안 합니다. 그것과 마찬가지예요.

결국 출가한 부처님이나 그 뒤를 따라 출가한 사람은 다 살아남았고, 세속의 이익을 추구하던 사람들은 결국 비참한 죽음을 당하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어쨌든 그들이 흩어져 어찌 어찌 살아남아서 계급은 현재 수드라, 즉 평민 계급이고, 현재 다섯 개의 성으로 나뉜 채 인도에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강대한 나라가 작은 나라를 없애고 통합하는 하나의 역사지만 거기에 이런 원한까지 겹쳐 있었어요. 이것도 지은 인연의 과보라고 볼 수도 있겠죠.

아자타샤트루(아자타삿투) 왕이 밧지족을 침공할 때는 부처님이 설득해서 막았고, 로히니 강물의 분쟁도 막았어요. 코살라국이 원한에 사무쳐서 샤카족을 침공할 때는 부처님이 나섰으나 그 사람이 부처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전쟁을 막지는 못했지만, 부처님이 그런 실천적인 활동을 하셨다는 점에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부처님의 인격을 제대로 이해해야 부처님이 어떤 실천적 활동을 하셨는지를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한 시간 반 동안 성지순례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법문을 들은 뒤 대중들은 조별로 소감문을 작성하고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같은 성지순례를 했지만, 저마다 느끼고 배운 것은 다 달랐습니다.

오후 6시에는 다시 잔디밭에 모여 차량별로 대표로 한 명씩 소감문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삼귀의를 의례적으로 하던 부처님이 인간 붓다로 다가왔습니다. 여기에 부처님이 앉아계셨구나. 뭉클했습니다.’

‘무너진 벽돌 무더기 속에서 2600여 년 전 신화 속 붓다를 살아 숨 쉬는 분으로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필요 이상으로 가지고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짜이 한잔에도, 물 한 방울에도 감사했습니다.’

‘나 자신과 만나는 시간이었습니다.’

소감문 발표와 더불어 성지순례를 하며 개선하면 좋을 점에 대해서도 건의했습니다. 발표가 모두 끝나자 스님은 잘 들었다고 하며 개선사항에 하나 하나 함께 검토해보았습니다.

오늘 대중들은 자유롭게 쇼핑할 수 있는 시간도 가졌는데요. 스님은 그 속에 담긴 법(法)의 이치에 대해서도 알려주며 이 시간을 마무리했습니다.

“인도를 이해하려면 길거리만 봐서는 조금 부족합니다. 그래서 물건값을 깎아도 보고, 비싼 곳에서 바가지도 한 번 써보는 게 좋은 경험이 됩니다. ‘제법이 공(空)하다’는 이치 속에는 원래 정해진 가치가 없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정가제가 이치적 관점에서 보면 딱 부합하는 것은 아니에요. 이치로 보면 내 것, 네 것 하는 소유도 없지만, 어떠한 것에 매겨지는 가치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정가제 문화 속에서 지내기 때문에, ‘이것의 정가가 얼마입니까?’ 이런 질문을 자주 합니다. 인도에서는 그런 게 없습니다. 100달러 달라고 하던 물건도 10분 지나면 10달러 달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더 지나면 100루피 달라고 해요. 어떤 때는 공짜라며 가지고 가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공짜로 주는데도 또 못 들고 오게 됩니다. (모두 웃음)

이런 게 일종의 심리전이고, 우리의 마음 작용입니다. 특히 바라나시로 들어가는 골목길에 있는 상점들은 공부하기 아주 좋은 장소입니다. 예전에는 순례자들 공부시키는 곳으로 들르곤 했는데, 그곳에는 한국에서 몇 만 원씩 하는 염주인데, 거기에서 쇼핑하도록 두면 한 사람이 1000 루피 하는 걸 700루피에 샀다면서 자랑하듯 버스에 오릅니다. 그러면 조금 이따가 다른 사람이 같은 물건을 500루피에 사서 올라와요. 그러면 조금 전까지만 해도 300루피나 깎았다면서 좋아하던 사람이 금세 ‘아니, 나한테 사기 친 거잖아!’ 합니다. (모두 웃음)

그러다가 또 조금 있으면 300루피에 사서 오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면 이번에는 500루피에 샀다고 좋아하는 사람의 기분이 안 좋아집니다. 결국 맨 나중에 사서 오는 사람이 제일 싸게 주고 와요. 그런 곳에서 파는 물건들은 버스가 출발하기 직전에 그냥 가려고 하면 ‘10루피, 10루피!’ 이러면서 제일 싼 값에 주거든요.

그 일이 있고 나면 사람들이 저 물건 원가가 얼마인지 물어옵니다. 사람마다 각기 다른 값을 지불하고 사니까 도대체 원가가 얼마인지 궁금한 거예요. 그때 제가 이렇게 대답해 줍니다.

‘원가가 없다.’ (모두 웃음)

그런데 실제로도 원가가 없습니다. 파는 사람이 기분이 좋으면 공짜로도 줘요. 그래서 이곳에서 물건을 사다 보면 때로는 너무 깎아줘서 오히려 사는 사람이 ‘이걸 이렇게 팔아서 괜찮나’하고 걱정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런 걸 체험할 수 있는 곳이 인도입니다.

이 세상에 값이 정해진 건 없어요.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 둘 다 좋으면 그것이 곧 값이에요. 그러니 앞으로는 물건의 정가를 너무 따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법의 이치를 봐도 물건값은 정해진 것이 없고, 물건을 사고파는 두 사람이 정하는 것이 값입니다.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쇼핑 시간 배정을 한 거예요. 이런 경험을 갖고 법문을 들으면 훨씬 쉽게 다가오는 게 많아요. 그래서 제가 오늘처럼 이런 좋은 호텔에서도 자보게 하고, 아주 허름한 순례자 숙소에서도 자보게 하는 겁니다.

스님의 법문은 들을 때뿐이지 내일은 다시 자기 습관대로 다 살아가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자기 스스로 모순을 느낀 것은 오래갑니다. 그래서 오늘 비싼 호텔에 온 것도 의미가 있어요. 그러니 ‘왜 스님이 이런 비싼 호텔에 우리를 데리고 오나’라고 의아해하지 마세요. ‘인도라는 곳은 이런 계층도 있고, 저런 계층도 있고, 짜이 한 잔에 3루피 주는 곳도 있고, 커피 한 잔에 몇 천 루피씩 주고 사야 하는 곳도 있고, 이런 곳이 인도이구나!’ 하는 것을 경험해 보라고 하는 것이니까요.

우리가 너무 시골만 다니다 보면 인도를 너무 우습게 알기 쉬워요. 그래서 내일 델리에 가서 화장실에 줄도 좀 서보고 도시가 갖는 다른 모습도 좀 보셔야 해요.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아직 인도도 건물의 외형만 클 뿐이지 정교함은 떨어집니다. 아마도 이런 문화까지 바뀌려면 한 10년~20년 정도 더 지나야 되지 않을까 싶어요.”

마지막까지 애정 어린 조언을 듬뿍 쏟아내어 준 스님에게 모두 큰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이렇게 강연을 모두 마치고 저녁 만찬 시간을 가졌습니다. 지난 15일 동안 낡은 순례자 숙소에서 세수도 제대로 못하고 꾀죄죄하게 다녔는데, 오늘은 고급 호텔에서 하룻밤을 자는 데다가 푸짐한 저녁 식사가 차려져 나왔습니다.

“많이 드세요. 또 드시려면 환경보호 차원에서 먹었던 접시를 사용하시고요.”

한껏 흥이 오른 만찬장의 분위기를 이어서 장기자랑 시간이 펼쳐졌습니다. 스님은 잘하는 사람만 나오라며 농담을 했지만, 대중들은 스스럼없이 앞으로 나와 노래를 불렀습니다.

장기자랑 시간을 어느 정도 즐긴 후 성지순례를 진행하느라 애쓴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같은 순례자이면서도 차장, 조장 역할을 하며 머슴 역할을 톡톡히 했던 분들, 전체 진행을 했던 한국과 인도의 스텝들, 법사님들에게 작은 선물을 증정하고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자욱한 안개와 정신없는 도로 위를 달리면서도 아무 사고 없이 무사히 순례를 마칠 수 있게 해 준 운전수와 조수에게도 작은 선물을 증정하며 감사의 마음을 담아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

이렇게 만찬을 마친 후 필요 없는 물건은 수자타 아카데미에 보내게 내어 달라고 공지하고 내일 아침에 출발할 때 숙소에 두고 가는 물건이 없도록 각별한 주의를 당부한 후 오늘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내일은 아침 6시에 숙소에서 나와 먼저 타지마할을 관람한 후 곧바로 델리로 이동해 델리 박물관과 라즈가트, 간디 박물관을 연이어 관람하고 공항으로 이동할 예정입니다. 스님은 성지순례단을 공항으로 보낸 후 델리 교민들을 위하여 저녁 즉문즉설 강연을 하고 내일 아침에는 델리 불자회 회원들을 위해 아침 법회를 해 준 후 로힝야 난민촌에 구호품을 전달하기 위해 방글라데시 콕스 바자르로 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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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

정토회에 인도 성지순례가 있는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늘 성지순례 가려 생각만 했지 실천에 옮기기는 못 했습니다 내년에는 꼭 가보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2019-01-28 17:41:19

고경희

알찹니다~^^

2019-01-22 16:39:09

김충균

자투리 시간때마다 스님의 하루를 볼 수 있어 감사합니다. 수시로 사로 잡힌 마음이 일어 날때, 스님의 법문을 보며 돌일 킬 수 있어 감사합니다. 내년에는 순례에 참여 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 납니다. 지금 마음은 편안 합니다.

2019-01-22 09:5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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