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9.2.9 정초 정회원 법회(3) 광주 전라
“법문이 지식이 아니라 실제 내 삶이 되려면...”

안녕하세요. 오늘은 정초순회법회 3일째 되는 날입니다. 오늘은 광주전라지부에 소속된 정회원들을 만나러 갑니다.

어젯밤 11시에 대구에서 정초법회를 마친 스님은 평화재단 실무자들과 긴급히 의논할 일이 있어 밤새 서울로 달려왔습니다. 아침 7시에는 서울공동체 발우공양에 참석했습니다. 서울공동체 대중들은 새해를 맞이하여 스님께 삼배로 인사를 올렸습니다.

스님은 출가하여 공동체에서 상주하고 있는 대중들을 위해 10여 분 정도 법문을 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은 수행자가 되기를 지향하고 수행자로 나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개개인을 기준으로 보면 내가 돈을 얼마나 버느냐가 중요한 가치인 것 같지만, 전 지구적으로 보면 환경을 어떻게 보전할 것인가, 어떻게 굶고 병들어 죽는 사람들을 보살필 것인가, 어떻게 하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괴로운 사람들을 괴로움이 없도록 도울 것인가, 이런 것들이 진짜 중요한 가치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내 호주머니에 돈이 들어올 수만 있으면 남을 헤치는 일도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인류와 전 지구를 위하는 일을 해도 돈이 안 생기면 헛된 일을 하는 것 같은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수행자가 되기 위해 이곳에 들어온 여러분들조차도 자신이 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늘 삶이 위축되어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부모, 친구, 세상 사람들을 만날 때 마치 내가 부족한 사람인 것처럼 여겨지는 겁니다. 그러나 내 존재 자체도 당당할 뿐만 아니라 내가 하는 일도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이라는 점을 아셨으면 해요. 그래야 여러분들이 비굴해 하면서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살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이곳에 들어와 있는 것은 참으로 거룩하고 훌륭한 일인데, 정작 여러분들의 얼굴은 밝고 당당하지 못한 이유는 아직 여러분들이 이 큰 법을 만나고도 돈 몇 푼의 가치에 짓눌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저도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조금 더 자신이 하는 일의 소중함을 제대로 아셨으면 해요. 그래야 ‘수행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사는 수행자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8시부터는 평화재단 실무자들과 2월 27일에 열릴 3.1 운동 100주년 기념 심포지엄 준비와 관련하여 회의를 하였습니다. 이번 심포지엄에서는 스님이 직접 용성 스님의 독립운동에 대해 발표를 하는데, 자료 준비를 맡은 실무자들은 의문 나는 점에 대해 스님과 의논했습니다. 회의를 마친 후 다시 광주로 향했습니다.

오후 2시부터는 광주 정토법당에서 광주전라지부 정회원들을 대상으로 정초 법회가 열렸습니다. 다시 매서워진 바람에 옷깃을 여미게 되는 토요일 오후였지만, 광주전라지부 소속 정회원 160여 명이 광주법당을 가득 메웠습니다.

삼귀의 반야심경으로 법회가 시작되었고, 참가자들에게 반가움과 고마움을 표현하는 대광 법사님의 가볍고 밝은 인사가 있었습니다.

이후 각 법당 별 참가자 소개 및 정회원 퍼포먼스가 진행되었습니다. 순천정토회는 짧고 굵은 힘찬 구호를 보여주었고, 전주정토회는 태권v 노래를 개사해 부르면서 금빛 보자기를 펄럭이며 법당을 누벼 큰 웃음을 주었습니다.

플롯과 첼로의 우아한 선율을 바탕으로 광주정토회가 부른 ‘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 테야’ 노래는 정토회의 주제곡으로 꼭 맞는 느낌이었습니다. 참가자들의 퍼포먼스는 함께 하는 기쁨과 즐거움이 얼마나 큰 지 보여주며 법회의 분위기를 후끈 달아오르게 했습니다.

밝고 경쾌한 분위기 속에서 스님의 법문이 시작되었습니다. 반갑게 인사를 한 뒤 스님의 말씀이 시작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모두들 진지하게 스님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스님은 정토회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말문을 열었습니다.

“정토회는 처음 설립할 때, 절이 아닌 길거리로 나와서 식당이나 가정집, 사무실에서 시작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절이 많습니다. 정토회도 다른 절에서 하듯이 운영을 했다면 사람들도 많이 모였을 것이고 운영을 하는 사람들도 편했겠지만, 기존의 절과 다른 방식을 택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法)을 알게 되면 누구나 ‘이야, 그게 그렇구나!’ 하고 이해가 가고 고개가 숙여지는데, 실제로 절에서 행해지는 모습을 보면 봉건적인 요소, 불합리한 요소, 부정한 요소가 많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부처님이 설하신 법(法)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어요. 그래서 조계종 총무원장과 종정을 지내신 서암 큰스님을 뵈었을 때 제가 가진 불만을 토로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불교가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 되었습니까. 이미 우리 불교 내부에도 많은 비리와 문제가 있고, 또 세상의 모순과 문제도 외면하고 있습니다.’

이런 요지로 말씀을 드렸는데, 제 이야기를 다 들으시고는 서암 큰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어떤 사람이 말이야, 논두렁 밑에 앉아서 그 마음을 청정히 하면, 그 사람이 중이네. 그곳이 절이야. 이것이 불교라네.’

머리를 깎고 법복을 입은 사람이 스님이 아니라, 바로 마음이 청정한 사람이 스님입니다. 근사한 기와집을 지어놓은 게 절이 아니라, 마음이 청정한 사람들이 모이면 비록 그곳이 논두렁 아래라고 하더라도 그곳이 바로 절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입니다.

물론 저도 당시 불법(佛法)이 그렇다는 것을 몰랐던 것은 아닙니다. 그때 그 말씀이 불교에 대해 처음 듣는 새삼스러운 이야기는 아니었어요. 그렇게 한편으로는 저도 알고 있는 이야기였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래도 스님은 머리를 깎은 사람이 스님이고, 절은 기와집이 절이고, 이러한 것이 불교다’라는 상(相)을 지어놓고 이런저런 불만을 토로한 거예요. 평소 배운 내용은 그것대로 따로 있고, 큰스님 앞에서는 ‘머리를 깎은 사람이 중인데, 이런 중들이 문제입니다. 기와집이 절인데, 이런 절이 문제입니다’라고 말씀을 드린 거예요. 그 이야기를 듣고 큰스님께서 ‘그건 중이 아니다. 마음이 청정한 자가 중이다. 그건 절이 아니다. 마음이 청정한 사람들이 모인 장소가 절이다. 그런 상(相)에 집착하는 것이 불교가 아니라 이것이 불교다’라는 말씀을 해주신 겁니다.

그때 그 이야기를 듣고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마치 원효대사가 해골바가지에 담긴 물을 먹고 토하면서 ‘한 마음 일어나니 만법이 일어나고, 한 마음 사라지니 만법이 사라지네’라고 하신 것처럼, 불교가 아닌 것을 불교라고 생각하고,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난리를 피운 거예요. 모두 상(相)에 집착해서 일어난 일이에요. 상(相)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을 머릿속으로 달달 외우고 있었는데도, 그것은 그것대로 따로 있고, 실제로 행하는 것은 또 따로 있었던 거예요.

그후로 기존 불교를 비판하거나 욕하고 비난하는 것을 멈추고, 나부터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자는 뜻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기존의 불교는 어차피 불교가 아니기 때문에 비난할 대상이 되지도 않고, 그럴 만한 가치가 없으니까요. 그건 산에 가서 내 마음에 안 든다고 돌을 욕하고 나무를 욕하는 것과 같습니다. 남을 탓하고 욕할 게 아니라, 나부터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바르게 살아가자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승려인지 아닌지 따질 것 없이 누구나 법에 귀의하는 사람이 수행자라는 관점으로 정토회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법담(法談)을 나누는 자리라면 식당도 절이고, 가정집도 절이고, 사무실도 절이에요. 정토회는 신자들의 모임인 신앙공동체가 아니라, 수행자들의 모임인 수행공동체입니다.”

어제에 이어 광주에서도 스님은 정토회가 수행자들의 모임임을 강조했습니다. 그런 후 “오늘은 정회원들이 모인 자리인 만큼 사적인 고민보다는 정토회 활동을 하면서 느꼈던 어려움이나 궁금한 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좋겠다”라고 제안했습니다. 그러자 총 4명이 질문을 했습니다.

그중 마음 나누기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던 내용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

“불교대학 수업이나 법문을 듣고 나면 늘 마음 나누기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수업 내용에 대해 나누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의 상태를 나누는 것으로 그칩니다. 그러다 보니 공부하는 것에 대해 서로 점검하는 기회가 없고, 법문을 듣고 ‘다른 사람은 이렇게 느꼈구나’ 하는 부분이 적어서 아쉽습니다. 그리고 나누기를 하고 나면 조금 더 보완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때도 있는데, 한 번씩만 나누기를 하고 끝내니까 실제로 소통하며 공부하는 부분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부분이 보완될 수 있는지 질문을 드립니다.”

“법문을 듣고 내 마음이 어떻게 변화했는가가 마음 나누기의 핵심입니다. 정토불교대학에서는 법문의 지적인 내용에 대한 것은 비중을 적게 두고 있습니다. 일반 불교대학에서는 ‘삼보란 무엇인가? 불(佛), 법(法), 승(僧)이다.’라는 지식적인 내용을 중요시한다면, 정토불교대학에서는 그런 내용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그런 내용을 듣고 내 마음이 어떠했는지, 내 마음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중심에 두고 있습니다.

이런 중심을 잘 잡지 않으면 마음 나누기가 자칫 지적인 토론의 장이 되기 쉽습니다. 예를 들어, 공(空)에 대해 배웠다면 그 이야기를 듣고 ‘평소 집착하던 일이 있었는데 공(空)을 들으니 달리 보게 됩니다’라고 마음 나누기가 될 수 있지만, 자칫 공(空)이 무엇인지에 대한 지적 토론으로 넘어가기가 쉬워요. 그래서 만약 질문자가 가지고 있는 아쉬움이 이러한 지적 토론이 부족해서 생기는 것이라면 정토불교대학의 운영 취지와는 조금 맞지 않는 기대를 갖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마음 나누기는 법문을 듣고 ‘나는 어떠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가령 금강경 제1분의 내용을 보면, 수보리가 어느 날 부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평소에는 ‘그냥 그렇게 사시는구나’ 생각했던 모습이 ‘아, 부처님의 저러한 일상적인 삶이 미래의 수행자들에게 큰 모범을 보이시는 것이구나’ 하는 깨달음으로 다가와서 ‘희유하십니다, 세존이시여!’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런 법문을 듣고 ‘나는 어떠했는가?’를 나누는 것이 마음 나누기입니다. 여기에 대한 지식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그 법문을 듣고 내 마음에 떠오른 것을 나누는 거예요. 예를 들어 금강경 제1분에 대한 수업을 듣고 나서 이렇게 마음 나누기를 할 수 있겠죠.

‘부모님이 살아가신 모습을 보며 평소에는 ‘그냥 살아가시는구나’ 하고 생각만 했는데, 오늘 법문을 들으니 ‘나도 모르게 그런 모습이 나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겠구나’ 싶습니다. 평소에는 그저 엄격하다고만 생각했는데 ‘그런 부모님의 엄격함이 오늘의 나를 있을 수 있게 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어떤 날은 법문을 들으러 오기 전에 남편과 싸워서 법문은 소리로만 들리고 마음속에서는 온통 남편과 싸운 생각만 했을 수도 있어요. 그런 날은 ‘어떻게 해야 이 인간에게 복수를 할까’ 이런 생각만 수업 내내 할 수도 있어요. 비록 마음 나누기가 남편과 싸운 이야기나 자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자리는 아니지만, 지금 내 마음이 그것으로 꽉 차 있다면, ‘오늘 좋은 법문을 듣긴 했는데 남편과 싸운 것에 대한 집착으로 법문이 귀에 잘 안 들렸습니다.’ 하고 자기 마음을 보는 것 또한 마음 나누기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1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법문을 들으면서 내 마음이 어떠한지, 내 마음에 어떠한 변화가 생기는지를 보고 그것을 나누는 것이 마음 나누기예요. 또 그렇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아,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나는 전혀 저런 생각을 못했는데’ 하며 감화를 받기도 하고, 똑같은 법문을 듣는데도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것이 제각각 다르다는 것을 알 수도 있습니다.

마음나누기를 하다 보면 마음 작용의 원리도 알게 됩니다.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는 같지만, 외부의 소리가 각자가 가진 업식을 통과하면서 어떤 사람에게는 이렇게 다가가고, 어떤 사람에게는 저렇게 다가간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비유하자면 외부의 똑같은 빛을 봐도 업식에 따라 어떤 사람에게는 빨갛게 보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노랗게 보이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빨갛게 보는 사람은 외부의 빛이 빨간 줄 알고, 노랗게 보는 사람은 외부의 빛이 노란 줄로 착각합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탐구를 해보는 거예요.

‘왜 같은 것을 보고도 어떤 사람은 빨갛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노랗다고 하는가? 왜 같은 법문을 듣고도 어떤 사람은 이렇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저렇다고 말하는가?’

그것은 바로 외부 자극이 우리의 업식을 통과하면서 어떤 사람에게는 이렇게 다가가고, 어떤 사람에게는 저렇게 다가가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각자에게 들리는 소리가 다르고, 각자가 받아들이는 게 다릅니다. 뿐만 아니라 그날 기분에 따라서도 같은 법문이 다르게 들리기도 하죠. 이런 경험을 통해서 ‘아, 내가 느끼는 것이 객관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구나, 나에게 다가오는 것도 늘 나의 업식을 통과해서 받아들여지는 것이구나, 이것이 모두 내 업식의 투영이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니 어떻게 그 이야기를 저렇게 들을 수가 있지?’ 하다가도 어느 순간부터는 ‘아, 이 사람의 업식에서는 그 이야기를 이렇게 들을 수 있겠구나, 저 사람의 업식에서는 그 이야기를 저렇게 들을 수 있겠구나’ 이렇게 이해하게 됩니다.

제가 아기 엄마들에게 늘 강조하는 얘기가 ‘아이를 낳으면 아이의 심리적 안정을 위해 가능하면 3살까지는 직접 키우는 것이 엄마의 중요한 역할이다, 그리고 그저 키우는 것으로 되는 게 아니라 아이를 키우는 동안 엄마의 심리가 안정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아이를 다 키워본 50대가 넘은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맞아, 엄마의 심리가 안정이 되어야 하는데 그때 내가 남편과 싸우고, 또 아이를 놔두고 직장에 다니느라 엄마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했구나’ 하고 대부분 수긍을 합니다. 그러나 지금 아이를 키우는 젊은 엄마들 중에는 ‘스님이 아이를 안 키우니까 그런 이야기를 하지, 지금 직장 다니는 것도 바쁜데 어떻게 아이 키우는데만 집중할 수 있느냐’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이렇게 스님의 법문을 똑같이 듣고도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때도 누군가가 법문을 잘못 들은 게 아니라 ‘아, 저 사람에게는 저렇게 들릴 수 있구나’, ‘자기 생각에 빠지니까 같은 내용도 다르게 듣는구나’ 이렇게 알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 법문의 내용만 공부가 아니라 법문을 듣고 사람마다 보이는 다양한 반응들을 보면서도 공부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마다 다르게 보이는 다양한 반응들을 보면서 ‘아, 정해진 게 없구나’ 하는 무아(無我)를 터득하게 되기도 합니다. 정해진 게 없는 사례들을 보면서 ‘아, 이래서 무아구나’ 하고 알고, 항상함이 없는 다양한 사례들을 보면서 ‘아, 이래서 무상이구나’하고 체험으로 알게 되는 거예요. 책 속에서 또는 강의 중에 들어서 아는 ‘제법무아(諸法無我)’, ‘제행무상(諸行無常)’은 지식에 불과합니다. 실제 상황 속에서 체험해가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반드시 마음 나누기를 해야 합니다.

이렇게 공부하는 과정이 마음 나누기이기 때문에 마음 나누기가 잘 되었는지 누군가가 평가할 필요는 없습니다. 설령 누군가가 스님의 이야기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하더라도 ‘스님 법문은 아이를 잘 키우라는 이야기인데 왜 그걸 왜곡해서 받아들이느냐’ 이런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어요. 그 사람에게는 법문이 그렇게 들렸다는데 어떡하겠어요. 그때 법문을 잘 들었다, 잘못 들었다고 평가하거나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시비에 속합니다. 오히려 ‘아, 저 사람에게는 저렇게 들렸구나’, ‘그 이야기를 저렇게 들을 수도 있구나’ 하면 내가 사람들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지는 거예요.

비록 나에게는 그 말이 다르게 들렸지만, 그 사람에게는 그렇게 들렸다는 것을 받아들임으로 해서 세상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렇게 바라보면 세상이 왜 이리 다양하고 복잡한지 이유를 알 수 있게 돼요. 또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면 나와 다른 주장을 해도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나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의 관점이 옳다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는 다르게 들릴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거예요.

마음나누기는 내 마음을 관찰하고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서 법문의 내용을 자기화하는 과정입니다. 이걸 지식으로만 받아들이는 사람들 중에는 법문을 들은 다음 마음 나누기를 하지 않고 집에 가는 경우도 있는데, 이번에 불교대학을 개편하면서 반드시 법문을 듣고 마음 나누기까지 해야 출석이 인정되게끔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법문의 시간을 줄이고 마음 나누기의 시간을 늘렸어요. 우리는 수행을 목표로 수업을 듣는 만큼 반드시 마음 나누기를 통해 자기화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나아가 법문의 내용을 체험하려면 마음 나누기를 한 후에 그날 배운 내용을 집에 가서 남편이나 자식에게 직접 실천해봐야 해요.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서 다음 불교대학 시간에 그 체험을 바탕으로 한 마음 나누기를 또 해보는 거예요.

이렇게 자기화하는 과정을 늘이고 직접 체험해보는 기회를 많이 갖도록 하기 위해 이번에 불교대학 프로그램을 개편한 겁니다. 다른 일반 불교대학에서처럼 교리 자체를 배우는 것이 중심이 아니라, 법문을 통해 배운 내용을 자기화하여 수행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심입니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불교에 대해 잘 모르니까 불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예전 정토불교대학의 목표였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대부분의 불교대학생들이 이미 불교를 믿고 절에 다니던 불교 신자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대로 된 불교를 알게 된 것만으로도 반응이 아주 좋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불교대학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는 불교 신자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비율로 따지면 불교 신자가 30%도 채 안 됩니다. 그래서 재편된 정토불교대학의 목표는 불교 교리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보다는 수행자가 되는 것입니다. 1년 동안 수업을 듣고 나서 마칠 때쯤 되면 수행자가 되어야겠다는 발심을 이끌어내는 것이 목표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불교 교리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곧 수행자가 되는 것이긴 하지만, 교리에 대한 이해보다 체험을 중시하고, 지식보다 자기화하는 것에 더 중점을 두게 된 거예요.

경전반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에는 불교 신자라면 금강경, 반야심경의 내용 정도는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목표였지만, 지금은 서원을 세운 행자로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경전반의 교육 과정을 통해서 내 수행만 하는 것을 넘어서서 다른 사람도 행복할 수 있도록 도움이 되어야겠다는 발심을 이끌어내는 것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이런 새로운 목표에 맞추어 운영 방식을 수정하였습니다. 그렇다고 불교대학을 졸업하면 모두 다 정회원이 되고, 경전반을 졸업하면 모두 다 서원 행자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그런 방침을 가지고 운영하기로 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마음 나누기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시면 좋겠습니다. 방금 들은 법문에 대한 마음 나누기를 할 수도 있고, 다른 것에 마음이 사로잡혀 있었다면 그 부분에 대해 마음을 돌이키며 나누기를 할 수도 있습니다. 법문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집안 이야기를 한다거나 사적인 이야기만 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그게 아니라 법문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더라도 그 시간에 마음 속에 일어난 것으로 나누기하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 열린 자세가 필요합니다.

또 그만큼 마음 나누기를 하는 사람의 자세도 중요합니다. 남편과 싸웠다고 해도 ‘제가 오늘 싸우고 와서 법문이 귀에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라는 나누기는 자기 마음이 다른 것에 신경을 쓰다 보니 법문을 못 들었다는 법문에 대한 마음 나누기예요. 그런데 법문에 대한 나누기가 아니라 ‘오늘 싸우고 와서 아직 분이 안 풀렸습니다’ 이런 식의 나누기는 법문을 듣고 하는 적절한 나누기가 아닙니다. 그러니 말하는 사람도 설령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더라도 법문과 관계된 마음 나누기를 해야 합니다.

마음 나누기에 대해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 하는 식으로 경직된 지도를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게 안내하면 마음이 닫혀서 정작 마음 나누기가 잘 안 돼요. 그러니 가능하면 자유롭게 열어두되 담당자가 자연스럽게 법문과 관련된 나누기가 이루어지도록, 법문이 체화되는 과정으로 마음 나누기가 진행되도록 조심해서 안내를 해야 합니다. 학교에서 공부 가르치듯이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이렇게 말하면 안 돼요. 마음이라는 게 지식과 달라서 건드리면 움츠러드는 성질이 있어요. 분위기가 경직되면 마음이 닫히고 입이 안 열려요. 그러니 경직되지 않도록 늘 신경 쓰면서 조심스럽게 안내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스님의 말씀을 듣고 나니 어떤 자세로 마음 나누기를 해야 하는지 정리가 잘 되었습니다. 스님의 적절한 실례에 공감하는 웃음이 간간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 외에도 3명의 질문이 더 있었습니다.

  • 서원 행자가 아닌 발심 행자로서 서원 행자 대회에 참석하려고 하니 불편함이 많았습니다. 이번에도 꼭 참석하라고 하는데 어쩌죠?

  • 봄경전반 입학자 9명 중 3명밖에 졸업을 못했어요. 탈락 원인의 첫째는 수행 맛보기를 안 해서이고, 둘째는 보시금 문제였습니다. ‘교회 하고 다를 바가 없다’고 하면서 ‘7대 행사 보시금이 부담스럽다’고 하는데, 어떻게 답변해야죠?

  • 아침에 108배를 하는데, 오른쪽 무릎이 시큰거려요. 딸이 그렇게 절하다가 무릎이 절단 난다고 하는데, 나이 먹을 때까지 계속 108배를 해야 하나요?

스님의 명쾌한 대답에 질문자들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습니다. 이제 마무리할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정토회 정회원들은 모두 각자 자신이 소속된 법당에서 일주일에 2시간 이상씩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분들인데요. 마지막으로 스님은 정회원들이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당당함을 갖고 봉사를 하면 좋겠다고 강조하면서 법회를 마쳤습니다.

“스스로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당당한 자세를 갖고 정진하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활동하는 모습이나 활동하면서 고뇌하는 모습을 보면, 아직 자기 소중함을 잘 모르는 것 같아요. 가족들이나 주변에서 이해해주지 않아도 ‘아, 저 사람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다’라고 이해하면, 그들이 뭐라고 해도 ‘죄송합니다’ 하면서 같이 화목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정말 잘못하거나 죄를 지어서 죄송하다는 게 아니라 나는 내가 하는 일에 떳떳하지만 당신의 요구를 다 들어주지 못해서 죄송하다는 의미예요. 그런 자세를 가지고 정진해나가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다가오는 3월에 불교대학 입학식이 열리는데요. 입학생 수를 늘리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불교대학은 입학하기까지가 어렵지 일단 와서 수업을 듣고 배우다 보면 다들 좋아하잖아요. 또 이왕 1년 동안 불교대학을 진행하는데 한 명이라도 더 와서 좋은 법을 접하면 좋잖아요. 그러니 더 많은 사람들이 불법(佛法)과의 좋은 인연을 맺어줄 수 있도록 알리는 데 조금 더 힘써주시면 좋겠습니다.”

재미있으면서도 명확한 스님의 말씀에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어느새 3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에게 세배를 올리고 정토회 별 사진 촬영을 하였습니다. 모두의 얼굴에 웃음꽃이 밝게 피어서 법당이 더욱 빛나는 것 같았습니다.

광주전라 지부 정회원들은 사진 촬영이 끝나고 나서도 서로 손을 맞잡고 아쉬운 헤어짐의 인사를 계속 나누었습니다. 도반의 소중함을 가득 느낀 가슴 훈훈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행사가 마무리되고 참석한 분들에게 소감을 물어보았습니다.

“어떤 질문에도 우리 수준에 딱 맞게 답해주는 스님의 모습을 가까이서 뵈니 가슴 뭉클했습니다.” - 광주정토회 박영애 님

“무릎이 아프다는 핑계로 아침 기도를 게을리했었는데, 스님의 말씀을 듣고 다시 힘을 받았습니다. 수행자는 탐진치 삼독에 빠지면 안 된다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갑니다. 앞으로 내 업식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열심히 정진하겠습니다.” - 광주정토회 이영희 님

광주법당을 나서는 정토회 회원들의 발걸음이 당당하고 가벼워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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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데오

"어떤 사람이 말이야, 논두렁 밑에 앉아서 그 마음을 청정히 하면, 그 사람이 중이네. 그곳이 절이야. 이것이 불교라네.’" 감사합니다.~~^^

2020-01-21 06:49:29

이지은

마음나누기에 대해 되새깁니다.

2019-02-17 23:56:20

김정화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2019-02-16 08: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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