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9.2.23. 한겨레신문 인터뷰 & 선유동 연수원 방문
“내일 베트남에서 열리는 북미 정상회담의 전망을 어떻게 보십니까?”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오전에 3.1 운동 100주년 기념 토론회 발표 준비에 대해 의논한 후 한겨레 신문과 인터뷰를 했고, 이후 전국 대의원회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문경 정토수련원으로 향했습니다.

아침 일찍 평화재단에 출근해 원고 교정을 본 스님은 오전 10시가 되자 3.1 운동 100주년 기념 토론회 때 상영할 영상에 대해 평화재단 실무자들과 함께 점검했습니다.

스님은 영상을 시청한 후 “용성스님은 돌아가시기 전 평생 동안 일궈놓은 독립운동 조직이 괴멸되면서 많은 아픔이 있었다”면서 “당신이 수립하고자 했던 오늘날 대한민국이 지난 100년 동안 이런 모습으로 발전되었고, 당신의 유훈을 계승해 미래 100년은 통일조국을 향해 나아가겠다는 것을 표현하면 좋겠다.”라고 의견을 주었습니다.

오전 11시부터는 한겨레 신문 조현 기자와 오는 27일에 열리는 3.1 운동 100주년 기념 토론회 관련해 용성 스님의 독립운동에 대해 인터뷰를 했습니다. 인터뷰는 약 2시간에 걸쳐 진행됐습니다.

스님은 3.1 운동 때 민족대표를 33인으로 하게 된 이유, 독립운동 자금 형성, 상해 임시정부 출범에 대한 기여, 만주에서 420만 평의 농장을 구입해 무장 투쟁의 기지를 건설한 이야기 등 용성 스님의 숨겨진 독립운동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중에서 용성 스님이 3.1 운동이 대한민국 수립 운동이 되도록 이끈 이야기와 3.1 운동 때 태극기를 사용하자고 주장한 이야기에 대해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대한민국(大韓民國) 국호는 3·1 운동 때 처음 등장했나요?”

“당시 신문을 보면 ‘대한민국(大韓民國)’이라는 말은 1907년에 이미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두 가지 금기사항이 생겼어요. 그중 하나는 ‘대한(大韓)’이라는 말이고, 또 다른 하나는 ‘태극기’의 사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이후 우리나라를 지칭할 때는 대개 조선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19년 3·1 운동을 하면서 다시 ‘대한민국’이라는 말이 등장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연해주를 비롯해 러시아에서는 경술국치 이후에도 여전히 ‘대한 국민회의’라는 말을 사용하였어요. 반면 중국에서는 ‘조선’이라는 말이 굳어진 것 같아요. 그래서 중국을 기반으로 활동한 독립운동 단체들을 보면 조선의용군 등 ‘조선’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대신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대한민국’이라는 말을 꾸준히 사용해왔습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대한’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태극기를 흔드는 3·1 운동은 일제의 금기 정책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평화적인 움직임이었기 때문에 일본에게는 상당한 부담이 되었습니다. 물론 공식적으로는 ‘대한민국 만세’라고 구호를 외치기로 정했다고 해도 이미 사람들 속에 굳어진 습관이 있으니까 실제 동네에서 사람들이 외칠 때는 ‘대한독립만세’와 ‘조선독립만세’가 같이 사용되었습니다.

용성 스님께서는 한일합방 이후 나라를 구해야겠다는 일념으로 1912년부터 6년 동안 전국을 다니시며 백성들이 사는 모습을 본 뒤 1918년 가을 무렵 손병희 선생을 찾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백성들이 피폐한 상황에 놓여있고, 게다가 나라를 잃으니 이 비참함은 더욱 심각한 지경입니다. 무엇보다 우선 나라의 독립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용성 스님께서는 백성의 곤궁함을 직접 보시고 나서 누구보다 나라의 녹을 먹은 관료들이 나라의 독립을 원할 것이라고 생각하셔서 삼정승, 육판서, 팔도 관찰사, 삼백육십 고을 원님이나 그들의 후손을 6년 동안이나 찾아다니신 겁니다. 그런데 정작 나라의 관료들은 아무도 나라를 되찾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 와중에 사람들이 굶어 죽고 병들어 죽는 비참한 모습을 보시고, 그 빈궁함을 해소하고자 기도를 많이 하셨다고 합니다. 또 나라의 독립도 중요한데, 무엇보다 백성들이 이러한 곤궁함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하셨다고 해요.

오히려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백성들이 일어나서 의병활동을 했지, 관리 출신들이 앞장서는 경우는 많이 없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되찾은 다음 새로 건설하는 나라는 백성이 주인이 되는 나라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사실 이는 용성 스님의 스승이신 혜월 스님과 동학(천도교)의 교주인 수운 최제우 선생이 이미 개벽에 대해 논할 때 나왔던 이야기입니다. 개벽의 핵심이 바로 모든 민(民)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고 민(民)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스승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데다가, 본인이 전국을 다니며 실상을 확인하였고, 더불어 만해 한용운 스님으로부터 국제정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난 후에는 더욱 민(民)이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관료들조차 독립운동의 주체가 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 생활이 곤궁한 백성들이 주체가 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웠습니다.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백성들이 의병을 일으키는 활약을 하긴 했지만, 삶이 너무나 곤궁하고 먹고 살기 급급했기에 하루아침에 백성들이 독립운동의 주체가 되기는 어렵다고 판단을 하셨습니다. 대신 나라의 녹을 받지는 않지만 당장 생존에 허덕이지 않는 사람들이 종교지도자였습니다. 또 당시에는 천도교(동학)의 교세가 단연 최고였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개신교와 천주교를 합해서 29만 명 정도였던 것에 비해 천도교의 교세는 약 30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스승들 사이에 인연도 있으니 용성 스님은 손병희 선생을 만나서 자신이 전국을 다니면서 살펴본 국민들의 상황을 바탕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조심스레 ‘나라의 독립을 위해 종교지도자들이 독립선언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말을 꺼냈다고 해요. 이렇게 해서 3.1 운동이 조금씩 준비되기 시작했습니다.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는 면에서 보면, 3.1 운동은 대한제국 부흥운동으로 진행될 수도 있었어요. 하지만 용성 스님은 이렇게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새로운 시대에 더 이상 임금이 주인이 아닌 민(民)이 주인인 나라를 새로 건설해야 한다, 따라서 대한제국 부흥운동이 아닌 대한민국 수립 운동으로 가야 한다.’

이러한 주장은 지금의 관점으로는 당연해 보일지 모르지만, 당시 대한제국을 잃은 상황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대한제국 부흥운동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기록을 보면 대한독립을 외치자고 하니 일반 국민들은 ‘그러면 그 나라의 임금은 누가 하는가?’하는 의문을 많이 가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용성 스님은 ‘왕이 나라의 주인인 시대는 이미 지나갔고, 앞으로는 민(民)이 주인인 시대이니 대한민국 수립 운동이 적절하다’라고 판단하였습니다. 물론 이 운동에는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고자 함도 들어 있었고, 나아가 새로운 나라를 만들고자 함도 함께 들어 있었던 겁니다. 이렇게 독립운동은 자연스레 대한민국 수립 운동이 됩니다.

3.1 운동의 핵심 정신은 나라의 독립과 더불어 민(民)이 주인인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자는 것입니다. 상해 임시정부도 대중들에게 ‘대한민국 임시정부’라고 인식되어야 합니다. 이는 진보, 보수와는 관계없는 역사의 문제입니다. 게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 이승만이었고, 보수의 뿌리가 이승만인데,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부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권을 회복한 다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여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가 정식으로 수립이 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대한민국은 이제 100년의 역사를 맞이하게 됩니다. 일부 보수 세력은 1948년에 나라가 건국되었다고 주장하는데, 물론 3·1 운동이 일어나고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도 건국의 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나라가 없는 와중에 새로운 나라를 세운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나라는 되찾은 것이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1948년을 건국의 해로 받아들이면, 1948년 이후 건국의 공로만 인정이 되고, 그 이전인 일제강점기에 그들의 친일 여부는 상관 없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 무엇을 했는가가 역사적 공로자를 판단하는 가늠자가 되기 때문에 많은 역사적인 문제를 야기시킵니다. 그러나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대한민국 수립으로 인정하면 독립운동에 기여했던 사람들이 모두 다 건국의 공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논쟁은 친일 여부의 논쟁이 될 수는 있지만, 진보와 보수의 논쟁 거리는 아닙니다. 진보와 보수를 떠나서 대한민국 정부는 3·1 운동과 상해 임시정부로부터 법통을 이어받은 정부입니다. 또한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된 계기가 바로 3·1 운동이기 때문에 상해 임시정부만 강조해도 안 됩니다. 3·1 운동 없이 상해 임시정부만 부각된다면 그 이야기 속에 민(民)이 빠지게 되고, 임시정부와 관련된 몇 사람이 주도한 것처럼 비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역사 속에 있는 민(民)의 활약상과 함께 민(民)이 주인이 되는 과정이 정말 중요합니다.

3·1 운동은 처음으로 민(民)이 일어나서 새로운 나라의 기초를 마련한 역사적인 일입니다. 그 흐름을 이어받아 4·19 혁명에서도 민(民)이 일어나서 새로운 정부를 구성했고, 2016년에 일어난 촛불 혁명도 민(民)이 일어나서 중심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특정한 정치인이나 정치집단이 나선 게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우리나라의 주인이 대한 국민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헌법의 첫 장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대한 국민은’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주어가 국민입니다. 그리고 국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만드는 그 시작이 3·1 운동이었습니다. 용성 스님의 말씀은 민(民)이 일어나도록 33인이 잡혀가야 된다는 것이었고, 어떤 계기로든 민(民)이 행위의 주체가 되어야 하고, 그래야 새로운 나라가 형성된다는 말씀이셨습니다.

그전에 일어난 동학혁명과 의병활동도 민이 주체가 된 움직임이지만 새로운 나라를 구상하고자 일어난 일은 아니었어요. 핍박당하는 억울함이 누적되어 폭발된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 3·1 운동은 상해 임시정부를 세움으로 인해 실제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성과로 이어진 운동입니다.”

“태극기를 사용하자는 제안은 어떻게 하게 된 겁니까?”

“3.1 운동을 준비할 당시 손병희 선생과의 대화에서 용성 스님은 태극기를 사용하자는 제안을 하게 됩니다. 태극기를 사용하자고 처음 제안을 할 때만 해도 사람들이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일부에서는 오히려 독립기나 한반도기를 들자는 제안도 있었다고 해요. 우리가 종종 쓰는 표현에 ‘삼천리 금수강산’이라는 말도 있으니 한반도기를 제안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용성 스님께서는 한반도기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셨습니다.

‘고구려, 발해 땅도 모두 옛날 우리 땅인데, 한반도기를 들면 우리 스스로 그 땅을 포기하는 것 아닌가. 우리가 지금은 비록 힘이 부족하여 땅을 잃을 수는 있지만, 우리 땅이 여기까지라고 우리 스스로 말하는 것은 나중을 생각했을 때 적절하지 않다.’

이렇게 말하면서 태극의 의미를 설명했습니다.

‘무극(無極)에서 태극(太極)이 나오고, 다시 태극에서 음양(陰陽)이 나오니, 태극은 곧 천도교에서 말하는 한울님이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이자, 불교에서 말하는 극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태극의 의미는 여러 가지 다양한 종교를 모두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설명과 함께 3·1 운동에 태극기를 사용할 것을 주장하니 다른 분들도 모두 수긍하였다고 해요.

이러한 측면에서 ‘대한민국(大韓民國)’이라는 국호와 태극기는 모두 그전부터 이미 있었지만, 3.1 운동을 계기로 국호와 태극기 사용에 대한 의미가 부여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3·1 운동이 대한제국 부흥운동이 아니라 대한민국 수립 운동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방향을 제시한 분이 바로 용성 스님이었습니다.”

태극기 사용과 국호 사용의 배경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 보니, 만약 이런 사실이 역사적 사실로 입증되게 되면 독립운동사도 굉장히 다르게 해석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직은 증언에 불과하기 때문에 앞으로 고증해 나가야 하는 과제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스님은 기자님에게 2년 전 세상에 공개된 김구 선생이 상해 임정 요인 30여 명을 데리고 종로 대각사를 방문하여 용성 스님의 영전에 참배하고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나마 이 사진이라도 공개가 되었기에 용성 스님의 독립운동 사실이 세상에 널리 알려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기자님은 이 사진을 의미 있게 보도하겠다고 하며 카메라에 사진을 담아갔습니다. 용성 스님에 대한 인터뷰가 모두 끝나고, 내일 베트남에서 열리는 북미 정상회담을 스님은 어떻게 전망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도 이어졌습니다. 스님은 환하게 웃으며 아주 간단한 비유로 북미 정상회담을 예측했습니다.

“북한이 원하는 만큼만 합의가 될 겁니다. 그 이유는 북한이 잘나서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서로 협상을 해서 물건을 사야 한다고 합시다. 한 사람은 100원 달라고 하고, 한 사람은 50원 주겠다고 합니다. 이때 합의를 보려면, 파는 사람이 50원에 팔든지, 사는 사람이 마음을 내서 100원을 주든지, 아니면 적당하게 70원에 합의를 보든지 해야 합니다. 무슨 200원, 300원에 합의될 수도 없고, 10원, 20원에 합의될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런 것처럼 미국은 ‘이렇게 하자’, 북한은 ‘저렇게 하자’ 하는 상황에서, 미국이 아무리 얘기해봐야 북한의 요구 이상 합의될 수가 없습니다. 북한의 요구 이상으로 합의가 되려면 딱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북한이 스스로 굴복을 하든지, 아니면 미국이 힘으로 제압해서 굴복을 시키는 것입니다. 미국이 힘으로 제압해서 북한의 굴복을 받아내면 미국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전쟁의 피해가 너무 크게 예상되기 때문에 그렇게 하기는 어려워요. 북한도 무조건 항복 할리도 만무하잖아요.

결국 미국이 원하는 것을 북한이 다 들어줄 리 없듯이 거꾸로 북한이 원하는 것을 미국이 다 들어주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미국이 강대국인데 무엇 때문에 북한이 하자는 대로 다 하겠느냐는 겁니다. 결국 타협점은 북한이나 미국이 원하는 것 중에 미국이나 북한이 들어줄 수 있는 만큼 들어주는 선에서 합의가 될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미국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이 협상은 실패한 협상이라고 평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미국의 요구는 무엇인지 잘 알고 있지만, 북한의 요구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잖아요. 그래서 이 회담에 대한 언론의 평가는 결국은 미국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았으니까 실패했다는 평가가 나오기 쉽습니다. 또한 북한의 요구가 들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북한이 승리했다는 평가가 나오기 쉬워요.

그러나 이것은 놓여진 조건이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평가되기가 쉽다는 것이지, 실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만나서 합의를 본 것이 최선인 것입니다. 물건을 50원 주고 샀느냐, 100원 주고 샀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고, ‘둘이 만나서 거래를 한 것이 성공이다’라고 평가해야 합니다.

그런데 합의가 깨지면 실패이고, 합의는 했지만 앞으로 거래를 더 이상 하지 못하겠다 해도 실패입니다. 이번 회담을 계기로 해서 어떤 거래가 성사되고, 다음에 더 거래를 할 수 있도록 약속이 이루어지면, 이번 회담은 성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용이 얼마만큼 조정이 됐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조정이 될 내용의 양도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북한은 ‘제재를 해제해라’가 핵심이고, 미국은 ‘핵을 폐기해라’가 핵심이잖아요. 그런데 미국의 요구를 북한은 일부 수용을 했습니다.

미국이 ‘핵을 신고해라!’ 하니까 북한이 ‘핵신고는 안된다!’라고 했고, 그러자 미국이 ‘그럼 일부 핵폐기를 해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북한은 ‘알겠다. 그러면 영변 핵시설은 폐기하겠다’ 하는 정도의 합의는 받아들일 의향이 있는 것으로 보이거든요. 지금 이 수준이 북한이 최소한으로 받을 수 있는 내용입니다.

여기에 미국이 하나 더 받을 수 있는 플러스알파가 있다면 ICBM 장거리 미사일 해체입니다. 이것까지 회담에서 받아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미국으로서는 과제입니다.

그리고 북한이 미국한테 요구하는 것은 ‘전쟁 끝내고, 제재 해제해라’ 이거거든요. 그러면 전쟁 끝내라 하는 것에 대해서 지금 이 선에서 합의 볼 수 있는 미국이 내놓을 수 있는 방법은 종전 선언입니다. 그런데 종전선언으로 할 것인지, 불가침 선언으로 할 건지, 또 연락 사무소를 설치하자고 합의를 볼 건지, 안 볼 건지, 이것이 미국이 내놓을 수 있는 카드입니다.

제가 볼 때 북한의 제재를 해제하기에는 미국의 부담이 좀 클 거예요. 미국 내의 여론이 워낙 분분하고, 군사적 공격을 할 수 있는 카드는 이미 버렸기 때문에 제재 카드까지 없으면 북한을 컨트롤할 방법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제제 해제는 실행하기가 쉽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일부 내어놓는다면 두 가지입니다. 인도적 지원의 허용과 미국 사람들의 방문 허용입니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북한이 만족을 할 수가 없잖아요. 이때 미국이 못 해주는 것을 한국이 대신하도록 하는 방법이 있는데 그게 바로 금강산 재개와 철도 연결입니다. 이 중에 제가 볼 때 금강산은 대충 합의를 본 거 아닌가 싶어요. 그러나 개성공단까지는 합의를 보기가 좀 어렵지 않겠나 싶습니다. 플러스알파가 주어지면 몰라도 또 다음에 만나자고 한 후 김정은이 워싱턴을 가든지, 트럼프가 평양을 한 번 가든지, 이렇게 하면서 조금 더 거래량을 늘리는 쪽으로 가지 않을까 합니다.

판이 깨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인식입니다. 만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최소 거래량은 정했다는 거거든요. 거래량을 더 늘이는 것을 지금 협상 중일 겁니다. 두 사람의 성격으로 봐서는 사전에 실무선에서 대충 감을 잡아 놓고 현장에 가서 서로 카드를 내밀고 극적인 효과를 보여주면서 합의를 보지 않겠나 예상합니다.

저는 지난번 1차 회담도 실패가 아니라 성공이라고 생각해요. 만났다는 게 성공입니다. 큰 틀에서 미국은 ‘북한에 대한 적대적 정책을 폐기하고 새로운 관계를 맺겠다’라고 했고, 북한은 ‘핵을 폐지하겠다’라고 한 이 두 가지 합의가 결국은 큰 선언입니다. 거기서 구체적으로 한 발 더 나간 것이 이번 영변 핵시설 폐기입니다. 지금까지 합의가 잘 안 된 이유는, 북한은 ‘우리가 한발 갔으니 미국도 한 발 오라’라고 요구하고, 미국은 ‘북한이 성의를 갖고 있는 것은 이해하는데, 그 정도 갖고는 한 발 갔다고 볼 수가 없다’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아무런 조치를 안 취하니까 북한에서는 ‘그러면 판을 깨자는 얘기냐, 그래도 겁 안 난다’ 이렇게 나오면서 협상이 중단된 겁니다. 이번 정상회담에서는 영변 핵시설 폐기로 북한이 먼저 한 발 떼는 대신 미국도 한 발 가는 쪽으로 최종 타협이 있지 않을까 예상합니다.”

장장 3시간이 넘는 긴 인터뷰였습니다. 어떤 내용이 주요하게 실릴지 모르지만, 많은 국민들이 용성 스님의 독립운동과 그 공로에 대해 되새겨 보고 오늘날 교훈으로 삼는 계기가 되길 바라봅니다.

인터뷰가 끝나고 오후 3시가 되어서야 스님은 문경으로 출발했습니다. 마침 문경에서 대의원회 회의를 하고 있던 대의원들은 보수 공사를 진행 중인 선유동 연수원을 방문하였습니다. 서울에서 빠르게 이동한 스님도 문경 수련원으로 가는 길에 연수원을 방문했습니다.

단체사진을 찍고 있던 대의원들 틈으로 스님도 들어가 함께 사진을 찍었습니다. 대의원들은 때마침 도착한 스님에게 환영의 박수를 보냈습니다.

대의원들은 문경 수련원으로 돌아가고, 스님은 현장 담당자들과 공사현장을 둘러보며 진행사항을 점검했습니다.

“식탁은 구했어요?”

“네. 일부 구했습니다.”

“돈 주고 사는 건 절대 안 돼요.”

스님은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현장 담당자들을 독려한 후 수련원으로 출발하려는데 스님은 나무로 된 계단 앞에 멈춰 섰습니다. 곧 철거할 예정인 곳이었습니다.

“여기 나무로 숙소동 앞 부서진 계단을 메우면 안 됩니까?”

“스님, 얼마 못 가서 부서질 겁니다.”

“그럼 문경 수련원 공양간 계단에 패인 곳이 있던데 거기 메우는데 써주세요. “

“스님, 이게 못질이 다 되어 있어서 뜯어내면 그렇게 못씁니다.”

“아이고, 그럼 시골에 불 때게 싣고 갈게요.”

“스님, 이 나무는 다 방수처리가 되어 있어서 태우면 오히려 독소가 나옵니다.” (모두 웃음)

스님은 어떻게든 버리지 않고 써보려고 했지만 방법이 없습니다.

문경 수련원에 도착한 스님은 간단히 저녁식사를 하고, 새벽까지 원고 교정 업무를 보았습니다. 대의원들은 예정된 즉문즉설 시간도 넘긴 채 늦게까지 안건을 심의했습니다. 내일은 하루 종일 문경에서 정토회 대의원회 회의, 서원 행자 대회, 행자대학원 13기 졸업식이 있을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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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데오

"우리의 역사 속에 있는 민(民)의 활약상과 함께 민(民)이 주인이 되는 과정이 정말 중요합니다." 감사합니다.~~^^

2020-02-25 06:09:55

이지은

북미가 베트남에서 만난것이 최소거래량은 된다라는 말씀이 와닿습니다.

2019-03-02 00:06:10

선화행

대한민국의주인되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019-02-28 16:4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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