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9.3.8 도문 큰스님 친견
“용성조사님의 행적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독립운동사는 새로 쓰여질 겁니다.”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은사 스님인 도문 큰스님을 찾아뵙고 지난 3.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후 두북에서 농사일을 했습니다.

새벽 일찍 서울 정토회관을 출발한 스님은 오전 9시에 도문 큰스님이 머물고 있는 부산 천마산 중생사에 도착했습니다. 미리 도착해 기다리고 있던 유수 스님과 함께 중생사 법당 안으로 들어가 도문 큰스님께 인사를 올렸습니다.

큰스님은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먼저 기도를 함께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이 기도는 용성 조사님께서 전 세계 인류가 이렇게 나아가야 된다고 하신 내용이 담긴 예불 기도 의식이에요.”

큰스님은 이 예불 기도를 매일매일 밤낮으로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특히 요즘은 건강이 좋지 않지만 누워서라도 이 예불 기도는 반드시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큰스님이 예불 기도를 시작하자 스님도 간절한 마음을 담아 함께 기도를 했습니다. 예불 기도의 내용에는 불교 수행을 통해 다섯 가지 향(오분향)을 올리고 만중생이 해탈 열반하고, 대한민국의 800년 대운이 열리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계향. 능히 모든 악업을 짓지 아니하고, 능히 모든 선업을 닦는 계향의 몸을 이루어 계향을 드리옵니다.

정향. 미래세에 성불을 서원한 대승보살 행자님을 깊이 믿고 마음으로 물러나지 아니하는 정향의 몸을 이루어 정향을 드리옵니다.

혜향. 항상 마음과 몸에 안과 밖을 살펴보는 혜향의 몸을 이루어 혜향을 드리옵니다.

해탈향. 능히 무명 절박을 풀어서 보리심으로 회향하는 해탈향의 몸을 이루어 해탈향을 드리옵니다.

해탈지견향. 깨침으로 살펴 항상 밝아 통달하여 걸림이 없는 해탈지견향의 몸을 이루어 해탈지견향을 드리옵니다.”

예불 기도는 1시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예불 기도를 마치고 나서 도문 큰스님은 법륜 스님에게 당부의 말을 이어갔습니다.

“법륜 스님은 천 년을 바라보는 안목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나도 밤낮으로 기도를 하고 있긴 하지만 이걸로는 안 되고 법륜 스님이 나서야 이 길이 열릴 것 같아요. 우리나라 모든 국민들이 능히 모든 악업을 짓지 않고, 능히 모든 선업을 닦는 오분향의 몸을 이루도록 하자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모든 국민들이 미래세에는 성불을 해야 돼요. 정토가 다른 것이 아니라 오분법신향을 전 세계에 풍기는 것이 바로 정토예요. 번뇌 즉 보리이고, 보리 즉 번뇌입니다. 한 생각 돌이키면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법륜 스님은 세계적인 인물이니까, 법륜 스님이 이 일을 해주셔야 한다는 겁니다. 나는 이제 건강이 안 좋아져서 얼마 못 산다니까.”

큰스님의 신신당부를 깊이 새기고, 방으로 들어가서 대화를 계속 이어갔습니다.

먼저 스님은 큰스님에게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지난 2개월 동안 용성 조사님의 독립운동을 세상에 알리고자 진행한 일들에 대해 보고했습니다. 각종 신문에도 용성 조사님의 독립운동 행적으로 재조명하는 기사들이 실렸는데요. 보도된 기사 내용도 큰스님에게 보여드렸습니다.

역사학자들과의 토론 과정에서 제기된 문제들을 어떻게 수렴하고 극복할 것인지에 대해 스님이 생각하고 있는 향후 계획도 함께 이야기했습니다.

이번 학술토론회를 통해서 향후 연구 과제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잡히는 성과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스님은 총 7가지 연구 과제를 잡아보았다며 큰스님에게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지난 2월 27일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용성조사님의 독립운동사에 대해서 학자들과 토론을 해보았어요. 역사학자들의 평가는 증거 없이 이야기를 해서는 한낱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1년 계획을 세워서 하나씩 연구 과제를 진행하려고 해요. 총 7개 항목으로 나눠서 연구 과제를 세워보았습니다.”

스님은 큰 스님께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7가지 중 4가지 과제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과제는 3.1독립선언을 할 때 용성조사님이 민족대표를 33인으로 해야 된다고 말씀하신 부분입니다. 기독교계에서 인원수를 더 넣고 싶어 해서 불교계에서 두 명만 들어가기로 양보한 사실, 용성조사님이 공약 3장을 넣으라고 한 사실, 기독교계의 동참을 이끌어내기 위해 5천 원을 주라고 한 사실, 이런 내용들에 대한 근거들을 좀 더 준비해야 할 것 같아요. 지금도 증거만 있다면 바로 역사가 되는데, 큰스님께서 아무리 증언을 해도 그 증거를 확보하지 못하면 하나의 주장밖에 안 되거든요.”

“일본 사람들은 없는 역사도 만들어내는데, 우리는 있는 역사를 갖고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없애려고 하니... 참 안타까워.”

“손병희 선생님과 용성조사님 두 분이서 나눈 얘기를 역사적 사실로 하기가 가장 어려운 것 같아요. 단 둘이서 나눈 얘기는 제 3자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고증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역사 기록에는 한용운 스님이 3.1독립선언서에 공약 3장을 추가했다고 나와 있어요. 그런데 실제 사실은 용성조사님께서 한용운 스님에게 ‘공약 3장을 넣어라’라고 한 것이잖아요.

그런데 용성조사님이 하신 말씀을 듣고 가서 한용운 스님이 민족 대표들과 의논해서 공약 3장을 넣자고 한 것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한용운 스님이 했다고 알 수밖에 없어요. 이 경우 한용운 스님이 ‘공약 3장은 용성스님이 넣어라 해서 넣었다’라고 직접 말해주지 않는 이상은 다른 사람들이 그 내용을 알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불심 도문스님이 저에게 어떤 말씀을 하셔서 제가 그걸 듣고 밖에 가서 얘기를 하면, 세상 사람들은 법륜스님이 그런 말을 했다고 하지 불심 도문스님이 그런 말을 했다는 건 아무도 모르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내용들은 하나의 역사가 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아요. ‘한용운 스님이 공약 3장을 추가하셨는데 배후에서 그걸 지도해주신 분이 용성조사님이시다’ 이렇게 설명해야 어느 정도 설득이 되지, ‘공약 3장은 한용운 스님이 넣은 게 아니고 용성조사님이 넣었다’ 이렇게 주장하면 용성조사님이 했다는 걸 증명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두 번째 연구 과제는 상해 임시정부를 만들 때 용성조사님이 자금을 제공했다는 내용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상해 임시정부에 자금을 제공해서 초대 대통령이 됐다는 부분까지는 널리 알려져 있어요. 그런데 그 자금을 다 미국에서 가져왔다는 것이 현재까지의 정설입니다. 이 정설을 뒤집으려면 증거가 필요한데, 용성조사님이 자금을 댔다는 걸 털끝만큼도 아는 사람이 이 세상에 한 명도 없다는 것이 문제예요. 증거가 없이 갑자기 이 주장을 하면 오히려 지금까지 구축된 용성조사님의 명예마저도 떨어지게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증거를 좀 더 찾아봐야 될 것 같아요.”

“증거를 찾으려면 중국에 가서 찾는 수밖에 없지.”

“예. 중국에 가서 그 당시의 역사를 알아봐야 합니다. 그때 한국에서 중국으로 수출하는 인삼 무역의 80%가 상해로 갔다는 건 역사 기록에 있습니다. 인삼 거래 권한을 민영익이 고종으로부터 1907년에 받았다는 것도 역사 기록에 있고요. 앞으로 더 연구해야 할 것은 당시 상해에서 조선을 상대로 인삼 무역을 했던 최대 상인이 중국의 진씨 상인과 임씨 상인이었는지 여부입니다. 용성조사님은 진씨 상인, 임씨 상인과 교류를 하셨으니까요.

그리고 상해 임시정부에 미국으로부터 돈이 얼마 들어왔는지, 또 미국에서 온 돈이 언제 왔는지를 파악해야 합니다. 미국에서 온 돈이 그때까지 도착될 수 있었느냐, 당시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는 한국 교민이 얼마 안 됐는데 정말 그 큰돈을 모을 수가 있었느냐, 미국에서 돈을 모았다고 하더라도 정말 상해 임시정부를 출범할 때 돈이 전달된 것이냐, 이 사실들을 고증을 해봐야 할 것 같아요.

상해임시정부에 대해 연구해 보니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임시정부 건물 말고 처음에 임시정부가 출발할 때는 프랑스가 지은 좋은 건물에서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거든요. 그렇다면 미국에서 온 돈이 그만한 건물을 살 만큼이 되었느냐, 그렇지 않다면 그 돈은 어디서 왔느냐, 이런 사실들을 조사하면 어느 정도 밝혀질 것 같아요. 정설은 안 되더라도 터무니없다에서 가능성이 있다는 정도까지는 인정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려면 중국에 가서 조사하고, 미국에 가서 조사하고, 그 당시 연구 성과들도 조사해야 합니다.

세 번째 연구 과제는 대한민국 국호와 태극기를 사용하자고 향도하셨다는 부분입니다.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자고 용성조사님이 제안을 하셨다는 것은 얼마든지 얘기할 수가 있는데, 용성조사님이 제안했기 때문에 ‘대한민국’이 국호가 됐다는 연결 고리가 아직 없어요. 왜냐하면 상해 임시정부에서 신아무개라는 사람이 그런 주장을 했다고 기록이 나와 있는데, 신아무개와 용성조사님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것 같아요. 그분이 만해 한용운 스님처럼 용성조사님의 지도를 받고 말했다든지, 용성조사님이 상해 임정에 돈을 댄 게 먼저 증명이 된다면, 그 돈을 댈 때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라고 했다는 연결 고리가 나오든지, 이런 연구를 해야 될 것 같습니다.

태극기 사용을 제안하셨다는 부분은 3.1운동 당시 깃발을 무엇으로 할 것인지 논의했다는 기록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깃발을 무엇으로 할지 논의했다는 기록만 있으면, 그때 용성조사님이 태극기 사용을 주장했다고 하면 되는데, 그 기록이 없거든요. 그리고 처음에는 태극기를 안 흔들고, 대부분 다 맨손으로 만세를 불렀어요. 시간이 흐르면서 태극기를 많이 흔들게 되거든요. 용성조사님은 주로 손병희 교주님에게 이런 제안들을 했던 것 같아요.

“네. 맞아요. 두 분 사이의 얘기예요.”

“예, 그러니까요. 큰스님과 저하고 둘이 얘기 나눈 것이 역사가 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다만 이런 정황은 추측해 볼 수 있어요. 당시에 한일합방이 되면서 일제가 대한이란 말과 태극기를 못 쓰게 했거든요. 3.1운동할 때도 당시는 대한이라는 말을 쓰는 게 금기였기 때문에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기가 어려웠는데, 태극기도 금기로 되어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태극기를 들기가 좀 어려웠을 거예요. 천도교에서는 가능하면 일본과 안 싸우고 이 문제를 풀려고 했기 때문에 태극기 사용에 대해서 부담스러워했을 가능성이 높아요. 이에 대해 용성조사님이 ‘아니다. 태극기는 불교, 기독교, 천도교의 교리를 다 담고 있고, 중생을 구제하고, 번뇌를 끊자는 뜻이 담겨있기 때문에 태극기를 들어야 한다’라고 주장했을 수가 정황상 충분히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 갖고 용성조사님이 주장해서 3.1운동 때 태극기를 흔들었다고 하기에는 선뜻 동의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용성조사님이 그런 주장을 한 것과 대중들이 태극기를 흔든 것과는 상관성이 없다고 여겨질 수 있거든요. 이것도 증명을 하려면 그때의 정황을 더 조사해 봐야 합니다.

네 번째 과제는 만주에 선농당을 만든 부분입니다. 만주에서 선농당을 만들었다는 것은 이제 거의 다 밝혀졌습니다. 증거도 나왔습니다. 만주 대각교당의 책임자가 안용호 씨였는데요. 이 분이 용성조사님을 대신해서 대각교당의 신도 회장을 했어요. 안용호 씨의 아들이 안수길 씨입니다. 안수길 씨는 북간도라는 소설을 쓴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1941년에 ‘원각촌’이라는 소설을 쓴 게 있습니다. 그런데 안수길 씨가 안용호 씨의 아들일 뿐만 아니라 서울 대각사의 일요 불교학교 선생도 했습니다. 그러니 이 분은 만주에 있는 선농당에 대해서 잘 알 거 아닙니까? 그런데 이 사람이 쓴 ‘원각촌’이라는 소설의 내용이 큰스님이 증언하신 내용과 똑같습니다.

소설에서는 용성스님이라고 안 나오고 해룡 스님이라고 나옵니다. 해룡 스님이 신도 몇 명과 함께 돈을 가져와서 명월촌과 봉녕촌에 땅 600상을 샀다고 나와요. 해룡 선사가 이곳에 와서 불교 이상촌을 건설하려고 했다는 표현도 나옵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참선하고, 또 당시에 소작료가 5대 5인데 이곳에서는 3대 7로 했답니다. 당시에는 혁명적이었죠. 처음 이사 온 사람들에게는 집을 지으라고 50원을 지원해주고, 세 집에 소 한 마리씩 줘서 농사를 지을 수 있게 지원해주고, 척박한 땅을 개간하면 5년 간 세를 안 내도 되게 했다는 내용도 소설에 나옵니다. 40호의 집이 살고 있는데, 곧 50호의 집이 새로 들어온다고 하면서 이를 대비해 무엇을 하자는 내용도 나온다고 해요. 이 소설의 내용과 용성조사님의 선농당을 비교하여 분석한 논문도 나왔습니다. 1941년 해방되기 전에 나온 소설이니까 이 내용은 거짓말이 될 수 없다고 보여져요. 이런 사실들을 전부 조사하면 용성조사님이 만주에 독립운동 근거지 마련을 위해 농장을 만들었다는 것은 사실로 다 밝힐 수 있습니다.

그리고 1921년에 흑하사변, 즉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러시아에서 괴멸되어 버립니다. 그 사건 뒤에 독립운동가들이 모두 흩어지게 됩니다. 용성조사님이 1921년 3월에 감옥에서 나왔는데, 흑하사변이 난 것은 1921년 6월입니다. 용성조사님은 아마 괴멸된 독립운동가들을 도우려고 급하게 선농당 땅을 산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용성조사님은 감옥에서 방금 나왔기 때문에 삼장역회를 조직할 때였는데, 갑자기 1922년에 만주로 가셔서 땅을 사거든요. 그때 순정효황후와 최상궁, 고상궁 세 명이 1만 원을 냈습니다. 원각촌 소설에는 3만 3천 원에 땅을 구입했다고 나와 있어요. 나머지는 임동수 거사가 돈을 마련했겠죠.

그런데 소설에서는 실제 땅값이 2만 원도 안 되었는데, 그 동네 사람들이 스님을 속여서 땅을 비싸게 구입했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이 사실은 거의 진실에 가까운 것 같아요. 용성조사님이 왜 1922년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만주의 산골에 땅을 구입했을까 생각해보니 아마 흑하사변으로 흩어진 독립운동가들을 돕기 위해서 급하게 구한 것 같습니다. 그냥 농사짓는 것만 필요했다면 넓은 들판을 구입해야 하는데, 굳이 산골짜기인 그 땅을 구입했을 리가 없거든요. 그리고 5년 후에야 용정에 대각교당을 세웁니다. 농장을 먼저 구입하고 5년 있다가 교당을 세운 거예요. 교당을 먼저 만들어 놓고 농장을 세웠다면 농사짓기 위해서 농장을 세웠다는 것이 말이 되는데, 산골짜기를 거금을 주고 먼저 사고, 5년 후에 교당을 세웠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당시의 독립운동가들 중에는 용성조사님이 그 땅을 제공했다고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예요.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흑하사변이 1921년에 났고, 1923년에 그곳 명월촌에서 이범석 등이 고려혁명군 400명을 재건합니다. 당시에는 명월구라고 불렸다고 해요. 나중에 명월촌으로 이름이 바뀌어요. 당시에 독립운동가들이 모두 흩어지고 없어졌는데 그 명월촌 산골짜기에서 어떻게 400명을 먹여 살렸느냐는 겁니다. 그때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그들을 돕기 위해서 50원을 보내줬다는 기록이 나오거든요. 당시에 50원은 집 한 채 짓는 경비밖에 안 됩니다. 그 돈으로 어떻게 400명을 먹여 살렸느냐는 거죠. 400명의 고려혁명군은 결국 용성조사님이 마련한 그 농장을 기반으로 재건된 것이 아닌지 앞으로 더 연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1931년에 명월구는 유명한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됩니다. 중국 공산당 역사에도 명월구 회의가 나옵니다. 북한 김일성도 그 회의에 참석했다는 기록이 있고요.

또 1938년에 만주의 독립운동 세력을 궤멸시키기 위해서 일본이 파견한 부대가 간도특설대입니다. 간도특설대가 독립운동가들이 사는 곳을 샅샅이 뒤져서 다 죽이는데, 그때 죽은 사람만 몇 천 명이 되거든요. 간도특설대도 명월구에 세워집니다. 명월구가 그만큼 독립운동의 중요한 근거지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1939년에 간도특설대가 그 동네를 다 없애버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다 불 질러 버렸어요. 절단 부락이라고 표현하거든요.”

“이런 것들을 이제 하나씩 조사를 하면 명월촌과 봉녕촌의 선농당이 어떻게 독립운동의 근거지 역할을 했는지 밝혀낼 수 있습니다. 이 내용이 왜 우리 역사에 없냐면, 1921년 흑하사변 이후 만주 지역에서 민족주의 독립운동은 다 없어지고, 전부 사회주의 독립운동으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분단 이후 이념의 장벽 때문에 우리 역사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연구가 안 이루어졌습니다.

학자들이 제일 황당해했던 것은 용성조사님이 모택동과 장개석을 만나서 대한의사군 1만 명을 보낼 테니 조중 연합군을 구성하자고 제안했다는 내용입니다. 이 부분도 연구가 많이 필요합니다.

용성조사님은 장학량의 소개를 통해 장개석을 만났을 겁니다. 그러면 장학량과 용성조사님은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요? 용성조사님이 장학량을 알고 있었다고 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멉니다. 그런데 만약 용성조사님이 장학량의 아버지인 장작림을 알고 있었다면, 그건 말이 됩니다. 용성조사님이 대각교당에 머무르실 때가 1927년이고, 장작림은 1928년에 죽었습니다. 장작림이 죽기 전에 용성조사님과 만났다는 증거만 찾을 수 있으면, 장개석을 만나 조중 연합군을 제안했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 될 수 있습니다.

저희들이 용성조사님에 대해 조사를 하면 할수록, 용성조사님도 훌륭하시지만 이런 모든 일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다 임동수 거사님 덕분이란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맞아요. 임동수 거사가 다 뒷받침을 한 겁니다.”

“큰스님께서 들으셨던 내용을 근거로 저희들이 더 많은 연구를 해야 이 문제를 역사적으로 밝혀낼 수 있어요. 그렇게 되면 용성조사님은 물론 임동수 거사님도 독립유공 건국 훈장을 받아야 되는 인물로 다시 평가될 겁니다.”

“임동수 거사님이 당시 쌀 2만 석을 다 팔아서 독립자금을 댔거든요.”

“네. 이중에 한 두 개만 증거를 찾으면 다른 것도 다 믿을 수 있게 될 것 같아요. 제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 만주의 선농당과 상해 임시정부에 자금을 보낸 사실이에요. 그게 사실이라는 것이 확인되면 나머지도 다 역사로 인정이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더 연구해 나갈 테니 큰스님께서 너무 걱정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그렇게 되면 독립운동사에서 용성조사님은 완전히 새롭게 평가될 것입니다.”

도문 큰스님은 스님의 이야기에 무척 흐뭇해했습니다. 그러면서 최근에 출간된 용성스님 관련 책들을 소개하고, 연구 작업에 참고하라고 하면서 전해주었습니다. 스님이 “저희가 앞으로 더욱더 연구해 나갈 테니, 이제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라고 하자, 큰스님은 “수고가 많다”며 격려와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정성껏 차려준 점심 식사를 한 후 오후 1시 무렵에 중생사를 나왔습니다. 스님은 큰스님에게 3월 중에 또 찾아뵙겠다고 인사를 한 후 두북으로 향했습니다.

두북에서는 봄을 맞이하여 농사 준비를 하며 오후 시간을 보냈습니다. 내일은 해외활동가 수련 마지막 날입니다. 지난 6일간의 수련을 총정리하면서 즉문즉설을 한 후 회향 법문을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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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데오

"해탈지견향. 깨침으로 살펴 항상 밝아 통달하여 걸림이 없는 해탈지견향의 몸을 이루어 해탈지견향을 드리옵니다.” 감사합니다.~~^^

2020-03-29 13:24:27

은손

일본에게 나라를 잃고. 해방이 되었지만, 친일파들에 의해 다시 한 번 나라를 잃어, 바른 역사를 구현할 황금같은 시기를 잃은 것이 또 한 번의 통한입니다...모두 밝혀지는 것은, 사필귀정이라고 모든 것이 바른 것으로 돌아간다는 뜻과 맞아져 모든 사람이 바른 삶을 사는 것이 옳음을 가르치는 큰 교훈이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모든 것이 바른 것으로 돌아가야 우리 사회가 바로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되기 때문입니다...!!

2019-03-14 13:3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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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실들을 전부 조사하면 용성조사님이 만주에 독립운동 근거지 마련을 위해 농장을 만들었다는 것은 사실로 다 밝힐 수 있습니다.] [그리고 1921년에 흑하사변, 즉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러시아에서 괴멸되어 버립니다. 그 사건 뒤에 독립운동가들이 모두 흩어지게 됩니다. ……용성조사님은 아마 괴멸된 독립운동가들을 도우려고 급하게 선농당 땅을 산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용성조사님은 감옥에서 방금 나왔기 때문에 삼장역회를 조직할 때였는데, 갑자기 1922년에 만주로 가셔서 땅을 사거든요. ] [ 용성조사님이 왜 1922년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만주의 산골에 땅을 구입했을까 생각해보니 아마 흑하사변으로 흩어진 독립운동가들을 돕기 위해서 급하게 구한 것 같습니다. 그냥 농사짓는 것만 필요했다면 넓은 들판을 구입해야 하는데, 굳이 산골짜기인 그 땅을 구입했을 리가 없거든요. 그리고 5년 후에야 용정에 대각교당을 세웁니다. 농장을 먼저 구입하고 5년 있다가 교당을 세운 거예요. 교당을 먼저 만들어 놓고 농장을 세웠다면 농사짓기 위해서 농장을 세웠다는 것이 말이 되는데, 산골짜기를 거금을 주고 먼저 사고, 5년 후에 교당을 세웠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당시의 독립운동가들 중에는 용성조사님이 그 땅을 제공했다고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예요.]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흑하사변이 1921년에 났고, 1923년에 그곳 명월촌에서 이범석 등이 고려혁명군 400명을 재건합니다. 당시에는 명월구라고 불렸다고 해요. 나중에 명월촌으로 이름이 바뀌어요. ……그때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그들을 돕기 위해서 50원을 보내줬다는 기록이 나오거든요. ………400명의 고려혁명군은 결국 용성조사님이 마련한 그 농장을 기반으로 재건된 것이 아닌지 앞으로 더 연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1931년에 명월구는 유명한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됩니다. 중국 공산당 역사에도 명월구 회의가 나옵니다. 북한 김일성도 그 회의에 참석했다는 기록이 있고요.] [또 1938년에 만주의 독립운동 세력을 궤멸시키기 위해서 일본이 파견한 부대가 간도특설대입니다. 간도특설대가 독립운동가들이 사는 곳을 샅샅이 뒤져서 다 죽이는데, 그때 죽은 사람만 몇 천 명이 되거든요. 간도특설대도 명월구에 세워집니다. 명월구가 그만큼 독립운동의 중요한 근거지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1939년에 간도특설대가 그 동네를 다 없애버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이제 하나씩 조사를 하면 명월촌과 봉녕촌의 선농당이 어떻게 독립운동의 근거지 역할을 했는지 밝혀낼 수 있습니다. 이 내용이 왜 우리 역사에 없냐면, 1921년 흑하사변 이후 만주 지역에서 민족주의 독립운동은 다 없어지고, 전부 사회주의 독립운동으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분단 이후 이념의 장벽 때문에 우리 역사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연구가 안 이루어졌습니다. ] [그렇게 되면 용성조사님은 물론 임동수 거사님도 독립유공 건국 훈장을 받아야 되는 인물로 다시 평가될 겁니다.”] [제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 만주의 선농당과 상해 임시정부에 자금을 보낸 사실이에요.]

2019-03-14 01:4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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