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9.3.19. 평화재단 기획위원회 회의
“사랑이라는 것은 없어요.”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평화재단에서 오전에는 기획위원들과 회의를 하고, 오후에는 연이어 찾아온 손님들과 회의를 하였습니다. 저녁까지 이어진 회의로 오늘은 법문이 없습니다. 대신 지난 3월 11일, JTBC홀에서 열린 길벗 즉문즉설 중 ‘사랑’에 대한 즉문즉설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인간에게는 죽을 때까지 욕망과 욕심이 항상 붙어 다닌다고 합니다. 그러면 욕망과 욕심이 없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어떻게 하면 좋은 사랑을 할 수 있는지, 사랑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없어요.” (모두 웃음)

“...”

“사랑이라는 말이 있고, 사랑이라는 환상이 있지, 사랑이라는 것은 없어요. 굳이 사랑이 있다면 부모가 자식을 보고 안쓰러워하거나,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보고 내가 안쓰러워하거나, 무엇을 좀 도와주고 싶다고 생각하거나, 이런 것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어요. 굳이 사랑이라는 말을 빌린다면 말이죠. 만약 남녀 간에 서로 좋아해서 잠자리를 같이 하거나 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욕망의 다른 이름이 사랑이라고 불리는 것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러나 욕망의 다른 이름인 사랑도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남을 좋아하면 뭐든지 해주고 싶은 게 있기 때문에 거기에 사랑의 요소가 있기는 있어요. 그런데 여기에는 자기 뜻대로 안 되면 보복하는 요소가 있어요. 그래서 ‘사랑은 미움의 씨앗이다’ 이렇게도 표현하는 겁니다. 이것은 사랑이라는 용어를 어떻게 정의할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사랑이라는 용어를 내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이런 사랑은 반드시 복수나 증오의 감정을 동반할 위험을 갖고 있다고 이해하셔야 합니다. 이런 사랑은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좋은 만큼 괴로움이 뒤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재자일수록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엄청나게 잘해줍니다. 독재자일수록 자기 마음에 들면 그 사람에게 입안의 혀라도 내어줄 듯이 잘합니다. 그러나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어제까지 잘해주다가도 오늘 당장 비수를 가슴에 꽂으며 보복을 합니다. 이것이 독재의 핵심이예요. 그래서 독재자를 추앙하는 이유도, 적이 생기는 이유도, 이 두 가지에 있습니다.

여러분도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내 뜻대로 안 될 때는 거기에는 엄청난 증오가 생기잖아요. 이것이 좋다 나쁘다를 떠나 그 본질을 알아야 합니다. 이 때는 진짜 사랑이냐 아니냐 하는 용어를 쓸 필요가 없어요. 내가 바라는 대로 됐을 때는 좋아하고, 내가 바라는 대로 안 되면 미워하는, 욕망의 다른 표현일 뿐이에요. 만약 어떠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미움으로 바뀌지 않는 것을 사랑이라고 정의한다면, 남을 뭔가 도와주고 싶다거나, 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좋아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남녀 간의 욕망과 욕구를 사랑이라고 표현한다면, 그런 사랑에는 반드시 증오라는 것이 따르게 되는 부작용이 있습니다. 서로 좋아서 결혼할수록 상대가 바람을 피우거나 하면 10년을 같이 살았어도 곧바로 원수가 될 가능성이 높아요. 기분 나쁜 감정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서로 헤어졌다 하더라도 이 세상에서 나와 한 이불 밑에서 10년이나 자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어요? (모두 웃음)

어쩌면 유일할 수도 있고, 앞으로 두세 명도 안 될 수 있잖아요. 그런데 그런 사람을 왜 미워합니까. 내가 원하는 만큼은 아니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좋은 자산입니다. 내가 원하는 만큼 되지 않아서 헤어졌지만, 내가 원하는 것을 내려놓고 본다면 죽을 때까지 그만한 사람 한두 명 만날까 말까 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런 자산을 버리지 말라는 거예요.

연애도 마찬가지예요. 좋아하는 감정이 있어서 서로 만나다가 헤어졌다면, 내가 원하는 대로 안돼서 헤어진 거잖아요. 내가 원하는 대로 안 되었다는 것은 인정이 돼요. 그러나 그만한 사람이 이 세상에 많지가 않아요. 그래서 제가 늘 젊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헤어졌다고 해서 거기에 너무 목매달고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말아라. ‘그동안 잘 놀았다, 고맙다’ 하고 인사하고 헤어지는 게 좋다.’

그랬더니 어떤 정치인이 저한테 찾아와서 그러더라고요. 어쩔 수 없이 부인하고 이혼을 하게 됐는데, 스님 법문을 듣고 나서 ‘스님이 맞절하고 이혼하라고 하셔서 맞절하고 이혼했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맞절하고 이혼을 했기 때문에 지금 이혼을 했지만 가족 카톡방을 열어서 전 부인하고 아들하고 서로 안부도 물으며 지내고 있다고 해요. 그러면서 ‘스님의 그 제안이 자기 인생에 정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뜻대로 안 될 때의 기분 나쁜 그 감정은 이해가 되지만, 이 세상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다 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다 돼야 된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뜻대로 안 되면 괴로움과 증오가 생기는 것입니다. 또 반대로 남이 나한테 원하는 것을 내가 다 해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남이 원하는 것을 내가 못 해줄 때 괴로워하잖아요.

그러면 저는 부모가 원하는 것이 승려 생활을 계속하는 것일까요, 장가가는 것일까요? (모두 웃음) 장가가고 애 낳고 하는 것이 부모가 원하는 거겠죠. 부모가 그것을 원한다는 것을 이해는 하지만 나는 부모의 노예가 아니기 때문에 부모가 원하는 대로 살 수가 없는 거예요. 그렇게 부모가 자식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에요. 어릴 때 키워주신 것도 고마운 일이고요. 하지만 나는 그렇게 살 수가 없어요. 이 의지가 단호해야지 늘 미안해하면서 살 필요가 없어요.

저는 부부지간에도 그렇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상대의 요구를 이해하고 할 수 있는 데까지 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못하는 것은 못 한다고 말을 해야 합니다. 만약에 오늘 강연회에 남편이나 아내가 못 가게 했는데 왔다면, 저녁에 집으로 들어갔을 때 짜증을 내겠죠. 그럴 때 여러분들은 ‘내가 뭐 나쁜 데 갔나, 돈을 썼나, 좋은 말 듣고 왔는데, 왜 그래?’ 이렇게 화를 내기가 쉬워요. 그것은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거예요. 상대는 오늘 저녁에 나하고 저녁을 먹고 대화를 하고 싶다든지, 좀 일찍 와서 아이를 돌보라든지 하는 자기 요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집에 들어가자마자 상대가 언성을 높인다면 ‘죄송합니다’ 이러면 됩니다. 그러면 남편이나 아내가 ‘죄송한 줄 알면 다음부터는 가지 마!’ 이러겠죠. 이 때는 상대가 옳기 때문이 아니라 상대가 나와 다르기 때문에 일단 수용을 해줘야 합니다. ‘네 마음은 충분히 알겠다’ 이런 마음을 가져줘야 해요. 그런 후 내일 저녁에도 다른 일 없으면 일찍 집에 들어가면 되는데, 또 강연이 있어서 가보고 싶다면 나는 상대의 노예가 아니니까 또 강연을 들으러 가면 돼요. (모두 웃음)

그런데 여러분들은 ‘강의 들으러 갔다 오면 또 남편이 신경질 낼 텐데 어쩌지’ 이렇게 고민만 하다가 강의도 못 듣고 집에 들어가서는 ‘집에 별 할 일도 없는데 무엇 때문에 못 가게 했냐’ 이러면서 남편하고 싸웁니다. 나는 자유인이니까 강의를 오고 싶으면 그냥 오면 됩니다. 강의를 듣고 가서 상대가 짜증을 내면 ‘죄송합니다’ 하면 됩니다. 상대가 그릇을 던지면 그릇 하나 깨면 되는 것이고, 뺨 한 대 때리면 맞으면 되는 것이고, 곧바로 파출소에 전화해서 신고하면 되는 겁니다. (모두 웃음)

왜냐하면 아무리 가정이라도 폭력을 행사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내 남편을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자를 고발하는 거예요. 이것은 사회 정의 차원에서 폭력자를 고발하는 겁니다. 그래서 남편이 감옥에 가면, 면회는 가야겠지요. 고발한 것은 폭력자를 고발한 것이고, 면회 갈 때는 남편을 면회하러 가는 거예요. 관점이 이렇게 딱 잡히면 인생이 가볍게 정리가 됩니다. 남편을 어떻게 고발하느냐, 폭력자를 어떻게 면회 가느냐,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폭력은 사회 정의 차원에서 고발을 해야 되고, 내 남편이 폭력을 행사했든 강도짓을 했든 무슨 짓을 했든 내 가족이 지금 어려움에 처했으니까 면회는 가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입장 정리가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저는 정치인들을 만날 때도 보수든 진보든 가리지 않고 본인이 도움을 요청하면 가서 도와줍니다. 어떤 때는 양쪽이 원수가 된 상황인데 오늘은 이 사람 면회 가고, 내일은 저 사람 면회 가고 그래요. 그 사람이 어려움에 처해있기 때문에 도와주는 거예요. 그런 것처럼 여러분들이 이 관점이 분명해지면 세상살이가 그렇게 힘들지 않아요. 부인이 화를 내면 그 입장을 이해해서 ‘예, 알겠습니다.’ 하면 되고, 그렇다고 부인이 하자는 대로 다 하라는 것은 아니에요. 그 상황에서 화를 내는 것은 이해는 해 주되, 노예처럼 비굴하게 살라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우리가 인간관계를 맺을 때 당연히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줄 때 받을 것을 전제로 하고 주기 때문에 장사하는 것과 같은 심리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자꾸 믿진다는 생각이 들게 돼요. 연애를 하거나 결혼 생활을 해보면 자꾸 손해 보는 것 같잖아요. 그러다 보니 자꾸 ‘장사 그만할까’, ‘거래 끊을까’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거래는 거래라고 분명히 인식을 해야 합니다. 거래라고 인식을 하면 상대에게 미움이 안 생겨요. ‘내가 이익을 보려고 하듯이 상대도 이익을 보려고 한다’라고 분명히 알기 때문입니다. 장사꾼과 거래를 할 때는 상대가 조금 비싸게 불러도 기분은 별로 안 좋지만 그렇게라도 사는 게 나으니까 거래를 끊지는 않잖아요. 거래라고 생각하면 약간 손해를 보더라도 다른 데서 이익을 보는 것이 있기 때문에 관계를 유지할 수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거래를 하는 것이면서 자꾸 상대에게 이기적이라고 욕을 한다는 겁니다. 내가 거래를 하면 상대도 거래를 하는 것 아니겠어요? 한 남자 만나서 덕 좀 보려고 하면, 그 남자도 한 여자 잡아서 덕 좀 보려고 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이해가 충돌하는 겁니다.

일반 장사꾼도 서로에게 득이 돼야 같이 거래하는데 부부는 더 하죠. 그래서 서로 맞춰가면서 사는 게 필요합니다. 도저히 안 맞으면 관계를 그만둘 수는 있지만, 상대를 비난하고 욕해서는 안 됩니다. 어차피 거래를 한 것이기 때문에 수지가 서로 안 맞으면 합의를 파기하고 거래처를 바꾸면 되는 거예요. (모두 웃음)

거래를 사랑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증오하고 미워하는 거예요. 사랑에 속지 말고 아예 거래라고 분명히 알고 살면, 훨씬 더 건전한 부부관계가 될 수 있어요. 그래야 오히려 상대를 이해하기가 더 쉽습니다.

자기는 거래를 하고 있으면서 자꾸 상대에게는 사랑을 요구하기 때문에 ‘배신’이라는 말이 나오는 겁니다. 어떤 것이 배신일까요? 정치하는 사람들이 이 당에서 저 당으로 옮기면 배신이에요? 본인들한테 물어보세요. 전부 다 ‘이 당에 문제가 있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저 당으로 갔다’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을 바꾸면 무조건 잘못됐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사람이라는 것은 다 시시때때로 마음이 바뀌는 거예요.

결혼해서 5년 같이 살았는데 중간에 상대의 마음이 바뀌었다고 해서 배신했다고 여기면 안 돼요. 사람의 마음이 항상 같은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바뀌는 게 정상이에요. 그러면 5년 전에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냐고 하는데, 5년 전에는 평생 살 마음이었는데 살다 보니 생각이 바뀐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자꾸 ‘그때 네가 나를 속였다’ 이렇게 말하거든요. 그때 속인 것이 아니라 지금 생각이 바뀐 거예요. 물론 그때부터 흑심을 품고 산 사람이 있을 수는 있어요. (모두 웃음) 오히려 그때 흑심을 품었는데 이제 와서 내가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은, 내가 바보라는 말밖에 안 돼요. 상대의 흑심을 내가 몰라봤으니 내 눈이 삔 거예요. 잘생긴 얼굴에 반해서 그랬든지, 가진 돈에 눈이 어두워 그랬든지, 나한테 잘해주는 거에 반해서 그랬든지, 내가 잘못 알아본 거니까 ‘아, 내가 눈이 삐었던 거구나’ 하고 자각할 필요가 있어요. 처음부터 그랬다면 내가 잘 못 본 것이고, 처음에는 괜찮았는데 살다 보니 마음이 바뀌었다면, 내 마음이 바뀌듯이 상대의 마음도 바뀔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자꾸 처음의 약속을 너무 강조할 필요는 없어요. 지금 어떻게 할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그래도 계속 장사를 하는 게 나을지, 안 그러면 이 정도 선에서 거래를 끊는 게 서로에게 나을지, 서로 합의를 보면 됩니다.

그런데 만약 미움으로 바뀌지 않는 사랑을 했다면, 거래를 끊을 필요가 없어요. 애초에 거래가 아니었기 때문이죠. 그가 어떻게 하든 그것은 그의 인생이고, 나는 그를 좋아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 거거든요. 그가 나를 좋아하든 안 좋아하든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가 나를 좋아하는 대가로 내가 그를 좋아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가 나를 좋아하든 안 좋아하든 그것은 그의 사정이고, 나는 그가 좋다면 관계를 끊을 필요가 없잖아요. 거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상대를 문제 삼을 필요가 없어요. 이런 자기 관점이 중요합니다.

여러분들은 다 그렇게 거래를 하는 마음으로 상대를 선택하잖아요. 저는 그런 선택을 안 합니다. 선택을 안 하는 것도 하나의 선택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나 선택을 했다면 어떤 상황이 찾아오든 그것은 나의 선택이었기 때문에 내가 책임을 져야 해요. 망해가는 회사의 깡통 주식을 어떤 사람이 선전하는 것을 보고 좋은 주식인 줄 알고 잘못 선택을 했으면, 주가가 떨어져도 내가 책임을 져야 되잖아요. 그것처럼 자기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책임을 중요하게 여기면,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거기서 다시 일어설 수 있어요.”

“감사합니다.”

내일 스님은 정토회 서초 법당에서 수행 법회 법문을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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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데오

"내가 원하는 만큼 되지 않아서 헤어졌지만, 내가 원하는 것을 내려놓고 본다면 죽을 때까지 그만한 사람 한두 명 만날까 말까 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런 자산을 버리지 말라는 거예요."
감사합니다.~~^^

2020-04-06 06:54:33

임규태

감사합니다!!!^_^

2019-04-04 01:19:21

산나무

책임. 사랑. 거래. 내인생

2019-03-26 21:4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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