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9.3.26 대각교당, 명월촌, 봉녕촌 일대 답사
“용성 조사님의 발자취를 따라”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용성 조사님이 독립운동을 했던 장소로 알려진 용정 태평촌, 대각교당 터, 명월촌, 봉녕촌 일대를 답사했습니다. 용성 조사님은 일제 식민지 시대에 만주에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마련하고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양성하고 지도하는 등 평생을 독립운동에 몸 바친 분입니다. 스님은 하루 종일 용성 조사님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습니다.

숙소 근처 새벽시장에서 간단히 아침을 먹은 후 방학봉 교수님 댁으로 이동하였습니다. 평생을 발해사 연구에 전념해 온 교수님은 이제 90세가 되어 거동이 불편합니다. 연길에 온 김에 교수님에게 인사를 드리고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방 교수님과 대화를 마친 후 룡정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오늘은 그동안 중국 역사기행을 준비해 온 조춘호 선생님의 사위 분이 특별히 휴가를 내어 운전 봉사를 해주었습니다.

방 교수님 댁을 나와서 룡정 동성용진 태평촌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이곳은 용성 조사님이 토지를 구입해 농장을 만들었다는 곳입니다. 일부 학자들이 룡정 인근 태평촌의 위치에 대한 이견이 있는 터라, 룡정 시내와 동성용진 사이에 태평촌 마을이 실제 있는지, 또 농장을 운영하기 적합한지 확인하기 위한 답사였습니다. 넓은 용정 벌판 한가운데 연길과 개산툰으로 나뉘는 길목에 위치한 태평촌 마을은 농장을 운영하기 적합해 보였습니다.

다음은 룡정 시내 대각교당 터를 찾아갔습니다. 1993년에 스님이 답사했을 때 대각교당은 없어지고 일부만 남아있는 것을 어떤 집에서 벽채로 쓰고 있는 것을 보았고, 1994년에 스님이 다시 왔을 때는 벽채를 다 헐어버리고 백화점을 짓는 중이라는 주민들의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오늘 다시 확인하니 룡정에 백화점이 몇 개 있었는데 1994년에 지은 백화점은 주민들도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길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았으나 짐작할 만한 백화점들은 모두 1994년 이전에 지어진 것이고, 더구나 대각교당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대각교당 터 찾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 방 교수님 사모님에게 룡정의 지인들을 통해 자세히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대각교당 터를 찾던 중 룡정 1백화점 터의 맞은편 룡정 실험소학교 교내에 있는 이상설 선생의 서전서숙 설립 비석과 '이상설정'이라는 정자를 멀리서나마 볼 수 있었습니다.

근처 용두레 우물터에도 잠시 들렀습니다. 용두레 우물은 룡정이라는 지명의 근원지라는 명목으로 보존되고 있었는데, 우물은 말라 있었고 우물 덮개만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룡정을 떠나 용성 조사님이 1922년 700 정보(210만 평)나 되는 땅을 구입하여 대규모 농장을 운영했다는 명월촌으로 이동하였습니다. 명월촌은 1930년대에는 명월구라고 불리다가 지금은 명월진으로 지명이 바뀌어 있었습니다. 연길에서 가려면 큰 고갯길을 2개나 넘어야 할 정도로 깊은 산림 지역에 명월구가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가는 도중에 길이 막혀 좁은 시골길로 돌아가기도 하였습니다.

명월구에 도착하여 명월구의 옛 이름인 ‘옹성랍자(甕聲磖子)’의 유래가 된 바위를 둘러보았습니다. 명월구 시내를 흐르는 부르하퉁하 물살이 절벽에 부딪히거나 바람이 불면 단지 소리가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후에 이 지역은 밤에 달이 뜨면 물에 비치어 환하게 밝았다고 해서 명월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 이곳은 연길과 돈화로 이어지는 주요 도로의 길목에 위치한 곳으로 일본 식민지 때 간도 특설대가 주둔한 지역이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곳은 북한과 중국 양국의 항일 독립운동사에 ‘명월구 회의’라는 유명한 회의가 열린 장소라 일컬어지는 아주 중요한 곳이기도 합니다. 이곳에 기념비석이 세워져 있다고 해서 스님은 직접 확인해 보기로 했습니다.

기념비석이 있었다고 알려진 곳을 찾아가 보았으나 간도 특설대 비석만 있고, 명월구 회의 비석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촌로들과 근처의 관공서 직원에게도 문의했지만 알지 못하여 지난 2월 27일에 열린 용성 조사님 토론회 자료집에 들어있는 사진을 직접 보여주니 그제야 옮겨간 위치를 알려주었습니다. 기념비석은 안도 외곽의 고속도로 초입에 위치한 대랍자촌(大磖子村)으로 옮겨져 있었고, 직접 가보니 큰 돌비석에 명월구 회의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었습니다. 자료집 사진의 그 기념비는 없애고 큰 돌비석을 새로 세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비석에는 명월구 회의라는 용어를 빼버리고 동만주라고 표기되어 있어 역사가 지워지는 것 같아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대랍자촌은 안도 시내에서 좀 떨어진 거리라서 명월구 회의 기념비석을 외곽으로 이동시키는 게 적절한지 의문이 들었으나, 대랍자촌 관공서에 문의해 보니 ‘명월구 회의가 이루어진 곳이 대랍자촌이며, 간도 특설대가 주둔한 그 자리에 처음 세웠던 비석은 충분한 고증 없이 세웠다’라는 답변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다음은 봉녕촌을 확인하기 위해 안도현 량병진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지금은 봉녕촌이라는 지명은 찾을 수 없고 봉서촌이라는 마을 지명이 남아 있었습니다. 촌로에게 물으니 “절단 부락이라는 마을이 이곳에서 10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라고 했습니다. 양병대라고 불리다가 지금은 ‘량병촌’, ‘량병진’이라고 불리고 있었습니다.

이곳의 북쪽은 하얼바령 고개가 있어 북풍을 막아줄 뿐만 아니라 옆에 흐르는 개천이 논농사를 짓기 유리한 조건이고, 마을 뒤쪽의 산록은 끝없이 백두산까지 이어지고 있어서 농사를 짓다가도 무장투쟁에 임할 수 있고, 일제의 침공에는 언제든 백두산 쪽으로 대피할 수 있는 지리적 조건이었습니다. 명월촌과 봉녕촌은 30리 거리를 두고 있었다고 하는데 답사 결과 거의 비슷한 거리임이 확인되었습니다. 용성 조사님은 명월촌과 함께 이곳에서도 700 정보의 대규모 토지를 구입하여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사용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연길 주변에 독립운동 지역을 답사한 후 무순으로 가기 위해 연길 기차역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저녁 5시 57분 기차를 타고 약 13시간을 지나 내일 아침 6시 44분 무순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기차에 탑승한 후 시장에서 구입한 야채와 과일로 간단히 요기를 한 후 하루를 마무리하였습니다.

전체댓글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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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데오

"자료집 사진의 그 기념비는 없애고 큰 돌비석을 새로 세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비석에는 명월구 회의라는 용어를 빼버리고 동만주라고 표기되어 있어 역사가 지워지는 것 같아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감사합니다.~~^^

2020-04-17 20:40:50

임규태

감사합니다!!!^_^

2019-04-04 23:04:49

민영진

묻혀가는 독립운동역사를 발로 뛰며 찾아내시는 스님께 감사합니다. 기억하고 복원하는 것이 현재를 바로세우는 길이구나 알게 됩니다.

2019-03-30 06: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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