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9.03.28 고구려 박작성, 비사성 답사
“이름마저 사라져 가는 역사”

안녕하세요. 중국을 방문한 지 4일째 되는 날입니다. 오늘은 고구려의 산성인 ‘박작성’과 ‘비사성’을 둘러보았습니다.

새벽기도를 마친 스님은 북한이 바라보이는 압록강변을 산책했습니다. 어제는 밤이어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신압록강 대교도 자세히 볼 수 있었고, 건너편 북한의 모습도 보였습니다.

압록강 이쪽과 저쪽이 완전히 대비되었습니다. 중국 쪽은 높은 건물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고, 북한 쪽은 허허벌판 뿐이었습니다. 안타까운 모습이었습니다.

아침식사로 빵과 과일을 먹고, 중국 실무자들과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단동시 박작성으로 이동했습니다.

박작성(泊灼城)은 현재 단동시에서 20km 떨어진 호산(虎山)에 있는 고구려의 성입니다. 규모는 작지만 이곳에서는 압록강 하구로부터 들어오는 적군의 움직임을 한눈에 볼 수 있어, 군사적으로 매우 가치가 높은 곳이었습니다. 645년 당나라의 태종은 고구려를 침략하지만 실패하고, 다시 648년에 3만여 당군이 대규모 전함을 이끌고 침입했습니다. 이렇게 고구려의 요동지역이 위협을 받았을 때 침공군의 앞을 가로막은 곳이 바로 박작성이었습니다. 박작성이 당군의 진출을 저지하는 사이, 오골성(烏骨城) 등지에서 보내온 지원군이 도착하여 고구려는 당나라를 격퇴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고구려의 성이라고 해서 찾아왔지만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인해 고구려성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안내판에도 만리장성의 시작 지점이라고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고구려성이 있었던 자리에는 중국식으로 복원한 새로운 성이 있었습니다. 이름 또한 호산장성(虎山長城)이라 하여 이름마저 역사에서 사라져 가고 있었습니다.

중국 만리장성과 유사하게 복원한 박작성을 동북아 역사기행 코스로 넣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다음 답사지인 대련 비사성으로 이동하려고 나섰습니다. 그때 한국에서 호산의 뒤편, 성의 남쪽에 고구려 성의 흔적이 있다는 자료를 보내주었습니다. 가던 길을 되돌아와서 남쪽으로 찾아가 보았습니다. 처음 올라간 곳의 정반대까지 걸어가니 다행히 고구려 성의 양식이 일부 남아 있었습니다. 이름이 잊혀져 가듯 고구려 성의 흔적도 초라하게 잡목에 묻혀 있었습니다. 스님은 잡목에 묻힌 역사를 찾아 이곳 저곳을 둘러보면서 매우 안타까워했습니다.

“이름마저 사라져 후손들이 역사를 찾으려 해도 찾기가 어렵겠어요.”

고구려성의 흔적 옆에 세워진 중국식 호산장성의 망대에서는 멀리 북한 의주가 보이기도 했습니다. 돌아 나오는 길에 민가 뒤편으로 산성 성벽의 일부로 보이는 석축 흔적과, 성벽에서 무너진 돌로 쌓은 듯한 민가의 담벼락이 보였습니다.

박작성을 계획에 없이 두 번이나 둘러보고 나니 예정한 시간보다 약 1시간 늦게 대련의 비사성으로 이동했습니다. 비사성까지 이동하는데 4시간이 걸렸습니다. 비사성으로 가는 고속도로 왼편으로 넓은 들판이 펼쳐졌는데 들판 너머로 서해바다가 아련히 보일 듯했습니다. 저 서해바다를 건너 수∙당의 군사는 요동 벌판을 넘으려 했고, 고구려의 군사는 요동반도를 지키려고 피땀을 흘렸을 것입니다. 이런 상상을 하니 4시간이 그리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비사성(卑沙城)은 대련시에 있는 고구려의 성입니다. 고구려의 수군기지인 장산 군도와 가까우며, 고∙당 전쟁 당시 주요 해전과 상륙전이 벌어진 곳이기도 합니다. 비사성은 해발 663m의 산림을 성의 정상으로 삼아 서남쪽 계곡을 안고 있는 포곡식 산성입니다. 성벽의 길이는 약 5km이고 석회암으로 쌓은 석축산성입니다. 산성은 산을 등지고 바다를 마주하고 있는 데다가 지세가 험준하기 때문에 산성을 지키면 바다와 육지를 한 번에 방어할 수 있었습니다. 비사성은 614년 수나라의 내호아가 대규모 수군을 이끌고 요동에 상륙하여 비사성을 공격했지만 점령하지 못하였을 정도로 천년의 요새였습니다.

스님은 비사성의 서쪽 등성이를 따라 올라갔습니다.

약 50분 정도 걸어가니 서문으로 추정되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성벽과 성문이 일부 남아 있었지만, 당나라 양식으로 다시 복원하여 고구려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돌비석에는 ‘대흑산 산성’이라고 적혀있었습니다. 박작성처럼 이곳도 이름마저 사라져 있었습니다.

또, 645년 당태종의 고구려 침공 때 함락된 적이 있어서 점장대에 당태종을 기리는 당왕전(唐王殿)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고구려의 흔적을 찾기란 더욱 쉽지 않았습니다. 고구려 성의 유일한 흔적은 서문 위에 세워진 비사성이란 현판이었습니다.

서문으로 오른 스님은 남문 쪽으로 내려왔습니다. 석고사(石鼓寺)란 절이 바로 아래에 있었습니다. 평범한 절이겠거니 하며 스쳐 지나가려다 대웅전 아래 마당으로 가보았습니다. 마당에는 옛 우물터가 남아있었는데 살펴보니 바닥엔 아직 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산의 7부 능선에 가까운 석고사 마당에 우물터를 보니 산성을 세울 때 반드시 필요한 우물을 마련하고 분명히 비사성의 군사들이 이용했으리란 확신이 들고, 고구려의 옛 흔적을 찾은 듯 반가웠습니다.

석고사에서 산 아래로 내려오는 길은 계곡을 따라 웅장한 산세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내려오는 길에 관문새(關門塞)가 성의 남문 일부로 남아 있었습니다.

약 2시간 동안 비사성을 돌고 5시가 넘어서야 다음 답사지인 개주로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약 2시간 30여분을 달려 개주에 도착하니 이미 어두워졌습니다. 건안성은 내일 보기로 하고 숙소에 짐을 풀고 난 후 늦은 저녁을 먹고 하루를 마무리했습니다.

전체댓글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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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농일치행복한농장

"이름이 잊혀져 가듯 고구려 성의 흔적도 초라하게 잡목에 묻혀 있었습니다. 스님은 잡목에 묻힌 역사를 찾아 이곳 저곳을 둘러보면서 매우 안타까워했습니다." 감사합니다.~~^^

2020-04-20 09:57:43

임규태

감사합니다!!!^_^

2019-04-05 20:23:30

정지나

감사합니다 꾸벅 ^^

2019-04-03 23:3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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