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9.5.1 수행법회, 즉문즉설(15) 청주 청년
“엄마를 용서할 수 없어요”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오전에는 정토회 회원을 위해 수행법회를 하고, 오후에는 청년들을 위해 청주에서 즉문즉설 강연을 했습니다.

매주 수요일 정토회에서는 수행을 점검하는 법회를 엽니다. 한 달에 한 번은 서초 법당에서 스님이 직접 법문을 하고 전국 정토 법당으로 생중계를 하고 있습니다.

먼저 스님은 5월 1일 근로자의 날을 맞아 노동의 중요함과 모든 일에는 귀천이 없음을 강조했습니다.

“오늘은 5월 1일입니다. 신록의 계절이라고 하는 5월이 시작되는 첫날에 여러분을 만나서 반갑습니다. 5월은 계절의 여왕이라는 말이 있죠. 계절 중에 가장 좋은 달이라는 뜻입니다. 5월 1일은 노동절이고, 5월 5일은 어린이날이고, 5월 8일은 어버이날이고, 5월 12일은 부처님 오신 날이고, 5월 15일은 스승의 날이고, 이렇게 우리가 감사하고 기념해야 할 많은 날들이 5월에 있습니다.

특히 오늘은 노동자를 위한 날인데요. 인간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이 먹고 입고 자는 일상생활이죠. 이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을 만들어내는 게 노동입니다. 노동 없이는 우리의 삶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노동은 정말 중요하고 소중해서 ‘신성하다’라고까지 말합니다. 왕이 없거나 시장이 없어도 세상은 유지될 수 있지만, 밥하는 사람이 없고 청소하는 사람이 없으면 우리의 삶은 유지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난 봉건시대, 즉 지배계급 중심의 시대에는 놀고먹는 사람들이 귀하게 여겨지고, 노동하는 사람을 오히려 천하게 여기는 지배 문화가 팽배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노동하는 것을 자기도 모르게 좀 천하게 여기는 잘못된 관습 혹은 풍속이 아직도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청소는 천한 일이 절대 아닙니다. 어지르는 건 좋은 사람이고, 그걸 치우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에요? 어지르는 사람이 나쁜 사람이고, 치우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고는 왜 생각하지 않느냐는 거예요. 그러면 밥해주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고, 앉아서 먹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에요? 옷 만드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고, 그걸 입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에요? 옷을 더럽히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고, 빨래하는 사람은 하찮은 사람이에요?

이런 생각이 바로 지배 이데올로기입니다. 우리는 이런 지배 이데올로기에 세뇌돼서 죽을 때까지 늘 그 생각에 묶여 전전긍긍하며 살아갑니다.

농사를 짓고 물건을 만들고 노동을 하는 것을 귀하게 여겨야 해요. 누군가 일을 해야 먹고살 거 아니에요? 그게 왜 하찮은 거예요? 빈둥빈둥 노는 인생은 인연 과보에 의하면 빚만 지는 인생이에요. 우리 사회에도 노동을 통해서 벌어들인 돈보다 이자를 받거나 부동산이 올라서 버는 불로소득이 더 많다고 해요. 그렇기 때문에 사회가 이렇게 혼란스럽고 범죄가 많이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5월 1일이 무슨 날이라고요?”

“노동자의 날이요.”

“네. 노동자의 날입니다. 노동하는 사람을 정말 소중하게 여기자는 날입니다.”

스님은 최근 즉문즉설 강연에서 있었던 사례를 덧붙여 재미나게 설명해주었습니다. 이어서 수행자로서 관점도 명확하게 알려주었습니다.

“절하는 것, 수행 법회에 오는 것, 명상을 하는 것이 수행이 아니에요. 그것은 수행의 한 수단이에요. 수행의 목표는 여러분의 삶이 자유로워지는 것, 마음이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그 행복이란 막 들뜨는 즐거운 상태가 아니라 마음이 고요한 거예요. 즐거움을 추구하면 반드시 괴로움이 뒤따라오게 됩니다. 돈을 빌리면 갚아야 하는 것과 같아요. 이것을 윤회라고 합니다. 즐거움과 괴로움이 되풀이되는 거예요.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 해탈이에요.

정신건강에 좋은 것은 돌이킴입니다. 첫째, 나를 돌아봐야 해요. 내가 상처 입은 것들을 돌아보고 ‘그 사람들은 자기 성질대로 살 뿐인데 내가 상처를 입었구나’ 하고 내가 나를 치유해야 해요. 또 내가 내 성질대로 살면서 다른 사람에게 알게 모르게 상처를 준 것은 돌아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두 번째, 내 주위도 돌아봐야 해요. 내가 배가 부르다면 배고픈 사람을, 내가 건강하다면 아픈 사람을, 내가 장애인이 아니라면 장애인을, 나이가 젊다면 나이 든 사람을, 내가 돈이 있다면 돈 없는 사람을 돌아봐야 해요. 늘 나보다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고 함께 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어제 저는 거제도 애광원의 지적장애인들과 나들이를 다녀왔어요. 장애인과 있어보면 아직 걸을 수 있고 손을 움직일 수 있고 말을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소중한 지 알 수 있어요. 또 한국 사회에 살면서 불만이 많은데 외국인 노동자와 같이 이야기해보면 한국 시민증이 있는 것만 해도 부자예요.”

마지막으로 스님은 “이 좋은 계절에 북한은 보릿고개가 닥쳐서 식량난이 매우 심각하다”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보시해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대중은 법당에 둘러앉아 법문을 들은 후 마음을 나누고, 스님은 손님이 찾아와 바로 평화재단으로 갔습니다. 찾아온 손님들을 차례로 만나고 오후 3시 40분에 저녁 강연을 하기 위해 청주로 향했습니다. 강연장에 도착하기 전 청주에 살고 있는 실상화 보살님을 잠깐 찾아뵈었습니다.

실상화 보살님은 정토회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30여 년 간 정토회에서 봉사하고 후원을 해주고 계신 분입니다. 나이가 92세가 되셔서 지금은 법당에 자주 나가지 못하지만, 스님과 정토회를 아끼는 마음은 늘 한결같은 분입니다.

스님이 엘리베이터 문을 열고 모습을 보이자 보살님은 너무나 기뻐하며 스님을 얼싸안았습니다.

“아이고, 기쁘고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모르겠어요.”

집 안으로 들어가서 인사를 나눈 후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 건강은 어떠신지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보살님은 스님을 보자 편안하게 요즘 고민을 말했습니다.

“잘 계셨어요?”

“눈이 희미하고, 텔레비전 화면도 잘 안 보여요.”

“안경을 바꿔보시죠?”

“안경 바꿔도 소용없대요. 노안이어서 그렇대요. 작년부터 그래요.”

“눈 수술하면 안 돼요?”

“수술해도 소용없대요. 눈이 잘 안 보여서 가장 답답해요. 책 보는 게 취미였는데 이제 안 보여요.”

“그럼 저도 희미하게 보이겠네요.”

“네. 스님도 지금 잘 안 보여요. 눈이 더 악화될까 봐 걱정이에요. 제가 무슨 벌을 받아서 그런 거예요?”

“90년을 사용했는데 당연하죠. 나이가 많아서 그런 거예요.”

스님은 잘 아는 안과 의사에게 전화해서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지 알아보기도 했습니다. 치료 방법이 없다는 소리를 들은 보살님은 ‘늙어서 그런 거죠. 그러려니 해야겠네요’라며 웃음을 보였습니다.

냉장고에 있는 밑반찬 몇 가지를 꺼내 함께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스님이 잠시 화장실을 간 사이 보살님은 스님과의 인연을 회상하며 30년 전 스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스님이 30대 청춘일 때 처음 뵈었지. 그러니까 30년도 더 되었네. 청주에 오실 때마다 가까이에서 뵈면, 그냥 김치와 밥만 있으면 그거 드시고 가셨지 일체 돈을 쓰시는 법이 없었어. 그때는 누가 챙겨주는 사람도 없었잖아. 그렇게 검소하게 사셨던 양반이야. 지금도 그러시지만.

제일 불안했던 게 털털거리는 봉고차였어. 밤에 강연 마치고 오셔서 우리 집에 와서 주무시면 다음날 아침에 부산에서 강연이 있다고 하면서 새벽 6시에 나가셨어. 남이 버린 봉고차 고쳐서 타고 다니셨는데, 의자 눕히고 침낭 속에 들어가시면 담요 하나 덮고 가셨거든. ‘아이고, 저러다가 허리 다치면 어떡하나’ 하고 늘 걱정이 되었지. 차 문을 닫으면 우리 집 앞 모퉁이에 있는 복덕방을 돌아서 나가는데 차가 털털 거렸어. 털털 거리는 봉고차가 혹시 사고가 날까 봐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제발 무사하세요’ 하고 기도를 했었지. 그렇게 정토회가 시작된 거야.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찡해.

이렇게 행동을 잘하시니까 내가 홀딱 빠진 거지.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이 이 분이야. 이 분의 일상 생활의 모습을 내가 잘 알기 때문에.”

보살님의 눈에 눈물이 고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동안 틈틈이 모아놓은 동전 한 꾸러미를 스님에게 건네면서 JTS에 보시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혼자서 외로움을 많이 타시는 보살님에게 스님은 _“부처님 오신 날 지나면 문경 정토수련원에 와서 좀 있으세요”_라고 말한 후 집을 나왔습니다.

“보살님, 그럼 가보겠습니다. 건강히 잘 계세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고 하자 보살님은 힘차게 손을 흔들었습니다.

저녁 7시 30분부터는 청주시 상당구청에서 청년들과 함께하는 청춘 톡톡 즉문즉설 강연이 열렸습니다. 오늘은 청년들을 위한 즉문즉설입니다. 강연 장소인 청주 상당구청은 도시 변두리에 있었습니다.

“청년들이 오기가 쉽지 않겠네.”

스님은 차 안에서 잠깐 휴식한 뒤 강연장으로 들어갔습니다.

사람들이 오기 쉽지 않겠다는 우려와 달리 3백 석이 꽉 찼습니다. 좌석이 부족해 사람들은 깔개를 깔고 계단 한쪽과 제일 뒤편에도 앉았습니다.

“오늘은 청년을 위한 강의예요. 늙은 청년들도 많이 보이네요.(모두 웃음) 늙은 청년들은 질문 자격이 없습니다.”

청년 강연은 진행이 색다릅니다. 먼저 청중이 강연 전에 쓴 ‘한 줄 질문’에 대해 스님이 짧게 대답해주었습니다.

‘가끔씩 돌아가신 가족들이 보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죠?’

“사진을 보시면 돼요.”(모두 웃음)

‘스님 덕분에 많이 행복해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스님처럼 주변에 행복을 전할 수 있을까요?’

“남을 행복하게 할 생각하지 말고 자신부터 행복하게 살면 돼요. 저는 스스로 행복하게 사는 거예요. 내일 오전에는 거제, 저녁에는 부산에서 강연을 하고 모레 아침 일찍 비행기를 타고 중국으로 갔다가 돌아오자마자 강릉에서 가서 강연을 해요. 해외에 다녀왔다고 특별히 쉬지 않아요. 아침에 일어나서 밥하고 방청소하는 거나 똑같은 거니까요. 밥 할 일 있으면 밥하고, 밭일할 일 있으면 밭일하고, 누가 와서 물어보면 이야기하는 거예요. 누구를 위해서라고 자꾸 생각하면 부담이 돼요. 참으면 오래 못해요. 남을 위하는 게 곧 나를 위하는 거라는 관점이라면 오래 할 수 있습니다.”

‘사고로 상대방을 다치게 해서 저도 너무 힘들어요.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좋은 방법이 있나요.’

“후회하지 말고 ‘미안해요. 제가 부주의로 다치게 해서 죄송합니다.’ 이렇게 참회를 하세요. ‘나는 실수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데 실수했다’라고 후회하는 것은 교만이에요. 누구나 다 실수를 할 수 있고, 자기가 실수한 거라고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 사건을 계기로 앞으로 더 주의를 하면 돼요.”

‘시간이 너무 아까워요. 이 아까운 마음을 어떻게 털 까요?’

“시간은 아까울 것도 없고 지루할 것도 없어요. 시간은 시간일 뿐이에요. 시간이 아까운 사람은 조급한 사람이에요. 왜 조급 할까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뭔가 자기 욕심이 있을 거예요. 10만큼 노력하고 10을 얻으려고 해야 하는데 2만큼 노력하고 10을 얻으려고 하면 조급합니다.”

짧은 한마디에 지혜가 담겨 있었습니다. 가벼운 분위기 속에서 질문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청년들은 취업, 관계, 연애, 결혼, 진로, 자존감 등 다양한 고민을 내어놓았습니다. 그중 어릴 때 자신을 학대한 엄마를 용서하기 어렵다는 질문자와의 대화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어릴 적 폭언과 폭행을 한 엄마가 미워요. 어떻게 엄마를 용서할 수 있을까요?

“26세 직장인인데 10대 때 엄마에게 폭언과 폭력을 많이 당했습니다. 19세 때 일부러 대학을 멀리 지원했습니다. 엄마와 떨어져 5년을 살았습니다. 다시 엄마와 살게 된 것은 엄마가 ‘마음이 많이 아프다. 미안하다. 앞으로 엄마로서의 역할을 다시 해주고 싶다’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엄마와 살게 되었지만 엄마는 변하지 않았고, 참다가 작년에 일이 터졌습니다. 저는 패륜아가 되어 그 길로 집을 나왔습니다.

저는 전문대를 다니며 22세에 심리상담사 자격증을 취득했고, 그 뒤로 일을 병행하며 4년제 학위도 받았습니다. 지금은 학원에서 일하고 있으며, 앞으로 심리학과 대학원에 진학하고자 학비 마련을 목적으로 학원이 끝나면 아르바이트도 하고 있습니다. 작년부터 심리상담도 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열심히 살며 만족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저는 엄마가 그립습니다. 얼마 전 엄마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미안하다. 언제든 연락해라.’ 그래도 연락을 할 수 없습니다. 엄마에게 크게 화를 냈던 제 자신이 두렵고, 또 엄마가 제게 바라는 만큼 엄마를 포용할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저와 엄마는 아주 많이 닮아 있습니다. 저 또한 신경질적이고 의존적입니다. 제가 자식을 키우게 되었을 때 같은 상처를 주고 싶지 않습니다. 또 앞으로 대학원을 마치고 가정폭력에 처한 아이들을 위로하는 역량을 갖게 될 수 있을까요? 그러려면 엄마의 사랑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고 마음을 열어야만 하는 걸까요?”

질문자의 딱한 사정에 청중은 격려 박수를 보냈습니다. 이어서 스님이 차분하게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사정은 충분히 알겠어요. 엄마하고 떨어져 살아도 되느냐는 것을 묻는 건가요. 그래도 됩니다.”

“지금 엄마와 떨어져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요. 떨어져 살아도 아무 문제가 없어요.”

“엄마를 용서해야 할까요?”

“엄마가 질문자한테 뭘 잘못했는데요? 어릴 때 고함 좀 질렀다고 그래요?”

“많이 심했습니다. 엄마가 욕을 하고 때리기도 했어요.”

“스님은 질문자한테 욕도 안 하고 때리지도 않았지만, 질문자가 자라는데 도움도 안 주었잖아요. 그런데 질문자의 엄마는 때리기도 하고 욕도 했지만, 그래도 질문자를 밥도 먹여주고 학교도 보내줬잖아요.

그러면 질문자는 어느 쪽이 나아요? 질문자가 어릴 때 때리지도 않았고 욕도 안 했지만 아무것도 안 도와준 게 나아요, 야단 좀 치고 악을 좀 쓰더라도 밥도 먹여주고 학교도 보내준 게 나아요?”

“저는 스님보다 엄마가 싫어요. 그런데 앞으로 대학원에서 공부를 해서 좋은 엄마, 좋은 사람으로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건 불가능해요. 그냥 스님처럼 혼자 사는 게 나아요. 질문자는 그럴 수 있는 소질이 없어요. 자기를 낳아서 길러준 엄마를 미워하는데, 그런 상처가 있으면서 어떻게 좋은 엄마가 되겠어요?”

“그 상처를 치유하고 싶어서 질문한 거예요.”

“그래요.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제가 묻는 겁니다. 어린애를 도와주지도 않고 야단도 안 치고 그냥 두는 게 사랑이에요? 내 성질을 못 이겨서 욕을 하더라도 밥 먹여주고 키워주고 학교 보내주는 게 사랑이에요? 물론 질문자가 원하는 대로 밥도 먹여주고 학교도 보내주고 야단도 안 치면 제일 좋죠. 그건 스님도 알아요.

지금 내가 천만 원이 꼭 필요해요. 누가 나한테 천만 원을 그냥 주면 좋겠지만, 준다는 사람은 ‘나한테 천만 원을 받아가려면 뺨을 한 대 맞아라’라고 해요. 그러면 뺨 한 대 맞고 천만 원 받아 가는 게 낫겠어요, 뺨 안 맞고 안 받아가는 게 낫겠어요? 둘 중에 선택하라면 질문자는 어느 쪽 할래요?”

“돈이면 얘기가 달라질 것 같은데요.”(모두 웃음)

"엄마가 질문자를 낳아서 지금까지 키우고 학교 보낸 총경비를 계산하면 얼마쯤 나올까요? 보통 아이 하나를 키워서 대학 졸업까지 시키려면 몇 억 원 든다고 하거든요. 욕한 것과 뺨 때린 것을 전부 계산해서 나눠보면 한 대에 얼마쯤 계산될까요? 아마 백만 원은 넘을 거예요.

딱 이해관계로 접근하면 그렇다는 거예요. 물론 나를 키워주면서 사랑해주기도 하고 내 뜻대로 해주면 제일 좋죠. 그건 저도 알아요.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잖아요. 현실에서는 둘 중에 어느 게 더 나아요?

스님처럼 욕도 안 하고 때리지도 않지만 돈도 안 주는 게 나을까요? 자기 성질을 못 견뎌서 욕을 좀 하고 가끔 가다가 성질나면 뺨을 한 대 때리더라도 키워주고 학교 보내주고 나를 도와주는 게 나을까요? 지금 선택하라면 질문자는 어느 쪽을 하겠어요?”

“그런데 엄마가 용서가 되지 않아요.”

“아니, 둘 중에 선택을 한 번 해보라고요. 왜 엄마를 용서해요? 어느 쪽이 더 이익인지 따져보라는 거예요. 질문자는 법륜스님을 용서해요? 엄마하고 법륜스님 하고 둘 중 어느 쪽이 낫냐고 했을 때 엄마가 낫다고 생각한다면 엄마는 용서할 게 없는 거예요. 법륜스님을 용서할 게 없는 것과 똑같아요.

그런 손익계산도 할 줄 모르는데 어떻게 훌륭한 엄마가 되겠어요? 질문자도 애 낳으면 똑같이 자기 성질대로 그렇게 성질을 부릴 것 같네요.”

“손해와 이익을 따지면 그냥 지금처럼 의절하고 지내는 게 나은 것 같습니다.”

“네, 그렇게 의절하고 지내도 돼요. 아무 문제도 없어요. 그러나 자기를 낳아주고 키워준 엄마를 미워해서 의절하는 수준이니까 질문자가 훌륭한 엄마가 되긴 어렵죠. 질문자가 훌륭한 인간성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그럼 스님처럼 살면 돼요. 저는 엄마가 안 때렸는데도 엄마하고 의절하고 이렇게 살잖아요.(모두 웃음)

어떻게 할래요? 울지 말고 딱 생각해 봐요. 여기 지금 어린아이가 한 명 있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 있고, 그 아이를 데려다가 키우면서 자기가 성질나니까 야단도 치고 가끔 한 대씩 쥐어박지만 그래도 대학까지 보내주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면 어떤 사람이 그 아이한테 이익되는 사람이에요?”

“키워준 사람이 더 이익되는 사람이지만, 그건 지금 스물여섯 살에 하는 생각이고, 제가 여섯 살 때는 그런 생각을 못하잖아요.”

“그래요. 누구나 어릴 때는 다 그래요. 그게 중요한 거예요. 질문자가 그런 이해관계를 생각할만한 수준이 안 됐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상처를 입은 거예요. 어린애는 어리석기 때문에 ‘어린애’라고 부르잖아요. 그때는 상처를 입어서 원망을 했는데, 내가 스무 살 넘고 어른이 돼서 지금 딱 생각해보니 ‘어, 엄마가 나쁜 사람인 줄 알았더니 나한테는 고마운 사람이네!’ 이렇게 깨달으면 상처가 치유가 되는 겁니다. 스물여섯 살이나 됐는데 아직도 어린애처럼 이를 갈고 있으니까 상처 치유가 안 되는 거예요. 고마워까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미워하거나 원망은 안 해야 해요. 질문자가 이제 어른이 되었다면 이렇게 딱 돌이켜야죠.

‘아, 내가 그때 어려서 몰라서 그랬구나. 그래서 상처가 됐구나. 그런데 어른이 되고 나서 돌아봤더니 다른 사람에 비해서 나한테 이익을 준 분이구나. 길 가는 사람도 원망 안 하면서 나는 왜 나를 먹여주고 키워준 엄마를 원망할까?’

이게 깨달음이에요. 사실을 사실대로 자각하는 걸 깨달음이라고 해요. 부모이기 때문에 용서하라는 게 아니에요.

이 세상 사람 중에서 질문자가 제일 큰 이익을 받은 사람은 엄마예요. 제일 상처를 많이 입은 사람도 엄마이지만요. 엄마한테 이익을 받은 게 1000이고 엄마한테 손해를 입은 게 500이라면, 이익에서 손해를 빼면 500이 남잖아요. 그런데 법륜스님은 이익을 준 것도 없고 손해 준 것도 없으니까 0이에요. 0이 나아요, 500이 나아요?”

“500이 낫죠.”

“500이 나은 줄 아는 걸 보니 학교는 다녔네요. 아예 셈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인 줄 알았어요.(모두 웃음)

내가 어떤 물건을 팔려고 해요. 그런데 나는 가격을 1000원으로 매겨놨는데 어떤 사람이 500원밖에 못 주겠대요. 1000원짜리를 500원이나 깎아서 기분이 팍 나빴어요. 그래도 이 사람한테 파는 게 나을까요?

또 어떤 사람은 내가 500원을 불렀는데 50원만 깎아서 450원에 하재요. 앞의 사람은 절반이나 깎았지만 이 사람은 50원밖에 안 깎아요. 앞사람은 500원을 깎아도 나한테 500원이 남고, 뒷사람은 50원밖에 안 깎았는데도 내가 450원밖에 못 받아요. 그러면 질문자는 어느 쪽에 물건을 팔래요?”

“더 많이 남는 쪽에요.”

“그래요. 그런데 질문자는 지금 500원 받는 건 생각 안 하고 ‘이 사람은 500원 깎았고 이 사람은 50원 깎았다’ 이것만 생각해서 50원 깎은 사람한테 물건을 주는 수준이에요. 인생을 좀 계산할 줄 알아야 해요. 질문자는 자기 이익을 챙길 줄 모른다는 겁니다. 계산을 할 줄 안다면, 엄마를 용서할 게 뭐 있어요?

‘아, 내가 그때 꿈속에서 악몽을 꾸고 있었구나. 어릴 때 어리석어서 오해를 했구나. 그때 내 수준은 그것밖에 안 됐구나.’

이렇게 돌이키면 돼요. 그때는 어리니까 그렇게 이해한 거죠. 엄마가 나를 사랑해줬으면 했는데 안 해주었으니까요. 그런데 커서 보니까 그래도 엄마는 나한테 이익을 준 사람이에요. 플러스 마이너스 계산해보니까 내가 이득을 봤다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길거리에 다니는 세상 사람들도 미워하지 않는데, 내게 이득을 준 사람을 굳이 미워할 이유가 뭐 있어요? ‘내가 바보같이 생각했구나’ 이러면 끝나는 거죠. 용서할 게 없어요.

‘어머니, 감사합니다. 낳고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끔 야단은 쳤지만 그래도 제가 덕 많이 봤습니다.’

이걸로 끝내면 돼요. 엄마를 만나고 안 만나고는 자유예요. 스무 살이 넘었기 때문입니다. 엄마와 떨어져 살아도 아무 문제가 없어요. 집에 들어가라는 것도 아니고, 부모를 도와주라는 것도 아니에요. 과거에 키워준 것에 대해서 ‘고맙습니다’ 하고 끝내라는 말이에요.

앞으로 어떻게 살 거냐는 자기 선택이에요. 엄마를 평생 안 만나도 괜찮냐고요? 아무 문제가 없어요. 잘못이 아니냐고요? 아무 잘못도 없어요. 원래 자연이라는 건 다 크면 집을 떠나게 되어 있어요. 어미새가 아무리 새끼에게 먹이를 가져다주었더라도, 새끼가 다 크면 그냥 날아가는 걸로 끝이에요. 그래서 엄마와 떨어져 지내는 건 아무 문제가 없어요. 그러나 과거에 관해서는 질문자가 엄마로부터 이득을 봤으면 봤지 손해 본 건 없다는 말이에요. 제 말이 이해는 돼요?”

“네.”

“이해는 돼도 실제로는 잘 안 될 거예요.”

“아직도 과거에 사로잡혀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걸 트라우마라고 해요. 여섯 살 때 상처를 입었다면 그 심리가 여섯 살에 딱 고정이 돼서 크질 않고 그대로 뭉쳐 있는 거예요. 몸은 이렇게 커서 스물여섯 살인데, 그 문제에 한해서는 여섯 살짜리예요. 그러니 균형이 맞지 않죠. 스물여섯 살짜리 덩치에 여섯 살짜리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요.

그때 여섯 살짜리 아이의 입장에서는 상처를 입을 만해요. 어린아이를 학대해도 된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질문자의 어머니가 안 그러면 좋았겠지만, 질문자의 어머니는 수준이 그것밖에 안 되는 사람인데 어떡해요. 어머니가 나쁘고 흉악해서 그런 게 아니라 수준이 그것밖에 안 된다는 겁니다. 질문자도 확 성질이 나면 어머니한테도 욕하잖아요. 패륜아가 됐다면서요. 그럼 엄마한테 욕을 했겠네요. 욕만 했어요, 손찌검까지 했어요?”

“제가 받은 대로 똑같이 했습니다.”

“그때 질문자는 정상적인 상태였어요, 미쳐서 그랬어요?”

“미쳤었어요.”

“그래요. 엄마도 질문자를 야단치고 때릴 때 제정신이 아니었던 거예요. 스물여섯 살 어른인 데다가 애도 없는 질문자도 그렇게 미쳤는데, 애 키우면서 혼자 살아야 했던 엄마는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힘드니까 그렇게 한 거예요. 엄마가 나빠서 그런 게 아니에요.

내가 원했던 수준의 엄마는 아니었어요. 그건 스님도 인정해요. 그러나 질문자도 이제 엄마가 되어서 아이를 한 번 키워봐요. 엄마보다 더 잘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제가 ‘그런 생각을 가지면 좋은 엄마가 될 수 없다’라고 한 거예요. 그러니 미운 감정을 탁 털어야 해요.

‘어머니, 감사합니다. 내가 원하는 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감사합니다. 내가 원했던 1000원은 못 받았지만 500원이라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마음을 가져 보세요.”

“네, 감사합니다.”

“질문자에게 상처가 생겼기 때문에 그걸 치유하는 방식을 말한 겁니다. 그렇다고 어른이 아이들한테 이렇게 야단치고 악을 써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어떤 상처를 받는지 질문자한테서 방금 잘 들었죠? 어른이 아이들한테 야단치고 악을 쓰면 아이들한테 상처가 됩니다. 절대로 아이들한테는 성질을 내면 안 됩니다. 나는 그냥 성질 한 번 내고 끝나지만, 아이는 어리석기 때문에 그게 상처가 돼요. 어른들끼리는 ‘에이, 저 성질 더러운 것!’ 이렇게 욕 좀 하고 잊어버리지만, 아이들은 그런 걸 이해 못합니다. 그래서 그게 평생의 상처가 되고, 그런 상처가 이어지니까 결혼하면 자기도 모르게 또 그렇게 하게 돼요. 이렇게 상처가 대를 이어서 내려가게 됩니다. 최근에 어떤 기업의 엄마하고 딸 봤죠? 그렇게 대를 이어가요.(모두 웃음)

웃을 일이 아니에요. 그게 우리의 모습이에요. 그러니 빨리 치유를 해야 합니다. 그 사람들은 감옥에 가야 할 사람이 아니라 병원에 가서 치유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에요.”

대화를 하는 중에도 한참 동안 눈물을 흘리던 질문자였습니다. 대화가 끝나고 질문자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였지만 웃고 있었습니다.

“어린 저를 깨우쳐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 취업을 앞두고 있는 대학생입니다. 해야 할 일이 많은데 게을러질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 낯선 곳으로 취직한 지 두 달 됐습니다. 주변에 아는 사람이 없어서 퇴근하고 나면 너무 외롭습니다.
  • 화가 올라오면 내지도 말고, 참지도 말고 알아차리고 지켜보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화를 알아차리고 지켜보나요?
  • 이혼하고 아내가 딸 둘을 키우기로 했습니다. 아이들과 관계를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요?
  • 28살 취업준비생입니다. 하고 싶은 일이 많은데 지금 시작하면 늦을 것 같고, 남들보다 뒤처질 것 같아 불안합니다. 도전해도 될까요?
  • 다음 주에 결혼 예정입니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결혼 생활에 임해야 할까요?
  • 대학 졸업하고 취업준비만 하며 청춘을 보냈어요. 만약 지금 직장이 제 길이 아니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너무 계산적인 부모님에게 서운해요.
  • 휴학생입니다. 걱정이 많고 우울하고 무기력해요. 어떻게 만족하면서 살 수 있을까요?

스님이 청년들을 따끔하게 지적해 주는데도 청중석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두 시간 동안 실컷 웃고 나니 마음이 가볍습니다. 마지막으로 질문자들의 소감을 들어봤습니다.

“속이 시원해졌습니다.”

“제가 외롭고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잘 살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결혼을 일주일 앞둔 예비신랑은 결혼 생활을 잘하는 방법에 대해 물었습니다. 스님은 _“삼가 조의를 표합니다.(모두 웃음) 결혼생활의 핵심은 상대에게 맞추는 것입니다”_라고 알려주었습니다. 나이 지긋한 청중들도 스님의 말에 크게 공감하며 박수를 쳤습니다. 예비신랑은 씩씩한 목소리로 “오늘 너무 명쾌한 해답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소감을 밝혔습니다.

자존감이 낮아 고민이라는 질문자도 훨씬 밝아진 목소리로 소감을 말했습니다.

“유명하신 분이 답변해주셔서 용기를 얻었어요.”

“질문자는 지금도 완전해요. 여러분 질문자 어때요?”

청중은 큰 목소리로 “괜찮아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질문자는 더욱 용기를 얻은 듯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습니다.

강연이 끝나니 짙은 어둠이 내려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별처럼 환한 얼굴이 되어 돌아갔습니다. 스님은 밤새 청주에서 두북으로 이동했습니다. 내일은 거제와 부산에서 강연이 있습니다.

전체댓글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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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규태

감사합니다!!!^_^

2019-05-28 20:22:13

큰바다

그렇군요.
어린 마음에 상처가 되어 계산 을 제대로 하지 못해 괴로왔네요.
이제 계산을 제대로 해보니,
미워할 것이 본래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네요.
안타깝거나 서운한 일은 있지만...
내가 가끔은 짜증이 올라오듯이, 그도 가끔은 그럴 수 있지...
이부분이 이해가 픽요한 부분이겠네요.
감사합니다

2019-05-14 09:04:08

정지나

나와 너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대로 완전합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2019-05-12 22: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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