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9.5.22. 즉문즉설(22) 부천시
“예민하고 잔소리하는 남편 때문에 힘들어요”

안녕하세요. 오늘은 오전에 부천시청에서, 저녁에는 대전 서구청에서 두 번의 즉문즉설 강연이 열리는 날입니다. 부천시청으로 출발하기 전 스님은 아침 7시부터 평화재단에서 찾아온 손님들과 미팅을 가졌습니다.

스님은 요즘 굶주리는 북한 주민들에게 식량을 보내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아침 7시부터 9시까지는 유엔 경제 제재 문제를 어떻게 풀어서 북한에 인도적 지원을 해나갈지 찾아온 손님들과 의논했습니다.

강연장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도 북한 인도적 지원 문제로 상의를 하기 위해 전화 통화를 계속했습니다.

여름이 다가온 듯한 강렬한 햇살이 내리쬐는 가운데 부천시청 대강당에는 많은 시민들이 스님의 즉문즉설을 듣기 위해 모였습니다.

강연은 10시 반에 시작하지만 사람들은 아침 7시부터 강연장으로 오기 시작했습니다. 봉사자들은 밝은 얼굴로 강연장을 찾아온 사람들을 반겼습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이 강연에 찾아와 530여 석이 금세 꽉 찼습니다. 200여 명은 통로 한쪽으로 앉고, 로비에서 100명 정도 앉거나 서서 강연을 보았습니다. 로비에서도 보기 어려우신 분들은 발길을 돌리며 무척 아쉬워했습니다. 연일 뜨거운 강연장의 풍경입니다.

스님은 지금 스님이 가장 집중하고 있는 북한 인도적 지원 문제를 언급하며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제가 요즘 ‘북한에서 사람들이 굶주리는 고통을 겪고 있으니 도와주자’고 얘기했더니, 어떤 분들은 ‘미사일 쏘는 북한을 왜 도와주냐’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렇게 얘기하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지금 굶주리는 북한 주민의 의사를 대변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북한의 지배자는 자기들의 체제 유지를 위해서 언론에 나와서 발언을 합니다. 한국 정부도 자기 입장을 얘기하고, 한국의 시민 단체도 자기 입장을 얘기하는데, 이 상황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누구예요? 북한 주민들입니다.

제가 요즘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북한 주민들과 말 못 하는 아기들을 대신해서 얘기하다 보니까 욕을 좀 얻어먹어요. 저는 이런 말을 할 때 이미 욕 얻어먹을 줄 알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욕을 해도 끄떡없어요. 말을 할 때 이미 ‘이 말하면 욕하겠구나. 그러나 사람들이 욕을 하더라도 이 말은 해야 된다’ 이런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어제 어떤 분이 ‘일이 뜻대로 잘 안 되는 것은 전생에 죄가 많아서 그렇냐?’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무런 관계가 없다’라고 얘기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불교인들이 기분 나빠해요. 기분 나빠할 것을 저는 그 말을 할 때 이미 알고 있어요.

저는 좋은 일 하는 것 같지만 이렇게 늘 욕을 얻어먹어요. 아무 이해관계가 없는데도 욕을 얻어먹어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이해관계 속에서 삶을 사는데 어떻게 욕을 안 얻어먹겠어요. 욕을 얻어먹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왜 욕을 안 얻어먹으려고 해요? 예수님도 욕을 얻어먹었습니다. 부처님도 비난을 받았어요. 그런데 제가 비난을 안 받고 어떻게 살겠어요? 그런데도 여러분들이 비난을 안 받고 살려고 한다면, 그건 여러분이 부처님과 예수님보다 더 낫다는 얘기 아니에요. 꿈을 깨세요. (모두 웃음)

인생 문제를 풀려면 너무 자기 생각에만 빠지지 말고 ‘사실은 어떤가’ 하는 관점으로 접근해야 됩니다.”

살다 보면 욕을 얻어먹는 게 당연하다는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나니 시작부터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들 얘기를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와, 엄청나게 많네요. 부천이 살기 힘든가 봐요.”(모두 웃음)

질문자는 20여 명이 넘었지만 총 7명이 스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중 예민하고 잔소리하는 남편 때문에 힘들어하는 여성분의 질문과 스님의 대답이 청중의 열렬한 호응을 받았습니다.

예민하고 잔소리하는 남편 때문에 힘들어요

“저희 아버지는 생활력이 부족했어요. 그 영향으로 제가 남자를 좀 믿지 않는 경향을 갖게 된 것 같고, 상처도 받은 것 같습니다. 저는 결혼할 때 남자의 생활력만 보고 생활력이 강한 사람과 결혼했습니다. 남편은 아버지가 5살 때 돌아가셔서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고 굉장히 아끼면서 근검절약하고 성실하게 산 사람입니다. 그런 모습이 너무 괜찮아서 결혼했는데, 결혼해서 살다 보니 너무 답답하고 말을 너무 밉게 하고 굉장히 예민합니다.

제가 아빠한테 상처를 받아서 남자를 미워하나 이런 생각도 많이 합니다. 제가 아이를 낳고 아빠가 손주를 예뻐하는 걸 보면서, ‘우리 아빠도 어릴 때 경제력만 됐으면 나를 저렇게 예뻐하면서 키웠을 텐데’ 하면서 이해도 합니다. 남편에 대해서도 ‘저렇게 예민한 사람이 어렸을 때부터 살기 힘들었겠다’ 하고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남편이 말을 좀 예쁘게 하면 좋겠습니다. 제 아들은 남편에 비하면 저한테 정말 예쁘게 말을 해 줍니다. 아이가 크면 언젠가 결혼해서 자기 가정을 꾸릴 테니 저는 남편만 보고 살아야 되는데, 제 남편은 저한테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것 같아서 힘듭니다. 나중에 졸혼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남편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만 ‘나만 언제까지 이해를 해야 되지?’ 하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저만 계속 이해를 하면서 참아야 되나요?”

“남편한테 불만이 있다는 것은 이해가 돼요.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불만이에요?”

“제가 언제까지 이렇게 참으면서 살아야 되는지요?”

“뭘 참는데요?”

“남편이 너무 예민해요. 얼마나 예민하냐면, 집에 들어와서 발수건 색깔이 변해 있으면 왜 바꿨냐고 합니다. 수건이 더러우니까 바꿔주는 건데 그게 이유가 있나요? 저는 이해가 안 갑니다.”

“질문자가 지금 이유를 얘기했잖아요. 남편이 ‘왜 바꿨니?’ 그러면 ‘더러워서 바꿨다’ 이러면 되잖아요.”

“저는 그런 상황이 너무 많은 거예요. 사사건건 뭐가 변하면 ‘이거 왜 이랬어?’라고 남편이 물어봅니다.”

“이유를 말하면 되잖아요.”

“계속 말하다 보니까 저도 짜증이 나는 거예요.”

“말하는데 왜 짜증이 나요. 그러면 스님도 사람들이 계속 똑같은 거 물어보는데 짜증이 나서 어떻게 강연을 하겠어요? (모두 웃음) ‘왜 바꿨어?’ 이렇게 물으면 ‘더러워서 바꿨다’ 이렇게 말하면 돼요.”

“사는 내내 매일 그러는데요…”

“그러면 ‘이거 왜 바꿨어?’라고 말하는 게 길어요? ‘더러워서’라고 말하는 게 길어요? 남편은 긴 말하고 질문자는 짧은 말 하는데, 그게 뭐가 어렵다고요. ‘이거 왜 바꿨어?’ 이렇게 물어보는 게 일이 많아요? ‘더러워서’ 이렇게 대답해주는 것이 일이 많아요? 물으면 대답만 해주면 되는데 그게 뭐가 어렵다고요.”

“저는 남편이 그럴 때마다 숨이 막혀요. 남편이 집에 오면 뭘 지적할지 모르니까 막 청소를 해 놓습니다.”

“그게 왜 지적이에요. 궁금해서 물은 거지요.”

“그게 왜 궁금한지 저는 그게 또 이해가 안 갔습니다.”

“본인이 궁금하다는데 어떡해요.”

“저는 너무 답답합니다. 그걸 왜 궁금해하는지 이해가 안 돼요.”

“아무 일도 아닌데 질문자가 문제를 삼고 있는 거예요. 질문자가 문제예요. 질문자가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물으면 그냥 대답해주면 돼요. ‘밥이 왜 이렇게 질어?’ 이러면 ‘물을 좀 더 넣었나 봐요’라고 대답하고, ‘밥이 왜 이렇게 꼬들해?’ 그러면 ‘제가 깜박 잊고 쌀을 안 불렸습니다’라고 대답하고, ‘반찬이 왜 짜니?’ 그러면 ‘소금이 많이 들어갔나 봐요’ 이렇게 대답하면 돼요.”

“맞아요. 그런 식으로 다 물어봐요.”

“그때마다 대답하면 되잖아요. 그게 뭐가 문제예요? 질문자는 이런 걸 왜 묻냐고 하지만 남편은 궁금해서 묻고 싶은걸 어떡해요. 지금 질문자는 ‘묻지 마라’ 이 얘기잖아요. 사람이 묻고 싶으면 물어야지 어떡해요.”

“근데 너무 자주 물으니까요.”

“질문자가 좀 문제예요. 당연히 사람 사이에 대화할 수 있는 얘기인데 자기 생각만 하잖아요. ‘수건이야 당연히 필요하니까 바꿨지. 묻기는 왜 물어’ 이런 심리란 말이에요. 이건 말하지 말라고 남의 입을 봉하는 거예요. 아예 그냥 남편한테 마스크를 씌워 놓지 그래요.”

“그런 말을 예쁘게 하면 좋은데, 되게 신경질적으로 합니다. 그래서 화가 납니다.”

“질문자에게 신경질적으로 들리는 거겠지요.”

“그런가요?”

“그래요. 남편은 그냥 물어보는 거예요. 저는 경상도 식으로 말을 그냥 하는 건데 사람들은 다 ‘스님이 화났나’ 이렇게 얘기해요. 친구들을 보면 누가 약속에 좀 늦게 오면 ‘어, 좀 늦었네?’ 이렇게 얘기 안 해요. ‘난 네가 오다 죽은 줄 알았다’ 이렇게 말해요. (모두 웃음)

그리고 ‘우리 집에 놀러 오너라’ 그러면 ‘응, 갈게’ 그러면 되는데, ‘가면 뭐 주는데?’ 이렇게 말하는 게 일상적인 대화 방식이에요. 약속 시간에 먼저 와 있으면 뭐라 그러는지 알아요? ‘먼저 왔구나’ 이렇게 얘기 안 해요. ‘시간이 남아도는구나’ 이럽니다. (모두 웃음)

미국에서 한국까지 왔으면 먼 데서 왔으니 반갑잖아요. ‘미국에서 왔어요’ 그러면 ‘아이고, 돈이 남아도는구나’라고 말해요. 이게 반갑다는 표현이에요. ‘돈을 그렇게 많이 들여서 먼 데서 왔구나’ 이렇게 얘기를 해야 되는데, 표현이 ‘돈이 남아도나’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이게 반갑다는 뜻이에요.

말을 어떻게 그렇게 하냐고 하는데, 어릴 때 말을 그렇게 배운 걸 어떡해요. 스님은 대중 강연을 하면서 굉장히 많이 조절을 했는데도, 사적으로 만나면 나도 모르게 말이 그렇게 튀어나와요. 어릴 때 그렇게 말을 하고 자랐기 때문이에요.”

“제가 음식을 맛있게 해 줘도 남편은 ‘맛있다’라고 하지 않고 ‘여기에 뭘 더 넣으면 좋겠다’ 이렇게 말해요. 늘 분석을 하는 게 너무 짜증 나요.”

“더 넣으면 좋겠다고 자기 견해를 밝히는 게 뭐가 문제예요. 남편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꼭 저 같네요.” (모두 웃음)

“맛있다고 하면서 먹어주면 좋겠는데, 그런 식으로 얘기하니까 화가 납니다.”

“남편의 버릇이 그런 거예요. 자기가 그런 남자를 선택한 걸 어떡해요. 제가 들어보니까 아무 문제가 없어요. 말투가 그런 거예요. 일본 사람 만나면 일본어를 하듯이, 미국 사람 만나면 영어를 하듯이, 그 사람은 말투가 그런 걸 어떡해요.”

“말투는 못 바꾸죠?”

“그럼요. 그런데 그거 빼고는 괜찮나 봐요?”

“아니오. 남편은 항상 불만이 너무 많습니다.”

“남편이 월급은 받아와요?”

“남편이 벌어준 돈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밤에 잠자리는 괜찮아요?”

“네…”

“그럼 아무 문제가 없어요. 그냥 말투가 그런 것이니까 영어라고 생각해요.”(모두 웃음)

“네, 알겠습니다.”

질문자의 대답이 조금 퉁명스러웠습니다. 그러자 스님이 바로 콕 찌릅니다.

“알았다는 뜻이 아니라 ‘네가 내 대신 한 번 같이 살아봐라’ 이런 소리 같네요.” (모두 웃음)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남편을 고칠 수는 없어요. 헤어지든지, 말투가 좀 문제 있는 흠이 있지만 그래도 같이 사는 게 득이 되면 데리고 살든지, 길은 두 가지밖에 없어요.”

“같이 데리고 살아야 하는데요.” (모두 웃음)

“그래요. 헤어지면 다른 여자 좋은 일 시키는 거예요. 금방 주워갈 거예요.”

“아, 네.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그냥 ‘발수건 왜 갈았니?’ 그러면 ‘더러워서 갈았어요’라고 대답하고, ‘이 음식에는 이것만 더 넣으면 좋겠다’ 그러면 ‘다음에 그렇게 해 보겠습니다’라고 하면 돼요. 사례를 10개 정도 더 얘기해 봐요. 다 대답해 줄게요.”

“되게 많은데 사소한 거라서요. 이불을 왜 접었냐부터 시작해서 너무 사소해서…”

“질문자가 발수건 얘기하고, 음식 얘기하고, 이런 사소한 일을 하소연하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사실은 사는데 별 지장이 없다는 뜻이에요. 아무 문제가 없어요. 얼마나 문제가 없으면 이런 것을 갖고 문제를 삼겠어요?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 도박을 했다, 빚을 져서 난리를 피웠다, 이런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은 발수건 같은 문제는 얘기도 안 나와요. 이런 사소한 얘기를 들으면 저는 이렇게 딱 알아들어요.

‘아, 저 사람은 별 일이 없구나.’

이 말은 큰 문제가 없다는 걸 뜻해요. 남편이 민감한 게 아니라 질문자가 작은 일에 민감한 거예요. 그런 말투는 그냥 웃으면서 넘기면 돼요.

작은 문제에 민감하게 신경을 많이 쓰면 큰 재앙을 부릅니다. 왜 그럴까요? 작은 문제는 큰일이 딱 생기면 저절로 없어지거든요. 그래서 큰 재앙을 부르는 거예요. 조심해야 돼요. 별 일 아닌 것이 싹 없어지려면 큰일이 벌어져야 해요. 그래서 작은 일 백 가지를 없애버리는 큰 일 한 가지가 찾아옵니다. 질문자는 지금 작은 일 백 가지보다 큰 일 한 가지가 낫겠다 생각할지 모르지만, 막상 큰일이 터지면 안 그렇습니다. 그런 바보 같은 생각 하지 말고 지금 이대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큰일이 안 생겨요.”

이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있었습니다.

  • 점쟁이가 딸의 이름이 좋지 않다고 하면서 이름을 팔아야 딸에게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고 하는데 어찌하는 게 좋을까요?
  • 남편이 작은 애만 좋아하고 큰 애에게는 관심이 덜 합니다. 또 술을 마시면 큰 애를 붙잡고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설교를 하는데, 듣는 아이도 또 저도 매우 괴롭습니다.
  • 생활력이 없던 아버지가 싫어서 그 반대의 사람을 골라 결혼을 했는데 지금은 남편의 지나친 근검절약과 까다로움에 숨이 막힙니다.
  • 20년 전에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아들을 키웠는데 그 아들이 제 마음대로 결혼을 하더니 제사에도 오지 않고 자식 된 도리를 하지 않아 서운합니다.
  • 삼대 째 기독교 집안인 모태신앙인으로, 순종하며 살았지만 나이 들면서 종교의 진위에 대해 의문이 생깁니다.
  • 작은 며느리가 성격은 좋은데 살림을 너무 못해요.
  • 남의 눈을 많이 의식하는 나를 보며 왜 나는 나 자신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고 남 눈치만 보며 사는지 고민입니다.

질문자들은 자신의 괴로움을 주저하지 않고 내놓았습니다. 청중은 질문 하나하나가 마치 내 문제 이기라도 한 양 때로는 한탄하고 또 때로는 박수도 치며 들었습니다.

내놓기 전에는 풀 수 없을 것 같던 문제들도 드러내 놓고 보니 하나씩 풀렸습니다. 스님과 대화를 끝낸 질문자들은 한결 가벼워진 얼굴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질문자들의 소감을 들어보았습니다.

예민하고 간섭하는 남편 때문에 힘들다는 질문자는 “이제 남편이 하는 말을 편안하게 듣겠습니다.”라며 밝게 웃었습니다.

며느리가 살림을 못해서 아들이 자꾸 손자들을 키워달라고 한다는 할머니는 시원하게 대답했습니다.

“이제 아들이 집에 오면 집을 비우겠습니다.” (모두 웃음과 박수)

어릴 적 상처로 평생 남을 의식하고 살아서 힘들다는 분은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스님께서 너는 존엄한 존재라고 하신 말씀에 가슴이 벅차고 눈물이 흐릅니다. 저 자신을 사랑하고, 저 자신을 제가 잘 돌보고 살겠습니다.” (모두 박수)

모든 질문자들의 소감을 들은 후 스님은 모든 존재가 소중함을 강조하며 강연을 마쳤습니다.

“장애아를 낳으면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애를 낳았나’ 이런 말이 입에서 튀어나오죠? 그런데 장애가 어떤 죄의 대가일까요? 아닙니다. 장애를 죄의 대가라고 생각하는 것은 장애우를 차별하는 것이에요.

옛날 사람들은 딸을 연달아 5명 낳으면 ‘아이고,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딸만 낳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딸을 낳는 게 전생의 죄 하고 관계가 있을까요? 이런 말은 여자를 차별했기 때문에 나온 말이에요. 죄가 있어서 여자애를 낳은 게 아니고, 여자애를 차별했기 때문에 이런 잘못된 원인 규명을 했던 겁니다. 그것처럼 장애아를 차별했기 때문에 장애를 죄의 대가라고 생각하는 잘못된 관습이 생긴 겁니다.

모든 존재는 아무런 흠결이 없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얼굴이 검든 희든, 신체에 장애가 있든 없든, 이성애자든 동성애자든,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그 어떤 사람도 있는 그대로 완전합니다.

다만 장애가 있으면 불편할 뿐이에요. 불편을 시정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보충을 하면 돼요. 팔이 없으면 의수를 하면 되고, 다리가 없으면 의족을 하면 되고, 눈이 없으면 의안을 하면 되고, 눈이 안 보이면 점자로 읽으면 되고, 이렇게 불편한 것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하면 됩니다.

항상 아이를 먼저 생각해야 돼요. 내가 힘들다고 아이를 버려도 안 되고, 내 아이라고 다른 전문가가 가르치는 것이 더 좋은데도 내가 데리고 있으려 하면 안 됩니다. 아이가 엄마보다 전문가한테 교육받는 것이 더 낫다면 전문가한테 맡겨야 됩니다. 나와 헤어지는 것이 아무리 가슴 아파도 아이를 위해서 보내야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항상 자기가 중심이에요. 이혼을 했지만 아이가 자기 엄마 집에서 크는 것이 좋으면 나는 아이를 보고 싶더라도 안 만나야 돼요. 부모가 해야 할 일은 아이에게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아이를 보고 싶다고 해서 아이를 억지로 끌고 오면, 아이가 부모가 되고 내가 어린애가 됩니다. 아이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내가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아야 돼요. 아이가 필요로 해서 아이가 나를 보고 싶어 한다면, 내가 직장에 휴가를 내어서라도 아이에게 가야 됩니다. 내가 아이를 만날 권리만 주장하지 말고, 부모는 먼저 아이를 중심에 놓고 생각해야 돼요. 이렇게 관점을 잡아야 하는데 ‘내가 보고 싶다’ 이것만 자꾸 생각하는 거예요.

그리고 스무 살이 넘으면 더 이상 애가 아닙니다. 옛날에 보호자와 피보호자 관계의 인연이 있었던 성인과 성인의 관계입니다. 자녀가 성인이 되면 항상 존중해 주는 게 나중에 덤터기를 안 쓰는 방법이에요. 여러분들은 간섭도 하고, 그래서 덤터기도 쓰죠.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덤터기도 쓰지 말고, 간섭도 하지 말고, 서로 자유롭게 살자는 겁니다. 아이도 부모로부터 독립해서 자유롭게 살아야 되고, 나도 스무 살 때까지는 아이를 키우는데 헌신했지만 스무 살이 넘었으면 더 이상 아이에게 매달릴 필요 없이 내 인생을 살아야 됩니다. 이렇게 해야 서로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강연이 끝난 후 스님은 단상에서 내려와 청중에게 따뜻한 인사를 건넸습니다. 청중도 스님에게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강연을 마치고 햇살이 내리쬐는 거리로 쏟아지는 사람들이 얼굴이 싱그러웠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은 강연을 위해 애쓴 봉사자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습니다. 봉사자들의 얼굴에는 뿌듯한 미소가 맴돌았습니다. 스님은 다시 평화재단으로 이동하여 늦은 점심을 먹었습니다. 저녁에는 대전에서 평화와 통일에 대한 즉문즉설 강연이 이어졌습니다.

전체댓글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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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규태

스님께 감사드리며,
여러 봉사자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_^

2019-06-13 02:38:01

정지나

있는 그대로 사실 그대로...
\"왜 바꿨어? 더러워서!\"
감사합니다 꾸벅^^

2019-06-01 22:22:55

지혜승

네, 스님. 저는 아무 문제 없습니다. 고맙습니다._()_

2019-05-27 12:2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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