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9.8.9 동북아 역사기행 2일째
“고구려의 첫번째 수도인 홀본산성에 도착했습니다”

안녕하세요. 동북아 역사기행 2일째입니다. 오늘은 오전에 고구려의 첫번째 수도인 홀본산성을 둘러보고, 오후에는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과 환도산성을 답사하는 일정입니다.

숙소에서 아침식사를 한 후 홀본산성으로 향했습니다. 7시에 출발하기로 했지만 늦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버스가 출발하자 차분하지만 단호한 스님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항상 버스 출발 시간보다 여유를 좀 두고 움직이면 좋겠습니다. 예를 들어 버스가 5시에 출발한다면 아침에 호텔 체크아웃도 해야 하니까 적어도 15분 전까지는 카운터에 카드를 반납해주셔야 하고, 버스가 출발하기 5분 전에는 탑승이 완료돼서 인원 체크까지 다 끝나야 합니다. 오늘은 여유가 있었는데도 오히려 여유가 있다고 해서 더 머뭇거린 것 같아요.

정토행자의 세 가지 원

정토행자들은 세 가지 원(願)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첫째, 개인은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래서 이번 역사기행 중에 자신이 한 번도 짜증을 안 내고, 한 번도 성질 안 부리고, 항상 웃으면서 지내는지 점검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둘째, 정토행자는 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행복하게 사는 삶과 사회를 만들고자 하기 때문에 정토회가 그런 일을 하는 모임이 되도록 발전시켜나가고자 합니다. 그래서 정토회가 우리 사회에서 가장 모범적인 사회단체가 되도록 합시다. 정토행자들이 왔다 가면 호텔에서 이렇게 감탄할 정도로 정직하고 깔끔한 모습을 보이면 좋겠어요.

‘야, 진짜 그 사람들은 다르네. 휴지도 한곳에 딱 모아놓고, 신발도 딱 제자리에 놔두고, 쓰기는 썼지만 딱히 체크할 게 없구나’

우리가 어디를 가든 딱 줄서서 질서를 지키고, 식사할 때도 허겁지겁 서로 뜨려고 하지 않고 차례대로 앉아서 조용히 먹고, 이렇게 해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지금 이곳에 관광을 온 게 아니라 통일의병 훈련을 하러 왔습니다. 이렇게 공동체 생활을 하는 것이 다 훈련이에요. 차를 타고, 짐을 싣고, 밥을 먹고 산을 오르내리고, 더운 데도 하고, 다리가 아픈데도 하는, 이게 다 훈련입니다. 그래서 차에서는 차안의 질서를 지키고, 조별 모임도 질서정연하게 갖고요. 누군가가 군대처럼 통제해서 이것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자율적으로 이것이 이루어지는 조직이 되어야 해요. 군대조직이라면 스파르타 조직 같이 잘 훈련된 조직도 있지만, 그런 군대조직을 우리의 이상으로 삼는 것은 아니잖아요. 개개인이 다 자유로우면서도 질서를 지키는 조직을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거예요. 지도자의 통솔에 의해서만 질서가 유지되는 조직이 아니라, 각자가 자발적으로 참여해서 자연스러운 가운데 질서가 지켜지는 훈련을 역사기행 동안 해보는 겁니다.

셋째, 세계에서 모범이 되는 대한민국, 누구나 다 부러워하는 대한민국을 한 번 만들어보고자 합니다.

‘통일 대한민국을 만들어보자. 평화가 정착된 나라,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지 않는 나라, 환경적으로 잘 보존된 나라, 인권이 보장되고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대한민국을 한 번 만들어보자.’

정토행자는 이런 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통일운동을 하는 거예요. 그런 통일의병이 되기 위해 훈련을 받으러 지금 우리가 여기에 왔습니다.

단체생활을 통해 배운다

이런 원이 부족한 사람은 이 역사기행을 통해서 원을 좀 키워야 하고, 뜻은 있지만 행동이 못 따라가는 사람은 이번 역사기행을 통해서 자기 행동을 돌아보고 실천하는 연습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이번 역사기행에서는 이런 여러 가지 훈련을 하게 됩니다.

책상에 앉아서 말만 들으면 다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막상 여기 와서 같이 살아보니까 쉽지가 않죠?”

“네.”

“여기는 먹는 것도 풍부하고 자는 것도 시설이 다 괜찮습니다. 그러나 단체생활을 하는 것은 사실 좀 어려워요. 졸릴 때도 자지 못하고, 더워도 가야 하거든요. 개인생활은 더우면 쉬고, 졸리면 자도 되지만, 단체생활은 사람마다 특성이 다르니까 그렇게 안 되죠. 그런 것들을 우리가 연습하는 기회니까 그걸 힘들어하지 말고 ‘훈련이다’ 이렇게 생각해서 기꺼이 임해주시기 바랍니다.”

역사기행 이틀째, 기행단은 빡빡한 일정에 흐트러지려는 마음을 다잡아보았습니다. 환인시를 약간 벗어나자 옛날에 ‘비류수’라고 불렸던 ‘혼강’이 나타났습니다. 기록에는 비류수의 서쪽 언덕에 홀본산성을 쌓았다고 합니다.

먼저 박물관에 들러 홀본산성에 대한 개괄적인 이해를 한 후 산 중턱까지는 버스를 타고 이동했습니다.

버스에서 내리자 산 중턱에서 정상까지는 계단이 쭉 놓여 있었습니다. 오녀산산성이라고 적힌 비석 앞에서 오는 순서대로 기념사진을 찍은 후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스님은 맨 처음 이곳에 답사를 왔을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제가 여기 처음 왔을 때가 1997년이었어요. 북한 사람들이 굶어죽는다고 해서 압록강, 두만강을 답사하러왔다가 환인을 지나가게 됐어요. 그때는 개방이 안 됐을 때에요. 산 아래까지 와서 저 위로 올라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으니 조선 사람은 못 들어간다는 거예요...”

지금처럼 관광지로 개발되기 이전이었으니까 당시에는 유적지 하나 찾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스님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다보니 끝이 보이지 않던 계단도 끝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비가 살짝 내린 뒤라 더위가 한 풀 꺾여 날이 선선했습니다.

올라갈 때는 덥지 않아서 좋았는데, 정상에 가까워지니 날이 점점 개더니 탁 트인 풍경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니다. 서문을 지나 드디어 정상 부근에 도착했습니다. 정상부근에 모여 앉아 한숨 돌렸습니다. 스님은 고구려가 어떻게 건국이 되었는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었습니다.

“고구려는 나라를 세울 때부터 쫓겨 다니면서 나라를 세웠어요. 고구려를 세운 고주몽은 동부여에서 도망 나와서 겨우 살았잖아요. 그랬기 때문에 항상 방어를 생각했어요. 그래서 수도를 정할 때는 항상 방어할 수 있는 산성을 먼저 짓고 그 산성 밑에 평지에다가 성을 쌓았습니다. 오늘 오후에 가볼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도 환도산성을 먼저 자리잡고 국내성을 잡았어요. 평양으로 수도를 천도했을 때도 대성산성을 먼저 자리 잡고 안악궁을 지었어요.

고구려를 세운 고주몽은 원래 동부여 출신이었습니다. 그런데 동부여에서는 왕의 제2부인의 아들이기 때문에 왕위계승권에서 후순위인 거예요. 동부여에서 도망 나와 북부여의 공주 소서노와 결혼했기 때문에 사실 북부여에서도 왕위계승권에서 사위의 서열이었어요. 이때 왕위의 정당성을 만들기 위해서 신화가 창조가 되는 거죠. 그래서 북부여의 천제인 해모수의 직계자손이라는 것이 주몽의 건국설화입니다.”

스님은 주몽의 탄생 설화와 유화 부인 이야기, 홀본산성을 첫 수도로 정한 이야기 등 다양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해주었습니다. 대중은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흥미진진하게 들었습니다.

정상 부근에서 설명을 듣고 행궁터, 양식창고터, 병영자리, 우물터 자리, 건축유지, 점장대 등 산성의 중요한 기능을 담당했던 다양한 유적지들을 둘러보았습니다.

점장대는 남쪽의 가장 높은 지점에 자연석을 석대로 한 채 위치하고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혼강과 환인 저수지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아침에 날이 흐려서 전망을 볼 수 없을 줄 알았는데, 거짓말처럼 날이 활짝 개었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절경에 탄성을 내지르며 삼삼오오 모여 기념사진을 찍은 후 절벽 아래로 내려왔습니다.

절벽 아래로 내려오니 해발 600미터 지점부터는 동쪽 성벽과 동문이 나타났습니다. 동문에는 공(工)자형 성문이 남아 있어서 고구려성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동문을 지나자마자 남문이 나타났는데 남문에는 옹성이 없고 성문만 있었습니다.

남문까지 보고 나와 버스를 타고 내려왔습니다. 내려오는 길에 만주족역사박물관을 들렀습니다.

올해부터 홀본산성 입장료에 만주족역사박물관 입장료까지 포함시켜서 무조건 보도록 했습니다. 얼떨결에 만주족의 역사와 문화를 볼 수 있었습니다. 3층에는 고려청자가 전시되어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사진을 찍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홀본산성을 돌아보고 나오는 길, 버스 창밖으로는 파란 하늘 아래 홀본산성이 우람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환인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기행단은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였던 ‘집안’으로 향했습니다. 버스가 출발하자 수신기로 스님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점심식사 잘 하셨어요? 중국에서는 야외에 모여서 설명을 못하게 해요. 아까 오녀산산성에서도 별 이야기를 한 게 아니라 고구려 건국설화에 대해 이야기했잖아요. 그런 것도 뭐하나 싶어서 공안이 붙어서 계속 보려고 하잖아요. 그런 것도 문제가 되나 봐요. 그래서 차에 가면서 공부를 해야 하는데 눈이 감겨서 들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모두 웃음) 자, 그럼 책을 다 펴보세요.”

버스 안에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먼저 방금 다녀온 졸본산성과 환인에 대해 복습을 했습니다. 그리고 오후에 가 볼 두 번째 수도 국내성과 환도산성에 대해 설명해주었습니다. 스님은 ‘왜 고구려는 이곳으로 수도를 옮기게 되었는지’, ‘환도산성과 국내성은 적으로부터 몇 번 침략을 받았는지’ 등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참가자들은 오전 내내 산을 타고 점심을 먹은 후라 식곤증이 몰려오기도 했지만, 생생한 고구려의 역사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환인에서 집안으로 향하는 길은 남로와 북로가 있는데 기행단은 북로를 택했습니다. 통화에서 집안으로 가는 길에 ‘관마산성’이라고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계곡에 산성을 쌓았던 흔적이 있는 곳을 지나가기도 했습니다. 부지런히 달려 오후 3시가 넘어 환도산성에 도착했습니다.

산성 안으로 들어가 우물터, 망대, 병영자리 등을 차례로 둘러보며 선조들의 숨결을 차분하게 느껴보았습니다. 이제는 개이빨식축성법이 눈에 쏙쏙 들어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볼수록 정말 천연의 요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궁궐터로 들어가려는데 입구를 막아 놓았습니다. 관리인에게 허락을 구하고 들어가는데 팻말 앞에서만 보고 전체는 못 둘러보게 했습니다.

아쉬운 대로 궁전터 팻말 앞에서 궁전터를 둘러보고 나왔습니다. 선조들의 유적지에 와서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지도, 둘러보지도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웠습니다. 거기다 파손된 유적들은 중국식으로 복원되고 있었습니다.

내려오면서 드넓은 산성하 고분군까지 둘러보고 환도산성을 나왔습니다.

차로 10분을 타고 가 국내성에 도착했습니다. 국내성은 사람들이 사는 주택가 한 가운에 있었습니다. 작은 울타리가 국내성을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도로를 낸다고 성벽이 절단이 나 있기도 하고, 집을 만드는데 성벽의 돌을 가져다 썼다가 다시 제멋대로 쌓아두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군데군데 고구려 성의 전형적인 축성 방식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기단은 계단식으로 다섯 개에서 일곱 개를 쌓은 다음, 그 위로 수직으로 쌓아올린 모습이었습니다. 스님은 국내성의 모서리 부분의 특징에 대해 특히 강조하며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국내성의 동쪽 성벽과 북쪽 성벽이 만나는 모서리 지점에 서 있습니다. 동쪽 성벽과 북쪽 성벽이 만나면 각이 져야 하잖아요? 그런데 각이 지면 적이 공격할 때 방어에 불리해 집니다. 적은 3면에서 공격하고, 우리는 1면에서 방어를 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모서리에 각을 주지 않고 둥글게 만들었어요. 여기에 양쪽으로 치를 둠으로써 각루를 방어하기 쉽도록 했습니다.”

국내성의 서쪽에는 ‘통구하’라는 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축대를 쌓고 땅을 메워 옛 모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스님의 설명 속에서 국내성의 모습이 되살려보았습니다. 강변을 따라 구불구불하게 만든 성벽과 홍수를 대비해 만든 공자형 성문, 배수로도 하나하나 살펴보았습니다.

서쪽 성벽을 지나 남쪽 성벽으로 접어드니 드디어 압록강이 나타났습니다. 압록강 너머에는 북한 땅이 바로 보였습니다. 산에 나무가 없고 뙈기밭을 만든 흔적이 가득한 것으로 보아 틀림없이 북한 땅 같았습니다.

스님은 북한의 뙈기밭과 압록강에서 보트를 타고 있는 관광객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북한동포돕기 운동을 처음 시작했던 때를 떠올리며 말을 이었습니다.

북한동포돕기를 시작하게 된 이유

“제가 북한동포돕기를 시작한 것은 이곳 압록강에서 있었던 사건이 계기가 됐어요. 1995년에 이 강변에서 중국 사람을 만났는데 이런 얘기를 해요.

‘북한에서 사람이 굶어죽고 있습니다. 식량이 없어서 아이들이 영양실조 상태예요. 아이들의 키가 안 커요.’
‘에이, 뭘 그렇게까지 얘기해요. 가난한 건 알지만 뭐 굶어죽을 정도까지예요?’
‘제가 중국 공산당원인데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제가 직접 북한에 초대받아 가서 보고 온 겁니다.’

그 당시는 제가 인도의 불가촉천민 마을에서 구호 사업을 할 때라 그 다음해인 1996년에 가난한 인도 아이들의 사진을 가져와서 보여줬어요.

‘요즘은 내 민족 네 민족 안 따지고, 내 나라 네 나라 안 따지고, 제일 열악한 사람을 우선으로 도와야 합니다. 인도 아이들의 형편은 이렇습니다.’
‘스님, 북한 아이들은 이보다 더합니다.’
‘에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그랬더니 저더러 재킷을 입으라 하고 여기서 운행하는 보트에 딱 태워서 강변을 따라 올라가면서 북한 주민들의 모습을 보여줬어요. 저기 유람선 타는 선착장이 보이시죠?

유람선을 타고 저 위쪽에 보이는 굴뚝을 지나 한참 올라가면 북한의 ‘만포’라는 도시가 나옵니다. 거기까지 배가 올라가서 북한 쪽 강변과 5미터 정도밖에 안 떨어질 정도로 가까운 곳 까지 배를 몰고 갔습니다.

구걸할 자유도 없는 비쩍 마른 북한 아이

강변에 사람들이 낚시한다고 앉아 있거나, 아이들이 부둣가에 앉아 있는데, 아이들의 행색이 진짜 인도의 구걸하는 아이들 못지않게 초라했습니다. 그 중에 한 아이가 너무 비쩍 마르고 초라해서 제가 가지고 있던 음식을 나눠주려고 ‘얘야, 얘야’ 하고 불렀는데 대답을 안 해요. 그러자 이 중국 친구가 하는 말이 ‘북한 아이들은 구걸할 자유도 없어요’ 이러더라고요. 왜 그러냐고 물어봤더니, 어릴 때부터 애들한테 ‘우리가 아무리 배가 고파도 나라의 체면을 손상하면 안 된다. 외국인한테 뭘 구걸하면 안 된다’ 이렇게 민족교육을 시켜서 애들이 아무리 배가 고파도 구걸할 줄 모른다는 거예요. 인도 애들 같으면 ‘박시시, 박시시’ 하고 난리일 텐데 북한 아이들은 아무리 ‘얘야’하고 불러도 대답을 안했습니다.

국경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

그래서 제가 ‘배를 잠깐 기슭에 대주세요. 음식을 좀 주고 갑시다’라고 다시 청했더니 이번에는 국경이어서 안 된대요. 이 경험이 제게는 큰 충격이었어요.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새도 이쪽에 먹을 게 없어서 배가 고프면 저쪽으로 날아가는데, 왜 사람이 여기는 먹을 게 풍부하고 저기는 먹을 게 없는데도 이 음식을 건네주면 안 되느냐? 나는 음식을 사줄 돈도 있고 여기는 음식도 있는데 왜 못 주느냐? 국경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이냐? 배고픈 사람을 살리기 위해 국가가 있고 국경이 있어야지, 배고픈 사람을 더 굶기고 배고픈 사람을 도와주지 못하게 하는 것이 국가와 국경이라면, 도대체 국가와 국경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무리 돕고 싶어도 그렇게 돕는 건 법적으로 안 된다고 해서 돕질 못했습니다. 그렇게 그냥 돌아왔을 때 저를 돌아보고 크게 반성했어요.

‘내가 가난한 아이를 돕고자 저 먼 인도까지 가서 일을 하면서도 등잔 밑이 어두웠구나. 어떻게 바로 곁에 있는 사람이 굶어죽는 걸 외면했을까? 내가 북한을 아주 미워하거나 싫어해서 외면한 탓에 이런 일이 생겼다면 반성을 하면 되는데, 북한을 싫어하거나 미워하거나 반대하는 입장이 전혀 아닌데도 이렇게 되었구나.’

꼭 나쁜 생각만 해서 장애가 되는 게 아니라, ‘가난한 줄은 알지만 뭐 굶어죽을 지경까지 되겠느냐, 말도 안 돼’ 이런 생각이 도리어 현실을 가로막는 장애가 됐던 겁니다. 그렇게 해서 북한동포돕기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저기 보시면 지금도 유람선 타는 곳이 있어요.”

강물은 유유히 흐르고 새는 지금도 자유롭게 압록강 이쪽저쪽을 오가고 있었습니다. 안내를 마친 스님에게 기행단은 뜨거운 박수로 감사한 마음을 전했습니다.

압록강변에서 저녁 식사를 한 후 8시 30분부터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내일은 장군총, 광개토대왕릉과 광개토대왕비를 둘러봅니다. 유적지에 앞에 모여 설명하면 관리인의 제지를 받기 때문에 오늘 저녁강연에서 미리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한 시간 동안 고구려 유적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 스님은 고구려의 뿌리는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결국 우리 민족의 뿌리는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는지 전체 역사를 꿰뚫어 주었습니다.

“옛날 유적이나 유물을 보면 대부분 성 아니면 무덤입니다. 고구려만 그런 게 아니고 이집트나 다른 어떤 나라든 수천 년 전의 유적은 다 마찬가지예요. 유적이 남아 있는 곳은 대부분 성과 무덤, 두 곳입니다. 성은 살아있을 때 자기를 보호하는 것이고, 무덤은 죽은 뒤에 자기를 보호하는 거예요. 어디를 가든 유적이라고 하면 다 무덤 아니면 성입니다.

진나라를 대표하는 것도 하나는 진시황릉이고, 하나는 만리장성이잖아요. 그래서 고구려의 유적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도 고구려의 성과 고구려의 무덤입니다.

고구려의 성은 첫째, 대다수가 돌로 쌓은 석성입니다. 그리고 그 쌓는 방식이 아주 독특해요. 치(雉)가 있다든지, 개이빨식으로 쌓는다든지, 성의 모서리를 둥글게 만든다든지, 성문을 옹자 또는 공자형으로 만든다든지 하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성문을 옹성으로 만드는 방식은 나중에는 다른 나라에서도 배워서 따라하지만 고구려 이전에는 그 사례를 찾아볼 수 없어요. 그래서 지금까지는 ‘이것이 고구려의 독창적 문화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고구려인만이 만들어냈다’ 이렇게 보고 있었습니다.

피라미드형 돌무덤도 동북아시아에서 고구려를 제외하면 이런 무덤을 만든 사례가 없습니다. 이런 양식으로 된 거란족의 무덤이나 여진족의 무덤, 몽골족의 무덤, 한족의 무덤이 있다면 ‘아, 거기서 배워왔나 보다’라고 할 텐데, 그 전에도 이후도 어디에서든 이런 무덤은 찾아볼 수 없어요. 그래서 이것은 고구려인이 창조해낸 무덤 양식이라고 지금까지는 설명했습니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뿌리가 어딘지를 생각해 봅시다. 역사에서는 고구려의 뿌리가 부여라고 해요. 고주몽이 자기는 부여의 후예라고 명확하게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부여의 역사를 보면 해모수가 ‘나는 단군의 아들이다’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신화에 따르면 단군은 환웅의 아들입니다. 환웅은 자기의 뿌리를 환인에 두죠. 환인의 아들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환인은 자기의 뿌리에 대해 뭐라고 한 내용이 없어요. 그래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환인에서 끝인 거예요.

그런데 고려를 세운 왕건은 고구려를 계승하기 위해서 나라 이름을 고려로 짓는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고려에서 고구려, 고구려에서 부여, 부여에서 단군조선, 단군조선에서 배달나라, 배달나라에서 한나라로 거슬러 올라가고, 한나라에서는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어요. 우리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계보가 이렇게 됩니다.

조선은 특별히 새로 만든 나라가 아니라 역성혁명으로 만들어진 나라입니다. 고려에서 왕의 성만 바뀌었지, 영토도 그대로고 다 그대로이기 때문에 딱히 특별한 것은 없어요. 즉 조선은 고려를 계승한 겁니다. 그런데 또 조선은 아무런 다른 변화 없이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이라고 바꾸었어요. 대한제국에서 ‘대한’은 나라 이름이고, ‘제국’은 임금이 주인 된 나라라는 뜻입니다. 그 후 우리는 ‘이제 더 이상은 임금이 주인이 아니라 백성이 주인이다. 민(民)이 주인이다’라고 해서 나라 이름을 ‘대한민국’으로 바꾸었어요. 그렇게 해서 오늘날의 대한민국까지 온 거예요.

오늘날 대한민국의 뿌리는 대한제국이고, 대한제국의 뿌리는 조선왕조이고, 조선왕조의 뿌리는 고려왕조이고, 고려왕조의 뿌리는 고구려왕조고, 고구려왕조의 뿌리는 부여고, 부여의 뿌리는 단군조선이고, 단군조선의 뿌리는 배달나라이고, 배달나라의 뿌리는 한나라입니다. 전체 역사가 이렇게 연결되는 거예요.

여기에는 다른 사람이 뭐라고 이의를 제기할 게 없어요. 당사자가 ‘우리 아버지가 저분이다’라고 하는데 남이 ‘그게 어떻게 네 아버지냐?’ 이러는 경우가 없잖아요. 양자든 한쪽이든 자기 아버지라고 본인이 말하는 것이니까요. 이렇게 우리 민족의 역사가 지금의 대한민국으로부터 한 쾌에 딱 꿰어집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설화를 단순히 설화라고만 보시면 안 돼요. 인류문화사적으로 이걸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유물 및 유적과 결합해서 이 설화를 어떻게 재현해낼 것인가 하는 과제가 있는 겁니다.”

이어서 스님은 황하 문명보다 앞선 요하 문명의 발견에 대해 소개하면서 오늘날 대한민국이 빠른 속도로 발전한 이유에 대해 설명하며 강연을 마쳤습니다.

“우리 민족이 어떻게 흘러왔는지를 살펴봅시다. 요하 문명의 유적이 발견된 적봉 지역은 건조지대, 즉 초원지대입니다. 그 이후 유적이 발견된 누허량 지역은 삼림지대이고요. 그리고 거기서 서쪽으로 내려간 게 은나라이고, 동쪽으로 내려온 게 고조선이에요. 거기서 약간 북쪽으로 올라간 게 부여입니다.

황하 문명보다 앞선 요하 문명

이렇게 보면 문명은 건조지대에서 일어나서 삼림지대로 이동해갑니다. 왜 그럴까요? 초기에는 사용할 수 있는 도구들을 다 돌로 만들었기 때문이에요. 돌로는 풀은 벨 수 있지만 나무는 베어낼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삼림지역을 개척하려면 금속기가 나와야 합니다. 양자강 이남과 갠지스강 유역이 개발된 것도 주로 철기가 나온 이후였거든요. 이렇게 살펴보면 우리의 문명은 건조지대인 요하 유역의 몽골 쪽에서 시작해서 점점 따뜻한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문명이 발전해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오랜 본거지는 요녕성 또는 몽골자치구가 위치한 이곳 만주였어요. 이 지역이 고구려 시대며 발해 시대까지 우리 민족의 본거지였지, 한반도는 우리의 본거지가 아니었습니다. 5천 년의 우리 역사는 대부분 북방에 있었고, 한반도는 변방에 속했습니다. 그 변방에서 가야도 생기고, 신라도 생긴 거예요. 북방 영토를 잃어버리면서 남쪽으로 내려왔기 때문에 지금은 우리가 한반도를 개척하고 그 안에서 사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한반도에 산다고 해서 ‘우리 민족의 뿌리가 처음부터 이곳 한반도에 있었다. 평양에서 문명이 시작됐다’ 하는 이런 주장은 역사적 현실에 맞지 않습니다. 잘못하면 ‘우리 민족의 모든 근거지가 본래부터 한반도에 있었다’ 이렇게 왜곡될 소지가 있으니까요. 이런 관점에서 우리 민족의 뿌리를 생각해봐야 해요.

이 요하 문명은 중국의 황하 문명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서로 교류는 했지만 뿌리가 다른 문명이에요. 언어적으로도 요하 문명은 우랄-알타이 어족이고, 황하 문명은 차이나-티벳 어족입니다. 인종적으로도 요하 문명은 북방 몽골 쪽이고, 황하 문명은 남방 몽골입니다. 이웃해 있을 뿐이지 문명의 성격이 이렇듯 완전히 달라요. 그리고 지금까지의 유물이나 여러 연구 결과를 비교해보면 요하 문명이 훨씬 더 앞선 문명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의 앞선 문명은 지금으로부터 3천 년 전쯤에 뒤바뀌기 시작합니다. 중국에 주나라가 들어서면서 서로 균형이 팽팽해지다가, 2천 년 전에 한나라가 들어서면서 균형이 깨져서 밀리기 시작하고, 우리도 이에 대응을 하게 돼요.

우리의 문명이 뒤쳐지기 시작한 이유가 뭘까요? 처음에는 우리가 앞섰어요. 특히 청동기가 월등하게 앞섰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청동기 문명에 안주했어요. 그런데 3천 년 전에 철기 문명이 나오면서, 중국 쪽은 철기를 발전시켜서 춘추전국시대를 펼쳐나갔습니다. 그때 우리는 청동기에 안주해서 철기 문명을 발전시키는데 뒤졌던 거예요. 문명의 발전 과정을 보면 늘 이런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래도 고려시대까지는 힘이 약해도 끝까지 대항하는 수준이었어요. 고구려, 발해, 고려 모두 그랬죠. 그런데 조선시대에 오면서 완전히 자발적 사대주의(事大主義)로 빠졌고, 일제 강점기를 거치고 현대에 이르면서 우리는 완전히 약소국가 또는 후진국가로 자임하는 상태에 이르게 된 겁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한국이 빠른 속도로 발전했습니다. 과학 기술, 문화,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다시 우리가 앞서 나가기 시작했어요. 여기에는 미국과 직접 교류한 영향이 일단 큽니다. 우리가 미국에 여러 가지 열등의식이 있다는 것은 단점이지만, 우리가 세계에서 가장 앞선 문명과 직접 바로 부딪혀온 것은 장점이에요. 미국과 이런 관계가 아니었다면 일본을 통해서 간접 수입을 해야 해요. 그러면 일본이 항상 우리를 앞서고 우리는 뒤따를 수밖에 없잖아요. 미국과의 교류는 가장 앞선 문명과 바로 직거래를 하면서 발전 속도를 상당 부분 앞당겼다는 큰 장점이 있습니다.

역사와 문화의 DNA를 가진 대한민국

지금 우리는 빠른 속도로 모든 분야에서 앞서나가기 시작했어요. 필리핀 같은 경우는 미국과 직거래 한 지가 100년이 돼도 이런 게 안 돼요. 이런 차이가 바로 역사, 문화의 DNA라는 겁니다. 우리는 그런 DNA를 우리의 역사 속에 담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 역사가 고난을 겪을 시기에도 팔만대장경을 만드는 일을 해냈잖아요. 팔만대장경을 결집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또 금속활자를 발명하고, 한글을 발명하고, 거북선을 발명한 것도 단순히 그냥 배운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이건 창조력에 해당되거든요. 문명 속에 창조적인 DNA가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지금 우리들에게는 우리도 모르는 창조 문명의 DNA가 이렇게 발현되고 있지만, 역사 공부를 안 하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는 그 사실을 잘 모르고 있어요. 그래서 지금 자기 존재의 소중함이나 위대함을 모른다는 게 문제입니다.

또 다른 문제 한 가지는 우리가 아직도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심리적 위축감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는 거예요. 이것은 돈을 많이 번다고 극복되는 건 아니에요.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이 돈 좀 벌면 오히려 사치하고, 향락에 빠지고, 목에 힘주는 등 부작용이 생긴다고 하잖아요. 우리도 그렇게 갈 위험이 있어요. 따라서 열등의식에서 벗어나 시민의식을 함양하려면 우리가 문명의 창조자였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꼭 자각해야 합니다.

이런 벽화 하나도 어디 가서 모방해온 게 아닙니다. 중국에 가서 모방해온 게 아니에요. 나중에는 오히려 중국에서 우리를 모방해갈 정도였어요. 중국은 다 벽돌로 무덤을 만들고 거기에 회를 칠한 뒤 그 위에 벽화를 그려요. 우리는 돌로 무덤을 만들고 돌에다가 바로 그림을 그렸어요. 그래서 색깔 변화가 없고 소실도 적죠. 횟가루를 발라놓으면 시간이 지나면서 횟가루가 떨어져서 온갖 문제가 발생하거든요.

이런 면에서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좀 소중하게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런 기초가 잘 잡히면 새로운 대한민국 건설이라는 게 실현 가능한 꿈으로 다가오지만, 이런 기초가 없으면 우리는 세계 일류로 가는 대한민국을 꿈꿀 엄두도 내지 못하고 늘 따라 배우기나 하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스님의 설명을 듣고 나니 역사를 바라보는 시야가 한층 넓어진 기분이 들었습니다. 강연이 끝나자 대중들은 뜨거운 박수와 함성으로 스님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했습니다.

내일은 새벽 5시에 숙소를 나와 고구려인들이 천제를 지낸 곳인 국동대혈로 갑니다. 그리고 다시 집안으로 돌아와 장군총, 광개토대왕릉 등 고구려 유적들을 하루 종일 답사한 후 림강까지 이동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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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나윤

감사합니다. 🙏

2023-11-03 13:33:16

임래미

우리가 문명의 창조자였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배워봅니다. 나부더 우리의 역사 DNA에 감사하며 발전시켜나가야겠구나합니다.

2020-07-16 11:38:42

이종화

스님이 21일 단식하시고 살이 빠진 듯 하시네요

2020-01-04 00:2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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