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9.8.18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 2일째
“역사도 배우지만 삶을 배워야 해요.”

안녕하세요.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 2일째 날입니다. 오늘은 우수리스크 주변의 독립운동 유적지를 둘러보고 한카호를 다녀온 후에 왜 역사를 배워야하는지, 이번 기행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지에 대해 강연을 들었습니다.

아침 7시. 청년 역사기행단은 우수리스크 외곽에 위치한 이상설 유허비로 향했습니다. 유허비는 솔빈강이 굽이쳐 흐르는 강가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유허비로 가는 길을 경찰이 막았습니다. 며칠째 비가 내려 강물이 넘쳐서 더 이상 가면 안 된다고 합니다.

오전에 이상설 유허비를 보고 발해 솔빈부성까지 둘러볼 예정이었지만 일정을 모두 바꾸었습니다. 먼저 발해 시대의 유물인 거북이 조각이 있는 거북공원을 방문했습니다. 거북공원에 도착한 기행단은 차례로 한 줄을 이루며 거북이 모양의 돌을 한 바퀴 돌았습니다. 스님이 거북이를 가르키며 짧게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비석은 지금 보시듯이 받침을 거북이 모양으로 만듭니다. 가운데 비신에는 글을 새겼고, 비 머리에는 주로 용을 새깁니다. 용은 하늘로 날아오른다는 의미를 포현한 거예요. 여기는 받침만 남아 있네요.

경주에 가면 가장 유명한 것이 태종무열왕릉 앞에 있는 거북이 받침대와 머릿돌입니다. 비신은 소실되었고요. 사천왕사지에 가도 살아있는 거북이처럼 잘 조각된 비석 받침이 두 개 남아 있습니다.

조각을 보면, 규모 면에서는 발해 시대 조각이 월등히 큽니다. 그러나 정교함에 있어서는 신라가 좀 앞서 보여요. 여기에는 원래 거북이 조각이 두 마리 있었는데, 한 마리는 러시아 황제가 극동 지역을 방문했을 때 선물로 준다고 하바로스크로 들고 가서 현재는 하바로스크에 있습니다.”

설명하는 도중 사람들이 자꾸 거북이를 만지니까 스님이 농담을 했습니다.

“자꾸 만지면 거북이가 물어요.” (모두 웃음)

웃음이 터지고, 다시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이 거북이는 발해 시대 유물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금나라 시대 유물이라는 주장도 있어요. 이 지역에 유물은 대부분 발해 시대 아니면 금나라 시대의 유물입니다. 그래서 논쟁이 될 때가 많아요. 발해는 698년에 건국되어 926년에 멸망했습니다. 229년 간 지속된 나라예요. 금나라는 1115년에 건국되어 1234년에 망했습니다.”

스님은 아침에 가보려다가 강이 범람해서 가보지 못한 솔빈부 성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우수리스크는 러시아 말로 ‘늪’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민족은 이곳에 와서 살면서 여기를 ‘쌍성자’라고 불렀어요. 쌍성이라는 말은 성이 두 개 있다는 뜻입니다. 이곳에는 성이 1km 간격으로 두 개 있었다고 해요.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개척하고 살 때 여기에 성터가 두 개 있으니까 ‘쌍성자’라고 부른 겁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하나는 발해시대의 성이고, 다른 하나는 금나라 시대의 성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우수리스크 도시가 개발이 되면서 성벽을 다 허물고 집을 짓고, 농사를 지었어요. 토성이다 보니 더욱더 유실이 컸어요. 현재 성벽의 남쪽 부분만 조금 남아있지 거의 흔적이 없습니다.

이곳은 발해의 5경 15부 62주 중에 15부의 하나인 솔빈부였다고 추정됩니다. 저기 언덕 위에 올라가면 아주 성터가 잘 남아 있습니다. 아침에 그 성터에 가보려고 했지만, 강이 범람해서 가지 못했어요. 강물이 좀 빠지면 오늘 저녁이나 내일 새벽에 다시 한 번 가봅시다.”

그리고 우수리스크 주변의 독립운동유적지를 참배했습니다. 최재형 선생이 사살되기 직전 1년 여 간 머물렀던 집무실, 대한국민의회의 전신인 전로한족중앙총회가 열렸던 장소, 4월 참변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4월 참변비를 잇달아 참배했습니다.

이어서 고려인 문화센터를 방문했습니다. 먼저 ‘연해주의 불꽃, 고려인’이라는 영상을 시청했습니다.

어젯밤 스님에게 연해주 고려인의 역사에 대해 강연을 듣고 오늘 영상과 실제 사진으로 보니 더욱 실감이 났습니다. 전시관에는 고려인들과 연해주의 독립운동가들의 활동 연혁도 잘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고려인이 무엇인지도 몰랐는데, 너무나 부끄럽고 슬퍼서 눈물이 났다는 청년들도 있었습니다.

고려인 문화센터까지 보고나니 9시였습니다. 아직 솔빈부성과 이상설유허비에 넘친 강물이 빠지지 않을 것 같아서 오후에 가기로 한 한카호 호수를 먼저 가기로 했습니다. 스님은 한카호로 떠나기전, 한카호를 가는 이유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호수를 보러가는 것은 핑계고, 주 목적은 호수로 가는 길에 펼쳐진 대 평원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 넓은 평원에 옛날 우리 선조들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소련은 고려인들을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그러나 소련이 해체되면서 집단농장도 문을 닫았습니다. 그 땅을 식량보고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한국이 기술과 자본을 투자하고 북한의 노동자가 일해서 북한 식량난을 극복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우리나라 식략 자급률이 28%인데, 이곳을 식량기지로 쓰자는 제안도 있습니다.”

스님의 말대로 넓은 평야를 두 시간 달렸습니다. 지금은 제멋대로 자란 풀들 뿐이지만 과거에는 우리 조상들이 살았고, 미래에는 또 어떤 가능성이 열릴지 모르는 곳입니다. 마치 청년을 닮은 듯 푸르고,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평원이었습니다.

어제부터 날이 맑았습니다. 한카호에 도착하니 파란 하늘 흰 구름 아래 드넓은 호수가 펼쳐져있었습니다. 청년들은 호수에 발을 담가보기도 하고 조원들과 기념사진도 찍었습니다. 다함께 BTS 음악에 맞춰 플래시몹도 연습해보았습니다.

한편, 스님은 한카호 가는 일정에 참여하지 않고, 스님을 찾아온 손님들과 함께 우수리스크 지역 독립운동 유적지 한 곳을 답사했습니다. 상해임시정부 초대 교통총장을 지낸 문창범 선생이 만든 학교가 푸치로프카 마을에 있다고 해서 찾아가 보았습니다.

우스리스크 시내에서 비포장 도로를 1시간 정도 달려가자 푸칠로프카 학교가 나왔습니다. 푸칠로프카 학교는 일제 식민지 시대에 민족혼을 가르친 독립운동의 산실이었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 학교를 다녔다고 합니다.

울산에 사는 몇몇 뜻있는 분들이 이곳에 역사기행을 왔다가 이 학교가 폐교되어 방치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타인의 손에 넘어가기 전에 이 건물을 구입해 독립운동 유적지로 가꾸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곳을 어떻게 복원하면 좋을지 스님의 조언을 듣고 싶다는 요청에 스님도 흔쾌히 응했습니다.

외관 상으로는 반듯한 건물이었지만, 막상 실내에 들어가 보니 훼손이 심각했습니다. 1년 전만 해도 바닥에 마루가 깔려 있었는데, 오늘 답사했을 때는 누군가가 마루 바닥을 다 걷어내고 밑에 벽돌까지 빼내어 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소중한 독립운동의 산실이 외형만이라도 남아있어서 참 다행이다 싶어요. 그러나 앞으로 더 훼손되지 않게 우선 울타리를 쳐야겠어요. 그리고 러시아 지방 정부의 승인을 먼저 받고 나서 복원 공사를 해야 해요. 그래야 나중에 문제가 없거든요.”

스님은 몇 가지 조언을 한 후 다시 우수리스크 시내로 돌아왔습니다. 함께 동행한 분들과 고려인 문화센터를 다시 한 번 더 둘러본 후 오후 2시에 한카호를 보고 돌아온 기행단과 다시 만났습니다.

원래는 강물이 빠지기를 기다렸다가 오후에 다시 솔빈성을 보러 가보려 했으나, 선발대가 가서 답사한 결과 오히려 아침보다 오후에 솔빈강의 수위가 더 높아졌다고 합니다. 결국 솔빈성에 가는 것은 포기하고, 기행단 모두 수분하 식당에 모였습니다.

솔빈성을 못 가는 대신 오후에는 스님의 역사 강의를 듣기로 했습니다. 2시 30분부터는 점심식사를 했던 식당에 모여 스님의 강연을 들었습니다. 스님은 왜 우리가 이렇게 역사기행을 다니고 역사를 깊이 살펴보고자 하는 것인지에 대해 약 2시간이 동안 다양한 사례를 들어가며 설명했습니다.

스님은 청년들과 조금 더 가까이 눈을 맞추기 위해 서서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자기 존재를 알기 위해서는 사회적 관계와 역사적 관계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일본하고 어떤 관계, 중국하고 어떤 관계, 러시아하고 어떤 관계, 미국하고 어떤 관계, 전 세계 나라들과 지금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 이런 국제관계에 따라 우리나라가 어떻게 규정되는지를 살피는 게 사회적 관계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시간적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과거의 우리 위치를 확인하고, 또 시간적으로 거슬러 내려가서 미래의 우리 위치를 확인하는 게 역사적 관계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시험 치기 위해 역사를 공부하는 것과는 달라요. 시험을 치기 위해 배우는 것은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나’ 하는 지식을 공부하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공부하는 것은 첫째, 과거를 앎으로 해서 미래에 도대체 어느 쪽으로 갈 것인지를 예측하는 거예요. 예측해본 결과가 나에게 불리하다면 방향을 바꿔야 해요. 방향을 바꾸려면 우리가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런 일을 하기 위해서 우리가 역사 공부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 학교 공부와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역사적 인식이 있어야 미래를 예측하고 대응할 수 있는 거예요. ‘저 사람은 역사의식이 부족하다’ 이런 말은 ‘미래를 보는 눈이 없다’, ‘현실을 꿰뚫어보는 눈이 부족하다’ 이런 말과 일치합니다. 여러분은 역사의식이 좀 없는 축에 들어갑니다. (모두 웃음)

현실을 꿰뚫어보거나 미래를 예측하는 일을 잘 못하잖아요. 연애를 할 때도 상대를 딱 꿰뚫어보고, ‘이 사람과 연애나 결혼을 하면 이런 점은 좋고, 저런 점은 나쁘고, 몇 년 가면 헤어지겠구나’ 이렇게 딱 인식이 돼야 해요. 그렇게 예측이 되었을 때 ‘3년 만에 끝날 관계라도 괜찮으니 당신과는 한 번 살아볼 만하다’ 이렇게 결정을 내려야지, ‘이 사람하고 영원히 살겠다’라고 하는 건 현실 인식이 부족한 거예요. (모두 웃음)

지금 한일관계나 북미관계도 이런 사회적인 면과 역사적인 면 두 가지가 섞여 있기 때문에 두 가지를 다 알아야 해요. 사회적인 관계와 역사적인 관계를 두루 살펴보고 ‘이것은 지금 시대가 바뀌어서 국제관계가 개편되는 과정이구나.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고, 오늘의 적이 내일의 동지가 되는 이런 큰 진동이 일어나는 시기이구나’ 이런 걸 알아야 합니다.

국제관계는 의리로 얘기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것도 다 생각이 고정관념에 젖어 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예요. 그래서 사회적 존재와 역사적 존재, 이 두 가지를 다 공부해야 합니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그 중에서 국제관계가 아니라 역사 관계를 공부하는 거예요. 얘기를 하다 보면 국제관계 이야기도 조금씩은 나오겠지만, 주가 되는 것은 ‘시간적으로 나의 존재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흘러왔느냐?’ 이걸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개인사나 씨족사를 공부하는 것이 아니고, 가문사나 문중사를 공부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민족사를 공부하는 것입니다.”

크게 3가지 이유를 설명했는데, 첫째가 고대사 부분, 둘째가 독립운동사 부분, 셋째가 현대사에 대한 부분입니다. 그 중에서 독립운동사 부분에서는 이런 말씀을 들려주었습니다.

“요즘 일본에 대해 시위를 하고 격분을 하는 것도 일본에 대해서 마음속에 상처와 콤플렉스가 있다는 반증입니다. 일본이 조금만 망언을 해도 난리를 피웁니다. 일본이 독도에 대해서 뭐라고 한마디 하면 난리가 나잖아요.

그런데 만약 남북한 통일을 우리 힘으로 이루고, 경제 수준도 우리가 일본보다 좀 낫다면 어떨까요? 그러면 일본이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해도 손가락 잘라서 혈서 쓰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그냥 ‘아, 또 저런 소리를 하는구나’ 하는 정도죠. 지금의 과격한 반응은 열등의식의 영향이 큽니다. 무의식 세계에서는 동경을 하는 한편, 또 저항도 하는 거예요. 열등의식은 늘 이렇게 동경과 저항이라는 두 가지가 겹쳐서 일어나거든요.

왜 열등의식이 생겼을까요? 서구 학문이 우리에게 들어오는 과정에서 일본을 거쳐서 들어오다 보니까 우리가 예전에 중국 것을 배우듯 일본 것을 배워서 그래요. 우리의 무의식 세계에는 이런 경험들이 깔려 있습니다. 요즘에야 학문이나 문화가 미국에서 바로 들어오니까 미국말을 바로 쓰지만,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서양 문물의 모든 용어가 일단 일본에 와서 번역 및 정립 과정을 거친 뒤 우리한테 들어왔거든요. 한 단계를 거쳐서 들어온 셈이죠. 거기다가 식민지 지배까지 경험을 했잖아요. 그래서 열등의식이 있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가 독립운동사를 제대로 알면 열등의식이 사라집니다.

‘우리 민족이 힘이 부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굴하지 않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싸웠다.’

이렇게 역사를 제대로 파악하면 열등의식이 생기지 않아요. 세가 불리하면 질 수도 있고, 빼앗길 수도 있잖아요. 중국 한족이 중원을 계속 지배하고 있었던 게 아니에요. 몽골한테도 중원을 빼앗기고, 만주족한테도 중원을 빼앗겼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남북이 분단되면서 우리의 독립투쟁사가 상당 부분 지워지고 왜곡됐다는 겁니다. 남쪽은 사회주의에 관여한 사람이거나 사회주의에 관여하지 않았어도 북한 정부에 동조한 사람을 죄다 삭제해버리고, 북한은 김일성 주체사상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다 삭제해버렸어요. 그래서 북한은 독립운동을 김일성 혼자서 다 한 것처럼 말하고, 남한은 독립운동이라고 하면 유관순 열사가 만세 부른 거나 안중근 의사가 총 쏜 것 정도 말고는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거의 몰라요. 전체 민중이 싸우고 투쟁한 역사를 모릅니다. 농민은 이렇게 싸우고, 노동자는 이렇게 싸우고, 온 인민들이 어떻게 싸웠다는 활동이 있을 거잖아요. 한쪽에서는 공산주의 이념을 가지고 싸우고, 한쪽에서는 기독교 이념을 가지고 싸우고, 젊을 때 독립운동을 하다가 늙어서는 친일을 좀 한 사람도 있을 테고요. 이런 활동상을 다 인정한다면 우리의 독립운동사가 굉장할 거예요.

연변 조선족 통계를 예로 들어볼게요. 한족과 조선족이 항일투쟁에 참여한 비율을 비교해보면 조선족이 한족보다 항일투쟁에 참여한 비율이 몇 배 더 높습니다. 한족은 100명 중에 5명이 투쟁에 참여했다고 하면, 조선족은 20명이 참여한 셈이에요. 여성 참여 비율은 더 차이가 큽니다. 중국 정부의 통계에 따르면 항일 투쟁에 참여한 여성이 200여 명에 달하는데 개중 다른 민족 여성은 3명밖에 없었다고 해요. 나머지는 전부 조선족이였습니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가 아는 독립운동의 내용이 별로 없는 것은 우리가 투쟁 열기가 부족해서도 아니고, 활동을 안 했기 때문도 아니에요. 분단으로 인해서, 또 남북이 체제 경쟁하는 과정에서 이런 기록들이 많이 묻히고 왜곡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만 제대로 밝혀져도 우리가 그저 분개하는 것을 넘어서서 자긍심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 세야 불리할 수도 있죠. 베트남의 경우를 보세요. 우리나라나 미국한테 배상금 내놓으라거나 이런 게 없잖아요. 침략을 받았지만 스스로 물리쳤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우리는 이런 투쟁의 역사가 왜곡되다 보니까 ‘우리는 아무것도 한 게 없이 연합군의 승리 덕분에 해방을 맞았고, 대한민국은 미국이 지켜줘서 유지될 수 있었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안 그래도 미국을 비롯한 서양에서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정신적으로 사대가 되기 쉬운데 이런 식으로 알고 있다 보니 미국에 대한 열등의식이 더 심해졌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한 열등의식을 극복해야 이번에 강제 징용 배상 판결을 둘러싸고 한일 무역 전쟁이 벌어진 사태에도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판단하고 대처할 수 있어요.

‘저들의 의도가 뭐지? 무엇 때문에 저들이 저러지? 역사 문제를 핑계로 삼아 우리의 빠른 성장을 막으려는 게 진짜 의도 아닌가?’

이렇게 본질을 파악하면 상대를 너무 건드려서 싸움을 힘들게 할 필요가 없어요. 절대로 비굴하게 굴지는 않지만, 너무 건드릴 필요도 없이 ‘어떻게 이길 것인가?’ 관점을 가지고 대응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조건 감정이 앞서요. 그러면 나중에 자기 기분은 좋을지 몰라도 실제로 이 경쟁에서 마지막 승리를 하기는 어려워집니다.

그리고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잖아요. 옛날에는 적과 죽기 살기로 싸워야 했지만, 지금은 경쟁을 해야 하는 관계 속에서도 협력을 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어요. 경쟁을 어떻게 유리하게 할 건지, 협력을 어떻게 유지시켜 나갈 건지, 우리가 이런 것까지 다 생각하려면 마음속에 콤플렉스가 있으면 안 돼요. 콤플렉스가 있으면 흥분해서 감정이 앞서버리니까요.”

강의 중간에 잠시 마당에서 다함께 어울리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청년들은 아까 한카호에서 연습한 BTS의 춤을 선보였습니다. 그새 많이 친해졌나봅니다.

노래에 자신있는 사람들도 나와 한곡씩 멋들어지게 불렀습니다.

청년들은 스님도 한 곡 해주시기를 청했습니다.

“와이래 좋노. 와이래 좋노. 와이래 좋노. 여러분과 함께하니 와이래좋노.”

스님은 아리랑을 불렀습니다. 노랫말에 공감하며 함께 어깨를 들썩였습니다.

한바탕 놀고 나니 몸과 마음이 가뿐합니다. 다시 식당으로 모여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다 잘 노네요. 이렇게 놀 듯이 공부하면 성공할 거예요. (모두 웃음) 근데 BTS가 춤을 그렇게 추나요?”

“아니요.”(모두 웃음)

한바탕 웃고 스님은 새로운 대한민국을 어떻게 만들지, 청년들에게 그 어떤 때보다 열정적으로 강연해주었습니다.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통일 담론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우리가 미래에 국가 비전을 가지려면 다시는 전쟁이 없는 평화를 정착시키고, 남북이 협력하는 통일을 추구해야 하는데, 통일 담론이 사라져 버리고 통일 세력이 없어지는 상태가 되다 보니 앞으로 통일할 수 있는 환경이 온다 해도 통일의 주체가 되는 세력이 없어서 통일을 이루기가 어려운 실정이 되었어요. 도무지 남북은 공통점이 없습니다. 국부가 같은 것도 아니고, 종교가 같은 것도 아니고, 사상과 이념이 같은 것도 아니고, 같은 사회 체제인 것도 아니고, 왕이 같은 것도 아니니까요.

그러나 제가 생각하기에 남북의 가장 큰 공통점은 바로 역사입니다. 역사는 부정할 수가 없잖아요. 분단 70년이 길다고 하지만 6천 년 역사에 비하면 1퍼센트에 불과합니다. 남북이 서로 다르다고 하지만 중국이나 일본과 비교해보면 크게 다르지 않아요. 말도 같고, 음식도 같고, 다른 것보다 같은 게 훨씬 많아요. 우리끼리 비교했을 때나 다른 게 조금 있는 정도죠.

저는 역사적인 접근을 통해 우리가 통일 담론을 만들어나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한중 수교가 되자마자 1993년부터 역사기행을 기획하고 시작한 거예요. 1993년에는 답사를 했고, 1994년부터 본격적으로 역사기행을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미래에 우리가 어떤 국가를 만들어나갈 것인가’와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처럼 남북한이 분단된 가운데 긴장이 고조되는 상태에서는 우리가 세계 일류국가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서로 이념적으로 대립하는 건 100년 전의 과제에 머물러 있는 거예요. 한일 간에 민족주의로 대립하는 것도 100년 전 과제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그런 이념적인 논쟁이나 민족적인 논쟁을 넘어서 세계 인류 공영의 길을 가야 세계 문명을 선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과거사를 극복 못하고 있어요.

그래서 첫째, 평화를 정착시키고, 둘째, 남북이 이익을 공동으로 추구하는 공동 경제 방식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통일의 기초를 닦아나가야 국가 비전이 있어요.

그런 다음에 사실은 일본과도 긴밀히 협력해야 합니다. 미중 세력 경쟁에서 한국만 갖고는 지렛대 역할을 하기 어려워요. 그러나 일본과 협력 관계가 유지되면 미중 세력 경쟁에서 지렛대 역할을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 패권 경쟁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일본과 협력하는 것은 비록 지금은 감정이 안 좋을지 몰라도 미래로 보면 우리가 중요하게 여겨야 할 일입니다.

평화와 통일은 이런 길을 가는 데 있어서 첫 발입니다.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에요. 국가 비전은 통일한다고 끝나는 게 아니에요. 통일이 곧 끝이라고 생각한다면 1945년의 이슈로 돌아가는 겁니다. 3.1운동 때 우리가 어떻게 했습니까?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자’로 끝난 게 아니라 여기에 더해 ‘민(民)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나라를 만들자’ 이게 우리의 비전이었어요. 1919년 당시에 독립된 나라를 만드는 것은 실패했을지 몰라도, 1919년부터 지금까지 100년을 돌아보면 결국은 독립된 나라도 만들고, 이에 더해 민이 주인인 나라도 만들었습니다. 4.19 혁명, 5.18 광주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이 계속 이어져 왔잖아요.

그런 것처럼, 남북이 통일된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그 통일된 나라는 새로운 나라여야 합니다. 우선 평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 위에 인류가 지금 관심을 갖고 있는 환경 문제나 빈부 격차 문제, 새로운 문명의 도래와 관련한 기술적인 문제, 인권 문제, 이런 것들이 잘 극복된 새로운 나라를 우리가 만들어나가야 해요. 그것이 앞으로 100년의 과제입니다.

우리가 흔히 ‘모범적인 나라’라고 하면 미국이나 중국 등 강대국이 아니라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같은 북유럽 국가들을 가리킵니다. 크기는 작지만 환경적으로도 괜찮고, 시민사회의식도 있고, 국제 협력 관계도 유지하고, 평화도 유지하는 등 여러 가지로 모범적이에요.

그런데 왜 우리는 대한민국을 그런 모범적인 나라로 못 만들어요? ‘민주주의’ 하면 한국이 떠오를 수 있도록 해야죠. 요새 홍콩 시위 현장에 민주주의 수출하는 거 보셨죠? 시위 때 부르는 노래도 수출하잖아요. BTS 같은 케이팝만 생각할 게 아니에요. ‘평화’ 해도 한국이 떠오르게 하고, ‘환경’ 해도 ‘한국이 환경 실천을 잘 하더라’ 이런 평가를 받을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나 인권 같은 문제에서도 이런 식의 새로운 삶을 실천해야 세계 문명을 주도할 수 있습니다.

중국에 와서 화장실 이용할 때 여성분들은 화장실 수가 적어서 많이 불편하죠? 한국의 경우 처음에는 남성용 화장실이 많고 여성용은 적었어요. 그러다가 남녀평등이라고 해서 수를 똑같이 만들었어요. 그런데 현실은 여성의 화장실 이용이 불편했어요.

그래서 지금은 모든 사회 시설을 만들 때 성평등 지수를 도입하고 있습니다. 여성은 화장실을 이용할 때 남성보다 시간이 더 많이 걸린다는 걸 계산해서 남녀 화장실 비율을 조절하는 거예요. 예컨대 화장실을 이용하는 남녀의 수가 같다면 남자화장실 반, 여자화장실 반이 아니에요. 여성용 화장실 개수가 남성용의 두 배가 되도록 그 비율대로 화장실을 지어놓으면 남성과 여성의 비율이 같은 여행객들이 똑같이 화장실에 갔을 때 나올 때도 똑같이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는 그런 게 전혀 반영이 안 돼 있습니다. 정책을 만들고 집행할 때는 이런 것들을 전부 고려해서 반영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제안하는 건 통일지수예요. 어떤 정책을 입안할 때 이게 통일에 유리하냐를 먼저 검토해서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는 제안입니다. 이런 것처럼 우리가 불평만 하지 말고 우리 대한민국을 개선해나가야 합니다.

민주주의도 그렇습니다. 현대적 민주주의 제도의 도입은 우리가 가장 늦었지만, 엄격히 따져보면 지금은 일본보다 나아요. 일본은 위로부터의 개혁이라면 우리는 아.래로부터 쟁취해서 올라오는 개혁이잖아요. 지금은 자유가 조금 지나치게 남용되거나 너무 자기 이익 중심으로 나가는 부작용이 있긴 하지만, 우리가 노력해서 조금만 개선을 하면 좋은 민주주의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가장 큰 장애가 분단으로 인한 정치적인 갈등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의 사고가 자유롭지 못한 거예요.

그래서 통일은 그냥 통일된다고 끝나는 게 아니에요. 그건 70년 전 이슈로 돌아가는 거예요. 우리가 미래로 가는 데 있어서 첫 번째 장애가 분단으로 인한 갈등이기 때문에 그걸 우선 넘자는 겁니다. 그리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자는 목표를 갖고 우리의 내적인 열등의식을 극복하고 미래의 비전을 갖자는 거예요.

방금 여러분이 BTS 노래를 불렀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BTS를 보면서 지내니까 음악 분야에서 서양에 대한 열등의식이 없어요. ‘영국 가서 좀 배워야 하겠다’ 이런 게 없습니다. 이런 가수들은 자기들이 노래를 만들어서 자기들이 부르고, 가사도 한국말과 영어를 자기들 마음대로 써서 부르기 때문에 그 노래를 따라 부르는 사람이 알아서 따라 불러야 해요. 홍콩 사람들이 시위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를 때 번역도 해서 부르지만 한국말로도 부르잖아요. 우리가 옛날에 팝송을 부를 때 혀도 안 돌아가는 영어 발음을 한글로 써서 부르던 것과 같습니다. 이런 게 문화의 수출이에요. 세상이 다 우리 것을 따라 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그만큼 창조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거예요.

요즘 우리 청년들이 공무원 된다고 야단들인데, 월급 좀 더 받아서 조금 더 편안하게 사는 게 그렇게 좋아요? (모두 웃음)

역사기행을 와서 우리가 좋은 호텔에서 자고 좋은 것을 먹는 건 우리에게 이런 아이디어를 줄 수 없습니다. 좀 고생도 해보는 가운데 협력도 되고 아이디어도 나오는 거예요. 막 힘들 때 누가 손만 한 번 잡아줘도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계단을 못 올라가서 죽을 것 같을 때 누가 손잡아서 끌어주기만 해도 엄청나게 고마운 거예요. 내가 등 따시고 배부를 때는 누가 나한테 아무리 맛있는 걸 사줘도 ‘배부른데 뭐 굳이 이런 걸 사 줘?’ 이러기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힘듦을 함께 극복하는 게 중요합니다.

이번 여행에서는 역사도 배우지만 삶을 배워야 해요. 힘든 것도 경험해보고 배워야 합니다. 그러니 너무 편안함에 집착하지 말고, 힘든 것도 즐겁게 받아들이고 협력하는 경험을 해보세요. 힘들수록 이기주의에 빠져들기 쉬운데, 힘들 때 우리가 서로 협력하면 그 경험이 여러분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꼭 강의 듣거나 유적지 보는 시간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여러분이 밥 먹고, 서로 가방 들어주고, 비 오는 날도 협력하는 가운데 실질적인 역사 공부가 있는 거예요. 여기서는 민족이 어떻고 하며 열심히 공부해놓고, 정작 자기 옆에 있는 사람은 죽든지 말든지 신경 안 쓰고, 옆 사람이야 반찬을 먹든지 말든지 나만 맛있는 걸 먹는다면, 역사의식이나 민족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한갓 지식에 불과한 거죠.

그런 것들을 함께 해나가자는 게 이번 여행의 취지입니다. 이런 목표로 이런 프로그램을 짠 거예요.

순간순간은 기분이 별로 안 좋을 거예요. 힘도 들고, 스님이 뭐라 뭐라 했다고 화도 날 거예요. 그런데 산을 못 올라가서 힘들어하는 사람한테 ‘아이고, 힘들지?’ 이러면 올라가기가 오히려 더 어렵습니다. 저라도 있어서 지팡이 짚고 뒤에서 독려를 하면 조금 눈치 봐가면서 올라가거든요. 그렇게 해서 그 고비를 넘어가보면 또 별 거 아니에요. 일어나기 싫은 건 이불 밑에 누워 있을 때는 큰일이지만 벌떡 일어나버리면 아무 일도 아니잖아요. 마찬가지로 지금 하는 고생도 여러분이 한국 가서 돌아보면 아무 일도 아니에요. 항상 그런 관점을 유지하면서 수행삼아 같이 공부해보시기 바랍니다.”

“네!”

“감사합니다.” (모두 박수)

왜 역사기행을 왔는지 스님이 되짚어 주자 청년들도 모두 공감을 표하며 기쁜 마음으로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강연이 끝나고 나니 저녁 6시 30분이 되었습니다. 저녁식사를 하며 참가자 소개를 했습니다. 러시아에서 머무는 동안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준 수분하 식당 사장님도 소개했습니다. 뜨거운 박수가 쏟아지자 사장님의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사장님은 조선족이었습니다. 먼 타국에서 오랜만에 많은 동포들을 만나 감격스러우셨나봅니다.

식사를 마치고 20분 정도 되는 거리를 걸어서 숙소로 이동했습니다.

내일은 새벽 4시에 기상하여 5시에 염주성이 있는 크라스키노 마을로 출발합니다. 염주성을 둘러보고 안중근 의사의 단지동맹 기념비를 참배할 예정입니다. 오후에는 중국 국경을 넘어 훈춘을 지나 봉오동 전투터까지 달려갑니다. 내일 또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

전체댓글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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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규태

스님께 감사드리며,
여러 봉사자님들과 역사기행 참가자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_^

2019-09-01 17:09:48

황영희

역사는 미래다
고맙습니다

2019-08-27 18:38:17

무지랭이

다시 읽을 수 있는 인연이 돼서 좋아요~^^

2019-08-23 17:4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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