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9.08.24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 8일째
“미래의 주역이 될 청년들에게”

안녕하세요. 오늘은 청년동북아역사기행 8박 9일의 여정 중 8일째입니다. 오늘 스님은 청년들과 고구려 역사 유적지를 둘러보고 저녁에는 8박 9일을 정리하며 한반도 통일의 필요성과 청년의 역할에 대해 강연했습니다.

새벽 5시. 국동대혈로 출발했습니다. 국동대혈로 가는 길에 보이는 압록강변의 북한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였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산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아침 공기가 상쾌했습니다.

“이 정도는 걸을만하죠?”

“네!”

산을 조금 더 올라가니 ‘장상애’라고 불리우는 바위 한 쌍이 나타났습니다. 높이 우뚝 솟은 두 바위는 마치 두 남녀가 서로 애틋하게 마주보고 있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스님은 이 바위를 보면서 고구려 2대 왕인 유리왕이 멀리 떠나간 연인을 차마 잡지 못하고 그리워하며 읊었다는 황조가의 배경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바위가 참 묘하게 생겼죠. 두 남녀가 마주보고 있는 모습이예요. 바위 앞에는 ‘장상애’라고 써놓았는데요. 영원히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이 바위는 고구려 2대 유리왕이 지은 황조가와 관련된 바위입니다. 황조가 아시죠? 누가 한번 나와서 읊어 보세요.”

“훨훨 나는 저 꾀꼬리 암수 서로 노니는데 외로울사 이내 몸은 뉘와 함께 돌아갈꼬.”

“잘 하셨어요. 학교는 다녔네요. (모두 웃음) 유리왕은 졸본에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제1부인으로는 권력가 집안의 여자와 결혼을 했어요. 제2부인은 자신이 좋아하는 아름다운 여자와 결혼했어요. 제2부인은 고구려족이 아니고 한족이였어요. 그런데 두 부인이 계속 서로 싸우는 거예요. 제1부인은 제2부인을 아주 천한 집안 출신의 여자라고 무시를 했고, 제2부인은 제1부인을 못생겼다고 무시했어요.

어느 날 왕이 사냥을 하러간 후, 두 부인이 한바탕 싸웠어요. 서로 비난을 하다가 제1부인이 ‘이 천한 것아. 너희 나라로 가라.’ 이렇게 얘기했어요. 그러자 제2부인은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하고 짐을 싸서 자기 나라로 가버렸어요. 저녁에 유리왕이 궁에 돌아오니까 제2부인이 없어진 겁니다. 그래서 말을 타고 막 달려가서 제2부인을 잡았어요. ‘궁으로 돌아가자’ 하니까 제2부인은 ‘나냐, 제 1부인이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왕의 입장에서는 참 곤란한 거예요.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왕이라는 지위를 유지하려면 권력가 집안의 제1부인이 필요했거든요. 결국 왕위를 포기할 수는 없으니까 왕 혼자 궁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 때 꾀꼬리 두 마리가 정겹게 노니니까 꾀꼬리가 부러워서 이런 시를 지은 겁니다. 그래서 서로 사랑을 못 이루었지만 바위가 되어서 영원한 사랑을 나눴다는 이야기가 전해져내려 오는 곳입니다.”

스님의 재미있는 설명에 모두들 크게 웃었습니다. 멀게만 느껴졌던 유리왕의 존재가 가깝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5시 30분. 국동대혈에 도착했습니다. ‘국동’이란 말을 처음에는 나라의 동쪽이라고 해석해서 그 위치를 정확히 알 수가 없었는데, 나중에 ‘국’이라는 글자가 ‘국내성’을 뜻한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이곳의 위치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즉 국동대혈은 국내성의 동쪽에 있는 큰 동굴이라는 뜻입니다. 고구려 왕들은 이 동굴을 하늘로 통하는 곳으로 신성시 여겨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이 곳에서 스님과 청년들은 조상님들께 인사를 올린 후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함께 발원했습니다. 평소라면 나의 행복, 내 가족의 행복을 바랬겠지만 스님의 발원기도를 듣고 있으니 나라를 자기 몸처럼 걱정했던 선조들처럼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대한 마음이 간절해졌습니다. 가슴은 뜨거워지고 눈시울은 붉어졌습니다.

청년 역사기행단은 조원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국동대혈을 내려왔습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다시 압록강 너머 북한이 보입니다. 북한을 바라보며, 언젠가 북한 청년들과 함께 역사기행을 올 날을 그려보기도 했습니다.

버스는 이제 고구려 속으로 달려갔습니다. 먼저 차를 타고 가는 길에 15대 미천왕의 능으로 추정되는 ‘서대묘’, 18대 고국양왕의 능으로 추정되는 ‘천추묘’를 보았습니다.

“자, 오른쪽 차창 밖을 보세요.”

서대묘
▲ 서대묘

천추묘
▲ 천추묘

다음으로는 장군총으로 향했습니다. 청년들은 거대하고 아름다운 장군총의 모습에 탄성을 내질렀습니다.

어제 저녁 스님에게 배웠던 내용을 되짚어 보며 장군총 곳곳을 살펴보았습니다. 장군총은 7층 규모의 거대한 돌무덤으로 약 1100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12개의 호석으로 4면이 받쳐져 있었습니다. 호석은 중력의 영향으로 무덤이 튀어나오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합니다.

호석 하나는 도난당했는데, 신기하게 그쪽면의 돌들은 튀어나와있었습니다. 바닥돌에 홈을 파서 윗돌을 끼워 넣은 정교함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큰 돌들을 어떻게 다듬고 옮겨왔을까 보면 볼수록 놀라웠습니다.

청년들은 고구려인의 기상을 표현하듯 재미있는 사진을 찍으며 추억을 쌓았습니다.

다음은 광개토대왕릉비와 광개토대왕릉을 보았습니다. 무엇보다 책에서는 실감할 수 없었던 웅장한 크기에 모두들 놀라워했습니다.

광개토대왕릉은 그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무너져서 본래의 모습을 알아보기 어려웠지만, 그 크기와 엄청난 규모에 압도되었습니다. 평양에서 만주 벌판까지 드넓은 영토를 호령했던 선조들의 기상이 느껴져 가슴 뭉클한 감동이 느껴졌습니다.


오전 11시, 이제 버스는 고구려의 첫 수도로 향했습니다. 버스 안에서 스님은 고구려의 건국, 홀본산성, 스님이 처음 홀본 산성을 찾았던 이야기 등을 들려주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고구려의 첫 수도인 환인, 옛날 이름으로는 졸본에 왔습니다. 오늘 우리가 가려고 하는 홀본산성은 해발 800미터에 있습니다. 사방이 깎아지는 절벽인데 정상 부위는 평평합니다. 주위가 자연 그대로 성벽처럼 생긴 아주 독특한 산입니다.

이런 곳에 나라를 세웠다는 것은 초기에 적의 공격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겠죠. 쫓겨와서 나라를 세웠으니까 처음에는 방어하는 것이 주축이였을 겁니다. 물론 이 산성 뿐만 아니라 평지에도 왕이 사는 궁성이 따로 있었겠죠. 고구려는 평지성과 산성이 항상 한 짝을 이루고 있거든요. 위기에 처하면 산성으로 갔다가 전쟁이 끝나면 평지성으로 다시 내려오고 그랬습니다.

사방이 깎아지른 절벽 위에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사실은 성벽을 쌓아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습니다. 다만 정상으로 올라가는 통로 한 곳에만 성문을 만들었습니다. 또 물이 없으면 산성이 될 수가 없는데 정말로 그 위에는 우물도 있습니다.

그런데 해발 800미터 위에는 왕과 군대만 피신을 할 수가 있지 일반 백성은 그 위에 모두 올라갈 수가 없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꼭대기가 아닌 팔부 능선에 해당하는 해발 600미터 지점에서 산을 끼고 성벽을 쌓기도 했는데, 여기로는 일반 백성이나 말이 피난올 수 있게 했습니다. 그것이 동쪽 성벽입니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은 이 산을 봉우리가 5개 있다고 해서 오녀산이라고 불렀습니다. 오녀산에서 산성이 발견되었으니까 자연스럽게 오녀산성이라고 부르게 된 것 같아요. 원래 이름은 홀본산성입니다.”

스님의 설명이 끝나고 얼마지나지 않아 스님이 설명한 우뚝 솟은 독특한 산이 드디어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보통 홀본산성에 오면 안개가 끼거나 비가 와서 산성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었는데, 이번에는 제대로 볼 수 있었습니다. 청년들은 ‘우와~’ 하고 감탄사를 연발했습니다.

“자, 저 곳이 홀본산성입니다. 저기를 올라갈 거예요. 너무 좋죠?”(모두 웃음)

먼저 박물관에 들러 홀본 산성에 대한 개괄적인 이해를 했습니다. 다행히 산 중턱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청년들은 안도했습니다.

버스에서 내리자 산 중턱에서 정상까지는 계단이 주욱 놓여 있었습니다. 오녀산 산성이라고 적힌 비석 앞에서 오는 순서대로 기념사진을 찍은 후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고구려와 홀본 산성에 대해 미리 설명을 다 했기 때문에, 청년들을 먼저 보내고 스님은 뒤에서 천천히 따라갔습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드디어 홀본 산성 안으로 두 발을 내디뎠습니다. 성 내부에 대한 설명은 현지 가이드 김만송 님과 평화재단 이승용 님이 해주었습니다. 옹성의 모양을 하고 있는 서문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산성 곳곳을 살펴보았습니다.

홀본산성은 그야말로 절벽 위에 산성이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고구려성의 특징인 개이빨식 축성법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온돌이 있었던 건축 유지도 여러 개 볼 수 있었습니다. 온돌은 우리 민족에게서만 보이는 고유한 문화인데, 이곳이 고구려의 성이 틀림없구나 싶었습니다.

드디어 기행단은 점장대에 이르렀습니다. 점장대는 원래 전망이 정말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입니다. 오늘은 날까지 맑아 그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었습니다.

청년들은 ‘백두산 천지보다 멋져요.’라며 환호했습니다. 점장대에서 다 함께 사진을 찍고 홀본 산성을 내려왔습니다.

내려오는 계단은 끝이 없었습니다. 힘이 들어서 짜증을 낼 법도 한 데 청년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그득했습니다.

“오늘이 역사기행 중에 꽃인 것 같아요.”

8부 능선 정도에서는 동쪽 성벽과 동문을 만났습니다. 동문은 공자 형 성문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비록 이끼와 풀로 덮여있었지만 공자 형 성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산을 내려오니 6시가 넘었습니다. 3시간에 걸쳐 산성을 둘러보고 저녁 식사 장소로 이동하였습니다.

아쉽게도 오늘의 저녁 식사는 이번 역사기행에서의 마지막 식사였습니다. 마지막 식사를 맞아 중국에서 실무를 담당한 조신님의 소감을 들어보았습니다. 조신님은 역사기행 실무를 담당하던 아버지가 병환으로 쓰러져 책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저는 조선족입니다. 저는 중국에서 자랐고, 중국어를 배우고 중국 역사를 배우며 살았어요. 그런데 역사기행을 따라다니며 조선족 역사의 아픔과 아름다움에 대해 알게 되었어요. 올해 제가 역사기행을 한 지 10주년입니다. 스님이 밀어주셔서 이런 일을 할 수 있게 되어 감사합니다."

조신님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감동이었습니다. 청년들은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저녁 8시 30분. 저녁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청년 역사기행단은 스님을 모시고 마지막 정리 강연을 청해 들었습니다. 강연은 1시간 10분 동안 진행되었습니다.

그간 8박 9일 동안 우리는 무엇을 보고 듣고 느꼈는지 주욱 짚어준 스님은 마지막 무렵 통일의 필요성과 청년의 역할에 대해 강조했습니다.

“현대사를 살펴보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까지 독립투쟁을 했는데도 왜 전쟁이 끝나고 우리가 피해를 입어야 합니까? 일본은 패전 국가이니까 피해를 입는 게 당연하지만 우리는 패전 국가도 아니잖아요. 우리는 일본으로부터 피해를 입은 쪽이니까 일본이 전쟁에 패하면 우리는 당연히 독립이 돼야 하는데, 왜 우리가 분단이 되고 신탁통치를 받아야 하나요?’

그런데 역사를 살펴보면 당시 국제사회에서는 한국은 일본의 일부라고 인식했습니다. 일본의 일부가 아니라면 우리가 저항운동을 강력하게 했어야 하지 않느냐는 거예요.

독립운동사에서 얻는 통일의 교훈

물론 초기에는 강력한 저항운동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1920년이 지나 우리의 저항운동은 사회주의 운동에 편입되면서 우리의 독자성이 희미해졌어요. 사회주의는 제국주의와는 달리 식민지 해방에 굉장히 도움이 됐지만, 이 사람들도 국가주의처럼 공산주의 혁명에만 너무 집중해 있었습니다. 결국 러시아 지역에서는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해 독자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이 없어져버린 셈이 되었습니다.

중국에서도 군벌이 활거하던 시대에는 잘하든 못하든 우리가 독자적으로 군대를 가지고 일본에 저항할 수 있었지만, 오히려 동북지역이 모택동(마오쩌둥) 부대의 관할 하에 들어가면서 우리의 독립운동은 결국은 중국 공산당, 즉 동북항일연군에 참여해서 독립 투쟁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최대 독립운동 근거지들이 다 소비에트의 일부, 혹은 중국 공산당의 일부가 되어 활동하다 보니까 국제사회에서 볼 때는 우리가 우리의 독립을 위해 겉으로 드러나도록 저항 운동을 한 게 아무것도 없다고 보게 되었습니다. 상해 임시정부가 있긴 했지만 독자적 군대가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상해임시정부는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인해 장개석(장제스)한테는 굉장히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4억의 중국 인민이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 이렇게 칭찬할 정도였어요. 그래서 장개석이 카이로 회담에서 조선의 독립을 관철시켰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 조선을 독립시킨다’라는 합의도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겁니다.

카이로 회담은 처칠과 루즈벨트, 장개석만 참여했어요. 스탈린은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스탈린은 중국이 내전 상태에 있다고 봤기 때문에 장개석을 참여시키려면 모택동도 참여시키고, 아니면 둘 다 빼야 한다는 입장이었어요. 그런데 장개석만 참여하니까 자기는 안 와버린 거예요. 결국 처칠, 루즈벨트, 장개석, 이렇게 셋만 참여했는데, 이 회담에서 조선의 독립 문제를 거론할 사람은 장개석 밖에 없었고, 장개석이 제안을 했기 때문에 카이로 선언에서 조선의 독립 문제가 나온 거예요. 루즈벨트나 처칠은 조선의 독립 문제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다음에 열린 포츠담 회담에서는 스탈린, 루즈벨트, 처칠, 이렇게 셋이 만났어요. 스탈린을 만나야 전후 처리를 의논할 수 있었거든요. 2차 세계대전에서 최고의 피해자는 소련이었기 때문입니다. 독일에 가장 크게 저항해서 희생을 치른 것도 소련입니다. 그러니 스탈린이 참가 안 한 회의는 의미가 없었어요. 회담에 스탈린을 참가시키려니까 스탈린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회담에 장개석은 참여할 수가 없었던 거예요. 그렇게 셋이 만나니까 그중에 조선의 이익을 대변해줄 사람이 없잖아요. 그래서 조선의 독립 문제는 아예 언급도 안 되고, 나중에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신탁통치로 가버린 겁니다.

상해임시정부는 독립운동에서 어느 정도의 역할을 했지만, 군대를 독자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에요. 프랑스도 독일의 지배를 받고 괴뢰정부가 들어섰지만 그래도 프랑스에는 레지스탕스 운동이 독자적으로 있었잖아요. 국제연합의 일원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전승 국가로서 독립을 인정받았던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국제연합의 일원으로 참여할 수 있는 부분이 없었습니다. 임시정부는 군대가 없었고, 간도나 연해주 지역의 활동은 군대는 있었지만 다 소비에트의 일부 혹은 중국 공산당의 일부로 편입되어 활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결국 신탁통치를 받는 원인이 되었고, 지금의 오랜 분단 상태에까지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미래에 통일의 주역이 될 청년들에게

이런 것들을 생각해보면, 우리가 앞으로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는 과정에서 어떤 것들을 고려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새로운 아이디어를 낼 수 있습니다. 고려의 건국이념을 봐도 그래요. 고려는 비록 신라를 계승했지만, 민족사의 정통성을 생각하면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현실은 신라를 이었지만 이념적으로는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게 우리 민족사에서 지금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지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앞으로 통일국가를 생각할 때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괴뢰’라고 배격해서 없애거나 역사에서 지워버리려는 관점은 결국 우리 민족사를 축소시키는 셈이 됩니다. 설령 현실에서는 남한 중심으로 통일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남북국 시대라는 입장에서 우리가 북쪽의 역사를 수렴해내야 해요.

중국은 다른 민족의 역사까지도 다 자기 역사로 수렴하는데, 우리는 사촌의 역사도 빼버리더니 이제는 제 민족의 역사도 빼버리려고 해요. 이미 발해사를 통해 한 번 경험했잖아요. 발해사를 역사에서 제외시켜서 민족사가 얼마나 많이 축소돼버렸어요? 그런데 현대에 와서 우리 민족 절반의 역사를 빼버리는 우를 또 범한다면 굉장한 손실을 자초하는 겁니다.

여러분은 미래에 통일의 주역이 될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이 노력하든 안 하든 통일은 현실로 다가올 거예요. 여러분이 지금은 20대이지만, 나중에 40대, 50대가 되면 결국 본인이 싫어도 통일코리아의 주역이 될 수밖에 없어요. 그때 멍청한 머리로 주역이 되면 이런 손실을 가져오게 됩니다. (모두 웃음)

그러나 사물을 제대로 보는 인식의 틀을 갖추면 우리는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어나갈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좀 부족하지만 독립운동사에 대해 학교에서 배운 수준을 넘어설 정도로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 역사에서 배우는 포용의 힘

그리고 북한과 통일을 할 때 너무 남한의 정체성이나 입장만 고수해서는 안 돼요. 북한이 많이 부족한 부분도 있고,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있지만, 우리는 북한을 어느 정도 포용하는 자세를 갖춰줘야 합니다. 남한이 북한을 포용할 수 있어야 남한 중심의 통일국가를 건설할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통일은 어렵습니다.

신라가 가야의 불교를 포용한 것과 마찬가지예요. 신라는 불교를 금지하던 나라인데 가야의 불교를 공인하고 가야의 귀족을 신라의 귀족으로 받아들이는 포용성을 발휘했기 때문에 결국 가야와 통합을 할 수 있었어요. 신라 중심의 통일을 했지만 가야를 포용했습니다. 그 덕분에 신라는 비약적으로 성장해 삼국의 일원이 되고, 결국은 민족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이런 것을 배워야 해요.

역사기행을 하는 이유

왜 역사를 배울까요? 역사적인 사실을 지식 차원으로 알아서 남하고 얘기할 때 ‘야, 그건 말이야, 이렇고 저렇고’ 이렇게 자랑하려고 우리가 지금 이 고생을 하는 건 아니에요. 우리가 이렇게 역사기행을 하는 이유는, 첫째, 지금 우리에게 닥친 현재와 미래를 풀어나갈 지혜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지금의 한미관계, 한일관계, 남북관계, 한중관계, 이런 문제를 어떻게 풀어낼 거냐?’

‘미래에 통일로 가기 위해서는 어떤 준비들을 해야 하겠느냐?’

이런 미래와 현재의 문제를 풀어갈 지혜를 얻기 위해서 우리가 과거의 역사를 둘러보고 교훈을 얻는 거예요. 과거의 지나간 사실을 지식으로 알아서 뭐하겠어요? 몇 년도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건 학교 시험 칠 때나 필요하고 박사학위 논문 쓸 때나 필요하지, 우리가 현실에서 살아 숨 쉬도록 하는 데는 그건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역사기행을 하는 두 번째 이유는 우리의 자긍심을 되찾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보기에 우리나라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은 자신감이 좀 결여되어 있는 것 같아요. 역사를 제대로 알면 자긍심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꼭 남을 헐뜯자는 게 아니에요. 중국 사람들이 자기들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럴 수도 있어요. 그렇다고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면 우리 스스로가 변방이 돼요. 또 우리 민족이 스스로를 지칭할 때 본래 사용하던 용어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걸 쓰는 자세가 필요한데, 우리 고유의 것은 버리고 남이 우리를 지칭할 때 부르던 용어를 씁니다. 이런 자세는 우리가 지양해야 해요.

그래서 한나라, 배달나라, 조선나라의 역사에 대해서 알아야 해요. 관련 역사적 사료는 많이 소실된 상태이기 때문에, 구전되어 내려오는 내용이라 하더라도 중요한 사료로 생각해서 ‘이걸 기반으로 해서 연구를 좀 해보자’ 이렇게 나가야 합니다. ‘그건 다 가짜다!’라고 폄하하는 건 자기비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몽골어도 연구하고, 만주어도 연구하고, 거란어도 연구하고, 선비족 역사도 공부해서 이 동북아 지역의 문명사가 어떻게 진행됐으며, 중국이 말하는 요하문명, 즉 우리의 배달문명이 이 동북지역의 여러 민족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를 살펴보면 좋겠어요.

이렇게 우리가 좀 더 폭넓은 시각으로 연구를 해나간다면 변방 문화, 혹은 변방 문명이라는 의식을 좀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지나간 얘기 가지고 뭐가 극복되겠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과거에 이렇게 선진문명을 창조해내었다는 것은 후세까지 이어지는 굉장한 자질입니다. 고구려에서도 이런 흔적을 볼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고려의 금속활자나 신라의 세계 최고 목판 기술도 그런 예입니다. 조선시대에 와서 한글이며 거북선을 만든 것도 그냥 우연이 아니에요. 창조적인 문명을 만들 수 있는 DNA가 우리에게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위축되는 가운데서도 이런 게 가능했던 거예요.

우리가 이런 역사를 공부하게 되면 서양을 그저 모방만 하는 게 아니라 창조로 나아갈 수 있어요. 지금까지는 모방을 했지만 앞으로 남은 과제는 창조로 전환해서 문명의 선도자가 된다는 자긍심을 가져야 합니다.

미래에는 땅도 아니고, 자본과 기술도 아니고, 결국은 정보와 창의력 핵심이에요. 이런 창의력을 갖추어서 우리가 작더라도 여러 면에서 세계의 모범이 되는 국가를 한 번 만들어봅시다.

새로운 통일 대한민국을 함께 만들어 나갑시다

우리가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자’라고 하면서 각자의 분야에서 열심히 연구하고 힘을 합친다면 세계 사람들이 부러워할 나라를 왜 못 만들겠어요. 예컨대 환경 문제는 앞으로 어떻게 하고, 교육 문제는 어떻게 하자는 걸 다 연구해서 힘을 합치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이미 우리 선조들은 굶어죽던 상태에서 지금 이 정도의 경제력이 되도록 산업화에 성공하고, 독재가 횡행하는 제3세계 수준에서 이 정도까지 민주화를 가져왔잖아요. 우리가 지금 아무것도 못해놓고 이런 얘기를 하면 어불성설이지만, 지금 우리가 이루어놓은 몇 가지 성과를 볼 때 능히 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역사를 살펴보니 과거에도 이미 그런 DNA가 있더라는 거예요.

이번 역사기행을 통해 이런 것들을 알게 되었으니 이제는 좀 더 적극적으로 살아가길 바랍니다. 앞으로는 술이나 담배에 찌들고 입맛에 찌들고, 잠자리에 찌들고, 아침에 못 일어나서 ‘으으’ 하는 수준에서 좀 벗어났으면 좋겠어요. 스님은 뭐 아침에 기운이 펄펄 나서 그렇게 일찍 일어나 산에 올라가는 줄 알아요? 저도 나가기 싫고 올라가기 싫어요. 밑에 떡 앉아서 ‘탑산에 다녀오너라!’, ‘졸본성에 다녀오너라!’, ‘나는 늙어서 못 가겠다!’‘ 이래도 돼요. 그런데 그렇게 얘기하면 여러분이 제 말 듣겠어요? 여러분한테는 길거리에서 사먹으라고 하고, 저는 고급식당에 가서 먹는다고 해봐요. 당장 반란이 일어나죠. (모두 웃음) 그래서 뭐든지 똑같이 하는거예요.

조금 싫은 마음이 올라와도 일단 해버리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일어나기 싫어도 일어나버리면 아무 문제가 없고, 올라가기 싫어도 올라가버리면 아무 문제가 없어요. 물론 다리가 부러졌는데도 꾸역꾸역 올라가라는 얘기는 절대로 아니에요. 그건 치료를 받아야죠. 삶을 조금 적극적으로 살자는 겁니다. 너무 안주하려고만 하지 말고, 약간 움츠러들 때 벌떡 일어나 운동장을 한 바퀴 돈다거나 하는 식으로 적극적인 자세를 가져보세요.

조금 더 길게 보고 살아가는 자세를 가지면 좋겠습니다.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을 생각해 보세요. 그 시대가 얼마나 암울했어요? 암울하다 못해 1937년에 가서는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태평양전쟁까지 일어나니까 독립운동을 열심히 했던 사람들도 독립운동을 그만두고 친일을 한 사람들이 나오잖아요. 훗날 그게 얼마나 큰 오명이에요? 역사적 안목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소위 ‘운동권’이라는 사람들도 그래요. 민주화운동을 해서 감옥에 다녀온 사람들에게 나중에 국가가 보상을 해주죠? 그 돈을 받으면 자기가 쓰는 게 아니라 사회를 위해서 공익에 써야 해요. 자기가 쓰니까 국민 지지가 없어지죠. 그 사람들이 민주화운동으로 감옥 다녀오는 시간에 공장에서 일한 사람들도 있잖아요. 이런 사람들은 나라를 위해서 일하지 않은 걸까요?

여러분이 젊을 때 어떤 일을 했다 하더라도 보상심리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발생합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당연히 나라를 빼앗기면 독립운동을 해야 하고, 독재시대에는 민주화운동을 해야 하고, 어려우면 산업운동을 해야 하고, 분단됐으면 통일운동을 해야 하고, 전쟁이 일어난다면 평화운동을 해야 해요. 그런데 보상은 무슨 보상이에요? 다만, 굳이 준다고 하면 주는 걸 굳이 안 받을 이유는 없어요. 받아서 공익적인 일에 쓰면 되죠.

이런 당당한 자세를 갖고 여러분이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이런 일을 하려고 우리가 새벽부터 일어나서 이 고생을 한 거예요. 알았죠?”

“네!”

“그러니 이건 고생이 아니에요. 고생이라고 생각해요?”

“아뇨!”

“한국은 더워 죽겠다는데 우리는 시원한 곳으로 잘 다녔잖아요. 한국에서 옥수수와 죽을 이렇게 많이 먹어본 적 있어요? 잘 먹고 잘 다닌 거예요. (모두 웃음)

단체 생활이 좀 힘든 건 사실이에요. 왜 그럴까요? 일 자체는 힘든 게 아니지만 개인 생활이 없어서 그래요. 개인 생활은 화장실 가고 싶으면 화장실 가고, 쉬고 싶으면 좀 쉬고, 일하고 싶으면 일하는데, 단체 생활은 같이 움직여야 하니까 화장실 가고 싶어도 못 가고, 쉬고 싶어도 가야 한다니까 가야 하다 보니 피로가 심한 거예요. 그래서 피곤한 것은 이해가 됩니다. 단체 생활이라는 게 원래 그래요. 자기 마음대로 못 하니까 보이지 않는 스트레스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일을 혼자서 안 하고 같이 하려면 이걸 극복해야 해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려면 혼자 살아야지 같이는 못 살아요. 혼자 사는 스님도 자기 마음대로 못하고 눈치보고 살아야 하는데, 여러분이 어떻게 세상 살면서 다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해요? 특히 청년들은 단체생활 하는 걸 좀 연습해야 해요. 요즘은 너무 개인주의화가 됐잖아요. 개인의 자유는 좋지만 남과 같이 사는 연습도 필요합니다. 이런 연습을 해두면 나중에 연애하고 직장생활 하는 데 다 도움이 돼요. 이 경험이 여기에서만 끝나는 건 아닙니다.

그러니 이번 여행에 스님이 좀 까다롭게 군 게 있어도 여러분이 양해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나쁜 의도를 갖고 한 건 아니니까 마음 상한 사람이 있으면 양해 부탁드립니다.

가볍게, 긍정적으로, 도전적으로!

어쨌든 이번 여행을 통해서 여러분이 삶을 좀 가볍게, 긍정적으로, 도전적으로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첫째, 삶이 좀 가벼워야 해요. 산다는 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지금 당장 길을 가다가도 차에 치이면 바로 죽습니다. 그러니 삶을 조금 가볍게 생각하세요. 시험에 떨어졌다고 기죽고, 승진 못했다고 기죽지 말고, 삶을 조금 가볍게 생각하세요. 그리고 사물을 늘 긍정적으로 보고 밝게 임하기 바랍니다. 또 약간 싫은 것도 ‘탁’ 하고 한 번 해보는 도전적인 자세를 갖고요.

이렇게 해서 우리가 서로 힘을 좀 모아야 해요. 개인의 힘은 작지만 모자이크 붓다처럼 힘을 모아서 해나간다면 큰일을 이루어낼 수 있습니다. 개인의 목표는 개인으로서 추구하더라도, 우리의 공동 목표는 첫째, 한반도에 다시는 전쟁이 없도록 평화를 지키는 것입니다. 둘째,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앞당기는 것입니다. 통일이라고 해서 꼭 정치적 통일을 말하는 건 아니에요. 단순히 분단을 극복해 하나의 나라를 이루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새로운 나라를 우리가 한 번 만들어보자는 거예요.

젊은 세대가 그런 생각을 갖고 30년 정도만 노력하면 새로운 나라가 됩니다. 절대 빈곤의 상태에서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자’ 하고 여러 사람들이 힘을 합쳐서 30여 년 만에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잖아요. 또 학생들 일부와 여러 사람들이 힘을 합쳐서 ‘우리도 한 번 자유롭게 살아보자’ 하고 민주화 투쟁을 해서 30여 년 만에 이런 민주화 사회를 이루었잖아요. 지금의 젊은 세대가 ‘우리가 평화로운 나라, 새로운 통일국가를 한 번 만들어보자’ 하고 다짐한다면 충분히 그 꿈을 이룰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해야 하는 건 아니에요. 한 세대가 적극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렇게 해서 분위기가 좀 바뀌면 30년 안에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이라고 손꼽히는 나라를 우리가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참가자들은 20일 동안의 단식 하안거를 마치고 일반팀 역사기행단에 이어 청년 역사기행단까지 이끌어준 스님의 노고에 큰 박수로 감사의 인사를 전했습니다.

강연을 마치고 8박 9일을 정리하는 소감문을 쓰고, 조원들과 소감문을 읽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8박 9일을 함께 보냈지만, 느낀 것은 다 달랐습니다. 함께 나누니 눈물도 웃음도 두 배가 되었습니다.


내일은 8박 9일 역사기행 일정의 마지막 날입니다. 스님과 기행단은 고구려의 웅장한 기상이 잘 남아있는 백암산성을 둘러보는 것을 마지막으로 역사기행을 모두 마칩니다. 선양에서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고 인천공항으로 귀국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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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화

고맙습니다 덕분입니다 ~(♡)

2020-04-05 13:05:41

정지나

스스로에 자긍심은 내가 나를 가볍고 밝게 하는 힘
감사합니다 꾸벅^^

2019-10-24 09:20:53

임규태

스님께 감사드리며, 여러 봉사자님들과 역사기행 참가자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_^

2019-09-10 00: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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