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9.8.31. 전국 대의원 회의 2일째
“어떠한 경우에도 괴로움이 없는 사람”

안녕하세요. 오늘은 전국 대의원회 회의 2일째 날입니다. 두북 수련원에서 농사일을 마무리하고 난 후 문경 수련원에 도착한 스님은 1박 2일 동안 열띤 토론과 회의를 마친 대의원들과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새벽 기도를 마친 스님은 제일 먼저 배추와 무에 물을 주었습니다. 배추는 땅에 뿌리를 잘 내렸는지 파릇파릇했고, 무는 아직 싹을 틔우지 않았습니다.

밭 한 켠에 남아있던 고수를 뽑고 다듬어 아침식사를 했습니다.

오전에는 흐드러지게 자란 국화를 바로 세워주고 잡초를 뽑았습니다. 일을 하다 보니 사진 찍을 겨를도 없었습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 들판은 가을빛으로 변해가고 햇살은 뜨거웠습니다.

땀 흘려 일하고 점심식사를 한 뒤 문경수련원으로 출발했습니다.

대의원들은 새벽 6시 30분부터 저녁 8시까지 하루 종일 안건 토의를 했습니다. 오전에는 2019년 상반기 사업계획과 결산에 대해 분과별로 심의한 결과를 발표하고, 질의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통일특별위원회의 하반기 사업계획에 대해서도 공유받았습니다. 이번 회의의 가장 핵심 안건인 ‘10차 천일결사 사업방향’에 대해 천일준비위원회의 발표를 듣고, 질의응답 시간도 가졌습니다.

점심 식사 후 오후에는 지부별로 모여서 10차 천일결사 사업방향에 따라 예상되는 지역 정토회의 어려움과 해결 방안에 대해 토론하고 그 결과를 함께 공유했습니다.

저녁 예불 후 7시 50분부터는 1분 스피치 시간이 펼쳐졌습니다. 누구나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앞으로 나와 자유롭게 이야기했습니다.

“내년에는 통일의병 활동을 일요일에도 하면 좋겠습니다. 평일에 하니 직장인들이 참가하기 어렵습니다.”
“성실한 대의원 강영희 님을 칭찬합니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함께 활동하면 좋겠습니다.”
“대전충청지부 대의원 7분 중 4분이 장로 모둠에 해당됩니다. 다 나이가 많으신데 열심히 해주시고 앞에서 이끌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안산다문화센터가 4주년을 맞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어서 스님을 모시고 지난 이틀 동안 회의를 하면서 미진했던 점에 대해 묻고 답하는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1차 만일결사를 어떻게 마무리하고, 2차 만일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에 대해서 회의를 충분히 했지만, 정토회의 다른 일들에 대해서도 의문이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이 궁금한 점이 있으면 뭐든지 대화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대의원들은 손을 들고 자유롭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중 한 분은 직장인 활동가들이 어떻게 수행적 관점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물었습니다.

“토론을 하다 보니까 저녁반이 주간반에 비해서 일을 할 때 효율성을 추구하고 수행적 관점에서 조금 벗어나 있다는 공통적인 의견이 있었습니다. 저도 정토회를 다니는 이유가 수행적 관점을 견지하기 위한 것이냐, 아니면 세상에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써 수행을 하는 것이냐, 이런 생각으로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녁반 직장인 활동가가 주간반보다 점점 더 많아지고 있는 반면에 의사결정권은 별로 없어 보입니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관점을 가져야 할까요?”

“네, 지금 질문하신 내용은 ‘수행적으로 어떤 관점을 가져야 되는가?’ 하는 것과 ‘정토회에서 의사결정을 할 때 누가 더 권한이 있는가?’ 하는 것 같습니다.

법사단이나 실무자들처럼 자기 일생을 세상과 끊고 전적으로 정토회에 들어와서 공동체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정토회에서 가장 결정권이 많다고 보여집니다. 그다음으로 정토회 사업에 영향력이 있는 사람은 주간반입니다. 이분들은 집에서 살지만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까지 전 시간을 다 내어 정토회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주간반 분들이 당연히 결정권을 더 가질 수밖에 없는 게 현실입니다. 그다음으로 저녁반 회원들이 있습니다. 저녁반 회원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자신이 먹고사는 생활에 쓰고, 시간을 조금 내어서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의사결정권을 놓고 따진다면 그 영향력이 적을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숫자로 따지면 저녁반 회원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정토회를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풀타임으로 참여해야만 지도력을 가질 수 있는 현재의 구조에서는 주간반이 영향력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이 부분은 참여를 어느 정도로 하고 있느냐. 이런 문제 때문에 생기는 겁니다.

그런데 정토회의 설립 목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입니다. 이렇게 정토회는 인간이 지향하는 보편성을 추구합니다. 세속에서는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을 자유와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실의 세상은 다 그렇게 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자유와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은 똑같은데,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행복이 이루어질 때도 있지만 이루어지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괴로움과 즐거움이 늘 되풀이됩니다. 이것을 부처님께서는 ‘윤회’라고 말씀하셨어요.

자기의 요구가 더 많은 비율로 이루어지면 즐거움이 많아지고, 그 비율이 떨어지면 괴로움이 많아지는데, 한쪽 극한이 천당이고, 그 반대 극한이 지옥입니다. 오늘 즐거웠던 게 내일 괴로움이 되고, 오늘 자유로웠던 게 내일 속박이 되는 것입니다.

자유와 행복이 지속 가능하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신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그럴 때 지속 가능합니다. 이 길을 붓다가 발견해서 우리에게 제시해 준 거예요.

정토회 구성원 중에서는 자신의 전 생애를 바쳐서 하는 사람, 절반을 바쳐서 하는 사람, 10%를 바쳐서 하는 사람이 있지만, 정토회 안에 들어와 살고 밖에 살고에 관계없이, 자신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누구나 지속 가능한 행복과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 관점에 동의하는 사람을 우리는 수행자라고 말하는 거예요. 이 관점에 동의를 안 한다면 수행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절을 하거나 참선을 한다고 해서 수행자가 아니에요.

물론 이 관점에 동의는 했지만 나도 모르게 짜증이 나고 화가 날 수 있어요. 이런 경우는 방향성에 동의했지만 현실에서는 안 되고 있을 뿐인 거예요. 내가 육상 선수가 되어 100m를 10초에 뛰기로 목표를 세웠지만 현실에서는 아직 연습이 부족해서 안 되는 것처럼 현재는 안 되는 거예요. 현실에서 안 되는 걸 가지고 수행자 자격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수행자이냐 아니냐는 관점의 문제예요. 수행자라면 현실에서는 잘 안 된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안 되는 것을 합리화하거나 고집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화가 날 수는 있지만, 남을 탓해서는 안 됩니다. 그건 관점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원망하거나 탓하거나 계속 꽁하거나 하면 관점을 놓친 사람입니다. 나도 모르게 화를 냈지만 금방 ‘어, 내가 수행 관점을 놓쳤구나’ 이렇게 돌아갈 수 있으면 100번 안 돼도 수행자입니다. 관점을 놓치고 남을 원망하거나 성질을 합리화시킨다면 수행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정토회 안에 들어와서 사느냐, 출퇴근하면서 주간반 활동을 하느냐, 직장을 다니면서 저녁반 활동을 하느냐, 이건 아무 관계가 없는 거예요. 수행적 관점은 정토회 활동에 내 시간을 얼마나 내고 있는가와 아무 관계가 없는 문제입니다.

그가 저녁반인지, 주간반인지, 법사인지, 이것과 수행적 관점은 관계가 없어요. 직장을 다니거나 저녁반이라고 해서 수행적 관점을 덜 가져도 되는 게 아닙니다. 수행자라면 모든 사람이 가져야 할 관점인 겁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수행적 관점을 좀 안 가져도 되지 않느냐, 이렇게 말할 수 없어요. 그러면 수행자가 아니에요. 신도는 되지만 회원은 될 수가 없습니다. 현실에서 수행적 관점을 놓치는 건 우리가 다 수용을 하는 거예요. 여기 계신 법사님도 놓칠 때가 있고, 서원행자도 놓칠 때가 있습니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관점을 놓치면 수행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정회원이 되기 위해서는 수행적 관점을 갖는 것이 제일 중요해요. 지금 되고 안 되고는 부차적인 거예요. 이러한 관점을 받아들이면 그 사람은 대통령이 되어도 되고, 정치를 해도 됩니다. 정토행자가 정치를 한다고 할 때 정치를 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안 돼요. 심지어 군인을 해도 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정치하면서 남을 욕하고 성질을 낸다면 수행자라고 할 수 없어요. 무슨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세간과 출세간으로 나누는 겁니다.

머리를 깎았나, 결혼을 안 했나, 뭘 먹느냐, 이런 건 핵심이 아니에요. 여러분들도 불법을 조금만 알면 그 관점을 가질 수 있어요. 결혼 생활하면서 ‘아내가 잘못해서 내 인생 버렸다’라고 성질을 낸다면 그는 수행자가 아닙니다. 법사가 되어도 정토회 안에서 같이 살면 서로 부딪치잖아요. 그때 ‘너 때문에 내가 못 살겠다’라고 하면 수행자가 아닙니다. 정토회 활동에 자기 시간을 얼마나 투여하느냐, 회비를 얼마나 많이 내느냐, 이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어요.

그런데 아무리 알려줘도 이렇게 관점 정리를 안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 관점이 안 잡혀 있기 때문에 일하면서 자꾸 삐지고, 결국 활동을 그만두는 거예요. 회의를 통해서 건의하거나 토론하지 않고,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욕하고 그만두는 사람은 관점 정리가 안 된 사람입니다. 관점 정리가 됐지만, 사로잡혀서 놓쳤다고 볼 수도 있고요.”

“네, 잘 알겠습니다.”

“관점이 딱 정리되어 있다면, 자식이 죽어서 막 울고 있더라도 ‘너, 자식한테 사로잡혔다’ 이러면 금방 정신 차리고 생글생글 웃어야 돼요. 울 수는 있지만 지적하면 바로 돌아와야 해요. 그런데 현실에서 우리는 그렇게 안 되죠. 그런데 정토행자 중에는 그렇게 되는 사람도 있어요.

그렇다고 누구나 다 상대에게 수행적 관점을 지적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법사 자격을 주는 겁니다. 사로 잡혔을 때 한번 체크를 할 수 있는 권한을 법사에게는 주는 거예요. 여러분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화가 났는데 ‘너 사로잡혔다’ 이렇게 얘기하면 화를 더 키우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사이에서는 그렇게 지적을 못 하게 되어 있어요. ‘수행에 대해서는 지적하지 마라’ 이것이 정토회의 규칙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사로잡힌 걸 누군가는 지적을 해줘야 되지 않겠습니까? 부처님 같으면 지적해 주었을테니까요. 그래서 그 권한을 법사에게 준 겁니다. 법사 수계를 하는 이유는 법사한테만 그 권한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법사는 항상 그런 지적을 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법사인 경우는 서로 원수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가끔 지적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준 겁니다. 하지만 법사가 아닌 경우는 수행을 갖고 논하면 안 돼요. ‘너, 수행 잘못했다’ 이런 말을 하면 안 됩니다. 항상 상대가 화를 내면 ‘화를 낼 만하구나’ 이렇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게 수행이에요.

그래서 스승이 있는 겁니다. 사로 잡혔을 때 지적해서 딱 돌아올 수 있으면 그 사람의 수행력은 굉장한 겁니다. 그런데 어떤 일에 사로잡히면 그게 잘 안 되잖아요.

사로잡힘이란 예측 없이 치고 들어오거든요. 미리 치고 들어올 줄 예상할 수 있으면 걸릴 일이 없잖아요. 어느 날 갑자기 치고 들어오니까 딱 사로잡히게 되죠.

그럴 때 스승과 제자 사이는 아무리 지적을 해도 원수가 안 됩니다. 내가 그 분을 스승으로 받아들이면 ‘내가 걸렸구나’ 이렇게 받아들이게 되지, 그걸 가지고 꽁해 있지는 않습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원수가 되는 이유는 제자가 스승으로 안 받아들이거나 수행적 관점을 놓쳤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자기 뜻대로 안 되면 원수가 되잖아요. 미워하고 원망한다는 것은 그가 원수인 거예요. 여러분들의 뜻대로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고, 그러면서도 관점을 딱 잡아야 수행자입니다. 정토행자의 수행문에도 이렇게 적혀 있어요.

‘어떠한 경우에도 괴로움이 없는 사람이 된다.’

‘어떠한 경우에도’라고 앞에 전제가 붙어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억울하다’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해탈에 이르기 어렵습니다. 즐거움과 괴로움을 윤회할 수밖에 없어요. 상대가 아내든 누구든 관계없이 수행자는 마음에 상처를 남기면 안 됩니다. 나도 모르게 말에 걸려서 넘어졌다 하더라도 2, 3일 후에는 딱 돌이켜서 돌아와야 해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회의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면 한 생각에 사로잡혀서 꽁 하게 붙들고 있는 사람들이 몇몇 있어요. 법사가 되었는데도 탁 못 내려놓고 사는 분들이 있어요. 수행자라면 입에서 원망하는 말이 나오면 안 됩니다. 불평하더라도 그건 하루, 이틀에 다 끝나야 하는 거예요.”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과 제안이 있었습니다.

  • 고령화 사회가 되었는데 깨달음의 장 참가연령을 높이면 어떨까요?
  • 사회활동은 사업보고만 받다 보니 회의 검토 순위에서 밀립니다.
  • 만일결사의 목표를 현실에 맞게 낮추면 좋겠습니다.
  • 정토회 활동가 양성과 행복학교 활동가 양성은 어떤 차이가 있나요?
  • 서원행자 중에서 법사를 임명하면 법사의 위상이 떨어지지 않을까요?
  • 늘어나고 있는 저녁반의 의견을 더욱 적극적으로 수렴해야 하지 않을까요?

시간이 좀 남아서 _“더 질문하실 분 없나요?”_라고 물었지만 더 이상 질문이 없었습니다. 1박 2일 동안 충분히 토론을 해서 그런지 다들 사업 방향에 대한 의문은 더 이상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은 내일 서원행자대회 때도 대중의 의문이 남지 않도록 좀 더 적극적으로 임해줄 것을 당부하면서 법문을 마쳤습니다.

“내일 서원행자대회 때 10차 천일결사의 사업방향에 대해 충분히 공유가 될 수 있게 하면 좋겠어요. ‘스님이 하시는 일이니까 그냥 따라가면 되지’ 이런 마음으로 임해서는 안 됩니다. 사업 내용을 현장에 적용했을 때 어떤 모순이 생길 것인지, 불분명한 부분은 토론을 더 해야 합니다. 막연히 대충 넘어가면 나중에 막상 자기 일이 되었을 때 혼란스러울 수가 있거든요. 그래서 내일은 보고 시간은 가급적 줄이고, 공청회 시간을 더 가지면 좋겠어요.”

“네!”

예정보다 30분 일찍 일정이 끝나서 다들 가벼운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내일은 아침 일찍 전국대의원회의 회향식을 한 후 오전 9시 30분부터 전국에서 600여 명의 서원행자들이 모인 가운데 서원행자대회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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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화

사로잡힘에서 벗어나고 수행적 관점을 무엇을 하든 놓치지 말자를 마음에 새깁니다.

2019-09-12 05:23:30

임무진

행복도 내가 만드는 것이요. 불행도 내가 만드는 것이네. 진실로 그 행복과 불행 다른 사람이 만드는 것 아니네. 남 탓하지 않습니다.

2019-09-06 07:41:26

무지랭이

감사합니다~^^

2019-09-04 19: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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