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9.9.17. 북미 순회강연 (9) 메릴랜드 콜럼비아(Columbia)
“처음 세운 목표가 버겁습니다, 포기해야 할까요?”

안녕하세요. 오늘은 워싱턴 D.C에서 국무부 아태 부차관보를 만나 한반도의 평화와 북미관계의 개선을 위해 대화를 한 후 저녁에는 메릴랜드주 콜럼비아(Columbia)에서 즉문즉설 강연을 하였습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4시 30분 목탁소리와 함께 하루를 시작합니다. 기도를 마친 후 아침 식사를 하고 워싱턴 D.C로 길을 떠났습니다.

스님은 매년 워싱턴에 오면 국무부(State Department)를 방문하여 한반도 상황과 관련하여 대화를 나눕니다. 무엇보다 한반도에 항구적인 평화가 정착되고, 북한에 인도적 지원이 이뤄지고, 북미관계가 개선될 수 있도록 늘 조언을 해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교류를 해온 지 벌써 20년이 넘었습니다.

국무성을 방문한 스님은 먼저 마크 내퍼 부차관보를 만났습니다. 잘 지냈는지 반갑게 인사를 한 후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지금 여기 상황은 어떤지 물으니 “다음 주 유엔총회에서 한미 간의 정상회담이 결정되어 많이 바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스님은 먼저 최근에 JTS가 북한에 옥수수 1만 톤을 지원한 것에 대해 브리핑했습니다. 인도적 지원은 유엔 제제의 대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유엔 제제로 인해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음을 토로했습니다. 그러면서 북미관계에 대한 대화를 자연스럽게 시작했습니다.

“북미 간의 대화가 다시 시작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지난 20년 동안의 경험으로 볼 때 북한은 2005년 9.19 합의가 이루어진 다음에 북미 간의 합의가 계속되지 못한 것에 대해 매우 큰 실망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시 기회가 왔습니다. 그때만큼 상당히 진지하게 북미 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북한의 처지를 고려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하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전쟁이 아닌 대화를 통해 북미 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해결방법으로 여러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첫째, 북미 간에 적대적인 관계가 청산되어야 하므로 전쟁 종결 선언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둘째, 평양과 워싱턴에 연락사무소를 설치해야 합니다. 셋째, 북한은 비핵화를 위해 우선 핵동결을 해야 합니다. 넷째, 미국 쪽에서는 경제 제재를 잠깐 멈추어야 합니다. 북쪽은 핵실험을 동결하도록 하고, 미국은 제제를 동결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핵동결을 하는 것을 시작으로 비핵화의 결과에 대해서도 분명한 입장을 취해서 싱가포르 회담 이후 한발 더 나아가는 모습으로 북미 대화를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스님은 북한은 핵동결을 해야 하고, 미국은 제재를 동결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두 분은 진지하게 북핵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란다고 하면서 많은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북미관계에 대해 얘기하느라 한미일 관계와 특히 한일 문제에 대해 얘기를 하지 못해 마크 내퍼 부차관보는 “조만간 한국을 방문하게 되면, 스님을 찾아뵙고 다시 이 문제에 대해 얘기하자”라고 하였습니다.

다음은 미 국무부에서 한국과 과장과 북미 관계에 대해 미팅을 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한국과 직원이 마크 내퍼 부차관보의 미팅에 배석하게 되면서 따로 미팅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오랜만에 여유시간이 생겨 작년 5월에 재개관을 한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을 방문했습니다.

도시락으로 싸온 김밥으로 간단히 점심 요기를 한 후 공사관을 둘러보았습니다. 공사관에서 오수동 관장님과 한종수 박사님이 스님 일행을 환영해 주었습니다.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은 백악관에서 북동쪽으로 약 1.4km 떨어진 로건 서클에 빅토리아 양식의 지하 1층, 지상 3층 붉은 벽돌 건물로 지어져 있었습니다. 1890년대에는 로건 서클 지역에 주미 공사관이 33개나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는 유적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청나라 공사관, 일본 공사관도 인근에 있었지만, 지금은 대한제국 공사관만이 그 당시 공사관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이라고 합니다.

고종황제는 조선의 자주성을 보이기 1891년 이 건물을 내탕금으로 2만 5천 불을 주고 매입하였고, 해외공관 중 유일한 조선 정부 소유 건물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일합방과 더불어 1910년에 일본은 이 건물을 단돈 5불에 거의 강탈하다시피 빼앗았습니다. 이후 2012년에 350만 불을 주고 다시 매입하였고, 사진과 자료를 이용하여 철저하게 고증을 하여 이렇게 개관을 했다고 합니다. 5달러에 뺏긴 대한제국 공사관 입구에 113년 만에 다시 태극기가 휘날리게 된 것입니다.

1층 객당에 가니 가족사진이 하나 있었습니다. 7대 공사를 역임한 이범진 공사님의 가족사진이라고 합니다. 가운데에 10살의 꼬마 아이가 보입니다. 이분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된 세 분의 열사 중 가장 어린 나이였던 이위종 열사라고 합니다.

이범진 공사님은 프랑스 파리 공사를 거쳐 1905년 한일합방 후 러시아 공사로 파견되어 연해주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했습니다. 그 아들인 이위종 열사는 아버지를 따라 파리와 러시아를 오가며 7개 국어에 능통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만국평화회의에서 세계 각국의 기자들을 상대로 한국의 호소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해 을사조약의 부당함과 일본의 조선 침략을 규탄했습니다. 이 성명의 전문은 <만국평화회의보>에 게재되었고, 기자단 사이에서는 즉석에서 만장일치로 한국을 동정한다는 결의문을 통과시키는 등 언론인들과 운동가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헤이그 특사였던 한 분을 여기 이곳 사진 속에서 만나고, 이분들을 헤이그로 보낸 이범진 공사를 만나니 130여 년 전 역사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습니다.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을 다 둘러본 후 스님은 태극기 아래에 놓인 방명록에 글귀를 남겼습니다.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석양의 조선이 여명의 꿈을 꾸며
대한제국의 희망을 품고
이곳에 공사관을 열었습니다.
이제 다시는 이런 비극을 격지 않으려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의 기초를 마련해야 합니다.
한미의 돈독한 동맹이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이 역사적인 곳을 방문하며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습니다.
2019. 9. 17 법륜

스님의 방명록 글귀가 마음을 다시 숙연하게 합니다.

스님은 워싱턴 미주 정토회관으로 복귀하여 잠시 짬을 내어 묘덕 법사님, 선주 법사님, 국제국장, 해외지부 국장과 함께 10차 천일결사 사업계획과 외국어 전법에 대해 의논했습니다.

일찍 저녁식사를 한 후 강연장으로 출발했습니다. 오늘 강연은 콜럼비아에 위치한 Wilde Lake Interfaith Center에서 열렸습니다. 150여 명이 강연장을 찾아 자리를 가득 메웠습니다.

스님이 무대 위로 등장하자 청중은 오랜만에 메릴랜드를 찾은 스님을 큰 박수로 환영했습니다. 스님은 일방적인 메시지 전달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 자각해나가는 과정이 즉문즉설이라고 소개하면서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즉문즉설은 저의 얘기를 여러분에게 전하는 형식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하고 싶은 얘기를 제가 듣고 대화하는 형식입니다. 저와 대화를 할 때는 청중을 고려할 필요가 없어요. 저와 대화를 하다 보면, 스스로 ‘별 문제가 아니었네’, ‘이게 내 문제이구나’, ‘내가 고집을 하고 있었구나’ 하는 자각이 일어나요. 진리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각을 일으키는 것이 진리입니다.”

이어서 주제에 관계없이 마음껏 질문하라고 하면서 질문을 받았습니다. 오늘은 총 8명이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분의 대화 내용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처음 세운 목표가 버겁습니다, 포기해야 할까요

“남편과 저는 교수가 되려는 목표로 미국 유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부부 모두 목표가 확고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졸업 후에 여러 상황을 겪으면서 이 목표가 희미해졌습니다. 지금은 ‘목표가 능력에 맞지 않는 것이 아닌가? 그저 이상적인 꿈이나 허황된 욕심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계속 올라오고 있어요. 과연 잘할 수 있을지 의문과 두려움이 커져만 가는 상황입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이 목표가 내가 정한 꿈이 아니라 가족, 특히나 남편 혹은 부모님의 바람이 아니었는지 의문을 품게 됐습니다.

목표를 이루려면 정신을 차리고 집중해서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할 텐데, 요즘 들어서는 계속 쉬운 일만 하고 싶고, 그 목표를 버리고 편안하게 살고 싶어요. 차라리 남편이 ‘그럴 거면 때려치워라’ 이렇게 말해주면 좋겠지만, 옆에서 계속 ‘빨리 이걸 해라’ 하며 밀어붙이고, 결과를 보여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런 남편의 요구 때문에 거부감이 들어서 공부를 열심히 하기가 더 싫어졌어요. 어떻게 하면 유학 초반의 초심으로 돌아가서 목표를 이루도록 정신을 차릴 수 있을까요? 아니면 포기하고 그냥 쉽게 살아야 할까요?”

“누구나 목표를 세울 수는 있어요. 예를 들어서 ‘돈을 많이 벌겠다, 정치인이 되겠다, 인기 연예인이 되겠다’는 목표를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표를 다 달성할 수는 없어요. 달성하는 사람도 있고, 못하는 사람도 있는 거예요.

질문자가 목표를 세웠더라도 반드시 목표를 이룰 수 있다는 보장은 없어요. 끝까지 그 목표를 추구해서 달성될 수도 있고, 끝까지 해도 달성을 못할 수도 있고, 중간에 목표가 바뀔 수도 있어요. 사람이 태어날 때 ‘넌 교수가 되어라’ 이런 운명을 갖고 태어나는 건 아니잖아요. 교수가 되겠다는 건 질문자가 정한 거예요. 이건 동의하시죠?”

“네.”

“세상을 살아보면 자기가 원하는 게 다 이루어집니까, 다 이루어지지는 않을 때가 더 많습니까?”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네, 그게 자연스러운 거예요.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만두면 되지, 그게 무슨 큰일이에요?”

“안 돼도 지금 이 상태로는...”

“안 돼도 미국 와서 한 번 살아봤잖아요. 스님은 태어나서 결혼도 못 해봤는데 질문자는 결혼도 해봤겠다, 미국 와서 살겠다, 그만하면 됐죠. 질문자만 마음을 긍정적으로 돌이키면 아무 문제가 없어요.

꿈이나 목표는 추구하다가 안 돼서 그만둘 수도 있고, 중간에 생각이 바뀌어서 변할 수도 있어요. 그것 자체는 아무 문제가 없어요. 그런데 질문자는 남편한테 ‘나, 공부 그만 할래’ 이 말을 못 하겠다는 거예요?”

“공부는 끝난 상태인데요, 졸업 후에...”

“요즘은 미국에서 박사 학위 따고 한국에 와도 강사 자리도 얻기 어려워요. 옛날에는 박사가 귀하니까 자리 잡기가 쉬웠지만요.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일제 강점기 때 초등학교 나온 사람이 초등학교 선생이 돼서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때는 배운 사람이 워낙 적었으니까요. 그런데 지금은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게 다 박사예요. (모두 웃음) 그러니 교수는 말할 것도 없죠.

공부해서 교수가 된다는 건 학생 수가 급격히 늘어나서 교수 수요도 늘어날 때 얘기예요. 지금은 아이를 적게 낳아서 학생 수가 줄어들고 있잖아요. 옛날에는 사범대를 안 나와도 선생이 될 수 있고, 교대를 안 나오고 부전공해도 선생이 됐는데, 지금은 사범대를 나와도 선생 되려는 데도 5수는 해야 합니다. 한국에서는 그래요. 학생 수는 줄고 대학을 나오는 선생의 수는 자꾸 늘어나니까요.

지금 이게 큰 사회 문제예요. 그래서 사범대를 나오고도 임용고시를 4수, 5수씩 해도 합격하지 못하고 결국 기간제 교사란 이름의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경우가 많아요. 정교사가 휴가를 가거나 자리를 비웠을 때 임시로 그 자리에 들어가 시간강사로 일하는 거죠. 같은 대학을 나온 같은 선생이어도 임용고시에 합격한 교사는 직업이 보장되는데, 시간 강사는 파리 목숨인 거예요. 그러니 마음이 얼마나 힘들겠어요? 즉문즉설에 와서 그런 질문을 하는 분들도 많아요.

이게 세상의 변화예요. 지금 질문자가 저한테 하는 질문은 조선 말기에 서당에 다니던 사람이 하소연하는 것과 같아요. 조선 시대에는 서당에 다니고 과거 급제를 해서 관리, 즉 공무원이 되었잖아요. 그런데 질문자는 열심히 서당에 다니다가 과거 제도가 없어져서 스님한테 하소연하는 것과 같아요. 그래도 본인이 더 하고 싶으면 하면 되지요.

“지금도 하고는 있지만, 한다고 해서 될 가능성이 적다는 압박이 오니까 피하고 싶은 마음이 계속 일어납니다. 남편은 제가 교수가 되길 바라는데 뭐라고 해야 할까요?” (모두 웃음)

“남편에게 이렇게 말하면 되죠.

‘여보, 내가 교수가 되려고 했지만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세상이 바뀌어서 교수되기가 좀 어렵겠다. 나는 당신한테 껌딱지처럼 붙어서 먹고살래.’”

“그게 지금 문제 상황이에요. 남편은 제가 교수가 돼서 자기가 저에게 붙어서 껌딱지가 되길 바랍니다.” (모두 웃음)

“남편도 교수예요?”

“남편은 교수가 되는 길을 포기하고 직장을 얻었습니다. 그게 빠르다고 생각해서요.”

“잘했네요. 질문자도 포기하고 딴 직장을 얻든지, 안 그러면 계속 가보든지 하세요. 다만 어떤 선택을 하든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제 이야기의 핵심은 ‘어떤 길이 좋냐’는 없지만, 질문자가 지금 부담을 갖고 있으니까 내려놓으라는 거예요. 그런 부담은 욕심 때문에 생깁니다. 괴롭고 싶으면 계속 그런 욕심을 내면 되고, 괴롭고 싶지 않으면 욕심을 버리면 돼요. 그냥 이 길을 계속 가도 좋고, 안 가도 좋고, 중간에 그만두고 딴 직장을 구해도 좋아요.

어차피 이보다 더한 일도 닥치면 해야 하잖아요. 차를 몰고 가는데 어떤 차가 와서 들이박는 바람에 죽을 일이 생기면 죽어야 할까요, ‘교수도 못 됐는데 나는 못 죽는다!’ 해야 할까요?”

“얼마나 다쳤느냐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요?” (모두 웃음)

“죽게 생겼을 때 ‘나는 아기 엄마니까 죽으면 안 돼’, ‘나는 아직 교수 못 됐으니까 죽으면 안 돼’ 이런 게 용납이 되냐는 거예요. 차가 와서 세게 들이받으면 죽어요. 그렇게 죽기도 하는 인생인데, 교수 안 되는 게 무슨 큰일이냐는 거예요.”

“남편이 오늘 같이 와서 들었어야 하는데...” (모두 웃음)

“그건 남편 문제가 아니에요. ‘남편이 나를 이해해줘서 이 문제가 해결되면 좋겠다’는 건 어린애 같은 생각이에요. 남편이야 당연히 자기가 직장 다니며 뒷바라지를 했으니 본전을 뽑고 싶겠죠. 질문자가 교수를 안 하겠다고 하면 남편은 본전 생각이 날 거예요. 그러면 ‘아이고, 미안해. 대신 내가 다른 걸 서비스 잘해줄게’ 이러면 되죠. 밥을 맛있게 해 주든지 뽀뽀를 잘해주든지 해서 다른 대가를 주면 되죠. (모두 웃음) 남편이 스님 법문을 듣고 이해하면 좋겠다는 것은 남을 고쳐서 자기가 편해지려는 거잖아요. 교수가 돼서 편해지나, 남편이 이해해줘서 편해지나, 똑같은 방식이에요.

‘교수가 안 돼도, 남편이 이해 안 해줘도, 내가 병이 나도 내 인생은 행복하다.’

이게 내가 갈 수 있는 길입니다.”

“감사합니다.” (모두 박수)

“뭐 뾰족한 수가 없다는 표정이네요. 원래 인생엔 뾰족한 수가 없어요.” (모두 웃음)

“남편의 요구에 대한 반감이 컸어요. 요구에 응해서 더 열심히 하고 욕심을 내면 좋았겠지만, 반대로 남편의 요구에 반감이 들고 하기 싫다는 감정이 들었어요. 그것 때문에 더 힘들었던 것 같아요.”

“그건 어린애 심리예요. 엄마가 애더러 공부하라고 하면 애가 더 공부 안 하는 것과 같습니다. 질문자는 몸뚱이만 어른이 됐지 심리가 7살짜리 어린애와 같아요. 지금 남편한테 투정을 하는 거예요. 엄마한테서 ‘그러면 공부하지 마라’ 이 소리 듣고 싶어 하듯이 남편한테서 ‘그만 해라!’ 이 소릴 듣고 싶어서 그래요? 아이고, 나잇값을 좀 하세요. 덩치만 크지, 아이가 따로 없네요.” (모두 웃음)

“남편에게 철 좀 들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딸 키우는 것 같대요.” (모두 웃음)

“그래요, 남편 말이 맞아요. 큰 딸 키운다고 남편이 고생이네요. (모두 웃음) 그러니까 큰 딸 되지 말고 아내가 되세요. 아기 엄마가 되고요. 어린애 같은 짓은 그만 하세요. 오늘 가서 딱 이렇게 얘기하세요.

‘여보, 내가 생각해 봤는데 나는 공부하고 안 맞는 것 같아. 또 공부하면 교수가 될 기회가 올 수도 있겠지만 확률로 보면 시간 낭비인 것 같아. 그래서 난 포기하고 당신 뒷바라지하면서 살림을 살든지, 아니면 슈퍼마켓에라도 가서 파트타임으로 일해서 당신 돈 더 이상 축 안 내고 내가 먹을 건 내가 벌게.’

이렇게 얘기해도 되고, 계속 공부하려면 이렇게 얘기하세요.

‘여보, 나 지원해준다고 힘들지? 딱 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내가 조금 더 해볼게. 이왕 밀어주는 김에 좀 더 밀어줘. “못 먹어도 고”라고들 하잖아. 그런 심정으로 좀 밀어줘.’

어느 쪽이든 이렇게 자기가 책임지는 자세를 딱 갖춰서 남편한테 얘기해야 합니다. 그만두겠다든지, 계속하겠다든지, 그럼 지원을 해달라든지, 이런 걸 자기가 해야 해요. 그런데 지금 가장 중요한 문제는, 질문자는 자기가 책임을 안 지려고 한다는 거예요. 남이 결정해주기를 원한단 말이에요. 그건 어린애 같은 짓이에요.”

“감사합니다.” (모두 박수)

질문자 웃음을 보이자 박수갈채가 쏟아졌습니다.

이 외에도 다양한 주제로 대화가 오갔습니다. 오늘은 질문 신청 개수가 작아서 그런지 시간이 조금 남았습니다. 누구든지 마이크를 잡고 얘기를 해보라고 해서 3명이 더 스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 6년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2년 전에 절친한 친구가 돌아갔습니다. 그 후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인생에 있어서 무엇이 중요한가 의문이 생겼습니다.
  • 정토회에 3년 정도 다녔는데 계율 때문에 갈등이 생깁니다. 5계를 지키려고 하니 불편함이 올라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 사춘기 아이 둘을 키우면서 일도 하고, 학교도 다니고 있습니다. 저의 직설적인 성격 때문에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내면에서는 자꾸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불만이 생기고 있습니다. 그래도 가만히 있는 게 좋을까요?
  • 이제 2살인 딸이 있습니다. 부모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 14년 전 오해로 인해 친구와 헤어졌습니다. 그 후 일상이 불편합니다. 어떻게 화해를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 학교를 졸업하고 경제적으로 독립해서 살고 있어요. 그런데 하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 어릴 적 부모님께 받은 상처가 많아 아직도 마음이 아픕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화해를 해야 할까요?

대화를 다 나누고 나니 벌서 2시간이 훌쩍 지나 마칠 시간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은 늙어서도 행복하게 사는 법에 대해 강조하며 강연을 마쳤습니다.

언제나 행복한 삶을 유지하는 방법

“늙어서 후회하지 않는 것은 쉽습니다. 80살이 됐다면 ‘아이고, 80까지 내가 안 죽고 살았네!’ 어떻게 살았든 80세까지 안 죽고 산 건 성공이잖아요.

예를 들어 우리가 설악산 정상에 올라간다고 합시다. 올라가다가 힘이 들고 비가 와서 길이 미끄러웠고, 추워서 힘들었어요. 그러나 이런 과정은 하등 중요한 게 아니에요. 문제는 정상에 올라왔냐, 안 올라왔냐입니다. 지금 올라왔잖아요. 올라왔으면 됐어요. 중간에 어떤 어려움이 있었든 그건 다 올라오는 과정에 불과한 거예요.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난하게 살았든 부자로 살았든, 둘이 살았든 혼자 살았든, 80세까지 안 죽고 산 것만으로 대성공이에요. 저는 오늘 아침에 눈 딱 떠보고 살아있는 것만 해도 대성공이에요. 그리고 미국에도 왔어요. 한국에 태어나서 평생 미국 구경 못 하는 사람도 많은데, 저는 이렇게 미국에 온 것만 해도 성공이에요. 그런데 여러분은 여기 살기까지 하잖아요.

이렇게 관점을 딱 긍정적으로 바꾸면 삶에서 늘 좋은 에너지가 나옵니다. 요즘은 이런 걸 ‘긍정적 사고’라고 하죠. 여러분은 대부분 부정적으로 사고해요. 결혼하면 결혼해서 괴롭다, 부모가 있으면 있어서 괴롭다, 없으면 없어서 괴롭다, 이렇게 전부 부정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있으면 있어서 좋고, 없으면 없어서 좋고, 젊으면 젊어서 좋고, 늙으면 늙어서 좋은 거예요.

늙은 게 얼마나 좋은지 알아요? 늙으면 시험 칠 일도 없지, 공부할 일도 없지, 애 낳을 일도 없지, 애 키울 일도 없어요. 이런 거 한다고 인생을 다 보냈잖아요. 그러니 그것만 안 해도 얼마나 좋은 일이에요? 동의 안 하십니까? (모두 웃음)

그러니 ‘자기 주어진 조건을 긍정적으로 보라. 그러면 웃으면서 살 수 있다’ 이런 말씀드리며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모두 박수)

강연을 마치고 워싱턴에서 오랜 인연이 있는 어른 분들과 반갑게 인사하였습니다.

무대 위에서는 책 사인회가 열렸습니다. 책을 사 가시는 분이 다른 곳보다 많았습니다. 높은 관심과 열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로비에서는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기념사진 촬영을 한 후 강연을 잘 마무리한 것에 대해 감사 인사를 했습니다. 주차장에서 차량 안내를 하고 있던 자원봉사자 분들과는 따로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WFP(세계 식량기구)를 방문하여 대화를 나누고, 오후에는 아메리칸 대학(American University)에서 영어 통역으로 외국인을 대상으로 즉문즉설 강연을 합니다. 저녁에는 베데스다에서 영어 통역으로 즉문즉설 강연을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19

0/200

정지나

자꾸 남탓,환경탓합니다 그런 나를 봅니다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합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2019-11-10 21:53:43

임규태

스님께 감사드리며 여러 봉사자님들과 참가자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_^

2019-10-16 18:14:45

지혜승

\"병탄 倂呑(삼킬 탄): 남의 재물이나 다른 나라의 영토를 한데 아울러서 제 것으로 만듦.\" 한일합방보다는 한일병탄으로 표기하는게 제 생각엔 적합해보입니다.

2019-09-23 14:27:57

전체 댓글 보기

스님의하루 최신글

목록보기